도서 소개
파란시선 95권. 김호성 시인의 첫 시집. 시 <개성 없는 세대>에 등장하는 무덤과 기둥의 결합은 조로한 세대의 내면에 기입된 사연을 낙담도 희망도 없이 내비친다. 무덤이 기둥이 된다는 상상은 이미 완료된 세상이자 성장하지 않는 세상,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사이렌이 울리기 시작한 세상을 살아가는 세대만이 그려 낼 수 있는 이미지다.
출판사 리뷰
“당신이 온다 문을 잠근다”김호성 시인의 첫 시집 <적의의 정서(正書)>를 읽으며 볼프강 보르헤르트의 흔적을 발견할 때마다 보르헤르트 식으로 ‘우리’에 대해 정의 내리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히고는 했다. 그러나 그를 흉내 내기에 그의 시대가 품었던 좌절과 비관은 우리 시대의 그것에 비해 너무나도 절대적이라는 인식이 충동의 발진을 제어했다. 스스로를 ‘이별 없는 세대’로 정의하며 좌절한 청춘의 아이콘이 된 보르헤르트의 배경에 2차 세계대전의 비극이 있었다면 그의 흔적을 흉터처럼 지니고 있는 우리 뒤에는 무엇이 있을까. 끝내 떠올리지 못했다면 좋았겠지만, 불행히도 나는 이내 우리의 비극을 찾아내고 말았다. 더 이상 성장을 이야기하지 않는 세계에서 종말의 서사를 현실로 받아들이며 소멸을 목격하는 우리는 기대할 것이 없어서 실망조차 없다. 지구의 소멸이 카운팅되고 있는 지금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가지지 않는 것, 포기하는 것, 기꺼이 불편해지는 것이다. 보르헤르트는 청춘을 ‘젊지 않다’고 말했지만 김호성이라면 청춘을 이미 늙은 것이라 말하지 않을까. 시 개성 없는 세대에 등장하는 무덤과 기둥의 결합은 조로한 세대의 내면에 기입된 사연을 낙담도 희망도 없이 내비친다. ‘무덤’은 과거를 품고 있는 땅속과 현재가 진행되는 땅 위를 연결하는 경계의 공간이다. 경계의 공간에서는 화자의 머리로 형상화된 ‘무덤’ 위로 행성들이 미끄러지는가 하면 ‘무덤’에서 증기가 뿜어져 나와 ‘무덤’ 밖의 사람들과 연결되기도 한다. ‘무덤’이라는 죽음의 공간이 하늘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을 연결해 주며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지고 있는 셈인데, 이는 마치 ‘무덤’이 세계를 유지시키기 위한 ‘기둥’ 역할을 하고 있음을 가리킨다. 그러나 ‘무덤’과 ‘기둥’은 상반된 이미지를 지닌 개념이다. 죽은 자를 품고 있는 ‘무덤’이 생의 끝과 종말을 상징한다면 단절된 공간 사이를 이어 줌으로써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 내는 ‘기둥’은 연결과 지속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무덤’이 ‘기둥’이 된다는 상상은 이미 완료된 세상이자 성장하지 않는 세상,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사이렌이 울리기 시작한 세상을 살아가는 세대만이 그려 낼 수 있는 이미지다. (이상 박혜진 평론가의 해설 중에서)
적의의 정서(正書)한마디 이름 앞에서는 누구나 조급해진다 휘몰아치는 욕조 속에서 꺼내 달라고 나는 숨을 헐떡인다 청테이프를 물어뜯는 아가리들을 본다 뜯다 만 몸이 있어서 변명하는 자의 눈꺼풀은 주눅이 든다 욕조가 깨져서 슬프다 미끄러져 나오는 시체들을 닦는다 생글거리며 날아오르는 방울뱀만도 못한 가족을 꾸리고 있다 잿빛 기침 하나가 달아난다 식민지의 식민지에서…… 꼬리를 문 식민지들은 너와 같이한 다툼에서 애용하는 인사말이 되었다 내 손은 주머니 속 화약과 총총한 푸른 항구를 동시에 펼친다 두 눈의 불순물에서 십자가까지 끊어진 인연을 되찾기 위해 무릎은 갖가지 길을 파헤친다 주저앉은 파도에 맞서는 동안 나의 이름은 터지고 말았다 낮과 밤도 없이 쓰인 여러 편의 몸은 설교로 전락한 지 오래다
음어혀는 진흙이 굳어진 것이다. 늪은 부푼 혀들이 모여서 생겨났다. 바위도 그 견고함도 해방을 원한다. 늪은 말을 삼키고 있다. 나는 늪이 마르기를 기다린다. 내 시야가 넓지 않다는 것을 안다. 당신은 내가 그어 놓은 원 안에서 무엇이라도 세울 수 있다.
움켜쥔 손은 대부분의 물체를 끌어당긴다. 늪이 한 사람을 빨아들이고 새 생명을 뱉어 내듯이. 살아남은 당신은 안개가 아니다. 숨을 참으면서도 빛을 발하는 곤충의 후손일 것이다. 이제 우리는 하나의 골격을 입고 하나의 정경을 바라보며 식욕을 느낀다. 두 눈을 크게 뜨며 산파의 머리를 바친다.
배 속에서 올라온 진흙이 과거의 계절들을 뒤섞고 있다. 죽은 바위들에게는 이름이 없으므로 계절도 희미해진다. 바위들의 과거는 눈앞의 그 안개일 뿐이다. 긴 주둥이로 산란 중인 여름에서 수은을 빨아올린다. 살 속으로 스며들어 심장을 부풀게 하는 생명과 맞닿은 기억이다. 늪에서 유래한 것들은 마찬가지로 어느 공기에서도 생존할 수 있다.
우리의 세포는 무한히 증식한다. 숲 전체를 뒤덮을 정도로. 세포와 세포 사이에 조그만 공간이 있다. 그곳에 우리보다 더 오래된 것들이 산다. 손가락 끝에 눅눅한 바람이 고인다. 당신은 원념의 바다에서 파생된 존재이다. 늪이 끓어오르고 있다.
작가 소개
지은이 : 김호성
1988년 서울에서 태어났다.상명대학교 한국어문학과를 졸업했고, 연세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박사 과정에 재학 중이다.2015년 <현대시>를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시집 <적의의 정서(正書)>를 썼다.현재 <현대시> 편집장을 맡고 있으며, ‘다시다’ 동인으로 활동 중이다.
목차
시인의 말
제1부
질긴 숨 11
금지된 삶 12
나무는 어둠을 들었다 14
만발하는 혀 16
수치심후기 18
환태평양 조산대 20
해미 22
저녁의 유해들 24
수치심숨 26
동거미래파에게 27
커튼의 존재 28
안부 30
귀가 32
상대성 33
중력 34
시체(詩體) 36
잊어버리는 일 38
수치심퇴화 39
아스라이 41
모호성은 무한대의 혼돈에의 접근을 위한 도구로써 유용한 것이기 때문에 조금도 부끄러울 것이 없다 42
수치심행선지 43
문밖에서 44
용서 46
떠나지 않기 위해서 47
악력 48
기대수명 49
개성 없는 세대 51
제2부
적의의 정서(正書) 55
제3부
상쾌한 공기 59
역류 62
마중 64
흑피 65
나를 거부한 시에게 66
음어 68
어쩌면 70
가속도 72
모두 죽는다 74
파종 75
섬광 76
붉은 달 78
수치심미조(迷鳥) 80
장마 81
마술사의 진심 83
뒷모습 85
은행의 구애 87
오후 88
비겁한 피부 89
물음의 밤 91
그물의 번식 93
내리막길 95
종점 96
동일성 98
가족의 건축 99
공터의 둘레 101
더 나은 세상 102
아르카디아에도 나는 있다 103
해설 박혜진 나의 적의, 당신들의 전위 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