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시인동네 시인선 170권. 정영숙 시인의 여덟 번째 시집. 보이는 순간 사라지는 것들, 가령 신과 예술과 사랑 같은 것들을 위해 정영숙 시인은 시를 쓴다. 보이지 않는 것을 구원하는 것, 두 극 사이에 가치의 균등을 회복시키는 성스러운 대조의 법칙으로 정영숙의 시는 나아간다.
출판사 리뷰
함제미인(含美人)의 약속
1993년 등단 이후, 독특한 시세계로 주목을 받아왔던 정영숙 시인의 여덟 번째 시집 『나의 키스를 누가 훔쳐갔을까』가 시인동네 시인선 170으로 출간되었다. 보이는 순간 사라지는 것들, 가령 신과 예술과 사랑 같은 것들을 위해 정영숙 시인은 시를 쓴다. 보이지 않는 것을 구원하는 것, 두 극 사이에 가치의 균등을 회복시키는 성스러운 대조의 법칙으로 정영숙의 시는 나아간다. 이 시집에는 정영숙 시인의 시가 다시 읽혀야 하는 이유가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시는 일종의 척독(尺牘)이다. 시간과 시간이 서로의 마음을 나누는 곁눈질의 서간문이다. 마음을 드러내되 다 드러내지 않으니, 시를 읽는 마음이 때로 애달프다. 간절함은 두말할 나위 없다. 짧은 편지 형식의 글에 시의 진심을 담고, 함축된 메시지를 전하다 보니, 그 간절함 또한 배가 된다. 정영숙 시인의 이번 시집 또한 이와 닮았다. 그녀가 시인의 말을 통해 전한 함제미인(含美人). 눈길 고운 미인이라는 뜻으로, 수선화가 언제 고운 자태를 드러낼 것인가의 의미를 담는다. 이왕 말을 꺼냈으니, 함제미인과 관련한 황산(黃山) 김유근과 자하(紫霞) 신위의 이야기를 마냥 지나칠 수 없다. 황산이 신위에게 보낸 편지 내용의 서두는 다음과 같다. “매화의 일은 이미 지나가고, 수선화는 아직 꽃을 피우지 않았습니다. 너무 적막하여 마음을 가누기 어려운 아침입니다.”(梅事已, 水仙未花, 正是寂寥難遣之辰.) 뜻을 풀면, 분매(盆梅)의 매화꽃은 이미 시들고, 구근에서 올라온 수반 위 수선화 꽃대는 아직 꽃을 피우지 않았다는 말이다. 어디에도 마음의 적을 두지 못한 황산의 애달픈 그리움과 갈망이 그대로 전해진다. 그런 와중에 황산은 문득 신위가 생각났음을 고백한다. 김소월 시의 한 구절처럼 “그립다/말을 할까/하니 그리워”(가는 길)진 셈이다. 이에 신위는 한 수 더 떠 편지에 대한 답장으로 ‘수선화’와 관련한 시 세 수를 황산에게 지어 보낸다. 이중 둘째 수의 내용은 이렇다. “얄미운 매화가 피리 연주 재촉터니, 고운 꽃잎 떨어져 푸른 이끼 점찍는다. 봄바람 살랑살랑 물결은 초록인데, 눈길 고운 미인은 오는가 안 오는가?”(無賴梅花 笛催, 玉英顚倒點靑苔. 東風吹水波綠, 含美人來不來.) 신위는 황산에게 매화는 가고 수선화는 오지 않은 주춤한 정경 속에서, 수선화가 필 때 만나자는 약속을 전한다. 서로 간의 함축적인 약속이 담긴 척독을 확인하는 순간이다. 함제미인에 대한 옛 문헌의 에피소드는 황산과 신위의 것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정영숙 시인의 이번 시집을 대변하는 중요한 키워드이자 약속의 상징이기도 하다.
매화 지는 밤
고월(孤月)로 떴습니다
당신이 다니시는 고샅길
비 오면 허리까지 차는 골가실 냇물
밤 이슥토록 푸른 대숲 비추는
매화꽃 흩날리는 밤
타다 만 비파 줄로 남았습니다
달 밝은 밤, 맑은 술 한 잔에
행여 그대 긴 손가락 울릴까
험한 재 굽이굽이 힘들 때
혹여 둥근 음에 쉬어 가라시며
청아한 피리 소리
휘영청 고월에 걸리는 밤
천년 벼루 속 푸른 달빛 찍어 그리는
흰 화선지 속
함제미인(含美人)이고 싶습니다
함제미인 전문
이 시집에서 함제미인에 대한 의미가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난 작품이다. 표면적으로는 ‘나’와 ‘당신’ 혹은 ‘그대’를 통해 서로를 구분하는 듯 보이지만, 인용한 시에서 함제미인은 수선화의 기본적인 의미를 그대로 수용한다. 수선화는 대표적인 ‘나르시시즘’(Narcissism)의 상징이다. 자기애적 욕망을 투영하는 꽃으로 불린다. 그리스 신화의 미소년 ‘나르키소스’가 연못에 비친 자기 미모에 반해 빠져 죽었다는 전설을 함의하기도 한다. 그 자리에 피어난 것이 바로 미소년과 같은 이름의 꽃, 수선화(나르키소스)인 셈이다. 이 작품 또한 앞에서 언급한 황산과 신위의 이야기가 내포되지만, 마지막 부분에서 다른 질감의 의미를 도출해낸다. 나르키소스가 연못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듯 시인 또한 “천년 벼루 속 푸른 달빛 찍어 그리는/흰 화선지 속/함제미인(含美人)”을 갈망해낸다. 주지하듯 정신분석학 혹은 신화적 관점에서 나르시시즘은 자기애적 욕망으로 규정된다. 하지만 시인은 이를 자신이 지나쳐버린 미래의 시적 욕망과 앞으로 마주할 사랑의 노래로 치환시킨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매화’와 ‘수선화’가 피는 그 사이에서의 감정은 이 시집에서 주목해서 봐야 할 부분이다. 함제미인에서 등장하는 매화 또한 그 사이에서 어룽거리는, 일종의 약속의 도정이자 시적 그리움이 되기 때문이다. 동시에 내가 되찾아야 할 과거의 나의 모습이거나 너의 모습이기도 하다. 예로부터 매화의 열매는 남녀의 결합을 상징하는 주화(呪花) 또는 주과(呪果)로 인식되었다는 점이 이를 방증한다.
그렇다면 정영숙의 이번 시집에서 ‘매화’와 ‘수선화’는 어떤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을까. 매화와 수선화가 시인의 심리 상태를 적극적으로 담보하는 상징물임을 고려한다면, “어느새 눈물 젖은 매화 꽃잎”(압화)이라든가, “매화꽃 흩날리는 밤/타다 만 비파 줄로 남”거나 “매화꽃 환한 봄날/눈부셔 앞이 보이지 않”(만복사(萬福寺), 봄꿈)는다는 표현은 시인이 지닌 심리적 기제를 그대로 은유화시킨다. 대표적으로 만복사(萬福寺), 봄꿈 같은 작품에서는 조선 전기 김시습이 지은 한문소설 만복사저포기에 스민 양생의 사랑 스토리를 시적 차용하여 기다림과 애달픈 마음을 극대화한다. 시인은 여기에서도 매화를 두고 “눈처럼 새하얀 저 꽃잎은/세월의 긴 망치로 하얗게 두들겨 편/삼천 년 기다림의 은빛 서간”이라고 묘사한다. 이러한 시의 전개방식은 마치 황산과 신위가 나눈 서간문의 내용처럼 정확한 의미의 일치를 보인다. 나아가 황산의 척독에 신위가 시를 지어 보냈듯이 시인 또한 그 마음을 함제미인의 뜻에 담아 전하는데, 가령 “검은 나뭇가지 위 눈꽃으로 피어난 매화 꽃잎”(입 밖으로 날아간 물고기)은 시인이 갈망하는 시에 대한 애절한 그리움의 변별점으로 작용한다. 이미 시인이 언급한 것처럼 괴테의 시 첫 상실의 의미를 빌린 “아, 누군가 그 아름다운 나날들을 되돌려주오!”(수선화 웃음으로 그가 오신다)라는 메시지로 자신만의 족적을 남긴다.
■ 시인의 산문
어릴 때 토담 옆에 서 있던 해바라기는 내게 태양이었다. 아버지였고 연인이었고 등대였고 고향이었다. 그가 있어 밤도 낮이었고 낮도 밤이었다. 음악이었고 춤이었고 사랑이었다. 나를 바로 볼 수 있는 거울이었다. 빛나는 거울 속에 항상 내가 있었다. 그 빛으로 나는 밝게 빛났다.
우리의 삶은 빛과의 싸움이다.
빛을 그리기 위해
지금도 나는 그를 향해 공전한다.
그는 나를 볼 수 있는 최상의 증거다.
그의 서랍을 열게 되면
무수한 나의 모습이
각기 다른 빛깔의 씨가 되어 쏟아지리라.
귀밑 간질이던 산들바람이
책장을 넘긴다
내 가슴에 묻혀 있던 말
수십 년이 지나서야
세상 밖으로 나온 최초의 문자들
오디세우스가 먼 길을 돌아와
페넬로페에게 사랑을 고백하듯
강물에 젖어 희미해진 문장들을
흰머리의 내게 읽어주고 있다
꿈같은 시간들을
다시 살고 있는
― 「불멸의 독서」 전문
수박을 먹으며 너를 생각한다
너를 생각하면 수박이 아프다
수박이 붉은 눈물을 흘리며 운다
뜨거운 양철 지붕 밑
이마 맞대고 파먹던 붉은 심장
보랏빛 새벽이 오기 전
무쇠 칼에 베어지던 청춘을 기억하며 운다
술 취한 배처럼 흔들리던 신념
그 무너진 기슭, 어느 무덤가
초록의 인광으로 빛나던 사랑,
그 이름을 불러보지만
어디에 숨었는지 보이지 않고
네 다디단 심장을 먹은
내 입술만 피처럼 붉다
너와 같이 수박을 먹던 한여름 밤도
붉은 눈물을 흘린다
유성이 떨어진다
― 「수박이 아프다」 전문
너를 처음 만난 순간
너는 내 사전 속 프롤로그에 쓴 시
주황색 오렌지 노란색 아침바다 불타는 장미였다
지중해에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며
오딜롱 르동의 〈이브〉처럼 카페에 앉아 있는 천진한 여인
탁자 위에 얹힌 오렌지주스 잔이 엎질러지는 순간
누가 천 일의 사랑을 예견할 수 있었을까
그녀 가슴을 찌르고도 남을 수천수만 불타는 가시를
수천 년 역사의 철제 궤짝 속에 녹슬어가거나
이제는 재가 되어버린 문장들
흐르는 물결 속 반짝이는 햇살 흰머리에 이고
푸른 심연 속 침묵으로 잠겨드는 늙은 여인
스테인드글라스처럼 빛나던 태양은 사라지고 없어도
이제 그녀는 노트르담 성당 성화처럼 고요하다
사제의 옷자락 같은 지중해의 물결 위로
참회의 저녁 종소리 번진다
남은 백지에 마지막 물그림자를 그려 너에게 띄우는 정유년 새해
내 가슴속 낡은 사전은 너에 대한 상징이었을 뿐
이제 더 이상 펼치지 않을 것이다
― 「태양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 전문
작가 소개
지은이 : 정영숙
대구에서 태어나 경북 상주에서 성장했으며, 김천여자고등학교, 서울교육대학교와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였다.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여 화가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대학 다닐 때부터 유화를 그렸으며, 졸업 후 10년간 서울 시내 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는 동안에도 유화 습작에 전념했다. 2000년과 2001년, 두 차례에 걸쳐 과천 국립현대미술관과 인사동에서 유화 그룹전을 열기도 했다. 세계 여러나라 미술관을 돌아다니며 명화를 보고 쓴 시와 산문을 이 책에 실었다. 1993년 시로 등단하여 시집으로 '황금 서랍 읽는 법' '하늘새' '옹딘느의 집' '물 속의 사원' '지상의 한 잎 사랑' '숲은 그대를 부르리' 등이 있다.2001년에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기금을 받았으며, 2012년에 목포문학상을 수상했다. 한국시인협회, 한국여성문학인회, 한국가톨릭문인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목차
제1부
불멸의 독서13/황금빛 나무를 그리다14/수박이 아프다16/입 밖으로 날아간 물고기18/The Love is something19/시를 찾아서20/라스코 벽화22/마르셀 뒤샹의 체스판24/연꽃 화엄경25/로열 플러시26/수선화 웃음으로 그가 오신다28/카사블랑카30/마음의 창32/자화상34
제2부
살아야지 살아야지37/CROSS ROADS38/그때 그 여름은 없네40/희망의 전언42/La sete di vivere44/잠자는 뮤즈46/아다지오48/1935년, 〈제비〉다방 스케치50/우리 함께 알람브라 궁전으로 갈까요52/몰도바54/중세 속으로 들어간 여자56/즈 스위 말라드(Je suis Malade)58/동백꽃이 피어나는 겨울 아침60/즈떼므62
제3부
사랑 앞에서는 모든 공간과 시간이 사라지는 법65/반쪽 심장66/이클립스68/태양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70/고망(古莽)의 나라72/보이지 않는 나무73/Drawing in the Air74/유월의 바퀴살76/봄꿈78/우수(雨水)79/이 많은 토끼풀을 언제 다 먹을 수 있을까80/누가 나를 이 부름나무 아래로?82/쿠마에의 전언84/압화(押花)89/푸른 별, 나의 물독90
제4부
허공 백지93/클라인 병 만들기94/함제미인96/만복사(萬福寺), 봄꿈98/백성 스님의 학춤을 보고100/모란 한 송이에 담긴 기억102/태엽이 나를 감고 돈다103/12월은 나무가 뚝뚝 부러지는 달104/다음 생에는 무채색 당신을 만나겠습니다106/통도사에서 읽는 시108/벽암록 흉내 내기110/저승과 이승과의 거리 30cm112/사랑114
해설 김정배(문학평론가, 원광대 교수)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