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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 강소천
1915년 함경남도 고원군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용률(龍律)이다. 고원공립보통학교와 함흥 영생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1939년 고향 미둔리에서 결혼했으며, 1945년부터 6·25가 일어나기 전까지 고원중학교, 청진여자고급중학교, 청진제일고급중학교에서 국어교사로 근무했다.1933년 동요 <울엄마젓>이 ≪어린이≫ 5월호에 입선되고, <까치야>가 ≪아이생활≫ 5월호에 윤석중의 고선으로 뽑혀 발표되고부터 정식 작가로 인정받았다. 1936년 ≪童話(동화)≫에 동요 <제비>, <?리아>, 동시 <국화와 채송화> 등을, 1937년 ≪소년≫ 창간호에 대표작 <닭>을 발표했으며, 1937년부터는 동요·동시와 함께 동화와 소년소설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강소천은 고향에서 6·25를 당하고, 1951년 1·4후퇴 때 고향에 부모와 처자를 남겨 둔 채, 흥남에서 군부대를 따라 단신으로 월남했다. 이때 그는 남한 땅을 고향에 두고 온 가족과는 일시적으로 떨어져 지내야 하는 한시적 삶의 공간으로 생각했으나 6·25 전쟁은 남북을 갈라놓은 휴전으로 종결되고 세월이 흐를수록 분단이 고착화되면서 결국 남한 땅은 그에게 삶의 터전으로 새롭게 일구어 내야 하는 공허한 삶의 공간이 되고 말았다. 월남 후 그는 주로 아동잡지 편집과 교육 활동에 종사하며 1963년 타계할 때까지 10여 년간 가장 왕성한 창작 활동을 펼쳤다. ≪어린이 다이제스트≫ 주간, ≪새벗≫ 주간, ≪아동문학≫ 편집위원, 한국아동문학가협회 분과위원장, 아동문학연구회 회장, 문인협회 이사, 한국보육대학 강사, 이화여대 도서관학과 강사, 국정교과서 국어과 심의 의원, 서울 중앙방송국 자문위원 등을 역임했다.저서로는 동요시집 ≪호박꽃초롱≫(박문서관, 1941), 동화집과 소년소설집으로 ≪조그만 사진첩≫(다이제스트사, 1952), ≪꽃신≫(한국교육문화협회, 1953), ≪진달래와 철쭉≫(다이제스트사, 1953), ≪꿈을 찍는 사진관≫(홍익사, 1954), ≪달 돋는 나라≫(대한기독교서회, 1955), ≪바다여 말해다오≫(대한기독교서회, 1955), ≪종소리≫(대한기독교서회, 1956), ≪무지개≫(대한기독교서회, 1957), ≪인형의 꿈≫(새글집, 1958), ≪꾸러기와 몽당연필≫(새글집, 1959), ≪대답 없는 메아리≫(대한기독교서회, 1960), ≪강소천 아동문학독본≫(을유문화사, 1961), ≪한국아동문학전집?강소천편≫(민중서관, 1962), ≪어머니의 초상화≫(배영사, 1963), ≪강소천 아동문학전집≫ 전 6권(배영사, 1964), ≪강소천문학전집≫ 전 15권(문음사, 1981), ≪강소천 아동문학전집≫(교학사, 2006) 등이 있다.
지은이 : 권태응
호는 동천(洞泉). 1918년 충북 충주에서 태어났다.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37년 일본 와세다(早稻田)대학 정경학부에 입학했다. 1939년 ‘독서회 사건’으로 일경에 검거되어 1년간 감옥 생활을 했다. 폐결핵 3기의 몸으로 귀국하여 요양생활을 하며 1944년 초부터 시조와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이후 동시 쓰기에 몰두하여 작고하기 전까지 『송아지』 『하늘과 바다』 『우리 시골』 『어린 나무꾼』 『물동우』 『우리 동무』 『작품』 『동요와 또』 『산골 마을』 등 아홉 권의 육필 동시집을 손수 엮었다. 1947년 잡지 『주간 소학생』 45호에 동요 「어린 고기들」을 발표했고, 이듬해 동요집 『감자꽃』(글벗집)을 출간했다. 1951년 전쟁 통에 병세가 악화되어 34세 나이로 별세했다. 1968년 충주 탄금대 공원에 「감자꽃」 노래비가 세워졌고, 1995년 동시선집 『감자꽃』(창작과비평사)이 간행되었다. 1997년부터 충주에서 시인을 기리는 문학제가 열리고 있으며, 2005년 정부에서는 독립유공자로서의 공훈을 인정하여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지은이 : 김소월
고향이 평안북도 정주이고 그곳에서 성장하고 생활하고 사망했기 때문에 전기적 사실을 확인하기가 어렵게 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와 관련된 사람들의 회고담이나 신문 잡지에 난 관련 기사를 통해 그의 생애를 재구해 볼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소월의 본명은 정식(廷湜)으로 1902년 음력 8월 6일(양력 9월 7일) 평안북도 구성군 서산면 외가에서 태어났다. 남산학교를 졸업하고 14세 때 세 살 연상인 홍실단(원명은 홍상일)과 결혼했으며 상급 학교로 진학하지 못하고 3년간 농사일을 거들었다. 그의 재능을 아깝게 여긴 동네 사람들의 도움으로 1917년 오산학교 중학부에 입학해 수학하던 중 은사인 김억을 만나 시를 쓰게 되었다. 오산학교를 다니던 1919년 3월 3·1운동이 일어나자 동급생들과 함께 만세 운동에 참여해 학업을 중단하게 되고 오산학교도 임시 폐교되었다.1920년 스승인 김억의 주선으로 ≪창조≫에 <낭인의 봄> 등의 시를 소월이라는 필명으로 발표했다. 이때 발표한 작품은 <낭인(浪人)의 봄>, <야(夜)의 우적(雨滴)>, <오과(午過)의 읍(泣)>, <그리워>, <춘강(春崗)> 등 다섯 편이고 그 후 ≪학생계≫, ≪동아일보≫ 등에 작품을 발표했으나 소월은 이 초기의 작품들을 시집에 수록하지 않았다. 소월은 오산학교에 이어 학업을 마치기 위해서 서울로 이주해 1922년 4월에 배재고등보통학교 4학년으로 편입했다. 1923년 3월에 배재고보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상과대학 예과에 입학했으나 학자금 조달에도 어려움이 있고 9월 간토대지진이 일어나자 10월에 고향 정주로 돌아왔다. 1924년에 김동인, 이광수, 김억, 주요한, 김찬영, 전영택, 오천석 등과 함께 ≪영대≫의 동인으로 참여했으며 1925년 12월 26일 자로 시집 ≪진달래꽃≫을 간행했다. ≪진달래꽃≫은 상당히 판매가 되었는지 발행처는 같은 매문사로 되어 있지만 총판이 ‘중앙서림’으로 되어 있는 것과 ‘한성도서주식회사’로 되어 있는 것의 두 판본이 유통되었고 그 원본이 각기 현재 전해지고 있다.1924년 이후에는 그의 처가가 있는 평안북도 구성군 남시로 이주해 생활했으며 1926년 8월부터 동아일보 지국 일을 맡아 본 것으로 되어 있다. 이후 1년에 한두 편씩 작품을 발표했고 1932년과 1933년에는 작품을 발표하지 않았다. 1934년에 다시 몇 편의 시를 발표했으나 그의 생활은 극도로 피폐해졌던 것 같다. 지국 경영은 일찍이 작파해 남에게 넘겼고 시대와 자신의 삶에 대한 울분이 겹쳐 거의 매일 술을 마셨으며 아내에게 살아 봐야 낙이 없으니 같이 죽자는 말을 여러 차례 했다고 한다. 1934년 12월 23일 밤에도 술에 취해 잠이 들었는데 새벽에 남편이 괴로워하는 소리를 잠결에 듣고 불을 켜 보니 아편 덩어리를 입가에 흘린 채 죽어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소월의 사망 일자를 1934년 12월 24일 아침으로 보고 있다.소월의 사망이 알려지자 12월 30일 자로 ≪조선중앙일보≫와 ≪동아일보≫에 사망 관련 기사가 실리고 1935년 1월에 서울 종로 백합원에서 소월 추모회가 개최되었다. 여기서 김억은 소월에 대한 추모사를 낭독하고 그것을 ≪조선중앙일보≫(1935. 1. 22~26)에 <요절한 박행의 시인 김소월의 추억>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했다. 1939년 12월 김억이 소월의 시를 선정하고 다시 편찬해 박문출판사에서 ≪소월시초≫를 출간했다.
지은이 : 방정환
어린이운동의 창시자, 선구자. 1899년 서울 야주개(종로 당주동)에서 상인 집안 장남으로 태어남. 한문에 조예가 깊은 조부의 영향으로 5~7세에 천자문을 배움. 7세 때 보성소학교 유치반 입학. 1907년 무렵 갑작스러운 집안의 몰락. 소년입지회 활동. 1909년 매동보통학교 입학 후 전학, 1913년 미동보통학교 졸업. 선린상고 입학, 중퇴. 1915년 조선총독부 토지조사국 취직. 1917년 천도교 3대 교주 손병희의 딸 손용희와 결혼, 천도교에서 운영하는 보성전문학교 법과 입학, 중단했던 공부를 계속함. 경성청년구락부 조직. 전국을 순회하며 동화구연대회, 소년문제강연회 등을 주도, 청년문화운동과 계몽운동에 앞장섬. 1919년 《신청년》 창간. 최초 영화잡지 《녹성》 발행. 《신여성》 편집고문. 1920년 《개벽》의 도쿄 특파원 임명, 일본 도요〔東洋〕대학 철학과 특별청강생으로 철학, 아동문학·심리학·문화학 등 공부. 1921년 세계 명작 번안동화집 《사랑의 선물》 출간. 번역·번안동화, 소설, 수필, 평론 등 각종 문예활동을 통해 아동문학 보급과 아동보호운동 펼침. '어린이'라는 단어 공식화. 1923년 《어린이》 창간. 색동회 조직, 그 해 5월 1일 어린이날 지정. 1927년 조선소년연합회 위원장 역임. 동요 창작과 추리소설 〈칠칠단의 비밀〉 등 집필. 1931년 고혈압과 신장염 악화로 그 해 7월 23일 별세. 1980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지은이 : 윤동주
1917년 12월 30일 윤영석과 김룡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1925년(9세) 4월 4일, 명동 소학교에 입학했다. 1928~1930년(12세~14세) 급우들과 함께 《새명동》이라는 잡지를 만들었다. 1931년(15세) 3월 15일, 명동소학교를 졸업했다. 1932년(16세)은진중학교에 입학했다. 1934년(18세) 12월 24일, 「삶과 죽음」, 「초한대」, 「내일은 없다」 등 3편의 시 작품을 쓰다. 이는 오늘날 찾을 수 있는 윤동주 최초의 작품이다. 1935년(19세) 은진중학교 4학년 1학기를 마치고 평양 숭실중학교 3학년 2학기로 편입. 같은 해 평양 숭실중학교 문예지 《숭실활천》에서 시 「공상」이 인쇄화되었다. 1936년(20세) 신사참배 강요에 항의하여 숭실학교를 자퇴, 광명학원 중학부에 편입했다. 간도 연길에서 발행되던 《카톨릭 소년》 11월호에 동시 「병아리」, 12월호에 「빗자루」를 윤동주란 이름으로 발표했다. 1938년(22세) 2월 17일 광명중학교 5학년을 졸업하고 4월 9일 서울 연희전문학교(연세대학교) 문과에 입학했다. 1939년(23세) 산문 「달을 쏘다」, 시 「유언」을 발표했다. 1941년(25세) 자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77부 한정판으로 출간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1943년(27세) 독립운동 혐의로 검거되고 작품, 일기가 압수되었다. 1944년(28세) 후쿠오카 형무소에 투옥되었다. 1945년(29세) 해방되기 여섯 달 전, 2월 16일 큐슈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숨을 거두었다.
지은이 : 정지용
본관은 연일(延日), 충청북도 옥천(沃川) 출신으로 아명(兒名)은 태몽에서 유래된 지용(池龍)이고 세례명은 프란시스코[方濟角]이다. 고향에서 초등 과정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와 휘문고등보통학교에서 중등 과정을 이수했다. 그리고 일본으로 건너가 교토에 있는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시단 활동은 김영랑과 박용철을 만나 시문학 동인에 참여한 것이 계기가 되어 본격화된다. 물론 그 이전에도 휘문고등보통학교 학생 시절에 요람동인(搖籃同人)으로 활동한 것을 비롯하여, 일본의 유학 시절 『학조』, 『조선지광』, 『문예시대』 등과 교토의 도시샤대학 내 동인지 『가(街)』와 일본시지 『근대풍경(近代風景)』에서 많은 작품 활동을 하였다.이런 작품 활동이 박용철과 김영랑의 관심을 끌게 되어 그들과 함께 시문학동인을 결성하게 되었다. 첫 시집이 간행되자 문단의 반향은 대단했고, 정지용을 모방하는 신인들이 많아 ‘지용의 에피고넨(아류자)’이 형성되어 그것을 경계하기도 했다. 아무튼 그의 이런 시적 재능과 활발한 시작 활동을 기반으로 상허 이태준과 함께 『문장(文章)』 지의 시부문의 고선위원이 되어 많은 역량 있는 신인을 배출하기도 했다.유작으로는 『정지용시집』(1935), 『백록담(白鹿潭)』(1941) 등 두 권의 시집과 『문학독본(文學讀本)』(1948), 『산문(散文)』(1949) 등 두 권의 산문집이 있다.
지은이 : 서덕출
1906년 경남 울산에서 태어났습니다. 6살 때 다리를 다쳤는데 염증이 척추까지 번지면서 척추 장애와 하반신 마비로 평생 걷지 못하는 몸이 되었습니다. 학교에 다닐 수 없어 어머니로부터 한글을 배웠고, 집에서 독서와 수예를 하며 혼자 공부하고 시를 썼습니다. 1925년 <어린이>지에 동시 「봄 편지」가 입선되어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했습니다. <봄 편지>, <눈꽃 송이>, <피리> 등이 동요로 만들어져 널리 애창되며 전국에 이름을 알렸습니다. 어린이 독서회 ‘기쁨사’의 동인으로 활동했으며 윤석중, 신고송, 윤복진 시인과 교류하며 동시 「슬픈 밤」을 공동 창작하기도 했습니다. 결혼 후에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약제사 공부를 하여 신약방을 운영하기도 했지만 이내 척추의 신경통이 극심해지며 자리에 눕게 되었습니다. 1940년 오랜 병고 끝에 34세의 젊은 나이로 돌아가셨으며, 1952년에 유고 동요집 『봄 편지』가 나왔습니다. 2007년 시인의 문학 정신을 기리는 서덕출문학상이 제정되었으며, 2012년 울산 서덕출공원에 서덕출기념관이 세워졌습니다.
지은이 : 박소농
‘영치기 영차’ 새싹도 응원하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시인
지은이 : 이태준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온전히 담은 재미있는 시를 쓴 시인
1장 감자꽃 호박꽃 봉선화 방실방실
나무│윤동주
감자꽃│권태응
코스모스│권태응
홍시│정지용
땅감나무│권태응
봉선화│서덕출
버들피리│서덕출
앵두│권태응
호박꽃 초롱│강소천
해바라기 씨│정지용
탱자│권태응
영치기 영차│박소농
2장 병아리 뾰뾰 오리 꽥꽥 나비 나풀나풀
개│윤동주
닭│강소천
사슴뿔│강소천
병아리│윤동주
오리│권태응
아기와 나비│강소천
귀뚜라미와 나와│윤동주
늙은 잠자리│방정환
비둘기│정지용
굴뚝새 굴뚝새│정지용
3장 해가 쨍쨍 별이 총총 바람이 솔솔
별똥│정지용
호수│정지용
달밤│강소천
밤시계│서덕출
햇빛 바람│윤동주
햇비│윤동주
4장 꽃 피고비 내리고 단풍 들고 눈 내리는 봄 여름 가을 겨울
호주머니│윤동주
봄│윤동주
봄 편지│서덕출
장맛비 갠 날│권태응
바람│정지용
여름 밤│강소천
더위 먹겠네│권태응
추석날│권태응
눈 뜨는 가을│서덕출
겨울│윤동주
눈│윤동주
눈은 눈은│서덕출
눈 내리는 밤│강소천
눈꽃 송이│서덕출
굴뚝│윤동주
겨울 밤│강소천
춥긴 뭐 추워│권태응
5장 아이 좋아 아이 좋아 우리 집 우리 동네
엄마야 누나야│김소월
고향 집│윤동주
병│정지용
바쁜 엄마│권태응
편지│윤동주
무얼 먹고 사나│윤동주
아기의 새벽│윤동주
할아버지│정지용
오줌싸개 지도│윤동주
한 동네 사람│권태응
엄마 손│권태응
빗자루│윤동주
혼자 자는 아가│이태준
6장 동무 동무 어깨동무
종이접기│강소천
1, 2, 3, 4 선생│서덕출
만돌이│윤동주
내 맘에 맞는 이│정지용
숨기내기│정지용
숨바꼭질│강소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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