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시인동네 시인선 172권. 시인이자 한 사람의 과학자가 시도하는 은밀한 연금술. 김익진 시인의 다섯 번째 시집이다. 한서대학교 항공신소재공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김익진의 시는 예술과 과학의 연결이 아니라 예술이 과학을 상보하고 과학이 예술을 상보해가는, 서로가 서로를 넘어서면서 어느 쪽의 색깔도 고집하지 않는 내면적 사유의 실천이다. 가시적이면서 객관적인 세계에 대한 깊은 인식이 돋보이는 김익진의 이번 시집은 시의 영역을 우주까지 한층 넓혀 놓았다고 할 수 있다.
출판사 리뷰
그동안 김익진 시의 해설은 일관되게 시인의 외적인 경력을 밝히는 데서부터 시작되어 왔다. 물론 그것이 독일에서 재료공학을 전공하고 현재 항공신소재공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시인으로서는 다소 특이한 이력 때문만은 아니다. 시인의 소박한 일상과 개인적 체험을 서정적으로 형상화한 첫 번째 시집 『회전하는 직선』에서부터 예술의 전유물인 상상과 과학의 전유물인 기술의 접목이 뚜렷해서일 것이라고 추측한다. 시에서 ‘확률’이나 ‘기하학’, ‘양자물리학’과 같은 용어들이 일반적이지도 않거니와, 무중력이거나 중력의 시공을 유영하는 것과 관련한 우주적 명제들이 김익진의 시를 뒷받침하는 사유와 인식의 틀이 되어 왔음은 분명해 보인다. 흔히 ‘우주적 상상력’으로 일컬어지는 김익진 시의 특이성은, 그의 시를 설명하는 구심점이자 중력으로 기능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과학과 예술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려는 시도는 이 둘 사이에 우열은 없다고 말하면서도 사실상 과학은 정신적 능력이 없음을 은연중 지적함으로써 예술의 편에 서는 방식이다. 이는 지식과 논리보다 직관적 통찰이나 감성적 문체를 편애하는 태도이기도 하다. 김익진의 시는 예술과 과학의 연결이 아니라 예술이 과학을 상보하고 과학이 예술을 상보해가는, 서로가 서로를 넘어서면서 어느 쪽의 색깔도 고집하지 않는 내면적 사유의 실천이다. 세상은 시인과 과학자로 나뉘는 게 아니라 자아라는 소우주에 주목하는 내향성을 가진 자인가 아닌가에서 그 유별함이 드러난다. 한편으로 시인은 모든 시편을 자신이라는 소우주로 채울 수 있지만 그의 기량이 탁월하게 드러나는 형식을 선택하기 마련이다. 그가 자신의 내면을 어떻게 전달하고 공유할 것인가에 대한 해답으로 자신에게 익숙한 도구를 선택함은 일견 당연하게 여겨진다. 시에서 과학은 낯선 도구다. 낯선 도구는 낯선 예술을 만든다. 김익진에게는 우주적 상상력이야말로 자신을 가장 잘 표현하는 형식인 셈이다.
지구의 절반은 밝음
다른 한쪽은 어둠
무한대
하늘 끝자락
무게의 변화 없는
회전 속, 나를 잡고 있는 궤도
반복되는 일출
약간은 쓸쓸한 감옥
권태와 지루함,
중력에 잡힌 삶
그러니 서로 사랑하라 하지요
우리의 춤은 왈츠보다 큰
공간의 음악,
아담의 노래
어둠 속으로 날고 있는 궤도는
혼돈 뒤에 고요함
비대칭의 흔적
― 「비대칭의 흔적」 전문
시집 제목으로 삼은 작품이기도 한 「비대칭의 흔적」은 과학과 문학이 접목된 김익진 시의 특성을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비대칭은 대칭이 아닌 것, 또는 대칭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다. 물처럼 양이 증가한다고 행복이 증가하는 건 아니지만 급감하면 고통을 주거나, 있을 땐 소중함을 모르는데 잃고 나면 회복하기가 어려운 건강 등은 비대칭의 실제적 사례다. 이러한 사전적 지식에도 불구하고 김익진 시에서의 비대칭이 갖는 의미는 모호하다. 이 모호함을 극복하기 위해 우리는 한 편의 영상을 보듯이 이 시를 동적인 이미지로 시각화한 후 그것을 지켜보는 상상을 할 필요가 있다. 요컨대 시의 1연과 2연은 지구를 타자로 설정한다. 그런 후, 지구를 한 초점으로 하면서 지구 주위를 도는 타원 궤도에서 가장 먼 지점인 원지점에 위치한 시선으로 지구를 느리게 비추고 있다.
「비대칭의 흔적」과 유사한 방식의 작품으로써 미디어 예술가 샘 테일러 우드(Sam Taylor-Wood)의 동영상을 들 수 있다. 이 작품은 탁자 위에 과일을 쌓아놓고 그것이 점점 썩고 메말라서 사라지는 과정을 카메라로 촬영하여 60배속으로 빠르게 돌린 영상물이다. 과일에 서서히 푸른곰팡이가 피고 진물이 흐르고 구더기와 파리가 들끓다 사라진 후, 진물도 마르고 과일의 흔적만 검은 상흔으로 남은 이 작품의 제목은 〈정물화Still Life〉(2001)다. 카메라와 시간을 이용한 이 미디어 예술을 힌트 삼아 이제 우리는 김익진의 시를 다시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시의 눈이 우주적 거리의 외부에서 카메라처럼 비추고 있는 지구는 무한대의 공간 속에서 고요히 떠 있다.
그러나 실상 지구는 자전축을 중심으로 하루에 한 번씩, 서쪽에서 동쪽으로 어마어마한 속도로 회전하는 하나의 구체(求體)이다. 영상은 문학에 소리를 덧입히지만, 반대로 김익진의 시는 소리를 철저히 소거한 채 정적인 움직임만을 보여준다. 그것은 “공간의 음악,/아담의 노래”이므로 실로 우리의 가청권 밖이다. 지구의 외부를 향하던 시선은 지구 내부의 ‘나’로 초점을 이동한다. 소리가 소거된 영상 속에서 중력에 사로잡힌 ‘나’는 우주적 시공간과 동일시되는 ‘우리’로 확장되고, 우주의 리듬과 동일시된 ‘우리’는 다시 인류의 기원인 ‘아담’으로 수렴된다. 과학이 논리를 초월하는 순간 과학은 시가 된다. 비대칭이라는 실제적 조건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가, “그러니 서로 사랑하라 하지요”라는 시의 전언을 교훈이 아니라 공감의 정서로 감각할 수 있는 이유는 이러한 신비로움에 있다.
지구의 중력은 달에 비해 6배다. 지구에서 물건이 낙하하는 속도가 달의 여섯 배라는 말과도 같다. 시는 이러한 지구의 중력에 잡힌 삶을 한계의 다른 이름인 ‘감옥’이라고 표현한다. 중력을 벗어날 수 없는 지구는, 아니 한계를 지닌 아담으로 대표되는 인간은 과거의 흔적에 불과한 존재로써 현재를 살다가, 부재로 인한 상실감을 후손에게 유산으로 남기고 가는지도 모른다. 이렇듯 김익진의 시는 과학 기술이 문학에 유비적 사고의 영감을 전해주는 양상을 나타낸다. 정리하자면 「비대칭의 흔적」에서 ‘비대칭’은 지구라는 행성에서 살아가는 존재의 유한성을, ‘흔적’은 존재의 부재로 인한 상실감을 환기한다. 시는 유한한 존재들의 한계와 소멸의 비애를 말하려 우주 속의 지구를 거대하고 단순한 형태로 조망한다. 그것은 실재를 초과하지만 이미지로 구축된 가상의 시뮬라크르((simulacre)가 아니라 실재 그 자체다. 그리고 이러한 설정은 우리에게 마치 사차원의 세계에서 유영하는 것 같은 신비로운 느낌을 선사한다.
■ 시인의 산문
꽃잎에 물방울이 매달려 있다.
고요하다.
곧 터질 듯 미세 입자로 가득하다.
꽃은 고요하지만 단호하다.
우주는 격렬함 이전의 순간처럼 소용돌이치고
태초의 시간은 이미 먼 곳에 가 있다.
선과 점 사이에서
나는 언제나 이별 중
기다림은 우주의 에코,
모든 과거는 개인적인 신화일 뿐이다.
지구본에 점을 찍은 후
우리가 있던 곳을 측정해 본다
처음 만난 곳 : 37.06° N, 124.5° W
첫 데이트 : 37.09° N, 124.92° W
첫 키스 : 37.16° N, 124.97° W
첫 번째 사랑 : 37.07° N, 124.02° W
첫 번째 그날 밤 : 37.01° N, 124.01° W
첫 번째 휴가 : 33.21° S, 132.0° E
EWSN을 모아 보면
우리는 점으로 뭉쳐 있다
― 「별에서 보면」 전문
수학은 형식의 특성을 적절하게 사용한다
W = 지혜, l = love, s = speech라고 말하면
W (l, s) = Wl + Ws
지혜가 l과 s의 질적 변화로 작용하면
W (l, s) = Wl * Ws
지혜는 승수로 작용하지만
승수와 질적 변화로 작용하면 까다롭다
물리적 대표자가 없는 지혜
어려워 보이는 것은 더 많은 동사의 추가로
다른 동사를 형성하는 것
이들 동사에는 포함된 내용의 전체 목록은 없다
걷기와 달리기가 비슷한 특성을 갖고
에스코트와 에스크로가 다른 의미를 갖는 이유다
수학은 예민한 언어다
― 「예민한 언어」 전문
당신은 별똥비가 내리는
은하계 옥상에 산다
게으른 해는 산 뒤로 떨어지고
어둠이 기어 나와
도시의 가로등을 감싸고 있다
도심은 수직으로
변두리는 수평으로
불빛이 씀벅거린다
세입자가 불을 켰을 때
지구의 흑점이 반짝거렸고
우주에 불빛 하나가 추가되었다
세입자가 월세를 미루자
지구는 채무자가 되었고
우주의 잔고가 줄어들었다
세입자의 불은 우주의 중심,
성스러운 특사
이제 사랑은 지구에서 드문 기술
당신이
지구의 주인임을 보여라
― 「세입자가 불을 켰을 때」 전문
작가 소개
지은이 : 김익진
경기 가평에서 태어나 독일에서 재료공학을 전공했다. 2007년 《월간조선》에 시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회전하는 직선』 『중력의 상실』 『기하학적 고독』 『사람의 만남으로 하늘엔 구멍이 나고』와 수필집 『수백억 광년의 사랑』 등이 있다. 현재 한서대학교 항공신소재공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목차
제1부
별에서 보면13/예민한 언어14/시작도 끝도 없다16/당신은 소수19/비대칭의 흔적20/양자 우주22/세입자가 불을 켰을 때24/한 우주에서 다른 우주로26/우리가 하지 않은 일들28/더 스테이션30/하늘은 내 어깨를 부수고 있지만32/떨림의 근원34/마이크로 코스모스35/오래된 독수리 뼈에 시를 뱉으며36/깊은 우주38/수백억 광년의 사랑40/퍼레이드의 근거42/양자물리 사랑44/마음은 탐험되지 않은 은하46/작은 벌레48
제2부
새들은 오지 않았다51/요나처럼52/화학은 무정부주의자54/별자리를 유지하라56/우리는 작은 액정만 본다58/소금60/견딜 수 없다61/숲의 랩소디62/잘못된 포크를 사용하는 이유64/신은 불완전하다66/우주의 이중성68/겨울밤69/빈 행성의 공포70/겨울 산72/수학은 악기다74/하늘이 궁금하다76/낮잠78
제3부
알 수 없는 미래81/나의 계정82/세렝게티84/당신86/지구가 하나이기 때문에87/SNS 사랑88/하늘은 음모를 꾸미지 않는다90/우연히 만나던 날92/나쁜 생각으로 눈이 떠질 때94/만남도 없는 이별95/도발적인 상상96/달은 당신을 근심에 빠뜨린다98/예쁜 여자100/사랑의 중력102/어둠이 곁에 앉았다103/계약104/맥박106/귀향108
해설 신상조(문학평론가) 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