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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공희 대주교의 북한 교회 이야기
가톨릭동북아평화연구소 | 부모님 | 2022.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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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서 소개

윤공희 대주교님의 기억 속에 살아 있는 북녘 교회에 관한 구술사이다. 1924년 평안남도 진남포 출생으로 격동의 역사를 사신 윤 대주교님의 기억은 진남포 본당에서 복사를 섰던 여덟 살 소년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윤 대주교님이 들려주시는 이야기 속에는 북녘 성당과 덕원신학교 풍경 안에 일제와 공산 탄압 속에서도 양 떼를 돌보던 평양교구 사제와 선교사들, 그 안에서 신앙을 지켰던 신자들의 모습이 보인다.

38선을 넘어 남쪽 땅을 밟은 순간도, 6·25 전쟁으로 아수라장이 된 명동성당에서 인민군복을 입은 큰형님께 강복을 준 그날도 대주교님의 기억은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모든 순간, 삶 가운데 함께 하시는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살아오셨다는 대주교님의 고백을 담은 이 책을 통해서, 우리 자신의 신앙과 민족 화해라는 교회의 소명을 비춰볼 수 있을 것이다.

  출판사 리뷰

기억 속에 살아있는 북녘의 교회

한국 교회사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인물이 있다. 2022년 현재 한국 가톨릭교회의 최고령 주교, 윤공희 빅토리노 대주교이다. 우리 민족에게 수난으로 가득한 역사를 몸소 체험하신 윤 대주교님의 삶은 한반도의 현대사이자 한국 교회의 살아있는 경험과 기억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24년 평안남도 진남포에서 태어나신 윤 대주교님의 삶은 숨 가쁘게 흘러왔다.

이야기의 시작은 진남포본당에서 복사를 섰던 여덟 살 소년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제 강점기 가혹했던 전시 동원 체제에서 진남포는 군산 전진기지가 되며 신흥 도시로 급변하고, 진남포성당은 새 성전을 지어야 할 만큼 날로 교세가 확장했다. 그 무렵 메리놀회가 평양교구에 진출하면서 진남포성당에도 외국인 신부가 부임했다. 어린 빅토리노가 복사를 서던 때는 메리놀회 스위니 신부가 진남포성당의 주임신부였던 때였다. 일제의 폐교 위협에도 학교를 지키고, 신사참배를 거부한 신부님을 보며 어린 빅토리노는 사제의 꿈을 키워갔다.

서포 예비 신학교에서 사제가 되기 위한 첫걸음 떼고, 빅토리노는 일생에서 제일 중요한 시기를 보내게 될 덕원신학교에 가게 된다. 푸른 숲속에 있는 덕원신학교에는 최고의 교수진이 있었다. 윤 대주교님은 스승이었던 베네딕토회 신부님들을 한 분 한 분 기억해 낸다. 덕원신학교를 떠난 후부터 오늘에 이를 때까지, ‘네가 원하는 게 주님의 뜻에 합당한 것이냐’ 물으셨던 스승의 질문에 답을 찾으며, 하느님의 섭리를 찾아오는 길을 걸었다.

청년 시절의 기억에는 해방 후 찰나의 기쁨과 교회가 북한 정권으로부터 당한 모진 수난도 스며있다. 일제의 징집으로 마음 졸이며 영장을 기다리던 중에, 해방이 찾아왔다. 도둑처럼 조국 해방이 온 날, 전쟁 물자로 몰수된 교회 종탑의 종소리를 대신해 해방의 기쁨이 수도원 하늘 높이 울려 퍼졌다. 하지만 해방의 기쁨은 잠시, 북한 지역에 새로운 체제가 들어섰다. 얼마 전까지 일본군 부대가 진을 치고 있던 신학교 운동장에는 소련군이 들어와 있었다. 상황은 더욱 나빠졌다, 소리소문없이 정치보위부에 끌려갔다 돌아오지 않는 사제와 신자들이 늘어갔고, 일제에 빼앗겼던 성전을 다시 짓는 일도 공산당의 방해와 압력으로 결국 중단되고 말았다.

북한 전 지역에 종교 탄압의 수위가 높아져 가던 1949년 봄. 한밤중에 수도원 주교 아빠스와 교장 신부, 수도자들이 연행되었고, 이윽고 덕원신학교에 강제 폐쇄 명령이 떨어졌다. 신학생들이 고향으로 뿔뿔이 흩어지고, 이제 막 차부제품을 받은 윤공희 빅토리노도 평양으로 향했다. 방학 때마다 찾아뵙던 교구장 주교님도 피랍되어 보이지 않았다. 이대로는 이북의 신부들은 다 잡혀갈 판국이었다. 누군가는 이남으로 가 평양교구의 재건을 준비해야만 했다. 윤공희 빅토리노는 평양교구의 존립을 위해, 1950년 1월 목숨을 걸고 38선을 넘었다.

서울에 도착한 지 두 달 만에 사제 서품을 받은 그 날, 윤공희 빅토리노 신부는 하느님의 섭리에 대해 곰곰이 생각한다. 만약, 북한에서 사제품을 받았더라면, 당시 평양교구 소속 사제들의 운명처럼 공산 정권에 피랍되어 지금의 교황청이 발표한 「20세기 신앙의 증거자」 명단에 올라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그때 순교하신 모든 분의 삶까지 살겠다고 다짐하며 신부 생활을 시작할 무렵 6·25 전쟁이 발발해 공산 치하를 경험하게 된다. 인민군 군의관이 되어 내려온 형님에게 강복을 준 일도 있었고, 9·28 서울 수복 전까지 구산 공소로 피신을 가 간신히 위험을 피하는 일도 있었다. 인민군들이 다시 북쪽으로 밀려가, 군종 사제들과 함께 북쪽으로 올라가 평양교구 성당들을 방문해 신자들에게 성사를 주었다, 가는 곳마다 신자들이 모여들었다.

그즈음 덕원수도원 주교 아빠스의 무덤을 참배했고, 조만간 다시 찾아와 수도원 땅으로 옮겨 드리리라 했지만, 아직까지 그 시간은 오지 않았다.

책이 막바지에 다다르면 머릿속에는 윤 대주교님이 전해 주는 북녘 교회와 신자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책에 실린 사진이 북녘 교회를 생생하게 각인시키고, 아직도 북한 지역 어디에선가 숨어 있을 교우들의 믿음이 분명히 살아 있을 거라 믿고 싶어진다.

“여러분 영원이 무엇이겠습니까? 잘 들어보세요. 가령 아주 큰 바위산이 있다고 생각해보세요. 매년 새 한 마리가 그 산에 와서 앉아요. 천 년 동안 천 번을 와서 새가 내려앉으면 그만큼 새 발자국이 바위 위에 찍히겠지요. 그러면 그만큼 바위가 작아지겠지요. 그렇게 해도 영원은 아직 시작도 안한 거예요. 그 새는 지금도 저 산에 와서 앉아요. 우리는 지금 영원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알듯 말듯 한 설명이었다. 나는 큰 새가 날갯짓을 하면서 산 정상에 앉는 모습을 떠올렸다. 그 새는 산 정상에서 영원의 모습을 보았을까? 생각할수록 고개를 갸웃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현존하는 영원, 주님의 영원성을 배우는 순간이었다. 다른 여러 가지 내용도 무척 재미있었고 감동적이었다. 그때 죽기 전에 세례를 받으면 바로 천국에 간다는 말을 들었는데 나는 그 말을 듣고 혼자서 심각하게 고민한 적도 있다.
‘나는 왜 어릴 적에 죽지 않았을까? 그때 바로 죽었으면 직(直) 천당 할 수 있었을 텐데 …’

- 사제 성소로 이끌린 어린 시절

(덕원 신학교) 로머 교장 신부님은 공산당에 끌려가 옥사덕 수용소에서 고초를 겪으시다 1951년 11월에 예순여섯의 나이로 선종하셨다. 교장 신부님은 마지막 순간까지 신학교로 돌아가 사랑하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으셨다고 한다.
나는 덕원신학교를 떠난 후부터 지금까지 언제나 선배 신부들을 생각하고 특별히 교장 신부님을 생각한다. 교장 신부님의 음성이 귓가에 들리는 듯하다.
“빅토리노, 네가 원하는 게 주님의 뜻에 합당한 것이냐? 네가 행하는 게 주님의 뜻에 합당하다고 확신할 수 있느냐?” 오늘에 이를 때까지 내가 살아오는 동안 교장 신부님의 그 질문은 나에게 하나의 나침반이었다. 스승의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이 곧 하느님의 섭리를 찾아가는 길이기도 했다. “너 잘하고 있느냐? 빅토리노~”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는 노정에 없어서는 안 될 나의 스승 로머 교장 신부님의 가르침을 지금도 듣고 있다.
- 아름다운 기억, 신학교 시절

일제의 식민지로 살아야 하는 게 우리의 운명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사람도 있었다. 조국의 해방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정말 도둑처럼 조국 해방이 찾아온 것이다. 그날 해방의 기쁨을 알려줄 종소리를 들은 기억이 없다. 교회 종탑에 달린 종이 없었기 때문이다. 일제가 전쟁 물자에 필요한 고철과 금속물품으로 사용하기 위해 교회 종탑의 종들을 모조리 뜯어간 게 오래전이었다. 독일의 나치가 전쟁 무기를 만들기 위해 수도원과 마을 성당의 종들을 몰수해간 것과 마찬가지였다. 다행히 덕원수도원의 종은 그때까지 살아남아 해방의 기쁨을 수도원 하늘 높이 울려퍼지게 하였다. 그러나 그 종소리 또한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해방의 기쁨은 정말 잠시였다. 북한 지역이 소련군의 점령 하에 들어가면서 새로운 체제가 들어섰다.

- 나의 가족, 해방을 맞은 우리

  작가 소개

지은이 : 윤공희
1924년 평안남도 진남포 출생으로 함경남도 덕원신학교를 수료하였다. 해방 이후 월남하여 서울 성신대학을 졸업하고 1950년 3월 사제 수품을 받았다. 1963년 초대 수원교구장으로 임명되어 주교 수품을 받았으며, 1973년 광주대교구장으로 임명, 대주교 승품을 받았다.

  목차

추천사 · 7

간행사 · 12

1부 신앙의 요람, 평양 교구
1장 사제 성소로 이끌린 어린 시절
우리 집안 · 27 | 진남포성당 · 32 | 복사를 서다 · 37 | 진남포의 은인, 스위니 신부님 · 39 | 배 신부의 시약소 · 43 신사 참배 · 46 | 해성학교 - 교리공부를 하다 · 51 | 나의 반성 · 56 서포 예비 신학교 · 59 | 장정온 악니다 수녀님과 인사 · 64 | 소신학교 - 덕원과 서울 동성신학교로 나뉘다 · 66

2장 아름다운 기억, 신학교 시절 덕원신학교 신학생이 되다 · 71
신부 여섯만 나와도 내가 춤을 추겠다 · 75 | 소신학교 시절 · 77 | 공부는 열심히 · 82 | 최고의 교수진 · 86 안셀름 로머 교장 신부 · 87 | 루치오 로트 원장 신부 · 93 라틴어 선생님 · 95 | 아르눌포 슐라이허 부원장 신부 · 97 루페르토 클링자이스 신부 · 100 | 평신도 교사들 · 104 | 신학교 관현악단 · 106 | 그레고리오 신부님 · 111 | 깐또르가 되다 · 114 월반을 하지 않다 · 117 | 덕원신학교의 학풍 · 122 | 담배 허용 · 122 자율적인 학교 분위기 - 경계는 없어 · 124 | 신학교에서도 내선일체 · 127 | 금강산 소풍 · 129

3장 나의 가족, 해방을 맞은 우리
부모님 · 137 | 큰형 건희 모세 형님 · 140 | 작은형 곤희 형님과 동생 봉희 · 145 | 누이동생 요안나 · 147 해방을 맞다 · 151 | 해방 후의 평양 · 154 | 관후리성당 재건 · 156 | 우리 신학생은 우리 손으로 · 159

4장 시작되는 공산 탄압
차부제 서품 · 167 | 덕원신학교 - 시련을 맞다 · 168 | 잡혀가신 주교 아빠스 · 174 | 끌려가신 교장 신부님과 독일 수도자들 · 178 덕원신학교 강제 폐쇄 · 181 | 평양교구 - 홍용호 주교님을 잃다 · 185 길 잃은 양들은 어디로 · 189 | 진남포 이야기 - 우리는 유대철처럼 될 거야! · 193 신부님을 지키는 신자들 · 199 | 조문국 신부님 · 202 월남 계획을 세우다 · 206 | 드디어 서울에 · 221

2부 사제의 길
1장 새 사제 시절과 6·25
사제 서품 - 가장 기쁜 날! · 229 | 첫 소임 - 명동 보좌신부 · 235 | 6·25 발발 · 236 | 모리 멜리우스 에스트 · 239 | 피난민들에게 고해성사 · 241 | 형님을 만나다 · 242 | 전란 중 명동성당 미사 · 247 | 북한군 명동성당 점령 · 249 | 중부보안서에 잡혀가다 · 250 | 명동에서 쫓겨나다 · 253 | 다 맡기고 떠나는 길 · 255 | 구산공소 · 259 | 서울로 돌아오다 · 261 | 9·28 수복 후 평양으로 돌아가다 · 263 | 주교 아빠스의 무덤을 참배하다 · 266 | 우리는 평양교구 신부다 · 269 | 다시 찾은 진남포본당 · 272 | 영유본당을 뒤로 하고 · 275 | 다시 서울로 돌아와서 · 277 | 포로수용소 군종 신부로 · 278 | 이산가족 상봉 · 282

2장 평양교구 출신의 주교
부산 가톨릭 도서관 부관장 · 289 | 성신소신학교 교사로 일하다 · 291 | 감독 신부 시절 · 295 | 로마 유학 · 296 | 지학순 주교와의 우정 · 302 | 학위를 마치다 · 308 | 중앙협의회 총무 시절 · 309 | 김남수 주교와의 우정 · 310 바티칸 공의회 참석하다 · 314 | 주교 수품 · 316 | 바오로 6세 알현 · 318 | 수원교구장 시절 · 321 | 서울교구장 서리 · 324 | 하느님 안에서 살아온 나의 삶 · 328 | 통일은 우리의 노력을 필요로 한다 · 330

에필로그 · 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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