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현대시세계 시인선 141권. ‘느닷없는 진지함’과 ‘유쾌한 명랑’이라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이성수 시인의 두 번째 시집. 1991년 『시와시학』 제1회 신인 공모를 통해 등단한 이성수 시인은 오랜 침묵을 깨고 18년 만에 두 번째 시집을 선보인다.
출판사 리뷰
이성수 시인, 오랜 침묵 깨고 18년 만에 두 번째 시집 『눈 한 번 깜빡』 출간
‘느닷없는 진지함’과 ‘유쾌한 명랑’이라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이성수 시인의 두 번째 시집 『눈 한 번 깜빡』이 출간되었다. 1991년 『시와시학』 제1회 신인 공모를 통해 등단한 이성수 시인은 2004년 시집 『그대에게 가는 길을 잃다, 추억처럼』 이후 오랜 침묵을 깨고 18년 만에 두 번째 시집을 선보인 것이다.
이성수 시인은 문 밖을 산책하다 문 안에 들어 시간의 물에 상처를 쓰는 사람이다. 그는 오래 문 밖을 떠돌았다. “절집 뒷간은 문도 없이 봄”(「하기야 동백꽃도」)이 오는 줄 알아채곤 동백이 피는 속도로 귀가해 시방은 방안에서 문을 열고 밖을 바라보는 사람이다. 절간 처마 끝 풍경을 떠올리며 “목숨 연명하는 소리”(「風磬」)를 추억하다가 “문이 왜 필요해” 하며 ‘벽’을 허물 수 있는 사람이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불러세워 한참을 웃고 떠들다가는 “잘 가” 하고 해맑게 손을 흔드는 사람이다.
그에게 시는 “뜻하지도 않은 곳에서” 만나 허물없이 웃고 떠드는 “뜻하지 않은 친구”이다. 어쩌면 ‘느닷없는 진지함’이라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릴 것이다. 이성수 시인의 ‘유쾌한 명랑’엔 “사막 한가운데”(이하 「개미귀신」)에 “뻥 뚫린” 구멍이 있다. 겉으로 드러난 게 다는 아니다. 가벼움만으로 무거움을 가름하긴 어렵다. 웃음의 이면에 감춰진 슬픔을 감지하면 ‘느닷없음’이나 가벼움을 탓할 수 없을 것이다.
「허물어진 시」에서 “나는 죽어가는 문장”, “내 병은/ 내 시”라 했듯 시인의 몸속에는 시가 흐르고 있다. 그냥 시인이다. 이성수의 시에선 진한 페이소스가 느껴진다. 그저 무심히 바라보는 듯하지만, 대상을 연민과 동경의 눈으로 바라본다. 사물을 요모조모 관찰하다가 슬쩍 비틀기도 한다.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아이처럼 진지한 듯 장난스럽고, 장난스러운 듯 진지하다. 그냥 천진난만하다.
이성수의 시집 『눈 한 번 깜빡』에는 ‘사랑’이라는 단어가 28번 나온다. ‘꽃’이라는 말은 67번이나 나온다. 시집에 꽃이 활짝 피었다. 꽃을 좋아하면 늙은 것이라는데, 그는 정작 ‘늙다’는 말은 한번도 사용하지 않은 반면 ‘젊은’은 1번, ‘청춘’은 8번이나 등장한다. 반어적일까? ‘청춘’을 상징하는 계절 ‘봄’은 35번 나온다. 결론은 사랑하는 사람과 봄꽃을 좋아한다는 것이고 그게 시에 녹아 있다.
시인은 죽음이라는 말을 싫어하는 것 같다. 죽음이라는 말 대신 겨울처럼 다른 단어를 사용했다. 죽음이라는 명사를 딱 한 번 사용(‘죽다’는 의미는 33번이고 돌아가시다 등 죽음을 의미하는 단어를 포함하면 더 많다)했는데, 그 “죽음은 이국적”(이하 「계엄령 내린 날」)이다. 시인에게 죽음은 길을 잃은 듯, “가슴까지 무너”진 듯 “무참한 일상의 반복”되는 고통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눈 한 번 깜빡”이면 봄 지나 겨울이 된다. 가을의 자리에 서서 “엄마가 쓴 이번 생 이야기 읽어보려고 엄마가 서 있던 자리에서 오랫동안 창밖을 바라보”게 된다. “날도 더운데 우리 막걸리 한잔”해야겠지요. 우리는 “눈 한 번 깜빡일 때마다 한 생이 지나고 또 다른 생을 맞”는다. “커다란 스케치북”(이하 「삶은 종잇조각」)에 ‘삶’이라는 글자를 쓰고 “뭔가 골똘하게 바라”보는 어린 조카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금방 “깊이를 알 수 없는 글자”가 적힌 “스케치북을 북 찢어서 꾸깃꾸깃 구겨버”리고는 아무 일 아니라는 듯 시소를 탄다. “올라갔다 내/ 려/ 갔/ 다”를 반복한다. 이쯤 되면 삶이 장난인지 장난이 삶인지, 시가 생활인지 생활이 시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거울 앞에서 엉덩이를 깐 사내가/ 근심과 번뇌의 경계를 넘자/ 순식간에 자세가 흐트러진다”(「반가사유상」 부분). 이성수의 삶이 머무는 지점이다.
눈 한 번 깜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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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당신이 살아온 날을 소설로 쓰면 몇십 권은 될 거라면서도 눈 한 번 깜빡하니까 머리가 하얗더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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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도 않는 역설을 자주 말씀하셨다, 꽃이 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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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긴 엄마 뱃속에서 내가 태어난 것도 황홀한 인연인데 엄마가 한평생 한 번 깜빡인 눈은 얼마나 이 생이 아름다울까, 꽃이 나부낀다는 것은 꽃이 진다는 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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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한 번 깜빡일 때마다 한 생이 지나고 또 다른 생을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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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쓴 이번 생 이야기 읽어보려고 엄마가 서 있던 자리에서 오랫동안 창밖을 바라보는데
왜 계절은 저만큼 먼저 꽃을 내던지는지 다시 눈을 깜빡이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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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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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사진을 뒤지다 어린 딸이 보여서 이게 너다, 가르쳐주려고 딸 방에 들어갔는데 딸이 화장하고 있었다 엷붉은 볼 초승달 손톱 노랗게 물든 머리 검은 눈썹
빨간 입술
내 허리쯤에서 찰랑이는 딸은 어디 갔을까 거울의 귀에 입을 대고 있는 딸에게 물었다 딸은 몇 해 전 거울 속에서 아이를 본 것 같기도 한데 지금은 어디 있는지 잘 모른다고 말했다 자신도 그 아이가 궁금하다며 긴 머리를 다시 쓸어내렸다 거울 속을 보니 옷장 뒤에서 숨바꼭질하는 아이가 보였다 아직도 아이의 곱슬 파마머리가 내 허리춤에서 춤을 춘다
그 어린 딸을 거실로 데리고 나와 사진을 같이 봤다
이게 너야, 하고 말해주니까 아이가 깔깔 웃는다 손뼉 치며 웃는다
사진을 다 보고 아이를 거울과 이야기하는 딸에게 데려다주었다
딸이 예쁘게 화장했다
화장대 앞에 있는 딸이 이리 와, 하니까 아이가 거울 속으로 달려가 나를 보고
웃는다
어디 갔을까 보름 전전전날 밤의 달처럼 나를 따라다니던 아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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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수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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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뭇잎처럼 우는 새가 있다
섣달그믐 늦은 밤인데
왜 한 남자를 동시에 늘어진 젖가슴에 담았는지
두 여자가 청량리에서 양수리 가는 버스
양쪽 자리에 앉아 싸움을 한다
남자는 아무도 없는 버스 정류장처럼 들척지근한 술 냄새만 풍기고
여자들은 “이년아!” “이년아!” 입에 풀칠한 욕만 뱉어낸다
버스는 그믐달이 낸 길을 소리도 없이 가고
버스에 타고 있는 여고생들은 청춘이 즐거워 낄낄거리며 웃는다
밤은 언제부터 어두워졌는지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는데
두 여자 눈에 한 남자가 밟혀서
머리끄덩이 잡고 싸움질일까
그믐은 얼마큼 깊어야 어둡다 말할까
팔당댐 지날 즈음 버스 운전사가
싸울 거면 내려서 싸우라고 깜깜한 밤 한가운데 차를 세운다
남자는 꾹 다문 섣달 그놈의 달만 쳐다보고
남자도 잃고 머리도 다 뜯긴 여자는
갈퀴 같은 손으로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 넘긴다
“염병헐, 이제 안 싸울라니, 후딱 갑시다.”
섣달그믐 늦은 밤
바짝 마른 나뭇잎처럼 우는 여자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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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소개
지은이 : 이성수
1964년 서울에서 태어나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1991년 『시와시학』 제1회 신인 공모를 통해 등단했다. 시집 『그대에게 가는 길을 잃다, 추억처럼』을 펴냈으며, 빈터문학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출판저널』 기자생활을 시작으로 여러 잡지사에서 일했으며, ‘푸른시민연대’ 문해자 시 교실 자원봉사활동을 계기로 어르신들 시 강의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목차
1부 고양이의 식사는 얼마나 위대한 고행이냐
반가사유상 · 13
하기야 동백꽃도 · 14
삶은 종잇조각 · 16
멀고 먼 중화반점 · 18
사이 · 20
그까짓 · 21
양수리행 · 22
화천 가는 길 · 24
폭포 · 27
꽃의 명함 · 28
꽃들은 · 29
고양이의 봄날 · 30
봄날을 보내는 방법 · 32
봄꽃 · 33
폐문 정진 · 34
달빛 · 36
제부도 · 38
운악산 현등사 · 40
2부 다시 눈을 깜빡이고 말았다
눈 한 번 깜빡 · 45
부리나케 · 46
월식 · 47
오래된 아이 · 48
시 공부 시간 · 50
양말 · 54
버려진 가구 · 55
노인의 열쇠 세 개 · 56
오후 4시 · 57
허물어진 시 · 58
그림자를 버리다 · 60
시집 왔다 · 62
아득한 · 64
빌어먹을 · 65
땅거울 · 68
물고기는 눈을 감지 않는다 · 69
하하하, 아버지 · 72
미사일 · 74
열대야 · 76
3부 내장을 드러내놓는 울음은 손가락 끝까지 시리다
피는 꽃 · 79
침묵의 경전 · 80
문신 · 81
낮과 밤의 깊이 · 82
동구릉 · 84
벽 · 86
장마 · 87
중생대 쥐라기 허니문 · 88
얻어터진 날 · 89
내가 아직 못 쓴 시 · 90
흔들리는 흙 · 92
송광사에는 풍경이 없다 · 94
춤을 추고 있었구나 · 96
기린의 골목 · 98
고드름 · 100
9월 · 102
일상의 방향 · 104
지렁이 · 106
끈적끈적하게, 빌어먹을 · 107
4부 향기 나는 집이 공중에 떠 있다
염색장 · 113
향기 나는 집 · 114
계엄령 내린 날 · 116
오래된 빨래 · 118
십자가와 거미줄 · 120
종점 · 122
돌아가는 길 · 125
단풍 · 126
길 · 128
의도하지 않읔 오류 · 130
일출의 그늘 · 132
꽃산적 · 134
어쩌자고 · 135
발문 “하하하 성수야! 우리 막걸리 한잔하자” / 김정수 · 1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