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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쪽 눈을 감고
블루뮤지엄 | 부모님 | 2022.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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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서 소개

<검은 여름>, <텅 빈 극장 속의 커튼콜>의 저자 김동하의 첫 장편 소설이다.

  출판사 리뷰

모티브가 된 세 편의 영화가 있다. 장 뤽 고다르의 <그녀에 대해 알고 있는 두세 가지 것들> 속에 잠깐 나타나는 커피의 소재, 페데리코 펠리니의 <8과 1/2>?물론 이번 소설 속 내러티브가 갖는 권한에 대해선 그다지 긍정적인 입장은 아니지만, 형식이 아닌 내용적 측면에서도 영향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로베르 브레송의 <돈>에서 두드러진 촬영 기법과 그것을 통해 내비친 그의 철학들.

오랜 시간 나를 괴롭혔던 감정은 더 이상 말해야 할 그 무엇이 아니게 됐다. 그리하여 이제는 글을 써 내려갈 이유가 없었고, 동시에 텍스트가 갖는 매체론적인 한계 앞에서 일종의 회의에 사로잡혀 있던 날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텍스트를 써 내려갈 수 있었던 이유는, 소설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택하면서까지 기록의 행위를 지속할 수 있었던 이유는 앞서 소개한 감독들의 연출 방식이 오히려, 영화가 아닌 종이 위에서 비로소 온전한 감각 작용으로 완성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영화 속 연출과 구조, 리듬 형성의 방식...... 그런 것들을 향한 모종의 실험 욕구가 텍스트에게서 마음이 떠난 나를 다시 한번 자극시켰다고 할 수 있겠다.

창작 의도와는 별개로 집필 과정에서 이미 나를 떠나간 것들, 낡아버린 감정 같은 것에 귀를 기울이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줄곧, 내가 행했던 기록의 메커니즘은 과거의 내가 품었던 사유들이 진실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현재의 내가 증명하는 식으로 이루어졌다. 이를테면 과거의 내가 가지고 있던 생각과 그 생각을 구성하는 논리들의 총체를, 현재의 내가 훨씬 더 견고하고 정밀한 사유의 힘, 그 강압과 무력을 통해 눌러 없앤 뒤 보다 정답에 가까운 관념들을 제시하는 일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번 소설의 집필 가운데 펼쳐진 기록의 방식은 그런 시간차로 인해 발생하는 폭력을 통한 것이 아니었다. 과거와 현재의 나 사이에서 벌어지는 헤게모니 싸움이 아닌 조금은 더 어른스러운 내가, 보다 유한 자세와 마음가짐을 견지하는 것을 통해 과거의 나로 하여금 현재의 내가 품은 생각과 논리에 닿을 수 있도록 이끄는 일에 가까웠다고 할 수 있다. 단지 현재에 의해 묵살되는 것으로, 영문도 모른 채 내 속에서 퇴장하는 게 아닌 어느 정도 고개를 끄덕이면서 이곳을 떠나갈 수 있게끔 배려한 것이다.

물론 그 과정이 내 생각만큼 평화롭지만은 않았을 수도 있다. 때로는 지시의 방법이 작용하는 것으로 준비했던 논리, 설득적 근거를 잃으며 일련의 폭력이 또다시 동반되었을 수도 있다. 그래도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잘 마무리된 듯하다. 과거의 내가 어느 정도 이해를 했으니, 스스로가 단지 과거일 뿐임을 이해하고 받아들였으니 이따금씩 수면 위로 떠오르던 과거의 파편들도 함께 납득을 하고 계속해서 그 자리에, 기억 너머의 깊은 바닥에 잠자코 머물러 있는 것이겠지.

어쨌든 이번 소설은 집필 과정 그 자체로 의미가 있는 일이었다. 과거의 나에게도 또한 내 지분이 있음을 인정하고 몇 가지를 양보하는 일이었으니까. 물론 머지않아 나 역시, 미래의 또 다른 나에 의해 결사항전의 순간 속으로 내몰릴 날이 올 것이다. 기분이 썩 좋지는 않지만, 과거의 나를 눌러 없앤 내 업보라고 생각해 볼 수도 있겠다. 과거의 내가 보다 더 영리하고 뛰어난 지금의 나에 의해 돌아올 수 없는 시간 속으로 떠난 것처럼, 미래의 나 역시 지금의 내가 생각지도 못한 수를 써서라도 결국에는 나를, 다른 차원으로 몰아넣을 것이다. 이해는 한다. 하지만 그가 제시할 논리와 사실들, 가르침에 담긴 진리를 미리 납득하겠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누르는 자와 눌리는 자의 태도. 그 이면에 비치던 쓸쓸함만을 이해한다는 것뿐이다.

- 본문 13p 중에서

나는 여태 몇 가지의 이유로, 몇 번의 끝을 경험했는가. 그 무수한 결말 속에서 진정으로 끝이 난 것은 무엇이었는가. 애초에 마지막 순간 앞에 선 적이 있었는가. 나는 두렵다. 끝이기 때문에 두려운 것이 아니라 다시, 이번이 진정 끝이 아닐 것 같아 두렵다. 다시 숨어버릴 나의 나약이 두렵고, 그 모든 것을 다시 용서할 내 속의 자애의 신이 두렵다. 신이시여, 부디 나를 외면하소서. 구원이라는 대의를 등에 업고 웃기지도 않은 명목을 들먹이며 다시금, 나를 그 시궁창 속으로 들어가게 하지 마시옵소서.

사라지고 싶은 열망. 그 순수한 꿈들이 나를 어디로 데려가는가. 화상을 입은 것처럼 두 손이 팽창하고 있다. 화마 속이다. 주머니에 넣어 감춰볼 수도 없다. 바싹 마른 천가죽 하나에 의존하며 버텨온 날들. 이제는 숨길 수도 없다. 손이 너무 커져가고 있다......

수많은 넋들과 수많은 과거 속에 살면서 어느 것 하나 뚜렷하지 않고 흐리멍덩하던, 취기 오른 꿈속이었다. 부득불, 사람과 사랑의 손길을 뿌리치며 들어갔던 어둠 속에서 이제 나는 끝을 맺는다. 매일 아침 펼쳐지던, 수많은 이름에 의해 재생되고 정지하던 영상들과는 다르게 묶이고 잘리고 굳어 마침내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리라. 그러나 대신, 불투명 속에서 비로소 맑아지던 나의 정신만을 위로한다. 먼 곳에서 밀려와 부서지던 허무한 파도...... 내 삶은 그 찰나에 타오른 불꽃이었다. 혹은, 차라리 타오른 적 없는, 비에 젖은 성냥이었다. 그러나...... 아주 긴 임사의 체험이었다.

방의 모습과 찻잔을 젓는 행위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방의 구조와 조건들, 그리고 그 속에서 펼쳐지는 내 행위에 대한 기술은 단지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일상을 보내는 태도와 다를 바 없는, 지극히 평범한 하나의 시선으로서 이곳에 중복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테면 기침으로 인해 들썩이는 어깨와, 순수 기침 소리가 갖는 관계와도 같은 것이다. 오로지 찻잔 속 검은빛의 커피와 그 위에 맺혀 있는 거품들, 그리고 그것들이 그려내는 성운의 형상에 시선이 맞닿아 있을때야 말로 쓰는 행위에 진정한 의미가 부여되는 것이다.

그러나 과거의 기억들 속에서 또 하나의 입체를 발견하는 순간, 나는 즉시 내 삶으로부터 멀어진다. 그곳에서 뚜렷하고 유일한 주체로서의 권한을 잃는다. 이를테면 다른 시간들 속에 끼어, 영화관에 앉아 단지 영사되는 필름을 바라보고 있는 하나의 존재이거나 혹은 객체가 될 뿐이다...... 맥없는 시선만이 찻잔에 닿아있다. 하나의 목소리가 될 뿐이다. 긴 곡선의 그래프에서 단 하나의 포먼트로 전환이 되는 것이다. 티스푼으로 잔 귀퉁이를 두어 번 치자 소리 굽쇠가 진동하는 듯, 그리고 그 진동을 따라 공명의 시간으로 떠나가는 듯 양팔에 힘이 빠지기 시작한다.

  작가 소개

지은이 : 김동하
1997년 출생. 저서로 <검은 여름>, <텅 빈 극장 속의 커튼콜>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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