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리뷰
“소중한 건 뒤편에 있다”
웃음도 슬픔도 모두 인생의 맛
사람살이의 위대함을 노래하는 이정록의 절창
선한 눈길과 맑고 밝은 언어로 많은 독자들과 호흡해온 이정록 시인의 신작 시집 『그럴 때가 있다』가 출간되었다. 사전 형식을 빌린 독특한 형태의 시집으로 주목받았던 『동심언어사전』 이후 4년 만에 펴내는 열한번째 시집이다. 오래전부터 정평이 난 독보적인 해학과 세상을 바라보는 너른 시선이 탁월하게 조화를 이루는 가운데 인생을 관조하는 눈길은 더한층 깊어졌다. 가족과 이웃, 자연과 사물, 삶과 죽음, 신명과 아픔이 한데 모여 그윽한 아름다움과 중후한 활력을 동시에 느끼게 하는 수작들로 가득한 시집이다.
이정록의 시에는 고독과 슬픔을 달래는 울음이 있다. 시인은 “세상의 슬픔과 고통의 풍경 자리에 푹 무질러 앉아 곡비를 자청하며 운다”(안상학, 추천사). 이윽고 “함께 울어줄 곳을 숨겨두지 않고/어찌 글쟁이를 할 수 있으리오”(「빌뱅이 언덕」)라는 진중한 자각에 이르러 “평화를 깨는 모든 소리”에 “뒤꿈치처럼 해진 장단”으로 “짧고 굵게 고함치는 게 시(詩)”(「북채」)라는 깨달음에 닿는다. “드높은 깃발”로 세상의 주목을 받는 것이 아니라 “목이 쉰 북”(「늙은 교사의 노래」)처럼 세상의 관심 밖에서 가뭇없이 사라져가기 쉬운 존재들에게 애틋한 마음으로 연민과 공감의 손길을 건네는 것이다.
시인의 그런 눈길은 이내 주변의 동식물, 사물에게로 이어진다. 자연의 미세한 변화를 감지할 줄 아는 늙은 개를 보며 세계와 교감하는 자세를 가다듬으려 하거나(「봄비」), 천덕꾸러기처럼 바다를 떠도는 신세가 된 빨대의 의인화를 통해 뭇 존재의 가치를 되새기는(「작별」) 시들을 만나다보면 한편의 시를 길어올리는 시인의 예민한 기척에 감탄하게 된다.
그런가 하면 시인의 해학성은 이번 시집에서도 빛을 발한다. 무릎 수술을 받은 사이에 “버스가 많이 컸네”라고 농을 건네는 팔순의 노인과 그런 노인에게 “성장판 수술했다맨서유”라고 너스레를 떠는 버스 기사의 대화(「팔순」), 소화가 안 된다는 아우에게 외려 실치회를 권하며 “배 속에서 고등어만 하게 클 거 아닌감.”이라 눙치는 장면(「실치회」)에서 볼 수 있듯 주로 충청 방언과 함께 그려지는 이웃들의 이야기는 시집을 읽는 즐거움을 더욱 크게 하는 동시에 끈기와 저력으로 삶을 꾸려가는 평범한 이들의 모습을 통해 따스한 기운을 전해준다. 그리고 시인이 마주한 저 다양한 이들의 낙천적인 에너지는 시인의 어머니 혹은 어머니를 떠올리게 하는 어떤 이의 모습 속에서 또다른 빛을 발한다. 가령 “눈곱만큼이라도 맘에 들면/장허다! 참 장허다! 머릴 쓰다듬었다./나는 정말 한마리/힘센 장어가 된 듯했다.”라는 장면에 이르면 뭉클한 감동과 함께 각자 삶의 든든한 버팀목이 어디에서 마련되었는가 떠올릴 법하다.
한편 4·3항쟁에서 무고하게 스러져간 제주 민중의 역사적 상처와 슬픔에 다가서는 시편들도 눈길을 끈다. 시인은 항쟁 당시 무참하게 희생된 민중의 넋을 불러 왜곡된 진실을 바로 세우고, 가슴 밑바닥에 “피멍과 녹물”의 상처만 남긴 잔혹한 폭력의 역사를 “검은 돌 숨비 소리”(「따뜻해질 때까지」)의 애끊는 울음으로 증언한다.
“감정의 평균에 중심추를 매달 것”
슬픔을 털어내고 삶을 곧추세우는 모두를 위해
이렇듯 이정록의 시는 사물의 본질과 이면을 두루 꿰뚫는 세밀한 묘사와 명징한 비유가 돋보일 뿐만 아니라 충청도 방언의 구성진 가락과 질박한 언어를 날것 그대로 능숙하게 구사하는 솜씨 또한 탁월하다. 특히 삶의 감각이 배어든 구술적 표현은 “민중의 삶의 내공”이 얼마나 튼실한지를 일깨운다.(고명철, 해설) 시인은 “작물이든 작문이든 손톱 뿌리까지/다 닳아빠지는 일”(「손톱 뿌리까지」)이라는 ‘엄니’의 말씀을 성실히 받아 적으면서 “슬픔도 괴로움도 다 무더기로 피는 꽃”으로 “어우렁더우렁 꼴값하며”(「그렇고 그려」) 살아가는 삶의 이치와 지혜를 깨쳐나간다. 이정록의 시는 낙천성과 긍정의 심성으로 삶의 고통과 슬픔을 툭 털어내면서 고달픈 존재들의 상처를 쓰다듬는다. “지켜준다는 건 조용하게/뒤편에 있어준다는 것”(「뒤편의 힘」)이라며. 불안과 고독의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 이 시집은 우리에게 단연코 따듯한 위로가 되어줄 것이다.
눈물이 나면
왼손으로 슬픔을 덮었습니다
왼손으로 설움을 훔쳤습니다
웃음이 터지면
오른손으로 입을 막았습니다
오른손으로 웃음꽃을 가렸습니다
왼손이 덜 늙었습니다
―「눈물의 힘」 전문
부푸는 무지개를
슬그머니 끌어 내리고
뚝 떨어지는 마음의 빙점에는
손난로를 선물할 것
감정의 평균에
중심 추를 매달 것
꽃잎처럼 달아오른 가슴 밑바닥에서
그 어떤 소리도 올라오지 않도록
천천히 숨을 쉴 것
불에 달궈진 쇠가 아니라
햇살에 따스해진 툇마루의 온기로
손끝만 내밀 것
―「감정의 평균」 부분
수업을 마치고 화장실에 들렀는데
문 뒤로 아이가 숨는 게 보였습니다.
고둥처럼 눈물이 그렁그렁했습니다.
조개 캐러 나간 할머니가 곧 오실 거라고 했습니다.
아이가 꼭 쥐고 있던 토막 연필을 내게 주었습니다.
무지갯빛 지우개가 가까스로 매달려 있었습니다.
외로움과 막막함과 슬픔이 물어뜯겨 있었습니다.
—제가 가진 것 중에 가장 새것이에요.
—고맙다. 나에게 주는 거니?
—이걸로 재미난 글을 써주세요.
눈보라 속에서 아이의 하나뿐인 가족이
함박눈을 지고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외톨이 늙은 개가 운동장을 질러 달려갔습니다.
선생님, 잘 쓰겠습니다.
나는 갓 등단한 어린 작가가 되어
화장실에 쪼그리고 앉아 고드름처럼 울었습니다
―「꼬마 선생님」 부분
작가 소개
지은이 : 이정록
시인은 충남 홍성에서 태어났다. 1989년 대전일보 신춘문예와 199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의자』 『정말』 『어머니학교』 『아버지학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것들의 목록』 『동심언어사전』 등과 동시집 『콧구멍만 바쁘다』 『저 많이 컸죠』 『지구의 맛』, 청소년시집 『까짓것』 『아직 오지 않은 나에게』, 산문집 『시인의 서랍』 『시가 안 써지면 나는 시내버스를 탄다』 등이 있다. 김수영문학상, 김달진문학상, 윤동주문학대상, 박재삼문학상, 한성기문학상 등을 받았다.
목차
제1부
눈물의 힘
눈
등
그럴 때가 있다
눈사람
돌
진달래꽃
배웅의 양식
뒤편의 힘
뿔
늘 내 몫인 어둠에게
감정의 평균
꽃길만 걸어요
첫날
산벚꽃
제2부
구명조끼
과음
딱풀
꼬마 선생님
뱁새 시인
마른 김
맹물
메밀국죽
빌뱅이 언덕
너무 고마워요
손톱 뿌리까지
게걸음
장어
고욤
무지개
제3부
봄비
황발이
딱
젖의 쓸모
팔순
달밤
첨작
일곱 마디
숯불갈비
몽돌해수욕장에서
그렇고 그려
작별
사랑합니다
선물
벽
제4부
성악설
실치회
북채
시소
어른의 꿈
나는 별이다
늙은 교사의 노래
구멍
삽
종달새
우금티의 노래
제주도
수선화
따뜻해질 때까지
괭이갈매기
해설|고명철
시인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