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시인동네 시인선 174권. 2018년 《문예바다》 신인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한 서상민 시인의 첫 시집. 서상민의 시는 눈에 보이거나 말해지는 것 너머의 세계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 한다. 규격화된 정서나 통약 가능한 세계 인식 너머에 사물과 말의 참된 세계가 있으리라는 그의 믿음은 앞으로도 그를 계속 흔들거리는 자세로 서 있게 할 것이다.
출판사 리뷰
깨진 거울 속의 숭고함을 찾아서
이 세계는 진실인가 거짓인가. 어쩌면 신을 통해 세상을 비추어보던 시대의 인간들은 타율적일망정 더 행복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서상민의 시집 『검은 모자에서 꺼낸 흰 나비처럼』을 읽으면서 하게 되었다. 그의 시집이 인간과 신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이곳과 저곳 사이의 경계를 떠돌며 깨진 거울을 들고 단 하나의 거짓말이야말로 진실이라는 주문을 외는 시적 주체의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시집의 주요 재제이기도 한 마술사에 대한 시적 형상화는 근대의 합리적 주체에 대한 회의를 떠올리게 한다. 칸트로 하여금 무한한 감탄을 자아내게 했던 ‘하늘에 반짝이는 별과 마음속의 도덕률’이라는 완벽한 세계는 이미 상실된 상태이다. 결국 근대적 인간들이 상정해 놓은 절대적 진리의 세계란 허구에 불과하다는 인식은 인간들로 하여금 또 다른 세계를 탐구하게 한다. 이랬을 때 예술적 탐구는 크게 두 방향으로 나가게 된다. 그 하나가 근대적 동일성의 세계로부터 탈주하는 아방가르드 예술론이며, 다른 하나는 여기 너머의 본질적인 세계에 대한 탐구라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서상민의 시를 읽는 일은 잃어버린 낙원을 찾아가는 여정이라 할 수 있겠다. 거짓말과 참말은 진실로 거짓말과 참말인가 하는 물음에 동참하는 일인 것이다.
『검은 모자에서 꺼낸 흰 나비처럼』에는 언어 혹은 말과 관련된 여러 편의 시들이 있다. 세계를 이해하는 가장 일반적인 방식이 언어라는 사실은 자명하다. 그러나 언어야말로 구조된 세계를 강제하는 가장 강력한 도구라는 사실 역시도 분명하다. 세계에 대한 앎의 근원이 언어로부터 시작되는 까닭이다.
새가 식탁 위에 앉아 있다
다문 부리에서 파란(波瀾)이 흐르는
쭈글쭈글해지고 거뭇한 새가
있었다는 색을 지우면
공중이 된다
식탁 위에 사과가 놓여 있다
어두운 뿌리를 격발시켜 하늘이 되는 나무와 숲
바람을 피력(披瀝)하는 새가 날아와
사과를 쪼아 먹는다
목질의 무늬가 굽이쳐 솟는
반질반질한 표면 위로
수만 세기의 별들이 돋아 사라지는 식탁
사막의 모래는 바다로 변하고
식탁 위에서 사과가 날개를 편다
사과 위에 식탁이 놓여 있다
식탁이 사과를 으깨지 않는 것은
깊은 수심 때문
어디선가 망각의 지느러미를 펼쳐
새가 날아오기 때문
식탁이 사과의 문을 연다
사과가 새를 몸 안으로 품는다
사과 속 씨방에 까만 부리들이 눈 뜨고
식탁이 사과나무로 자란다
새가 주렁주렁 달린다
― 「사과와 식탁」 전문
이 시는 의미망을 따라갈 필요가 없다. 메시지를 이해할 수 있는 인과는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다. 시의 이해를 위해 연 구분에 따라 시를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1연에서 식탁에 앉은 새의 부리에서는 물결이 치고 새는 공중이 된다. 2연에서는 식탁에 사과가 놓여 있다. 바람을 자처하는 새가 날아와 사과를 쪼아 먹는다. 식탁의 표면 위로 별들이 돋았다가 사라지고 식탁 위의 사과는 날개를 편다. 1연과 2연의 정확한 의미 파악은 물론 힘들다. 다만 식탁 위에 새가 있고 사과가 놓여 있다는 전제 자체는 현실적으로 수긍할 만한 일이다. 적어도 시가 가시적인 세계에서 출발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3연에 오면 상황은 또 다르다. 사과 위에 식탁이 놓여 있는 역전의 상황이 발생한다. 식탁이 사과를 으깨지 않는 것은 수심 때문이며 새가 날아오기 때문이다. 수심이 식탁의 수심인지 사과의 수심인지 알 길이 없다. 설령 안다고 해도 의미의 구성과 관련이 없다. 그 무엇이어도 현실적인 의미맥락으로부터는 멀어져 있기 때문이다. 4연에서는 식탁이 사과의 문을 열고 사과가 새를 품는다. 식탁이 사과나무로 자라고 새가 주렁주렁 달린다. 3연과 4연은 1, 2연에 비해 상상력의 비약이 더 강화되어 있다. 그 이유는 기호 때문이다. 소쉬르는 기호는 기표와 기의로 결합되어 있으며 그 관계는 자의적이고 비고정적이라고 했다. 3, 4연의 비약은 일반적 기표와 기의 관계를 무시한 데서 비롯된다. 기표에 대해 기의는 흘러가다가 어느 지점에서 고정점이 생긴다. 이것은 주체나 의미가 생성된다는 의미이다. 또한 기표와 기의는 다양하게 결합되고 심지어 고정점에 대해서도 다르게 해석하기도 한다. 문제는 언어로 표현되지 않은 언어의 바깥에 대해서는 사유할 수 없다는 점이다. 약속된 기표와 기의의 자의적 관계를 무시함으로써 “사과가 식탁 위에 놓여 있”을 수 있으며, “식탁이 사과의 문을” 열 수 있게 되고 “식탁이 사과나무로 자”랄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인식은 기표에 고정된 기의를 거부하는 끝없는 가역적 관계의 설정이라는 점에서 차이의 놀이이며 기표의 놀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차원에서 본다면 벤야민이 말한 아담의 언어에 대한 지향이라고도 볼 수 있다. 타락 이전의 언어로서 아담의 언어에 대한 지향은 사물의 본질에 대한 탐구라 할 수 있다. 은유체계에 갇혀버린 언어의 감옥으로부터 사물을 꺼내고 싶은 욕망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 우대식(시인)
■ 시인의 산문
아름다움의 가장 근친인 언어는 ‘불안하다’는 말이 아닐까? 아침에 일어나니 새는 보이지 않는데 새 울음소리 공중에 가득하다. 그 소리는 그지없이 아름답고 불안하다. 어떤 것들은 아는 순간 시시해져서 모르는 게 좋은 때가 있다. 모르는 것들에는 오해의 속삭임이 깃들어 있다. 오해에 대한 매혹과 집착은 어느 정도 무지에 힘입어 있다. 매혹과 긴장의 순간은 지나친 과잉이거나 결핍의 시간이며 타협할 수 없는 불안한 순간이다. 아름답고 불안한 것들이여 부디 융성해지길.
비가 내린다
어둠이 내리고
한 아이가 한 사내로 걸어가는 동안
보이지 않는 곳에서 눈물이 자란다
바람이 분다
먼지가 인다
운동장은 깊어지는 것이군
공은 찰 때마다 골대를 빗겨간다
공을 찾으러 그가 걷는다
비가 내린다
어둠이 내리고
공을 잃어버린 그는 돌아오지 않는다
빈 운동장에 남은 골대가 중얼거린다
이런 풍경을 어떤 슬픔이라고 부르긴 어렵고
슬픔은 구체적으로 얼굴을 가진 적 없다
비가 내린다
어둠이 내리고
이제 곧 운동장에도 어떤 표정이 생긴다
― 「운동장의 표정」 전문
당신의 일요일이 불안한 건
꽃이 아름답기 때문이에요
꽃에는 별다른 뜻이 없고
향기는 맥주 한 캔을 따기에 적당합니다
애인이 유리컵에 꽂아놓은 꽃에는
뿌리가 없군요
벌써 물빛이 갈색으로 변해갑니다
당신은 뿌리를 만드느라 지쳤군요
나른한 오후의 잠에는 책임이 없습니다
거울처럼 엉킨 비를 피해 방으로 들어온 나비가
말린 혀를 돌돌 뽑아
한나절 꽃을 빨고 있군요
당신의 요일들엔 다량의 진통제가 필요합니다
거리에선 공사가 한창입니다
인부들이 지나간 자리에는 새 보도블록이 깔리고
꽃무늬 거리 위로 사람들이 지나가는군요
뿌리 없이도 꽃은 쉽게 지지 않을 겁니다
잠들었군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양손을 치켜드느라
당신은 참 많은 최선을 소비했군요
만세와 항복의 자세는 늘 닮았습니다
― 「나비잠」 전문
길고 흰 손
그 손가락으로 검은 모자에서 꺼낸 흰 나비처럼
암막의 무대 위를 날아다니다
한순간 흔적 없이 사라지는 나비처럼
잘못 든 길에서 마주친
우연한 나비처럼
비상에는 이유가 없고
심장에는 향방이 없네
양들의 입술 위에 얹힌 나비처럼
믿고 싶은 거짓말처럼
검은 심장에 피가 도네
가면을 쓴 마술사의 눈을 피할 수 없네
눈이 내리네
눈썹 위에 내려앉은 나비가
주르륵 눈물로 흩어지네
단 하나의 주문을 완성하기 위해
자신을 버린 마술사처럼
거짓말을 믿기 위해
날개를 다친 나비처럼
공연이 끝나고
마술사가 떠나네
흰 박수 소리 등 뒤에 파닥이네
죽은 나비들이 테이블 위에 쌓이네
― 「검은 모자에서 꺼낸 희 나비처럼」 전문
작가 소개
지은이 : 서상민
경기 김포에서 태어나 한국외국어대 독일어과를 졸업했다. 2018년 《문예바다》 신인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목차
제1부
운동장의 표정13/목자는 외출 중14/둥근 삼각형16/사과와 식탁18/마술사의 탄생20/나비잠22/오해24/눈먼 사진사26/배에 관한 몇 가지 오해28/검은 모자에서 꺼낸 흰 나비처럼30/별들의 무덤32/폐타이어34/죽은 새36/랜섬웨어38/느낌들40
제2부
당신의 행방43/저울44/수평잡기46/새가 울다48/바닥50/한낮의 광장에는52/마흔54/철새56/못58/단풍 나뭇잎60/오래된 책62/붉은 꽃64/실어(失語)66/사람들68
제3부
그녀라는 문명71/혀의 방식72/페이스북74/오전 9시76/토끼의 간78/깨진 거울80/시 요리82/판테온84/비포장도로86/잠의 속도87/낮, 숲88/k의 공식90/관계자 외 출입금지92/들녘94
제4부
풀 뿔97/완성되지 못한 시98/애월, 눈 내리는100/아직 오지 않은 당신102/툭툭104/오줌을 누는 동안106/그 후로 오랫동안108/공부 안 하기110/봄밤112/모르는 사람114/풀 뿔 2116/신용카드118/돈 벌 러 가120/빗소리122
해설 우대식(시인) 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