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시인수첩》 2022년 여름호는 그러한 시인들의 화합과 재생의 목소리를 담았다. 우리가 그동안 마음대로 잘라내었던 시·공간과 공동체의 테두리에 시인들의 언어가 놓이게 되었다. 그리고 시인들은 서로 다른 것들을 억지로 이어붙이는 대신, 절단면 사이에 스며들어 ‘새 살’의 이미지들을 생성시킨다. 지나간 시간을 뒤로하고 ‘포스트코로나’ 시대를 구체화해나가는 지금, 《시인수첩》 여름호에 담긴 녹색의 시와 에세이들을 통해 우리는 새로운 만남의 장소에서 ‘나’와 ‘너’ 사이에 난 상처를 ‘생장점’으로 바꿔 나갈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출판사 리뷰
▣ 기획특집 시와 정치적 상상력
이경수 평론가, 「소수적 감정-공동체를 상상하며」
양균원 시인, 「세상의 (재)구성을 향한 정치적 상상력」
황유지 평론가, 「‘나’들과 함께 광장에서 아침을―시적 청년의 정치적 감수성」
▣ 신작시 열여섯 명의 시인이 전하는 여름의 언어들
김성춘, 앙애경, 이재무, 최준, 박광덕, 김왕노, 김태형, 정덕재, 손음, 권주열, 한영숙,
안민, 김태우, 장정욱, 서종현, 박규현
▣ 시;세이 도시의 서정을 담은 에세이들
임진우 건축가, 「옛것의 아름다움」
김정선 드라마 작가, 「우리들의 블루스―위스키 온더락, 콴도 콴도 콴도 그리고 첫사랑, 안녕!」
구성수 사진작가, 「대걸레 소녀」
▣ 계간시평
이지호 시인, 「온유의 힘, 잘 듣는다는 것」
모든 것이 바뀌어 가는 2022년 여름
‘단절’을 ‘분절’로 바꿔내는 문학의 힘이 담긴 《시인수첩》 여름호
코로나19의 위험성이 크게 떨어지며 우리는 다시 ‘만남’의 시간을 되찾게 되었다. 하지만 큰 병을 앓고 난 뒤 겪게 되는 후유증처럼, ‘단절’의 시간 동안 사회와 개인의 심층에서 누적되어온 문제들을 지금 우리는 떠안게 되었다. 환경 파괴, 기후 위기 등의 문제뿐만 아니라 성별·인종·국가와 관련된 혐오의 문제들이 지구 곳곳에서 터져 나오고 있다. 그것은 소규모 공동체 내에서의 갈등뿐만 아니라 ‘전쟁’이나 ‘쿠데타’, 그리고 ‘총기 난사 사고’의 원인이 되고 있다. 단절되었던 시간 동안 우리는 서로 소통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현실을 인지하지 못한 채 우리는 물리적인 만남의 과정에서 간혹 서로에 대한 ‘몰이해’를 드러내곤 한다. 그리고 그것은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시인들은 오래전부터 ‘사회’와 ‘개인’, 그리고 ‘개인’과 ‘개인’ 사이의 어디쯤에서 지금은 말해질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해왔다. 그런 시인들은 지금 우리가 안고 있는 ‘단절’의 문제를 ‘분절’로, 즉 ‘절단면’을 ‘매듭’으로 바꿔 나갈 수 있는 상상력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시인수첩》 2022년 여름호는 그러한 시인들의 화합과 재생의 목소리를 담았다. 우리가 그동안 마음대로 잘라내었던 시·공간과 공동체의 테두리에 시인들의 언어가 놓이게 되었다. 그리고 시인들은 서로 다른 것들을 억지로 이어붙이는 대신, 절단면 사이에 스며들어 ‘새 살’의 이미지들을 생성시킨다. 지나간 시간을 뒤로하고 ‘포스트코로나’ 시대를 구체화해나가는 지금, 《시인수첩》 여름호에 담긴 녹색의 시와 에세이들을 통해 우리는 새로운 만남의 장소에서 ‘나’와 ‘너’ 사이에 난 상처를 ‘생장점’으로 바꿔 나갈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기획특집 “시와 정치적 상상력”
기획의도
계간 《시인수첩》의 기획특집 이번 호 주제는 ‘시와 정치적 상상력’이다. 지난 3월에 치러진 대통령 선거와 6월에 치러진 지방선거를 통해 한국의 정치 환경은 큰 변화를 맞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 속에서, 또한 ‘앤데믹’이라는 시대적 상황으로 인해 전개될 사회의 변화 양상도 고려하면서, 《시인수첩》 여름호의 편집 동인들은 자연스럽게 시와 정치의 상관관계에 대한 새로운 사유가 필요하다는 데에 의견을 같이하게 되었다.
좋은 시는 정치적 목적 달성을 전제로 탄생되지 않는다는 생각, 뛰어난 예술은 정치 자체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는 주장은 그들 각각의 ‘교차점’을 부정하는 게 아니다. 시와 정치는 다른 계열에 속해 있지만, 다양한 교차의 순간을 통해 공존하며, 예술과 정치도 그렇다. 《시인수첩》은 바로 이 교차점에 주목하고자 했다. 시와 정치(예술), 이들을 대립 항과 상관 항이라는 변증법적 방법론으로 접근하지 않으려는 데 이번 특집의 초점이 있다.
이를 위해 평론가이자 국문학자인 이경수 교수를 통해 한국문학 안에서 ‘시와 정치적 상상력’을 조망해 보고자 했고, 시인이자 영문학자인 양균원 교수를 통해 외국문학의 흐름 속에 나타나는 양상을 알아보고자 하였다. 또 신예 평론가 황유지 선생을 통해 ‘시적 청년’으로 표상되는 새로운 세대의 정치적 감수성을 탐색해 보고자 했다.
책속으로(1) 이경수 평론가, 「소수적 감정-공동체를 상상하며」
이번 시집 수록 시에서 송경동은 지속적으로 말한다. “전체를 위해 노동자들 목소리는 죽이라고/소수자들 목소리를 불편하다고 말하지 말아주세요/부분들이 행복해야 전체가 행복해요”(「우리 안의 폴리스라인」)라고. 부분을 무시하고 소수자들 목소리를 불편하다 배제하는 세상을 향해 여전히 ‘꿈꾸는 소리’를 하고 있는 시인의 목소리를 들으며 한편으로는 위로받고 한편으로는 마음을 다지게 된다. - (본문 71페이지)
이경수 평론가는 2000년대 후반부터 지금까지 “파란만장했던 모든 현장에 늘 선두에 서 있었던” 송경동 시인이 올해 새롭게 펴낸 시집 『꿈꾸는 소리 하고 자빠졌네』(창비)를 통해 지금 광장에서 사라진 ‘촛불’의 기억에 대해 이야기한다. 한국사회의 역동적인 정치적 상상력은 우리 문학의 중심과 바깥을 오가며 수많은 화자들의 언어와 긴밀하게 관계를 맺어 왔다. 그리고 ‘촛불’이 꺼진 지금의 광장에서, 필자는 “늘 소외된 이들과 함께 싸우는 현장에 있었”고 지금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송경동이 새 시집에 담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필자는 송경동의 시집에서 “오랜 세월 사회운동을 해 온 시인의 소회나 깨달음”, 그리고 그 중심에 있는 “사람에 대한 믿음”을 읽어낸다. 현실정치의 분위기에 흔들림 없이 늘 소수자의 편에 서 온 그의 문학적 신념을 통해 필자는 촛불이 꺼진 광장에 새롭게 피어오를 ‘소수적 감정-공동체’의 온기를 상상한다.
책속으로(2) 양균원 시인, 「세상의 (재)구성을 향한 정치적 상상력」
시에서 정치적 상상력의 징후는 주제적 탐색에서 쉽게 발견될 수 있다. 환경 오염, 인종 차별, 성 소수자, 자본주의 문화, 산업화 등과 같은 문제들은 사회적, 문화적, 역사적 편견을 혁신하는 방향에서 진보적 시인들의 시에서 진지하게 다뤄진다. 그런데 이러한 주제에 어울리는 시의 형식과 기교에 관한 탐색에서도 그리고 시의 생성, 출판, 평가, 시상, 판매에 관여하는 전 과정에 관한 비판적 점검에서도 정치적 상상력은 핵심적 역할을 할 수 있다. 젊은 시의 형식과 내용 모두에서 정치적 상상력, 지적 탐구, 서정적 감동, 인식의 확장, 이런 것들이 다 함께 준동하여 우리의 사회적이면서 심미적인 의식을 씻어내고 헹궈주며 간간이 말려주는 행복은 어떻게 다가올 수 있을까? -(본문 85페이지)
양균원 시인은 이번 글에서 “시에서 ‘정치적 상상력’은 세상을 역사와 공동체 그리고 현실의 맥락에서 새롭게 열어가는 탐구의 정신이 되어야” 함을 역설한다. 그리고 필자는 그 ‘탐구의 정신’으로서의 정치적 상상력을 미국의 언어 시인 찰스 번스타인의 ‘교육’적 관점(“‘표준화’에 의해 덜 조종당하고 덜 속기 위”한 교육), 그리고 1970년대 이후 번스타인의 문제의식을 공유한 시인들이 창작한 ‘언어시’ 등을 통해 고찰해본다. 필자는 이들이 시를 생산하고 출판하며 평가하는 시스템 전반, 주류 문화, 대학과 대형 출판사를 중심으로 하는 공적 시 문화 등에 대해 근본주의적 질문을 던지는 과정을 통해 시의 정치적 상상력을 구체화시켰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시적 난해성 뒤에 숨지 않고 자신의 체계를 논리적으로 설명하려고 했던 그들의 노력이 있었다고 필자는 설명한다. 이러한 그들의 성공 과정을 살펴보며 필자는 우리도 여러 진보적 주제들에 대해 문학과 정치의 균형을 맞춰 가며 이야기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글에서 강조한다.
책속으로(3) 황유지 평론가, 「‘나’들과 함께 광장에서 아침을―시적 청년의 정치적 감수성」
‘나’들의 요구는 어떤 정치적 위치와도 요원한 나의 자리에 대한 고민들이 산발적으로 비어져 나온 목소리들이다. 그것은 하나의 공통분모를 형성하기 위한 정치적 행동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나를 몇 개의 프레임 속에 구겨 넣는 억압적 힘들을 향한 그 폭력적 역사와 현실에 묻는 물음이다. 모든 구획들, 그런 장벽들을 적시하며 지양하는 끊임없는 유위 그것을 장-뤽 낭시의 용어로 말하면 ‘무위’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공동체 위에 군림하는 어떠한 이데올로기도 삭제될 것을 요청하는 낭시의 공동체는 어쩌면 실현 불가능할 것처럼 보여도, 이미 실천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본문 95페이지)
황유지 평론가는 한국문학에서 ‘우리’로부터 거리를 둔 ‘나’들이 등장하는 과정에 대해 언급하며, “공동체의 정당성에 대한 의심”의 목소리를 들려주는 그 개별 화자들의 정서를 ‘시적 청년의 정치적 감수성’으로 명명한다. 그리고 그러한 감수성이 돋보였던 주민현의 시집 『킬트, 그리고 퀼트』에 수록된 작품들을 통해 “세계의 힘이 우연과 허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고발하는 ‘나’의 목소리가 향하는 지점이 어디인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필자는 주민현의 시에서 나타나는 화자들이 바로 “(사회적) 승인의 바깥에 던져져 있는 파편들을 줍는” 행위를 통해 ‘자기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자기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아가는 시적 청년들이며, 이들을 통해 우리는 개별 주체의 삶인 ‘골목’이 사회 혹은 공공장인 ‘광장’과 연결될 수 있음을 ‘퀼트’의 은유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고 글에서 설명한다. 그렇게 세계의 약점을 알고 바라보는 시적 청년의 새로운 정치적 감수성은 관습과 구조에 대한 ‘맥락 짚기’를 통해 오는 것이므로, 우리는 그들의 관점을 통해 비로소 우리가 잃어버린 진정한 광장에 닿을 수 있을 것이라고 필자는 글의 말미에서 덧붙인다.
신작시 ‘인생의 여름’을 품은 열여섯 편의 작품
《시인수첩》 여름호에는 ‘인생의 여름’이 품은 풍부한 맛이 느껴지는 ‘제철 시’들이 담겼다. <신작시> 코너에는 김성춘, 앙애경, 이재무, 최준, 박광덕, 김왕노, 김태형, 정덕재, 손음, 권주열, 한영숙, 안민, 김태우, 장정욱, 서종현, 박규현 시인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비둘기의 똥에서 “인간의 슬픔을 모르는 깨끗한” 허공을 읽어내(「선물-새똥」)는 김성춘 시인, 허리에서 느껴지는 통증을 “인연의 협착, 우정의 협착, 연애의 협착”의 감각으로 전유하며 “협착이 나를 고문하고 학습시킨다”(「협착증」)고 고백하는 이재무 시인, 민달팽이의 끈적한 몸에서 오랫동안 수축된 “신혼여행”과 같은 황홀한 순간들을 발견(「곡률의 부호」)하는 권주열 시인의 작품에서 독자들은 익숙한 감각을 여름의 푸른 언어로 바꾸는 마법 같은 언어들을 맛볼 수 있다. 그리고 인생의 여름이라고 부를 수 있는 시기를 지나가고 있는 MZ세대 시인들인 김태우, 서종현, 박규현의 시에서 독자들은 ‘사과 향이 나는 꿈’(김태우, 「행복의 나라」), ‘아들과 아버지가 모이는 천년해가 여전히 시작되는 밤’(서종현, 「천년해의 밤」), ‘사랑을 찾으러 가는 이야기’(박규현, 「6월」) 등 숙성 이전의 ‘상처’와 ‘기쁨’과 같은 감정들을 느껴볼 수 있다.
병원에 갈 때마다 무늬 없는 벽을 바라보거나
흰 천장을 올려다보면서 나는 그간의
생활의 협착을 떠올리는 게 버릇이 되었다
인연의 협착, 우정의 협착, 연애의 협착
퇴화성이기도 하고 자세 불량이 원인이라는
협착이 나를 고문하고 학습시킨다
완쾌되면 너와 나, 관계가 원활하리라
-이재무, 「협착증」 중에서
나는 천년 후의 아들이 천년 전의 아버지를 낳은 때를 기억한다 고열의 입김이 시리도록 차가운 밤 가물거리는 눈동자 속에서 뜨거운 수포가 떠오르고 곧 살얼음이 낀다 눈을 깜박일수록 파삭거리며 부스러지는 하얀 경계 시간의, 아들은 아버지의 아버지가 피워올린 연기를 흩는다 아들의 아버지가 아버지의 아들을 피워내며 누군가, 모닥불을 지핀 자의 이마를 짚는다 손가락 끝으로 옮겨진 미열을 톡톡 털어내는 밤 현기증 나는 속눈썹 사이의 시간이 잠시 늙어가는 동안 나는 잠시 어려진다 아들과 아버지가 모이는, 나의 천년해가 여전히 시작되는 밤
-서종현, 「천년해의 밤」 중에서
사랑을 찾으러 가는 이야기였다
나는 자꾸만 사람이라고 잘못 읽었다 그때마다 아이가 웃었다 그게 좋아서 계속 틀렸다
팔베개를 한 채 머리칼을 쓸어 넘겨 재웠다 아이를 오래오래 기억하려고 아이의 이름을 곱씹으며
깨어나니 나는 사랑을 제대로 발음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박규현, 「6월」 중에서
시인이 초대한 시인들지난 계절의 허기를 달래주는 따뜻한 한 끼의 시편들
이번 호《시인이 초대한 시인들》코너에서 이인철 시인(본지 편집 동인)은 팬데믹 기간 동안 각자의 방에서 사람의 정에 대한 허기를 느꼈을 독자들을 위해 ‘따뜻한 한 끼의 시편들’을 준비한 네 명의 시인들을 초대했다. 서안나 시인은 「저녁의 양치식물」에서 “작은 꽃 한 송이가 필 때, 고통과 슬픔과 상심은 연기되고 지연된다”는 마음으로 오랫동안 식물을 바라보며 ‘당신’과 ‘나’가 서로 완벽하게 이해하지 않아도 되는 ‘식물성의 순간들’을 그려낸다. 김나영 시인은 「봄의 편력」에서 “흙의 페달을 밟은 봄꽃들이 펑펑 꽃을 낭비”하는 ‘탕진’의 미학적 풍경을 작품에 담아낸다. 신미나 시인은 「돼지와 나」에서 ‘돼지’와 ‘인간’이라는 두 생명체를 나누는 경계를 지우고, 그 한가운데에 ‘홍조단괴’ ‘서빈백사’라는, 백사장의 찬란한 감각만을 담은 언어를 올려놓는다. 채길우 시인은 「보청기」에서, 세상의 소리를 듣지 못하기 때문에 ‘바깥’과 접속하기를 “애틋하게 망설이고 있는” 고래와 같은 사람들을 묘사하며, 그들의 고독이 “잘 알아들을 수 없는 의미일지라도” “소용돌이”와 “뜀박질”을 품고 있는 생기 있는 언어임을 다정하게 이야기한다. 지난 2년 남짓 ‘사회’로부터 밀려나고 사람에게서 멀어지며 ‘의미’에 대한 결핍을 느꼈을 독자들은 ‘바깥의 언어’로 시인들이 차려낸 밥상 앞에서 삶에 대한 믿음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양치식물은 고생대부터 나를 따라온 식물
양치식물이 어둠을 뜯어먹습니다
당신의 조상도 만났을 겁니다
물을 주면 일각고래 무리가 몰려옵니다
당신의 영혼을 가둔 빙하도 떠오릅니다
오랫동안 식물을 바라보면
나는 나를 이해할 수 있을까요
공벌레가 아픈 저녁을 숨깁니다
-서안나, 「저녁의 양치식물」 중에서
이 봄, 내 소원은 탕진. 유황으로 짠 면사포를 뒤집어쓰고 생애 마지막 키스를 받고 온몸에 불꽃을 피우며 죽어가는 오월의 신부.
저 멀리 수력발전소 제방에 잎맥처럼 번져가는 실금들.
흙의 페달을 밟은 봄꽃들이 펑펑 꽃을 낭비한다.
-김나영, 「저녁의 양치식물」 중에서
홍조단괴
서빈백사
들려주었다
돼지에게
인간에게만 어여쁜 말을
한낮의 해가
엑스레이를 통과하고 있었다
구름 속에 신의 밝은 뼈가
드러났다
-신미나, 「돼지와 나」 중에서
천장에서 뚝뚝 듣는 물방울과
바깥에서부터 새어 들어오는 바람에 대해
가까이 있는데도 아득히
어깨를 기대고 손을 맞잡을 수 있는데도
명명하며 애틋하게 망설이고 있는
덩치 큰 고래들의 슬픔도
이해해야 한다.
밤이 되면 그는 동굴의 수줍은 질량
입구를 막아 두었던
젖은 쉼표 같은 마개를 뽑아준다.
그러면 고래들은 소용돌이치며
뜀박질을 하고 깊은 숨을 토하는
열린 물길을 따라 밖으로 나간다.
-채길우, 「보청기」 중에서
시:세이 도시의 서정을 담은 에세이들
<시;세이> 코너에는 도시의 서정을 그려내는 세 편의 에세이가 담겼다. 다시 사람들로 채워지면서 팬데믹 이전의 매혹을 되찾게 된 도시에는 예전에 없던 새로운 감성들이 가득하다. 건축가 임진우, 방송작가 김정선, 사진작가 구성수는 새 도시의 풍경들을 각자의 관점으로 새롭게 구성해낸다.
임진우는 「옛것의 아름다움」에서 우리가 몰랐던 서울 한옥들과 그 주변 풍경들의 담백한 미감에 대해 이야기한. 필자는 전통과 현대의 조화를 이룬 서울 한양 도성, 북촌, 서촌 등의 독특한 정취를 그 지역 곳곳에 자리한 한옥들을 중심으로 이야기한다. 각기 다른 시대의 축조 기법을 한 곳에서 모두 발견할 수 있는 서울 한양 도성, 전통 담장의 문양이며 처마, 서까래, 창살, 대문 장식 등 숨겨진 전통미를 담은 한옥들을 곳곳에서 만나게 되는 북촌, 인왕산을 배경으로 생활 한옥들이 늘어서 활력과 낭만을 느낄 수 있는 서촌 등 필자는 옛것의 아름다움을 현대적인 맥락 안에 잘 배치한 장소들을 소개하며 “시는 말하는 언어의 건축”이라는 자신의 지론을 그 풍경을 통해 설명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김정선은 노희경 작가의 드라마《우리들의 블루스》(tvN)에 등장한 ‘목포’와 ‘제주도’라는 장소를 통해 메트로폴리스인 서울에서 느낄 수 없는 ‘블루스’적 감성을 글에서 소환해낸다. 제주도에서 나고 자란 한수와 은희는 10대 때 새끼 돼지를 내다 팔아 마련한 돈으로 떠난 목포행 수학여행에서 인생 최고의 한 컷(기습뽀뽀)을 만들어내지만, 40대 후반이 되어 서로 돈으로 얽히는 관계(외동딸의 유학 자금이 필요한 한수와 많은 현금을 보유한 자산가 은희)가 된다. 어울리지 않는 두 풍경이 하나의 서사로 이어질 때, 그 배경이 되는 지방 소도시들은 적절한 배경이 되어 준다. 완전히 망하거나 혹은 완벽하게 성공한 사람들로 가득한 대도시가 아니라, 약간의 결핍과 약간의 성공을 거둔 이들이 조금은 어색한 상황 속에서 ‘인간다움’으로 연결되는 곳이 바로 ‘목포’와 ‘제주도’같은 도시들이기 때문이다. 김정선 작가는 노희경 작가의 이러한 장소 선택과 서사의 어우러짐에 대해 이야기하고, 또 이것이 옴니버스 형식을 취함으로써 ‘한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이야기’가 될 수 있도록 한 점 등, 드라마의 다양한 미덕에 대해 글에서 언급한다.
사진작가 구성수는 자신의 사진 작품《대걸레 소녀》에 곁들인 한 편의 소설과 같은 에세이 「대걸레 소녀」로 팬데믹이 끝나가는 시점의 도시 풍경을 실감나게 재현해낸다. 술에 취해 바지 지퍼를 내리면서 화장실의 위치를 묻는 중년 남자, 주변 손님들의 시선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애정 행각을 벌이는 중년 남녀, 초저녁에 와서 문 닫는 시간까지 각자 한 잔의 맥주만 마시고 4시간이나 가게에 머물고 있는 청년들…… 한 호프집에 모여든 이런 손님들은 그저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진상 손님’인 것만 같지만, 구성수 작가는 사회적 거리두기 기간 동안 간절하게 ‘사람’과 ‘술’을 기다려온 우리가 지금 얼마나 이런 도시적 즐거움의 시간들을 꿈꿔 왔는지에 대해 이 삽화를 통해 보여준다. 그리고 그 모든 손님의 ‘과도함’을 받아주는 이 글의 주인공 ‘알바생’은 마치 어린 시절 우리의 철없는 행동들을 모두 감내해주었던 억척스러우면서도 다정한 어머니 혹은 누나를 떠올리게 한다. 차갑고 건조한 계산들로만 이뤄졌을 것 같은 도시의 풍경 너머에 있는 이런 ‘철없는 사람들’과 ‘엄마 같은 소녀’들을 찾아내는 구성수 작가는 매끄러움과 전혀 거리가 먼 이러한 개별적 삶의 조각들이 모인 곳이 바로 우리가 사는 도시의 진짜 모습임을 이 에세이를 통해 이야기한다.
이번 호《시;세이》에 담긴 세 편의 글을 통해 독자들은 한편으로 코로나19 기간 동안 마음에 축적된 결핍감을 해소하고, 또 그동안 우리가 알지 못했던 도시적 낭만을 여러 색다른 풍경 속에서 느껴볼 수 있다.
주요 내용 엿보기
여는 글 김재홍 시인이 “다시, 시를 생각하는 계절”이라는 주제로, 현재 커다란 변화의 과정에 있는 사회의 흐름에 휩쓸리지 않고 자기 본연의 중심을 잡는 것이 우리 문학의 역할임을 이 글에서 언급한다.
기획특집 시와 정치적 상상력을 주제로 한 이번 특집 코너에서는 이경수, 황유지 평론가와 양균원 시인이 ‘시’와 ‘정치’의 교차점을 찾아 나가는 데 있어서 도움이 될 여러 관점들을 제시한다. 좋은 시는 정치적 목적 달성을 전제로 탄생되지 않는다는 생각, 뛰어난 예술은 정치 자체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는 주장은 그들 각각의 ‘교차점’을 부정하는 게 아니다. 시와 정치는 다른 계열에 속해 있지만, 다양한 교차의 순간을 통해 공존하며, 예술과 정치도 그렇다. 『시인수첩』 여름호의 특집 기획에서 필자들은 바로 이 교차점에 주목하고자 했다.
신작시 김성춘, 양애경, 이재무, 최준, 박광덕, 김왕노, 김태형, 정덕재, 손음, 권주열, 한영숙, 안민, 김태우, 장정욱, 서종현의 시를 싣는다. 여름의 문턱에서 시인들이 느낀 섬세한 감각과 정서들이 작품에 담겼다.
시:세이 이번 호《시:세이》에는 ‘도시적 서정성’을 주제로 한 건축가 임진우, 방송작가 김정선, 사진작가 구성수의 에세이가 실렸다. 임진우는 「옛것의 아름다움」에서 우리가 몰랐던 서울 한옥들과 그 주변 풍경들의 담백한 미감에 대해 이야기하고, 김정선은 「우리들의 블루스」에서 노희경 작가의 드라마《우리들의 블루스》에서 느껴지는 ‘목포’와 ‘제주도’의 서정성에 대해 글에서 다룬다. 그리고 사진작가 구성수는 「대걸레 소녀」에서 팬데믹이 끝나가는 시점의 도시 풍경을 한 호프집의 ‘알바생(대걸레 소녀)’의 시점으로 그려낸다. 사진과 어우러지는 에세이를 통해 독자들은 한 편의 단편영화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전해 받을 수 있다.
그 시집 어땠어? 시인 박성현·문혜연, 자유기고가 이정현이 필자를 밝히지 않고 쓴 서평이다. 배한봉, 채수옥, 금은돌, 최백규, 윤보성 시인의 시집에 대한 세심한 분석이 담겼다.
시인이 초대한 시인들 이번 ‘시초시’에는 편집 동인 이인철 시인의 초대로 서안나, 김나영, 신미나, 채길우 시인의 작품이 실렸다.
시사회 이번 시사회 코너에는 6월 출간(예정)인 전영관 시인의『미소에서 꽃까지』와 7월 출간(예정)인 이수진 시인의 우리가 사과처럼 웃을 때 에 수록되는 작품들과 시인의 시론 에세이를 담았다. 시집 출간을 앞둔 시인들의 기대와 설렘을 작품과 에세이를 통해 느껴볼 수 있다. (*)
목차
여는 글
006 다시, 시를 생각하는 계절~_김재홍(편집 동인)
신작시
012 선물-새똥_김성춘
014 성적 취향_양애경
017 협착증_이재무
019 스민다_최준
021 비염-新 술 권하는 사회_박광덕
024 서귀포의 푸른 밤_김왕노
029 Mix-To Samantha_김태형
033 신발을 기다리며_정덕재
035 2022년 2월 15, 일광_손음
038 곡률의 부호_권주열
041 순이_한영숙
044 기우제_안민
047 행복의 나라_김태우
050 다정한 기분을 만났다_장정욱
052 천년해의 밤_서종현
056 6월_박규현
기획 특집_시와 정치적 상상력
060 [편집자 주]‘시’와 ‘정치’의 교차점_김재홍
063 소수적 감정-공동체를 상상하며_이경수
074 세상의 (재)구성을 향한 정치적 상상력_양균원
086 ‘나’들과 함께 광장에서 아침을_황유지
그 시집 어땠어? [박성현, 문혜연, 이정현]
099 망설임, 두려움, 설렘 ─ 배한봉, 『육탁』
107 일상에 감춰진 균열을 포착하는 날카로운 시선 ─ 채수옥, 『덮어놓고 웃었다』
110 오후 1시 40분의 시뮬라크르 혹은 ‘유물론-시’의 가능성 ─ 금은돌, 『그녀그』
117 꿈속의 포스트잇 ─ 금은돌, 『그녀그』
123 슬픔을 곱씹으면 새어 나오는 아름다움 ─ 최백규, 『네가 울어서 꽃은 진다』
126 판소리-체로 노래하는 ‘디스토피아’의 세계 ─ 윤보성, 『망현실주의 선언』
시인이 초대한 시인들
134 [초대평] 도서관의 시인과 물푸레나무 길_이인철
138 저녁의 양치식물_서안나
142 봄의 편력_김나영
144 돼지와 나_신미나
146 보청기_채길우
시;세이
152 옛것의 아름다움_임진우
173 우리들의 블루스-위스키 온더락, 콴도 콴도 콴도 그리고 첫사랑, 안녕!_김정선
183 대걸레 소녀_구성수
詩사회
190 전영관 | 『미소에서 꽃까지』
자선시_「무량」외 2편
시론 에세이_정육점 도마를 바라보는 채식주의자
202 이수진 | 『우리가 사과처럼 웃을 때』
자선시_「부수현상」외 2편
시론 에세이_걸어가며
2010년대 젊은 시인 읽기
215 시적 몽타주의 방법과 원리-유계영 시의 발화, 기법, 구조화 원리_오형엽
계간시평
246 온유의 힘, 잘 듣는다는 것_이지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