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시인동네 시인선 177권. 2020년 《발견》 신인상을 수상하며 등단한 강다인 시인의 첫 시집. 시적 대상에 대해 호기롭고 호전적이기까지 한 강다인의 시적 자세는 어쩌면 ‘절대’라는 세계에 이르기 위해 시인 스스로 내건 필수조건일지도 모른다. 강다인 시인의 도발적이고 감각적인 언어가 어디까지 향하게 될지 지켜보는 것도 앞으로 흥미로운 일이 될 것이다.
출판사 리뷰
디스토피아를 살아가는 두 가지 방법
너무도 상식적인 이야기이지만 전통적인 서정시는 일인칭의 문학 장르이다. 주관적으로 열망하는 세계와 보편적 가치의 세계를 일치시켜 감동을 끌어내는 것이 전통적 서정시의 문법이다. 파편화된 현실에서 꿈꾸는 안온하고 조화된 완전한 세상, 즉 일인칭의 유토피아가 바로 대부분의 서정시들이 의존하고 있는 기본적인 문법이다.
강다인의 시들은 이와 반대편에 서 있다. 그의 시들은 흔히 전통적인 서정시가 보여주는 일인칭의 유토피아에 갇혀 있지 않고 한 개인의 경험을 사회 속으로 확대한다. 이를 통해 주관과 세계 사이의 거리를 보여주고 거기에서 디스토피아로서의 현실의 모습을 확인한다.
은혜라는데 은신입니다
입체라는데 평면입니다
반응이라는데 적응입니다
계곡이라는데 개울입니다
검은 숲이라는데 사막입니다
둥글다는데 세모입니다
유산이라는데 가업입니다 쓰러진다는데 날이 섭니다
나의 정부는 수치라는데 당신의 정부는 감사랍니다
심지어 인류의 끈이랍니다
당신은
전쟁 없이 획득한 전리품,
이 구멍을 나는 버릴 수 없고
당신은 이 구멍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 「맨홀의 시작」 전문
둥글다고 알려진 세상이 날 선 세모로 보이듯이 세상은 항상 나의 열망과는 다른 것으로 존재한다. 은혜라고 믿고 싶은 나의 믿음은 사실 나를 감추는 은신의 수단일 뿐이고, “검은 숲”을 원하지만 세계는 지구온난화로 사막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그런데 세상이 내게 강요하는 이 인식의 굴레를 어느 누구도 버리지도 벗어날 수도 없다. 나는 바로 이렇게 인식되는 세계 안에서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런 인식의 굴레는 배제와 억압으로 나타난다.
■ 시인의 산문
내 몸에 얼룩무늬가 번지고 있다. 레이스 모양대로 점자처럼 나는 레이스 천에 가려진 얼룩말이 된다.
나인 줄을 아무도 모른다.
스카프를 둘렀다. 나비가 여자의 목에 꽃잎 한 장을 물어다 놓았다. 여자는 한동안 나비를 응시했다. 주술을 걸었다. 여자밖에 모르는 나비가 되었다.
나비밖에 모르는 여자가 되었다.
정원이 넓고 아름다웠다.
바깥이었다.
1
기대도 있고 본능도 있습니다
나를 여밀 수 있는 도구는 허리에 달린 끈 하나가 전부입니다 최선을 다해 여자가 됩니다
의자에 앉습니다 다리를 꼽니다
다리라는 끈으로
몸을 여밉니다
2
지퍼가 고장입니다 그 남자
여며야 할, 단속해야 할 무엇도 지퍼 속에는 없다고 합니다 지퍼가 고장 난 그를 그대로 두듯
자존심의 체위를 방치합니다 당신을 허용합니다
어제는 행복했습니까 당신은 최고의 장면을 향해 달려가지만 빈약한 스턴트맨입니다
뛰어내립니다
주먹으로 내리칩니다
목숨 값으로 지퍼는 그를 여밉니다
3
그 남자 구겨진 운동화 뒤축을 끌고 늦은 귀가를 합니다 현관문 비밀번호를 누릅니다 그 남자는 현관문의 비밀을 아는 유일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현관문은 그 남자를 모릅니다 앞으로도 알지 못할 것입니다 다만, 그 문은 습관처럼 남자를 단단히 여밉니다
4
오늘도 내 몸은 예절을 잘 지켰습니다 원피스 끈을 풀 때입니다 옷걸이는 잘 버텨줍니다 오늘의 라커룸에 넣어둡니다 원피스를 품은 라커룸은 여기까지 묵묵히 걸어온 나의 발자국을 여밉니다 내일의 뜀박질을 위해 오늘을 여밉니다
― 「오늘의 라커룸」 전문
내 방에는 카키가 많습니다
나도 당황스럽습니다 카키는 키위 하나를 씻지도 않고 입에 넣은 느낌입니다
가렵고 까끌까끌한,
지금 내 입속에 관해서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나는 알레르기로 살아가는 여자
고독에도 알레르기가 있습니다
욕실 환풍기를 켭니다
날개가 세차게 돌아갑니다
내가 생각하는 어디든 갈 수 있습니다
(이것은 최근에 내가 깨달은 고독 극복법입니다)
― 「고독 극복법」 전문
내 아빠는 예수
엄마는 세 명
아빠는 알 수 없는 숫자
엄마는 가득했다 아빠는 넘쳐났다
예수는 지루했다
엄마는 즐거웠다
나는 예수의 사랑스러운 모델
눈은 반쯤 감고 팔을 집어넣었다 누군가의 손이 나를 안으로 끌었다
젊은 예수는 내 쇄골을 다듬는 일에 집중했다 젊은 예수는 완만한 곡선을 사랑했다 예수를 위해 내 몸은 웅크린 곡선을 만들었고 다듬어진 쇄골을 자랑스러워했다
예수는 이 모든 상황이 기도 덕분이라고 했다 엄마는 들어본 적 없는 기도문을 계속 써야 한다고 했고
이제는 지루하지 않다고 했다
아빠는 세 명
엄마는 알 수 없는 숫자
예수는 가득했다 엄마는 넘쳐났다
엄마는 지루했다 엄마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 예수의 쇄골은 곡선으로 다듬어졌다
아빠는 쉽게 태어났다
나는 모든 게 지루한 딸이었다
― 「나는 예수의 사랑스러운 모델」 전문
작가 소개
지은이 : 강다인
경남 진주에서 태어나 2020년 《발견》으로 등단했다.
목차
제1부
맨홀의 시작13/오늘의 라커룸14/이를테면, 모자論16/티키타카18/새해20/장마22/주머니 속의 소지품24/고독 극복법27/품위28/기프티콘30/나는 예수의 사랑스러운 모델32/예의34/철계단36/풍선38/바나나40/질주의 달인42/스노우 폼 세차44
제2부
넥카라47/M의 사생활48/자모일기51/그 아이의 시소52/비행(非行)54/와플피플56/큐브58/수단60/그녀의 식탁62/언니가 화장대를 껴안고 산 이유64/돌이킬 수 없는66/자동차극장68/내비게이션70/이태원 이미테이션72/당신의 바니타스74/예스의 아바타76/슬리핑 기차78
제3부
스타벅스81/애인82/타이레놀84/한여름의 외식86/가스라이팅88/라라랜드91/트라마돌92/주저앉은 사람94/코코코코리투살96/그냥 와락,98/눈썹100/화102/리듬이 없는 정오104/의자105/꽃피는 원피스108/오름110/탯줄112/테트리스114
해설 황정산(시인·문학평론가)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