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리뷰
그림이 우리 삶에 대해 말해 주는 것들
“우리가 예술을 사랑하는 건
우리가 겪는 상처, 고통, 좌절, 극복의 순간들이
그 안에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화가의 자화상에 담긴 우리들 이야기예술이란 전문 지식을 가져야만 이해할 수 있는 ‘그들만의 리그’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예술가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그들의 즐거움과 괴로움, 기쁨과 슬픔, 배신과 복수가 우리네 삶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미켈란젤로는 고용주 교황의 갑질과 변덕으로 괴로워했고, 렘브란트는 사랑하는 가족의 죽음과 파산으로 외로운 말년을 보냈으며, 프리다 칼로는 소아마비로 인한 다리 장애와 교통사고 후유증, 남편의 바람기로 고통받았다.
한 개인의 삶은 역사적, 정치적, 사회적 변화에서 영향을 받기도 한다. 뒤러는 저작권과 지식재산권 개념이 없던 시대에 자기 그림을 도용한 화가와 출판사를 상대로 소송을 벌였고, 고야는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위협한 전쟁과 종교재판을 겪으면서 우울증과 대인기피증을 앓았으며, 앤디 워홀은 자본주의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스스로 상품이 되는 길을 택했다.
책에 소개된 14명의 화가들은 각자 인생에 닥친 위기에서 벗어나고자 애쓰면서 삶의 상처와 치유의 순간들을 자화상에 남겨 놓았다. 삶에 불어닥친 위기와 절망을 극복하고자 몸부림쳤던 그들은 우리의 인생 동료다. 그래서 우리들은 화가의 자화상을 통해 우리 인생을 돌아볼 수 있다. 예술이란 나와 동떨어진 세계가 아니라 우리 삶을 이야기해 주고 위로해 주는 친근한 동반자인 것이다.
스티브 잡스처럼 시대의 혁신을 이루다: 알브레히트 뒤러의 자기애한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은 둘로 나눌 수 있다. 기존 틀에서 최고 성과를 낸 사람과 아예 새로운 틀을 만들어 혁신을 이룬 사람이다. 알브레히트 뒤러는 후자의 경우로, 오늘날 애플 생태계를 만들어 후대까지 영향을 미친 스티브 잡스와 같은 인물형이다. 중세의 영향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르네상스 초기에 뒤러는 예술가들을 일개 장인 취급하는 현실을 뛰어넘어 새로운 모범을 제시하고 예술가의 위상을 높였다.
자화상 분야에서도 뒤러의 행보는 독보적이었다. 다른 동료들과 달리 자신을 그림 속 주인공으로 당당하게 등장시켰으며, 귀족과 동등한 지식인이자 엘리트로 표현했다. 심지어 예수 그리스도와 닮게 그린 자화상까지 제작했다. 정치에도 뛰어들어 38세 때 뉘른베르크 시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고 47세 때 아우크스부르크 제국회의에 시 대표단 일원으로 참석했다. 작품에 AD라는 모노그램 서명을 넣어 소유권을 분명히 밝혔고, 자기 그림을 복제해 판매한 위조 화가와 출판사를 상대로 1506년 법적 소송을 벌였다. 뒤러가 제기한 소송은 세계 최초의 예술 저작권 소송이라고 알려져 있다. 오늘날 예술가들이 누리는 자유와 권리가 어느 정도는 뒤러 덕택인 셈이다.
고용주 교황의 갑질에 맞짱 뜨다: 미켈란젤로의 처세이탈리아 로마 안에는 세상에서 가장 작은 나라인 바티칸시국이 있다. 교황이 다스리는 독립국으로, 이곳의 주요 건물 중 하나인 시스티나 예배당은 명화로 가득 차 있는 장소다. 특히 천장화와 제단 벽화는 르네상스 스타 예술가 미켈란젤로가 그린 것이다. 천장의 ‘창세기 9장면’과 ‘유대 민족을 구한 네 영웅 이야기’ 등은 30대에, 제단 벽의 '최후의 심판'은 60대에 그렸다.
원래 미켈란젤로는 그림보다 조각을 좋아하고 스스로의 정체성을 조각가로 여겼던 인물이다. 그래서 교황 율리오 2세에게 천장화 주문을 받았을 때 처음에는 거절하지만 교황의 회유와 협박에 이기지 못해 결국 작업을 맡았다. 작업 기간 내내 폭군 교황의 노동법 위반, 임금 체불에 폭행까지 당한 미켈란젤로는 사표를 던지듯 붓을 내팽개치고 로마를 떠나려 했다. 교황은 결국 사과의 말을 전하고 밀린 임금을 지불해 주었다. 자기 영역에서는 최고 권력자마저 고개를 숙이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천장화 작업 시기를 가장 힘들었던 때로 회고한 미켈란젤로는 율리오 2세에 대한 뒤끝을 천장화에 남겼다. 천장화 속 스가랴의 얼굴은 율리오 2세를 모델로 했는데, 그 뒤에 있는 두 아이 중 하나가 둘째손가락과 가운뎃손가락 사이로 보일락 말락 하게 엄지손가락을 내밀고 있다. 요즘으로 치면 주먹 쥔 채 가운뎃손가락만 올린 욕으로, 몇몇 연구자들은 미켈란젤로가 고의로 이런 손 모양을 그려 넣었다고 보고 있다. 이로써 율리오 2세는 천장화가 사라지지 않는 한 영원히 손가락 욕을 받게 되었다.
성폭력의 트라우마를 딛고 거장이 되다: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의 복수1612년 로마 법정에서 19세 소녀가 엄지손가락을 비트는 고문을 받았다. 소녀는 성폭행 피해자임에도 진술의 신빙성을 증명하기 위해 손가락 고문에 치욕적인 처녀막 검사까지 견뎌야 했다. 소녀의 이름은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로, 재판에서 승소한 뒤에는 주변 사람들의 2차 가해에 시달렸다. 결국 3류 화가와 서둘러 결혼한 뒤 로마를 떠나 남편 고향인 피렌체에 머문다.
억울함을 풀 길 없었던 아르테미시아는 그림에 가해자와 세상에 대한 분노를 담고 단죄의 칼날을 들이댔다. 또한 여성으로 느끼는 감정과 연대감, 화가의 자부심을 표현하기도 했다. 피렌체에서 재능을 인정받은 아르테미시아는 대형 역사화와 종교화를 그렸는데, 이는 누드 모델을 쓸 수 없었던 당시 여성 화가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장르였다. 덕분에 아르테미시아는 피렌체를 다스리는 권력자 집안인 메디치 가문의 후원을 받는 등 화가로 성공했다. 이후 유럽 여러 도시를 돌아다니며 작품 활동을 했다.
하지만 아르테미시아는 죽은 뒤 미술사에서 잊힌 존재가 되었고, 작품보다는 성폭행 피해자라는 스캔들로 더 유명해졌다. 300여 년간 미술사의 가십거리로 취급받았던 것이다. 최근에 와서 다른 화가의 것으로 오인되었던 그림들이 그녀 것으로 밝혀졌고(작품 복원 과정에서 그녀의 서명이 발견되었다), 그동안 주목받지 못했던 작품의 새로운 측면들이 페미니즘 이론에 의해 조명받기 시작했다. 이제 아르테미시아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위대한 거장 자리에 우뚝 섰다.
삶을 덮치는 죽음의 공포와 이별의 슬픔에서 살아남기: 에드바르 뭉크의 공포뭉크는 반 고흐처럼 평생 정신질환으로 고통받은 화가였다. 어린 시절 사랑하는 어머니와 누나를 결핵으로 잃었고 자신도 병약해서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 살았다. 커서는 세 차례의 유별난 연애를 경험하면서 여성에 대한 혐오와 공포심을 갖게 되었다. 첫사랑 밀리 타울로브는 유부녀로 뭉크를 포함해 연인을 여럿 두었고, 두 번째 사랑 당뉘 유엘은 사각 관계 끝에 뭉크의 친구와 결혼했다. 세 번째 사랑 툴라 라르센은 자살 소동을 벌였는데, 이를 말리던 뭉크가 총기 오발로 손가락 장애를 입었다. 뭉크에게 여자란 자신을 유혹한 뒤 배신하고 위험에 빠뜨리는 흡혈귀였던 셈이다.
죽음의 공포와 이별의 슬픔에 맞서 뭉크가 선택한 방어막은 그림이었다. 정신과 의사들은 환자들에게 글쓰기와 그림 그리기 같은 행위를 추천하곤 한다. 글 쓰고 그림 그리는 과정에서 정체를 알 수 없던 공포와 슬픔의 감정들이 구체화되고 객관화되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지 않던 감정들이 자신의 손을 거쳐 눈에 보이는 대상으로 형상화되면, 그것은 예전보다는 조금 더 견딜 만한 것이 되기도 한다. 어린 시절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몸부림쳤던 뭉크는 본능적으로 이런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신체장애, 교통사고 후유증, 남편의 바람기로 고통받다: 프리다 칼로의 고통프리다 칼로는 어린 시절부터 죽을 때까지 몸과 마음의 고통에 시달리는 삶을 살았다. 6살 때 소아마비로 다리를 절게 되었고, 18세 때 교통사고와 그 후유증으로 평생에 걸쳐 33차례 외과수술을 받았다. 22세 때 조국 멕시코의 벽화 거장 디에고 리베라와 결혼했지만, 복잡한 여자관계에 프리다의 여동생과도 불륜을 저지른 남편의 바람기에 고통당했다.
병상에 누워 무료함과 고통을 잊기 위해 그림을 시작했던 프리다는 신체의 고통, 남편으로 인한 정신적 괴로움, 조국 멕시코에 대한 애정을 화폭에 담아냈다. 남편과 이혼했다가 재결합한 뒤로는 신체적, 정신적, 경제적으로 독립적인 생활을 하면서 남편에 대한 사랑을 모성애로 바꿨다.
말년에는 오른쪽 다리를 무릎까지 절단하고 만성 통증을 다스리기 위해 다량의 진통제를 복용해야 했다. 그럼에도 프리다가 죽기 직전에 그림에 남긴 말은 ‘비바 라 비다Viva la vida(인생 만세)’였다. 단단한 껍질 속에 달고 시원한 속살을 숨기고 있는 수박처럼, 괴롭고 고통스러운 시간 속에 아름답고 소중한 순간들을 숨겨 놓고 있는 것. 그것이 인생이라고 프리다는 그림으로 말하고 있다.
자본주의에서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 상품이 되다: 앤디 워홀의 전략‘팝아트의 황제’ 앤디 워홀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은색 가발에 짙은 선글라스다. 워홀에게 가발은 대머리를 가리는 용도 이상의 의미를 가졌다. 내성적인 데다 코 성형수술까지 받을 정도로 외모 콤플렉스를 가졌던 워홀이 대중 앞에 나서기 위해서는 부캐가 필요했는데, 부캐로 변신하기 위해 필요한 아이템이 검은 선글라스와 은색 가발이었다.
워홀은 대량생산, 대량소비 사회의 특징을 포착해서 캠벨 스프 깡통, 코카콜라, 브릴로 상자(비누 상자)와 같은 상품들이 마치 슈퍼마켓 진열대에 놓여 있는 것처럼 작품을 만들었다. 이로써 과거 예술이 가지고 있던 아우라aura(진품만이 가지고 있는 분위기)가 기술 복제 시대에 와서 더는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는 발터 벤야민의 주장을 증명해 냈다.
워홀을 포함한 팝아트 작가들의 성공에는 미국 정부와 CIA의 오래된 계획도 한몫했다. 당시 세계는 미국 진영 대 소련(오늘날의 러시아) 진영이 대립하던 냉전 시대로, 미국은 자신들의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선전해 줄 문화인들이 필요했다. 이에 비밀리에 추상표현주의자들과 팝아트 작가들을 지원했는데, 이들은 미국 정부를 대신해 소련 체제와 싸우는 역할을 맡았다.
대중문화와 유행에 민감했던 워홀은 할리우드 섹시 스타 마릴린 먼로를 작품 주제로 삼기도 했다. 어려운 가정환경에서 자라나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었다는 점에서 마릴린은 워홀의 페르소나로도 볼 수 있다. '마릴린 두 폭 그림'은 1962년 마릴린이 죽고 몇 주 뒤에 만들어진 작품이다. 여기서 워홀은 한 시대를 풍미한 스타 배우의 화려했던 삶과 불운했던 죽음을 표현하고 있으며, 대중매체로 인해 만들어진 마릴린 이미지가 허상이라는 통찰력까지 제공해 준다.

이제 화가들의 인생 속으로 떠나실 준비가 되었는지요? 삶에 불어닥친 위기와 절망을 극복하고자 몸부림쳤던 그들은 우리의 인생 동료입니다. 우리가 예술을 사랑하는 건 우리가 겪는 상처, 고통, 좌절, 극복의 순간들이 그 안에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여행이 끝날 즈음에는 예술이란 나와 동떨어진 세계가 아니라 내 인생을 이야기해 주고 위로해 주는 친근한 동반자라는 사실을 느끼시게 되길 바랍니다.
[들어가며에서]그렇다고 미켈란젤로가 고용주와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한 건 아니었습니다. 원하지 않은 일을 억지로 떠맡고 부당한 처우와 비난을 당하기 일쑤였는데요. 우리가 사회생활을 하며 겪는 일들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누군가에게 고용된다는 건 내가 원하는 일도 원하는 방식으로 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고용된 사람만 그럴까요. 작은 가게를 운영하는 자영업자에게도, 명칭과 달리 전혀 프리하지 않은 프리랜서에게도 밥벌이 노동은 억울한 일들의 연속입니다. 오늘의 밥벌이가 억울하다고 밥그릇을 걷어차 버리면 내일의 밥벌이를 할 수 없을지 모릅니다. 그러니 자기 감정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지 말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인간적으로 참을 수 없는 모멸감과 부당한 일이 반복된다면 우리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번아웃 상태에 이릅니다. 사표를 내던지고 도망갔던 미켈란젤로처럼 말이죠. 천재 예술가도 해결할 수 없었던 밥벌이의 괴로움은 오늘날 우리의 고민이기도 합니다.
[03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의 처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