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사람이 사람에게 차가운 등을 보이며 떠날 땐, 이미 관계를 회복하긴 어려울 때라는 것이다. 그만 안 보고 살겠다는 마음. 그런 마음이 되기까지에는 많은 과정이 숨겨져 있다. 원망, 회한, 용서, 분노, 눈물, 체념, 결심…. 돌이키기엔 너무 먼 길을 온 것이다. 그렇지만 시인은 아직 마지막 기회가 있다고 말한다.
떠나는 사람도 보내는 사람도 고통스러우므로, 상대방에게 보이는 등은 ‘연민’인 것이다. 연민이 남아있는 한, 그를 붙들어서 뜨거운 가슴을 보인다면 아직 희망이 있다. 관계를 포기하지 않을 의지가 필요하다. 그래서 시인의 마음은 ‘지는 것에 대한 화해’에 이르게 된다. 표제시가 된 이 작품은 시인의 마음이 현재 있는 위치를 말해준다.
출판사 리뷰
최윤경 시인은 은둔의 시인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어도 침묵의 시인이었고 고요의 시인이었다. 그러한 최윤경 시인이 시집을 한 권 내더니 버쩍 그 자리에서 일어나 길을 떠나 먼 길 위에 서고 있다. 아니, 그 길은 가까운 길, 오히려 내면의 길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새롭게 떠난 그 길에서 시인은 ‘나’의 존재와 함께 ‘너’를 읽어내고 있다. 이것은 아주 작은 일 같지만 아주 큰 일이다. 외연의 확장은 물론이고 시야가 확 열리면서 세계가 새롭게 밝아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어떤 시인이든지 자기 샘물만으로는 평생 시를 쓸 수 없는 일이다. 때가 되면 타인의 물을 받아 내가 저수지가 되는 시기가 온다. 지금, 빠른 것 같기는 하지만 최윤경 시인은 바로 그 저수지의 시기에 이른 것 같다. 어디까지나 샘물을 잃지 않은 저수지여야 한다. 그러니까 ‘샘물을 품은 저수지’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오로지 내 설움, 내 기쁨만으로 시를 이루는 건 아니다. 남의 설움, 남의 기쁨을 받아들여 내 설움, 내 기쁨으로 바꾸는 단계다. 그렇게 하는 동안 시인은 보편성이 무엇인가 그 아름다움을 깨닫게 될 것이고 세상에봉사하고 도움이 되는 시를 낳기도 할 것이다.
- 나태주(시인)
정이 많고 마음이 여린 사람일수록 그 정 때문에 앓는 일도 많아질 수밖에 없다. 돌려받을 것을 생각하고 정을 주는 것은 아니지만, 많이 받고도 돌려주기는커녕 이미 받은 것은 당연하고, 작은 서운한 일에는 날카롭게 대응하는 상대방에 마음을 다칠 일이 생긴다. 그러면 상대방을 새롭게 바라보게 된다.
가끔 너에게서 짙은 안개를 본다
너는 없고 안개만 자욱할 때 있다
안개 걷히고 나면
다 그 자리 그 모습인데
문득 문득 네가 낯설다
너를 낯설어하는 나를 느끼며
너도 나에게서
그 까마득한 안개를 봤을까
- 「안개」 전문
내 마음 같은 줄 알고 대하다가, 어느 날 요즘 아이들 말로 ‘현타’가 올 때가 있다. ‘안개’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너와 나의 관계에서 피어오른다. 그럴 때 오래 사랑하던 사람이 낯선 타인처럼 보인다. 내가 너라고 생각했던 것은 누구이고 진짜 너는 대체 누구인가. 한번 그렇게 낯설어 보이고 나면 다시는 원래대로 돌아가기가 힘들다. 이쪽도 더는 상처 입고 싶지 않아서 방어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내 마음을 너도 느꼈을까 하고 시인은 독백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
간격과 간격 넓히고 싶을 때 있다
손 멀리 마음껏 뻗어도
절대로 닿고 싶지 않을 때 있다
- 「간격」 부분
그래서 시인은 애써 상대와 거리를 두고 싶어진다. 시 「간격」에서, 시인은 마음에서 상대방을 멀리멀리 밀어낸다. 상처 주는 너를 내게서 멀리해서 상처를 더 받지 않으려는 것은 물론이고, 네게도 나와 멀어지는 고달픔을 느끼게 해주고 싶은 것이다. 소극적인 복수다. 그것도 상대가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아무 효과가 없는 일이건만.
사람이 사람에게 차가운 등을 보이며 떠날 때는
이미 늦었네
안 보고 살겠다는 뜻이네
등을 보이며 떠나는 사람과
등을 보며 보내는 사람의 마음은 똑같이 아프다네
그 사이엔 원망이 있고 후회가 있고 눈물이 있다네
등은 연민이네
슬픈 용서의 마지막 몸짓이네
등이 사라지기 전에
뜨거운 가슴 보여야겠네
- 「등 이야기」 전문
관계에 대한 전문가다운 말이다. 사람이 사람에게 차가운 등을 보이며 떠날 땐, 이미 관계를 회복하긴 어려울 때라는 것이다. 그만 안 보고 살겠다는 마음. 그런 마음이 되기까지에는 많은 과정이 숨겨져 있다. 원망, 회한, 용서, 분노, 눈물, 체념, 결심…. 돌이키기엔 너무 먼 길을 온 것이다. 그렇지만 시인은 아직 마지막 기회가 있다고 말한다. 떠나는 사람도 보내는 사람도 고통스러우므로, 상대방에게 보이는 등은 ‘연민’인 것이다. 연민이 남아있는 한, 그를 붙들어서 뜨거운 가슴을 보인다면 아직 희망이 있다. 관계를 포기하지 않을 의지가 필요하다.
그래서 시인의 마음은 ‘지는 것에 대한 화해’에 이르게 된다. 표제시가 된 이 작품은 시인의 마음이 현재 있는 위치를 말해준다.
꽃잎 떨어진다
마치 봐 달라는 듯
오래 눈 맞춰 달라는 듯
떨어진 모습 속 간절함으로
내가 있다
분명 피어있었음에도 핀 줄도 모르고
지는 것만 보이던 나는
지는 꽃 보다가
날 보다가 절절 아프다
와스스 무너지는 꽃들의 우레같은 절규
나 이렇게 슬픈 걸 보니
아직은 남아있구나
아직은 살아있구나
꽃잎 줍다가
금세 사르르 녹아버리는 한 잎
툭 놓아버린다
아직은 뜨겁게 살고 싶은 나와
종종 사는 거에 대해 싸늘해지는 내가
부딪치며 화해하며 온건히 살고 싶어졌다
- 「지는 것에 대한 화해」 전문
우수수 떨어지는 꽃잎을 보며 시인은 지는 꽃과 자신의 모습을 겹쳐 본다. 피는 것과 지는 것. 사람들은 대개 꽃이 피어나는 것을 더 좋아하지 않는가. 왜 나는 꽃잎이 질 때가 되어서야 꽃을 바라보는 걸까. 슬픔으로 세상을 보는 삶의 자세 때문이 아닐까 하고 독백한다. 시인은 지극한 슬픔을 느낄 때, 오히려 ‘내가 아직 살아있구나’라는 실감을 하는 사람이다. 그러면서, ‘아직은 뜨겁게 살고 싶은 나와 종종 사는 거에 대해 싸늘해지는 나’가 충돌한다. 그렇지만 이제 원숙해졌다. 부딪치면서도 화해하며 온건하게 살겠다는 의지가 생겼다. 슬픔과의 화해라 할 수도, 슬픈 자신과의 화해라 할 수도 있는 마음이다.
작가 소개
지은이 : 최윤경
대전에서 태어났고, 2004년 <시와 시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는 <슬픔의 무늬>와 <오늘은 둥근 시가 떴습니다>가 있다.첫 시집 <슬픔의 무늬>에서 “슬픔은 사라지는 게 아니고 문드러져 뼈에 스미는 것”(「슬픔이 슬픔에게」)이라는 최고급의 성찰과 인식의 깊이를 보여주었던 최윤경 시인은 그 오랜 절차탁마의 과정 끝에 자아와 자아, 나와 당신,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과의 불화를 다 해소하고, “와스스 무너지는 꽃들의 우레같은 절규”를 너무나도 아름답고 감동적으로 받아들인다.최윤경 시인의 세 번째 시집인 <지는 것에 대한 화해>는 대화엄의 세계이며, ‘지는 것이 더욱더 아름다울 수도 있다’는 것을 ‘꽃들의 우레와도 같은 절규’를 통해 보여준다.
목차
시인의 말 5
1부
별 12
너에게 하고픈 말 13
눈발에 찔리다 14
간절하게 15
독감 앓이 16
허공에 잠긴 허공 17
느리거나 더디거나 18
사랑, 덧없는 19
지는 것에 대한 화해 20
산사에서 21
바람의 결 22
부드러운 길 23
말 못 24
바람이 내린다 25
살아있다는 건 26
불과 며칠 사이 27
2부
나는 30
뒷모습 향기 31
해후 32
커피 한 잔의 득음으로 33
희망과 절망 사이 34
노을 눈빛에 젖어 35
슬픔을 치다 36
여름이 매미에게 37
울고 있는 저 여자 38
너라는 꿈 39
가시장미 40
메밀꽃 보면서 41
불꽃놀이 그 찰나의 꿈 42
입관 43
저묾에 비치는 눈 44
친구의 독백 46
절창 47
3부
내 생각 50
가슴이 두 개인 사람 51
갈대밭 노을 안에서 52
등 이야기 53
꽃이란 이름은 54
암시 55
새벽에 56
안개 57
나무가 숲이 되려면 58
노을에 피는 59
봄꽃, 그 사이 60
엄마 61
봄은 바람과 함께 62
우리는 63
동백 64
매미가 운다 66
4부
바람이 지나간 길 70
복숭아 71
길의 뒷모습 72
마음 길 73
적요 74
바다에 오면 보이는 것들 75
기억은 사랑이었다 77
간격 78
가끔 이별 79
걸레의 힘 80
깊어지기 81
나무가 꽃에게 82
엄마의 집 83
우기 84
여행 85
좋다 86
마음과 마음이 87
해설
관계에 대한 탐구
― 최윤경 시집 『지는 것에 대한 화해』에 붙여 / 양애경 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