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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수첩 2023.봄
76ȣ
여우난골 | 부모님 | 2023.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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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서 소개

《시인수첩》 2023년 봄호. 이번 호에서는 ‘기억’과 ‘진화’의 반복 속에서 시적인 것의 새로운 순간들을 모색하는 지면들을 마련했다. 《신인특집》코너에서는 지난 2021년에 《시인수첩》 신인상을 통해 데뷔해 약진을 거듭하고 있는 이진양 시인을 조명한다.

  출판사 리뷰

▣ 신인특집이진양 시인(시인수첩 2021년 신인상 당선자)
기발표작 「미래 네모」 외 1편 / 신작 「흐르는 장난감」 외 2편
해설-「제로에서 플러스로 율동하는 시」_박성준(시인·문학평론가)

▣ 신작시 범람하는 자연과 회복하는 문명 사이를 응시하는 시인들
김완하, 강희안, 박완호, 김종태, 정용기, 박수현, 이채민, 박연준, 석미화
이은화, 김춘리, 권 박, 김철홍, 전비담, 유수진, 김광호, 권승섭

▣ 특별대담 이재복 평론가(제12회 김준오시학상 수상자)
‘생성’과 ‘공능’의 감각으로 한국 시를 다시 읽다-김재홍 시인·문학평론가

▣ 기획특집 시와 시
김재홍 시인·문학평론가, 「분열자의 산책 혹은 일의적 시 세계-최근 여성시의 몇몇 양상에 대하여」
박성현 시인, 「기억의 현상학, 혹은 순수한 전前-미래적 사건의 도래-디카시 현상을 중심으로」

▣ AI와 함께 쓰는 시-이인철 시인+AI
「《a-1》」, 「《a-2》」

‘기억’과 ‘진화’의 반복 속에서
시적인 것의 새로운 순간들을 발견하다

《시인수첩》 2023년 봄호(통권 76호)가 출간되었다. 실내에서 부분적으로 마스크를 벗는 것이 허용된 후 맞이하는 첫 봄. 가렸던 얼굴을 드러내고 친근한 말들을 가족과 친구들에게 건네듯, 《시인수첩》은 겨우내 따스한 시어들을 기다렸던 독자분들에게 새로운 계절의 소중한 감정들을 전하고자 한다.
이번 호에서는 ‘기억’과 ‘진화’의 반복 속에서 시적인 것의 새로운 순간들을 모색하는 지면들을 마련했다. 《신인특집》 코너에서는 지난 2021년에 《시인수첩》 신인상을 통해 데뷔해 약진을 거듭하고 있는 이진양 시인을 조명한다. 《현대문학》 2023년 1월호에서 ‘올해가 기대되는 시인’으로 언급되기도 한 이진양 시인은 전위적이면서도 정교한 시적 방법론을 통해 문단에서 컬트적인 인기를 확보해나가고 있다. 이번 지면에서는 그의 시작 지점을 기억하고 현재를 응원하며 한국 시의 새로운 탐구 지점을 그의 언어로 탐구해본다. 《기획특집》 코너에서는 ‘시와 시’라는 주제로 우리 시의 현재 모습을 세부적으로 살핀다. 팬데믹 기간에 가장 활발하게 목소리를 냈던 발화자 중 하나인 ‘여성’, 그리고 담론의 조명을 받지 못했지만 단절과 소통 부재라는 문제에 대해 꾸준히 이야기해 온 ‘디카시’ 필자들. 이번 기획특집에서는 이 두 화자가 지난 몇 년간 걸어온 길을 복기하며 팬데믹 이후의 새로운 문학장의 풍경을 전망해본다. 또한 생성과 공능의 감각이라는 독자적인 관점으로 한국시를 분석해온 중견 평론가 이재복을 조명하는 특집 대담, 첨단 기술과 전통 사이에서 가장 시적인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자기만의 방식을 찾아 나가는 시인들의 작품을 담은 《신작시》와 《AI와 함께 쓰는 시》(이인철 시인+AI)를 통해 ‘새로운 시’에 대한 시인들의 생생한 발화들을 전한다. ‘기억’과 ‘진화’ 사이의 오래된 미래들. 《시인수첩》은 그 찰나의 시어들과 독자들이 마스크를 벗고 만나는 공간으로 남아 있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자 한다.

기획특집 “시와 시”
기획의도

2020년 초부터 지금까지, 한국문학이라는 장소에는 두 가지 침묵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하나는 ‘나’의 개별적 체험을 수용하지 못하는 ‘우리’로부터 분리된 개별 화자들의 침묵, 다른 하나는 팬데믹 상황으로 인해 물리적으로 격리되어야만 했던 이들의 침묵이다. 서로 다른 두 침묵은 하나의 화자에게 중첩되기도 하고, 개별적으로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이로 인해 한국문학은 화자들의 ‘당사자성’을 반영한 다양한 목소리들의 공간이 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나’의 욕망과 현실의 언어들이 원활하게 오가는 통로의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되기도 했다.
두 화자가 머물렀던 각각의 장소(로서의 문학)를 이번 지면에서 돌아보고자 한다. 시인이자 평론가인 김재홍은 지난 시기에 가장 적극적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냈던 여성 화자들에게 주목한다. 존재적 상실을 여성이라는 위치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가 무화되는” 과정으로 그려내는 유계영 시인, 자신을 보편적 인격체로서 받아들이지 않는 사회 안에서 조롱과 냉소를 통해 ‘분열적인 방식’으로서의 구원을 추구하는 백은선 시인, “자극성과 폭력성의 사적 층위에서 분열자의 보편적 층위로 심화되는 경로도”를 그려내는 이소호 시인, “무기력한 일상 속에서 지루한 것을 찢어버려는 내면의 분열자와 그 반대 쪽에서 부풀어오르는 ‘나’”를 시라는 공간 안에 불안하게 공존시키는 임지은 시인의 작품을 분석하는 필자는 “경제적 불평등과 소외, 제도화된 기회의 박탈과 다수성의 폭력 등을 겪고 있는 세대”의 대변자로서 그들이 남긴 목소리를 통해 지난 시기의 ‘나’들에게 남아 있는 시대적 상처를 읽어낸다. 한편, 시인이자 연구자인 박성현은 문단에서 주목받지 못했던 화자들 중 하나인 ‘디카시’ 시인들에게서 지난 몇 년간 한국문학에 드리운 또다른 방식의 침묵을 포착해낸다. “이론과 창작을 저울질하는 문학-담론으로 출발했던 것이 아니라, 시인의 ‘자기-해석학’으로 부를 수 있는 창작 방법의 뚜렷한 경계 서정과 이에 대한 성문화 작업을 통해 저변을 확대했고, 아울러 ‘현대-로써’ 가속화하는 ‘디지털’과의 접속을 통해 전환을 도모”하기도 했던 디카시는 표현 방식의 직접성 등으로 인해 그동안 심층적인 분석의 대상으로서 다뤄지지 못했다. 하지만 팬데믹 시기에 어느 화자들보다도 치열하게 우리 문학의 공백 지점을 바라봐왔던 디카시 시인의 작품에는 침묵의 현실 너머에 있는 새로운 방식의 ‘연결’에 대한 고민이 담겨 있다고 필자는 이 글에서 밝힌다.

책속으로(1) 김재홍 시인·평론가, 「분열자의 산책 혹은 일의적 시세계」

유계영, 백은선, 이소호, 임지은 시인(들)은 떨림을 기다려 여럿(분열)과 하나(표현)의 분열증적 양상을 표현했다. 이들은 서로 다른 목소리로 말하지만 인접성과 세대론적 공유점을 통해 한 시대의 표상에 육박해 들어가고 있다. 비유컨대 이들의 인접성을 ‘분열자의 산책’이라 부를 수 있다면, ‘갇힌 세대의 함성’은 공유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모두 분열되지 않고는 터져 버릴 것 같은 압력의 임계치를 언어로 보여주고 있다. 그만큼 격렬하고 처연하고 치열한 고밀도의 언어를 통해 시대의 압력에 저항하고 있다. 이들은 2010년 이후 등단한 시인(들)로 경제적 불평등과 소외, 제도화된 기회의 박탈과 다수성의 폭력 등을 겪고 있는 세대이거나 그 세대의 시적 대변자이다. (중략) 시인(들)은 여럿과 하나의 주름진 세계의 시민권자로서 당당히 노래한다. 그들은 기회를 박탈당한 자들의 아우성을 노래한다. 그들은 절대적 고립을 고통스럽게 견디고 있는 자들의 슬픔과 미래를 상실한 자들의 분노를 노래한다. 그들은 폭발하지 않으면 안 되는, 가만히 있으면 끝내 터져 버릴 수밖에 없는 분열자들의 비극적 양상을 표현해 낸다. 그러므로 그들은 스스로 분열의 세대이면서, 분열의 시대를 표현하는 분열자들이다. 그들의 언어는 특수하며, 그들의 시는 환원되지 않는 고유성 속에서 약동하고 있다. 세계는 존재하는 모든 가능성들의 집합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세계는 최대의 것, 극한의 것, 무한의 것이다. 오늘도 시인(들)의 무한 울림이 시단에 울려 퍼지고 있다. -(본문 150~151페이지)

책속으로(2) 박성현 시인, 「기억의 현상학, 혹은 순수한 전(前)-미래적 사건의 도래」

디카시라는 하나의 작품이 역사의 어느 순간에 만들어지고, 또 수다한 개인에 의해 변이되는 가운데 사라졌다가 시간의 수면 위에 다시 솟아오른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무엇일까. 시인이 채집한 영상은 그것이 이미지로 구현되기 전에도 누군가에 의해 사로잡혔을 것이며, 그 사람의 의식이 투영된 사물-이미지는 생성과 동시에 소멸하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디카시는 영상과 텍스트의 변증을 통해 한겹 두꺼운 옷을 입고 의식의 깊은 곳을 침전되며, 독자는 기억과 충격을 통해 그 의미 층을 꺼내어 자신의 내면에 각인시킨다. 다시 말해, 하나의 영상에 텍스트가 입혀졌다는 것은 동시에, 그 사물에 대한 시인 고유의 해석이 이루어졌다는 말이고, 그만큼 그 사물에 대한 의미 지평이 넓어졌다는 얘기다. 여기서 모태가 변이로 확장될 수 있는 충분한 가능성이 생성될 수 있으며, 그 반대 과정도 역시 동일하게 전개될 것이다.
디카시는 사소한 사물들을 다시 일으켜 세워 지금까지 방치된 ‘의미의 무덤’에서 무수한 성좌를 엮어내는 작업이고 해석이란 그 성좌의 의미를 새롭게 만들어 후대를 향해 돌아서는 행위다. 그러므로 디카시는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기억의 ‘알레고리’다. -(본문 168~169페이지)


신인특집 이진양 시인(시인수첩 2021년 신인상 당선자)
《신인특집》 코너에는 지난 2021년 ‘시인수첩 제10회 신인상’을 수상하며 데뷔한 이진양 시인을 집중 조명한다. ‘비자연적 언어’와 ‘인간적인 것’의 변증법을 통해 기존의 시적 규율에 대한 답습을 거부하며 매혹적이면서도 기괴한 ‘프랑켄슈타인’과 같은 작품들을 선보이는 그는 이미 컬트적인 팬층을 확보하고 있다. 매끄럽고 견고한 성공을 꿈꾸는 게 아니라 ‘치열하게 실패하고 황홀하게 절망’하기를 기도하는, 그리고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언어들의 ‘폭발’을 우리 문학의 새로운 풍경으로서 기획하는 그는 시라는 장르의 의미를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완성해나가고 있다. 이번 호에서는 한국문학이 기억해야 할 중요한 시인으로 성장해나가고 있는 이진양 의 작품 5편(신작 3편+기발표작 2편)을 소개하고, 박성준 시인·평론가의 작품 해설을 함께 담았다.

사무치는 질감으로 황조롱이 흔들린다 복제된다 요절한 gold star television과 갈림길을 함께 걷는다 저기 발이 많은 물고기가 서 있다 언어 실험자는 단념한다 단념은 micro uzi를 낳는다 타타다당 타다당 너무 긴 형용사는 고드름 맺힌 아나콘다 관찰자적 시점에서 오늘 밤 눈보라는 처참한 배롱나무의 자가 격리; 안드로메다 주말 텃밭에는 이름을 잃어버리는 자 이름을 잃어버리고 싶은 자 양식과는 다르게 경양식과도 다르게 가득하다
- 「허수의 허수아비 떼」 중에서

내연기관에서 물결치는
뒤엉킨 물의 의중 따위에는
관심 없다
내가 노려보는 건
의자와 의심과의 관계
배신에 중독된
발명 의지 혹은
發狂 잔상
나무 한 그루의
베어짐을 기다리는 외로움
그런 것들; 치밀하게 시들어가는
허수아비의 헛구역질;

입 닥치고 하나에 몰입하기. 하나의 대상을 뚫어져라 쳐다보기. 하나로 물들기.
-「아인랑켄슈타인」 중에서

도형의 중심이 아니라 이진양의 시는 “모서리”나 주변에 관한 관심이 주로 나타난다. 게다가 동원된 말놀이들에서 번번이 노출되고 있는 서브 텍스트들이 가진 의미체들도 대다수 하위 문화적 특징들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흐르는 장난감」에서 “모서리들은 해맑게 죽었다”고 선언할 때 ‘해맑음’과 ‘죽음’ 사이에서 독자가 어떤 의미 기표에 방점을 두어야 하는지 의문스럽고, “나쁘게 서 있었다”라고 진술하면서도 좀체 “나쁜 게 뭔지도 모르”는 사태의 지속을 우리는 이진양의 시를 읽으면서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잘 모르지만, 잘 알 것 같은 “슈지”의 존재도 그렇고, 존재는 사라지고 현상만 남은 「아인랑켄슈타인」의 “나”도 그렇다. 이러면 안 될 것 같은 우연 다발을 모아다가 하나의 연대를 만들어 놓는 것. 그것을 통해 조금 더 비참한 흔들림과 발광, 슬픔의 율동을 전시시키는 것. 그리고 이런 형태의 존재론을 그저 말놀이가 아니라 관계 놀이, 인식 놀이로 끌어올리는 힘이 이진양의 시에는 있다. 그렇다면 이 ‘통고의 놀이’을 그저 아름답다고 불러봐도 좋지 않을까. 그리고 더 나아가, 이런 시를 읽는 것은 그저 독서가 아니라 지독하게 외로운 이진양과의 대화를 시도하는 것으로 생각해 보아도 좋지 않을까.
-박성준, 「제로에서 플러스로 율동하는 시」(이진양 시인 작품론) 중에서


AI와 함께 쓰는 시 한국문학 최초로 시도되는 현역 시인과 AI의 협업 작품 연재
이번 호부터 새롭게 시작되는 연재 코너인 《AI와 함께 쓰는 시》에는 《시인수첩》 편집동인이자 중견 시인으로서 활발하게 작품 활동하고 있는 이인철 시인과 AI 프로그램의 협업으로 창작된 작품을 수록한다. 이 기획은 한국문학 최초로 시도되는 현역 시인과 AI의 컬레버레이션 프로젝트로서, 지난 시대의 억압과 상처를 깊은 서정적 언어로 형상화해온 이인철 시인의 원숙한 감각과 건조한 정보들을 정교하게 조합해내는 차가운 지성의 언어가 결합해 만드는 특별한 시적 풍경을 독자들에게 선사한다. 최첨단의 언어 처리 방식을 통해 작품을 창작해내는 AI로 인해 새롭게 찾아온 문학의 위기 앞에서, 이번 프로젝트는 새로운 기술을 가진 가상의 창작자가 시인의 적대적 대상이 아니라 동반자가 될 수 있음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이인철 시인은 이번 연재에 앞서 “프로젝트를 꾸준히 지속하면서 한국문학의 경직된 상상력을 유연하게 바꿔 나가는 데 기여하고 싶다”고 밝히기도 했다.

나의 존재는 이 모든 것과 함께
잠시 떠돌아다니는 작은 입자일 뿐이야
나는 존재로 의미를 가질 수 없어
내가 지워질 때 모든 것은 그대로 남아있을 거야

불안정한 속에서도
나는 내가 살아갈 이유를 찾고 있어
나의 존재가 세상에서 한 가지라도 빛을 발할 수 있다면
의미가 될 거야
-이인철+AI,「《a-2》」 중에서


신작시범람하는 자연과 회복하는 문명 사이를 응시하는 시인들
《신작시》 코너에는 ‘지금, 여기’의 한국사회에서 펼쳐지는 새로운 문화적 풍경들과 마주하게 된 17명의 시인들의 작품을 담았다. “둑을 열고 물의 길을 살려내야 한다//무엇보다 저수지를 여는 순간//어느 쪽으로 물길을 댈지//그 판단이 참으로 관건이다”(김완하, 「물의 감정」), “언어의 행간마다 독 오른 칼날을 꽂아두고/서슬 푸른 눈빛을 안으로 갈무리해 가며/표적을 노리는 자객의 숨결 같은/적막 가운데 버티고 서 있어야 한다”(박완호, 「도산검림刀山劍林」), “노랑 파스타, 빨강 파스타, 파랑 파스타 중 어느 것이 더 맛있을까 생각하는 사이, 낮달이 지고 있습니다 메뉴판의 이름들 위에 지문을 찬찬히 찍어가는 즈음, 감자가 속살을 터뜨리고 베이컨은 구수한 냄새를 풍기고 크루아상의 버터가 부풀어 오릅니다”(김종태, 「조용한 식당」)과 같이, 시인들은 지금 잠잠해졌지만 지난 몇 년간의 도시적 삶들을 휩쓸었던 문명 바깥의 불가사의한 힘을 응시한다. 또 한편으로는 “아무에게나 동정받고 잘근잘근 씹힌다/누구에게나 침 발리고 돌돌돌 사탕처럼 포장되는//애라고 할 수 없는 애들이/자라면 정말 애가 되는 놀이/아이는 테이블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다”(박연준, 「수업 시간」), “특정 지역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불식시키는 일은 자신의 이름을 다시 지어야 하는 사람 같습니다. 같은 건지는 모르겠습니다만”(권박, 「에서부터」), “신선한 빵을 신성한 아침 식탁 기도의 손에 올리려고 졸음에 겨운 야근의 손은 붉은 잠에 빠져 죽었다”(전비담, 「빵의 손」)처럼, 우리 문명의 연장선상에서 그 파괴된 부분에 대한 반성과 회복을 촉구하는 목소리들을 작품에 담았다. 언제 다시 범람할지 모르는 자연과 그 구조의 근본적인 부분을 수정해야 하는 문명 사이를 응시하며 시인들은 이전 시기의 어느 시인들보다도 구체적인 방식으로 한국사회의 핵심적 심상들을 그려 나가고 있다.

아무에게나 동정 받고 잘근잘근 씹힌다
누구에게나 침 발리고 돌돌돌 사탕처럼 포장되는

애라고 할 수 없는 애들이
자라면 정말 애가 되는 놀이

아이는 테이블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다

어른을 잡으러 다니는 비가 온다
낙심한 얼굴로
비가 오면

아이가 엄마를 잃었다고 생각했다가
엄마가 아이를 잃었다고 생각하다가
-박연준, 「수업 시간」 중에서

특정 지역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불식시키는 일은 자신의 이름을 다시 지어야 하는 사람 습니다. 같은 건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네덜란드령이었던 동인도의 바타비아를 떠올립니다.
가짜 인어 사건은 식민지에서부터 비롯된 것인데요.

환상. 고통을 아름답게 소문내는, 사기꾼.
원숭이 상반신과 물고기 하반신을 꿰매는.
-권박, 「에서부터」 중에서

물속에서 얼굴을 내밀고
참았던 숨을 몰아쉬고 있었는데

세 번 말해준 이름을
다시 물어오는 회원이 있다

가장 흔한 이름을 떠올리고

붕어요
金붕어

아, 맞다

맞다고 말한다

갈수록 몸이 쉽게 물에 뜬다

변기에 빠진 금붕어의 방식으로

내가 사라진 자리에
새로운 물이 곧 차오른다고 믿는다

오늘은 금붕어가 보이지 않네
수영장을 옮겼대
-김광호, 「숨이 아닌 호흡들」 중에서

주요 내용 엿보기
여는 글 편집 동인 이지호 시인은 코로나19 ‘졸업’을 앞둔 지금 우리의 사회적 상황과 《시인수첩》을 발행하는 ㈜여우난골이 지나왔던 몇 년의 시간을 겹쳐 보며 스스로를 격려하고 새로운 도약을 다짐한다. 특히 이번에 《시인수첩》이 ‘2023 문예지발간지원사업’에 선정되었다는 소식을 전하며, “모두 시인수첩을 사랑하고 응원하는 마음들이 모인 결과라고 생각한다. 든든한 디딤돌이 되라는 당근이며 채찍이리라”는 말을 통해 독자들과 이 기쁨을 공유하고 싶다는 뜻을 밝힌다.

기획특집 ‘시와 시’라는 주제로 우리 시의 현재 모습을 세부적으로 살핀다. 팬데믹 기간에 가장 활발하게 목소리를 냈던 발화자 중 하나인 ‘여성’, 그리고 담론의 조명을 받지 못했지만 단절과 소통 부재라는 문제에 대해 꾸준히 이야기해 온 ‘디카시’ 필자들. 이 두 화자가 지난 몇 년간 걸어온 길을 복기하며 팬데믹 이후의 새로운 문학장의 풍경을 전망해본다.

신작시 김완하, 강희안, 박완호, 김종태, 정용기, 박수현, 이채민, 박연준, 석미화, 이은화, 김춘리, 권박, 김철홍, 전비담, 유수진, 김광호, 권승섭 시인의 신작시가 소개된다. 언제 다시 범람할지 모르는 자연과 그 구조의 근본적인 부분을 수정해야 하는 문명 사이를 응시하며 시인들은 한국사회의 과거·현재·미래를 새롭게 그려 나가고 있다.

신인특집 《신인특집》 코너에는 지난 2021년 ‘시인수첩 제10회 신인상’을 수상하며 데뷔한 이진양 시인을 집중 조명한다. 기발표작 2편과 신작 3편이 수록되는 이번 코너에서는 치열하게 실패하고 황홀하게 절망하기를 기도하는, 그리고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언어들의 ‘폭발’을 우리 문학의 새로운 풍경으로서 기획하는 그의 시도들에 주목하고 있다.

AI와 함께 쓰는 시 《시인수첩》 편집동인이자 중견 시인으로서 활발하게 작품 활동하고 있는 이인철 시인과 AI 프로그램의 협업으로 창작된 작품을 수록한다. 이 기획은 한국문학 최초로 시도되는 현역 시인과 AI의 컬레버레이션 프로젝트로서, 지난 시대의 억압과 상처를 깊은 서정적 언어로 형상화해온 이인철 시인의 원숙한 감각과 건조한 정보들을 정교하게 조합해내는 차가운 지성의 언어가 결합해 만드는 특별한 시적 풍경을 독자들에게 선사한다.

특별 대담-이재복 평론가 제12회 김준오시학상을 수상한 이재복 평론가와 대담을 진행했다. ‘생성과 공능의 감각’이라는 독자적인 관점으로 한국시를 분석해온 중견 평론가 이재복을 조명한다. 대담 질의자로 시인수첩 편집동인 김재홍 시인·평론가가 참여했다.

  작가 소개

지은이 : 시인수첩 편집부

  목차

여는 글
006 당신의 왼쪽 어깨 위로 삐죽 봄이 오듯이_이지호(편집 동인)

신작시
012 물의 감정_김완하
015 미궁의 과녁_강희안
018 도산검림_박완호
021 조용한 식당_김종태
023 연리지_정용기
026 백년 등대_박수현
029 슬픈 연대기_이채민
032 수업 시간_박연준
035 오늘 하루 어땠나요?_석미화
038 Anne_이은화
041 이별 여행_김춘리
044 에서부터_권박
047 사각의 여백_김철홍
049 빵의 손_전비담
052 그 혐의에 질문도 포함됩니까_유수진
055 숨이 아닌 호흡들_김광호
060 _권승섭

AI와 함께 쓰는 시-이인철+AI
066 《a-1》
067 《a-2》

시인수첩 신인 특집-이진양
069 기발표작 「미래 네모」 외 1편 / 신작 「흐르는 장난감」 외 2편
100 [해설] 제로에서 플러스로 율동하는 시_박성준

특별 대담-이재복 평론가(제12회 김준오시학상 수상자)
111 ‘생성’과 ‘공능’의 감각으로 한국 시를 다시 읽다_김재홍

기획 특집_시와 시
130 [편집자 주] 소란하고 외로웠던 장소를 기억하며_양진호
133 분열자의 산책 혹은 일의적 시 세계―최근 여성시의 몇몇 양상에 대하여_김재홍
152 기억의 현상학, 혹은 순수한 전前 미래적 사건의 도래-디카시 현상을 중심으로_박성현

그 시집 어땠어? [박성현, 문혜연, 이정현]
172 가끔, 종이의 이면을 궁금해하는 일―이순호, 『피의 맛』(글상걸상, 2022)
178 시에 이르는 길―김겸, 『하루 종일 슬픔이 차오르길 기다렸다』(여우난골, 2022)
184 물러서야 할 때를 아는 사람의 독백―장정욱, 『넓은 겨울을 혼자 썼다』(여우난골, 2022)
190 밤 산책―조해주, 『가벼운 선물』(민음사, 2022)
197 타오르는 시선을 되돌려 보내며―임효빈, 『우리의 커튼콜은 코끼리와 반반』(여우난골, 2022)
200 구멍 속의, 구멍을 바라보는, 전체를 보는―배시은, 『소공포』(민음사, 2022)

시인이 초대한 시인들
207 [초대평] 詩人_정연홍
210 우포늪_전다형
214 입속에 역방향은 없다_이효림
218 마닐라행 마지막 버스는 여섯 시면 떠난다고 하네_이환
222 Ghett-보트피플_이기록

Poet’s House_번역 여국현
226 늦가을 떼 기러기를 보며(Looking at the Flights of Wild Geese in Late Autumn)_홍신선
229 무량(Infinitude)_전영관

시;세이
235 프랑스에서 바라본 한류 현상과 한국 사회_전해웅
247 거울닦이_김의규

詩사회
258 정병근 | 『중얼거리는 사람』
자선시_「중얼거리는 사람」외 2편
시론 에세이_하지 못한 말
268 이해존 | 『이물감』
자선시_「가시철망」외 2편
시론 에세이_흘러가는 오늘
277 이사람 | 『지구에서의 마지막 여행』
자선시_「이별을 읽다」외 2편
시론 에세이_기억에 대하여

계간시평
289 애도를 시작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사랑해야 한다_김학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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