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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들 밑에 일군 밭
도서출판 말 | 부모님 | 2023.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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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서 소개

한미선 작가가 30여 년 전에 쓴 글들을 모아낸 소설집이다. 6편의 단편과 옴니버스식 장편 연작소설로 구성되어 있다. 기억을 소환하고 새로운 기억을 만드는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출판사 리뷰

기억을 소환하고 새로운 기억을 만드는 이야기

‘한 무리의 청춘들이 흐드러진 웃음을 피워내며 쏟아져 나온다. 스무 살, 젊음이다. ……교문을 들어서는 순간, 눈을 감아버릴 만큼 부셨던 것은 진달래가 아니라 개나리가 아니라 바로 젊음이 뿜어내는 기운이었음을. 모든 것이 젊다. 이 젊음들이 낯설다.’ 『한미선 단편선』 중 2부 「창밖으로 세상이 보인다」에 나오는 구절이다.

작가는 나의 친구로 대학 시절을 함께 했다. 당시는 5.18항쟁을 무력으로 짓밟은 군사정권이 집권하던 시기였다. 젊음의 눈부심보다 살벌하고 엄중한 분위기가 압도했다. 사복경찰이 학내에 상주하면서 학생들과 같이 수업하고 교내 잔디밭에 앉아 학생들의 동향을 감시하는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소설은 그 시절을 소환해 내었다. 그리고 내가 기억하지 못했던 낯선 젊음을 안겨주었다. 시절은 엄혹했어도 활화산 같은 젊음을 토해내던 그때 우리가 거기에 있었고 지금은 여기에 있다.

학생운동, 노동운동으로 바빴던 친구가 언제 소설을?

『한미선 단편선』은 작가가 30여 년 전에 쓴 글들을 모아낸 소설집이다. 6편의 단편과 옴니버스식 장편 연작소설로 구성되어 있다. 작가인 친구는 80년대 학생운동에 함께 몸담았던 논변이 정연했고 탁월한 리더십을 가진 나의 동료였다. 그리고 뜨거운 열정을 품은 젊음이었다. 수학을 전공했고 수학적 재능이 뛰어난 친구는 어떤 문제든 논리적인 접근방식을 취해 현실적인 감각이 없다고 응수하는 나와는 자주 충돌했다.

그런 친구가 소설을 썼다는 것은 그 자체로 놀라웠다. 내가 아는 친구의 모습이 거기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각자 다른 영역에서 사회운동을 할 때 친구가 진보 성향의 잡지인 ‘말’지 자유기고가로도 활동했던 것을 알았고 필명으로 책을 낸 것도 알고 있었다. 친구가 쓴 기사를 보면서 ‘성격대로 가지런하고 조리 있게 글을 쓰는군. 그런데 사람의 마음을 건드리는 감성은 약해.’ 그랬던 기억도 있다. 그랬던 친구가 소설을 썼다니. 더욱이 그 시기에. 초고에 적혀 있는 글 쓴 시기가 택시 기사로, 야학교사로, 현장 운동가로 종횡무진 뛰어다니고, 공안사건에 연루되어 옥살이하던 시기와도 겹쳐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두 번의 뇌출혈 수술, 그리고 꺼내든 30년 전 원고

이 책이 30여 년 동안 서랍에 갇혀 묵혀 있다 세상에 나오게 된 탄생 배경 또한 독특하다. 친구는 현재 생사를 넘나드는 수술 후 후유증으로 병마와 싸우고 있다. 3년 전, 급박하게 온 두 번째 뇌출혈로 수술을 했다. 다행히 목숨을 건졌고 가족들의 돌봄으로 회복으로 돌아섰지만, 여전히 표현과 거동에 제약이 있는 상태이다. 그간 친구는 다른 친구들과는 소식이 끊어진 채, 지방에선 꽤 유명한 수학 강사로, 가족과 함께 유기농업을 하며 생계를 꾸렸다고 한다. 재활 치료를 받던 친구와 어렵게 연락이 닿아 만난 자리에서 ‘책을 내고 싶다’는 말을 했다. 친구가 말한 책은 알기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수학 지도서와 예전에 쓴 소설을 책으로 출간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수학 지도서를 내는 것은 지금의 몸 상태로 불가능하고, 소설은 써 놓은 것이니 손을 봐서 책으로 출간할 수 있겠다 싶었다.

지금은 시장에서도 구하기 어려운 타이프로 친 원고가 컴퓨터로 옮겨져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그동안 왜 출간하지 않았는지를 물었을 때 ‘그냥.’ ‘그런 생각을 안 해 봤다.’는 친구의 대답에 궁금증은 접어두기로 했다. 자전적 소설, ‘구들 밑에 일군 밭’에 어린 화자의 탄생 장소는 살구밭이다. 새벽녘 진통으로 어머님이 부여안은 살구나무 밑에서 첫 호흡을 뱉었듯이, 30여 년 만에 세상 밖으로 얼굴을 내민 소설집의 탄생도 화자의 투병이라는 진통과정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 모든 과정이 우연일까? 필연일까?

1년간 속리산에서 쓴 2천 매

소설을 읽으면서 또 놀랐다. 책을 읽기 전 나의 선입견과 예상을 넘어선 글이었기 때문이다. 일단 양이다. 200자 원고지로 2천 매에 가까운 방대한 양은 직업소설가도 3년이란 세월에 쉽지 않다. 다른 일을 병행하면서 쓰기엔 더욱 그렇다. 1년간 속리산에 칩거하며 글 쓴 기간이 있었다 하더라도 창작은 쉬운 작업이 아니다. ‘이게 가능해?’라는 말이 맴돌았다. 무엇이 차고 넘치게 해서 글을 쓰게 했을까?

예상을 뛰어넘는 또 다른 점은 수학을 전공한 친구의 이력에 걸맞지 않은 절묘한 문학적 묘사 능력이었다. ‘아직 아무도 밟은 이가 없는, 골목길에 덮인 눈이 가로등 불빛에 반사되었다. 첫발자국을 내면서 병만은 연신 자신의 발자국을 돌아보았다. 곧바로 걸어보고, 갈지자로도 걸어보고, 오던 길을 돌아서서 뒷걸음질 쳐보기도 했다. 그러다가 성큼성큼 덩실덩실 발걸음을 큼직하게 떼 보기도 했다.’ 「창밖으로 세상이 보인다」에서 사랑이 시작될 때의 설렘을 표현한 구절이다. 인물의 심리와 행동, 배경이 톱니바퀴처럼 딱딱 들어맞게 표현되어 여운과 이미지가 나를 들썩이게 한다.

약자들의 우울한 삶과 희망 찾기

주제에 대한 접근과 서술방식도 나의 선입견과는 멀었다. 친구는 뜨겁게 한국 사회의 변혁을 꿈꾸고 몸소 행동했으므로 소설 또한 사회주의 리얼리즘 공식에 걸맞은 소설일 거라는 나의 예측과 다르게 인간 삶의 보편적인 문제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렇다고 이 소설들이 리얼리즘이 아니라는 얘기는 아니다. 한국사의 격변기에 있었던, 있을 법한, 현실에 뿌리 박은 곳곳의 이야기이다. 잭 런던의 ‘강철군화’, 막심 고리키의 ‘어머니’처럼 자신이 처한 상황에 눈뜬 인물이 사회변혁에 나서는, 눈물과 감동이 따르는 이야기라기보다는 우울한 역사적 반복과정에서 약자들의 삶이 실패할 수밖에 없는 처지와 상황을 예리하고 촘촘하게 표현한 이야기들이다. 어렵게 희망을 찾아가는 이야기도 있다.

누군가 그랬다. 작가의 숙명은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밀려난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려주는 사람이라고. 단편 「타인들」은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죽음을 둘러싸고 구성원 각자가 독백이란 형식으로 가족사를 회고하는 이야기이다. 각자가 다른 구성원과의 사이에서 벌어진 사건을 각자의 시선에서 토로한다. 독백의 내용은 서로에 대한 서운함, 원망, 이해할 수 없음이다. 가족 사이가 벌어진 것에 나는 잘못 없음이다. 그런데 독백을 듣다 보면 사건에 대한 기억도 다르고 오해를 풀지 않은 채 각자의 입장에서만 판단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작가는 독백만 들려주고 가타부타 개입하지 않는다. 그런데 독자는 작품을 읽다 보면 숨겨진 목소리가 무엇일지 찾게 된다. 그렇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작가의 목소리에서 작가의 천성을 가진 친구를 발견할 수 있었다.

다만 30년 전에 쓰인 문체라 요즘 추세인 단문은 아니다. 그래서 읽기가 만만치 않을 수 있다. 그러나 복문이기에 발휘되는 유려하고 밀도 높은 서술방식은 당시의 세계관을 반영하고 기록하는 의미도 있다. 곱씹어 보면 요즘 글에서 찾기 어려운 깊은 여운도 준다.

돌담 넘어 꽃잎을 흩뿌리는 백일홍 나무의 표상

책 표지에 백일홍 나무와 돌담이 펼쳐져 있다. 백일홍 나무는 친구의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상징적 소재라 삽화로 했다. ‘말이 서 있는 것이지 실제로는 누워있다고 표현해도 그다지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기묘한 형상을 한 나무였다. 비비 틀리고 꼬인 가지들은 하늘로 오르기보다는 옆으로 내뻗치기를 훨씬 좋아했다. 뿌리는 분명 돌담 밖에 있지만, 내 다리통만 한 굵기의 가지가 돌담을 불쑥 뚫고 들어와 잔잔하고 여린 붉은 꽃잎들을 마당 구석에 흩뿌리고 있었다. 부잣집 정원에서 꽃을 피웠더라면 수백만 원의 가치는 족히 발휘했을 법한 이 백일홍은 식구들 그 누구의 관심도 못 받은 채로 제 몸을 이리저리 비틀며 자라고 있었다.’ 「구들 밑에 일군 밭」에서 표현된 백일홍 나무의 모습이다. 그런데 작품에 나온 그 나무는 작가의 어린 시절 고향 집의 나무를 형상화했다고 한다.

작품에서 표현된 백일홍 나무는 작가가 추구하는 삶의 표상 같다. 돈으로 환산되는 부잣집 정원에서 꽃 피우지 않는 나무. 하늘로 치솟는 자기 과시보다 옆으로 내뻗치기를 좋아하는 나무. 자신이 내린 뿌리를 넘어서 돌담 넘어도 꽃잎을 뿌려주는 나무. 누구의 관심을 못 받아도 이리저리 비틀며 자라는 나무. 그 나무는 홀로 고고한 가치를 추구하기보다는 자기 주변에 한없는 관심을 기울이고 세상과 맞부딪치며 성장하면서 자신이 가진 재능과 열정을 함께 나눌 줄 아는 친구이자 작가의 모습과 겹친다.

「꽃이 진 자리」에서 인물 이 씨는 난만하게 흩어진 꽃잎과 뭉크러진 꽃잎들을 ‘낙화의 시신’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정성스럽게 그 시신들을 흙에 안장한다. 이런 인물의 행위는 하나하나의 존재를 알뜰하고 애틋하게 대하는 작가의 삶의 가치가 표현된 것이리라. 그리하여 꽃이 진 자리에서 새로운 생명을 피우게 될 것이다. 나는 작가가 살아온 삶의 내력이 좋은 이야기를 만든 밑바탕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 이야기들을 잘 품는다면 우리 각자는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손효신 씀)

그는 마당을 일구고 연이어 부엌 바닥도 파헤쳤다. 구들장을 들어낸 것도 구들 밑의 땅마저 밭을 만들기 위한 것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밭을 일구어 나가는 그의 노력은 거의 필사적이었다. 이제 곧 서리가 내릴 텐데……. 갓 일군 밭이랑이 생명을 잉태할 씨앗
들을 기다리며 마당에서 부엌에서 그리고 그의 구들장 방에서 하염없이 입을 벌린 채 겨울을 맞았다.

이제 할아버지를 땅에 묻으러 고향으로 간다. 할아버지를 묻으면서 나는 내 속에 조금이라도 남아있는 가족의 이미지도 함께 묻을 테다. 그러면 이전의 나도 묻히겠지? 나를 어떤 선입견도 없는 백지로 만들고 싶다. 그러면 누가 아는가? 이 캄캄한 세상 저만치에 서서 빛을 반짝이는 등대를 보게 될는지.
형은 아버지의 허벅지가 썩어들어가도록 이 집을 살 때 빌려 쓴 융자금을 갚고 있을 것이고, 아버지의 복부와 흉부가 썩어들어가도록 조카들의 교육보험료를 꼬박꼬박 낼 것이며, 아버지
의 뇌수까지 썩어들어가도록 더 큰 집을 마련할 꿈에 혈안이 되어 있으리라. (아버지의 자리)

다소 작아진 노인의 혀 꼬부라진 목소리가 다시 시작되었다. “산 좋고 물 맑은 곳으로 돌아가라고. 이놈의 세상은 언제부턴지 서로 뜯어먹으려고 눈알이 시뻘게진 각다귀판이 돼버렸어. 각다귀판이! 그러니 어서 돌아가라고. 나쁜 놈들, 땅이 무섭지도, 않느냐 말이야. 즈이 놈들이 그렇게 살다가 땅이 주는 업보를 받고 말 테지. “(용산의 비가)

  작가 소개

지은이 : 한미선
1963년 강원도 묵호(동해시)에서 2남 3녀 중 셋째 딸로 태어났다. 돌담으로 둘러싸인 묵호 집에는 오래된 배롱나무가 있었고, 이 소설집에 자주 등장한다.중학교 입학과 함께 가족을 따라 서울로 이사했고, 1982년 고려대 수학과에 입학했다. 그 시대의 많은 청춘이 그러했듯이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의 경험도 했다. 학교 졸업 후에는 월간 『노동자』 기자, 진보 시사지 월간 『말』의 자유기고가로 활동했다. 30대 초반에는 갈라진 나라를 하나로 이어 보려다 공안 사건에 연루돼 구속되기도 했다. 감옥에서 나와 다른 세상을 겪어보기 위해 1년 가까이 택시 운전을 했고,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10편의 연작소설 창밖으로 세상이 보인다’를 썼다.한동안 전공을 살려 수학 강사로 이름을 날리기도 했다. 최근에는 청소년을 위한 통일 민주 교육을 준비했으나 급작스럽게 뇌졸중이 찾아와 온 힘을 다해 병마와 맞서고 있다.이 책의 마지막에 실린 「희망새를 찾아서」의 마지막 장에 나오는 말처럼 “싸움은 이제부터 시작이다.”라는 생각을 하며 돌담 너머의 삶을 응시하고 있다.저서 : 『그래도 못다 한 이야기 : 전 감사관 이문옥 고백록』 (1991)『김대중·김영삼, 경쟁과 공존의 역사』 (한미선·오연호 공저, 1992)

  목차

1부
구들 밑에 일군 밭 _ 05
개구리의 죽음 _ 21
타인들 _ 45
아버지의 자리 _ 93
용산의 비가 _ 139
산이 흐르다 _ 171

2부(연작) _ 창밖으로 세상이 보인다
새로운 시작은 눈물로 _ 219
창밖으로 세상이 보인다 _ 241
먹이사슬의 꿈 _ 275
부자유친 _ 311
꽃이 진 자리 _ 359
조합장 선거 1 _ 381
조합장 선거 2 _ 407
조상근의 대응 전략 _ 433
돌아서야 할 때 _ 453
희망새를 찾아서 _ 483

추천사·시대의 우울에 담긴 조마조마한 희망 _ 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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