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2022년 《한국문학예술》로 등단한 김윤경 시인의 첫 시집 『애벌레의 꿈』이 문학의전당 시인선 368로 출간되었다. 김윤경은 아직 날것의 이미지를 간직하고 있는 시인이다. 이제 막 첫걸음을 뗀 날것의 무모함이 그를, 여기까지 끌고 왔다. 이 시집을 읽는 독자들은 시인이 품은 ‘애벌레의 꿈’이 원고지가 아니라 화선지에서 ‘우화등선’하게 되는 광경을 목도하게 될 것이다.
출판사 리뷰
■ 해설 엿보기
살다 보면 아무렇지도 않게 잊히는 ‘사실’이 있다. 마땅한 이유 없이, 감정의 동요도 없이 그냥 잊혔지만 되살아오는 순간 쓴물 게우듯 먹먹한 슬픔을 밀어 올리는 것, 가령 ‘인간은 직립보행을 하는 동물이다’와 같은 것이 그렇다. 진화의 결과라는 상식에 의지해서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 것처럼 자주 그 사실의 의미를 잊어버린다. 직립보행은 우리 몸의 목뼈 사용을 변화시켰고, 나아가 선 채로 고개를 젖혀 머리 위를 쳐다볼 수 있게 만들었다. 동물로 지상에 갇혔던 시선을 하늘을 향해 열어주었으며, 천체의 운행을 관찰하면서 시간을 의식하도록 만들었다. 결국, 인간은 대낮에 깨어 있는 상태로도 꿈꿀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
존재의 기표로서 ‘꿈’은 크게 두 개의 차원을 함축한다. 하나는 우리가 필연적으로 자연에 귀속한다는 점, 즉 ‘몸의 존재’로 ‘꿈’을 꾼다는 것이다. 가장 깊이 잠에 빠져든 ‘렘수면’ 상태에도 의식과 비슷한 형태로 꿈을 꾼다는 것을 현대 뇌과학이 밝혀내고 있다. 비록 몸 안에서 일어나지만 “꿈은 영혼의 가장 깊고 가장 친밀한 성소에 있는 숨겨진 작은 문”이라고 칼 융은 정의했다. 인간은 DNA만 같은 게 아니고 무의식도 공유하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다른 하나는 우리가 시간의 차원을 사유하고 상상한다는 의미에서의 ‘꿈’이다. 우리는 언제나 ‘지금-여기’라는 현재에 붙잡혀 있다. 하지만 시간을 소환하는 기억과 소급하는 기대를 통해 단절이 아니라 연속하는 의식의 상태로 존재한다. 나아가 자신과 자기의 확장된 형식으로 세계를 동시에 끌어안고 꿈꿀 수 있게 된다. 모든 희망의 메시지가 여기에 근거한다.
김윤경 시인은 ‘시인의 말’에서 “서툰 감정, 서툰 표현들로/내가 느끼는 세상 모든 아름다운 것들을/담아낼 순 없지만,//그래도/가능성은 갖고 가겠습니다.”라고 겸손한 어조로 첫 시집의 한계와 포부를 모두 밝히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김윤경 시인이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것들’을 포착하려는 시적 지향을 지녔으며, 거기에 닿는 방법으로 ‘가능성’, 즉 세계로의 열림이라는 방식을 취하고자 한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발이 있어도 걸을 수 없고
손이 있어도 잡을 힘이 없고
목소리는 있어도 말할 수 없는
나는 작은 애벌레입니다
꼬물딱꼬물딱 엉덩이만 밀어도 마냥 행복하고
마주 보는 동작 하나만으로도
설익은 노랫가락에도 웃음이 터져 나오는
나는 흥겨운 애벌레입니다
아주 조금 엉덩이 쳐들고
손가락에 힘을 줘 책장을 넘기면
책벌레가 될 수도 있는
나는 행복한 애벌레입니다
화려하지 않아도 좋고
함께 있어 기쁨 되어 좋은,
낯설고 두려운 시선 넘어
한껏 두 팔 벌려 바람이 되고픈
나는 날고픈 애벌레입니다
― 「애벌레의 꿈」 전문
인용 시는 이번 시집의 표제작이다. ‘애벌레’와 ‘꿈’은 시집을 지탱하는 것 같으면서도 다른 두 축을 상징한다. 문법상 ‘애벌레의 꿈’은 애벌레가 소유한, 품은 꿈이므로 애벌레와 분리할 수 없다. 하지만 그 꿈은 애벌레가 다른 상태, 즉 성충이 되었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때 비로소 실현하고자 다시 꿈꿔야 한다는 의미에서 애벌레를 초월한다.
이 작품은 단순하지만 단단한 구조를 가졌다. 각 연은 마지막 행에 “나는 ∽애벌레입니다”라는 명제를 제시한다. 제시된 명제가 아니라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앞에 도치된 구절들을 통해 작품은 등가의 병치가 아니라 변화를 함축한 종결 구조가 된다. 1연은 “작은 애벌레”의 상태에 대한 진술이다. ‘발’, ‘손’, ‘목소리’는 애벌레가 비록 작지만 지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모든 조건을 갖췄다는 것을 암시한다. 2연은 “엉덩이만 밀어도”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어떤 계기에 따른 변화 가능성을, 3연은 “책벌레”가 비유하는 것처럼 내적 동기에 의한 변화 가능성을 보여주고, 이렇게 1~3연의 ‘가능성’이 마지막 4연에 이르러 “낯설고 두려운 시선 넘어/한껏 두 팔 벌려 바람이 되고픈” 꿈의 구체적 형상으로 빚어진다.
― 고영(시인)
어릴 적
식탁 위에 쌓여 있는 약봉지를 보고
약이 먹고 싶어서
아무리 아프다고 꾀병을 부려도
알아주지 않는 엄마가 미웠다
그 꾀병이 무럭무럭 자라
어느덧
자연의 순리를 조금은 알아갈 나이가 되어서
아무리 아프다 힘들다 외쳐도
알아주는 사람 없고
식탁 위에 약봉지만 자꾸 쌓여 간다
내외하듯
약봉지 속의 약들은 여전히
불친절하고
— 「약」 전문
차마 말할 수 없는
무렵이 있었다
그 무렵에
그립다는 말 차마 내뱉지 못하고 꽁꽁 싸매두었던 마음을
그림에 담았다
소일거리였고
소풍이었고
회한이었으며
미련이었던
아버지 손때가 묻은 펜을 잡았다
붓을 잡았다
차마 말할 수 없는
무렵이었다
아버지의 아버지에 의한 아버지를 위한
무렵이었지만
그림은 끝내
붓을 건너가지 못했다
— 「말할 수 없는」 전문
백지 위로 검은 먹선 한 가닥이 지나갈 때마다
나무에 꽃이 피고, 새가 날아간다
그 옛날
용안을 그리고 풍속화를 그리던
도화선 화공들 손길처럼
내 마음에도 색색의 꽃이 피고 지고
새가 날고
툇마루 끝 풍경 소리를 화선지 위에 앉히고
먼 데 산을 끌고 와
바위를 세운다
산문(山門)에 드는 그림자 하나 둘
얼굴을 그릴까 말까
붓끝에 인정(人情)을 둘까 말까
여백에 빠져서
새의 눈치나 살피고 있는
내 마음속 민화
— 「내 마음속 민화」 전문
작가 소개
지은이 : 김윤경
대구에서 태어나 2022년 《한국문학예술》로 등단했다. 충주 〈문향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현재 오홀리압 예술융합연구소 대표를 맡고 있다.
목차
제1부
약 13/말할 수 없는 14/항해자 16/얼음 각시 17/애벌레의 꿈 18/이미와 아직 사이 20/태업 21/내 마음속 민화 22/달팽이 24/기다림 25/기표들 26/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 28/눈물이 왔다 30/백지 31/커피콩과 작두콩 32/삶 34/한 걸음 36
제2부
ING 39/볼링공 놀이 40/어항 42/히어로 43/치료 감옥 44/겨울방학 46/무제 47/저녁노을 48/연꽃 50/엄마를 보내며 51/성장기 52/거울 속으로 54/봄 55/반성 56/창 58/옥수수 59/희망 고문 60/부질없는 걱정 62
제3부
우화등선 65/진품 인간 66/악연 68/월급쟁이 69/별 70/군자 72/중앙탑 73/선물 같은 하루 74/바람이 분다 76/감정조절 77/공습경보 78/소망 80/나의 실체 81/본캐와 부캐 82/이별 84/요셉 85/문청염검신(文淸廉儉信) 86/카르페 디엠 88/공중에 뜬 배 한 척 89/구원 90
해설 고영(시인)/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