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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께
한국문연 | 부모님 | 2023.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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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서 소개

‘이녘’의 시집, 즉 당신의 시집이다. 시집은 당신이 읽어낸 오독의 결과물로써 비로소 완성된다. 당신은 『더께』에 ‘더께’를 덮어주거나 비밀을 벗겨내는 단 한 사람의 저자, 단 한 명의 ‘이녘’이다. 『더께』의 판본은 이 시집을 읽는 ‘당신’의 수만큼 존재한다. 당신이 지금 그곳에서 펼친 ‘이녘’의 시집 『더께』는 잠재성의 텍스트이다. 마치 들뢰즈가 언급한 ‘알’로 존재하는, 빛도 어둠도 아닌 그 무엇의 시작과 끝을 동시에 지닌 잠재적인 책. 무엇이 깨어날지 그 순수한 강렬도를 도무지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로 당신을 초대한다.

오독이 낳은 오해와 오인의 의미들로 ‘더께’에 ‘더께’를 하나 더 이어 하나의 독특하고 창조적인 오독의 다양성을 열어 펼치는 일, 종국엔 독자인 당신이 범인이 되고 목격자가 되고 실종자가 되기도 하는 일. 숨은그림찾기와 출구 없는 미로 게임, N개의 퍼즐 맞추기 혹은 ‘검은 섬’ 탈출 게임이 새로운 참여자를 기다린다.

『더께』의 두께와 가치, 의미들은 오롯이 독자인 당신이 이제부터 오독으로 완성해나갈 일이다. ‘검은 섬’이 열렸다. ‘더께’ 위로 첫발을 내딛는 당신, 거기서부터 오독은 이미 시작되었다.질식에 대한 기록들보증금을 월세로 모두 변제하고 난 뒤, 건물주는 마스터키로 문을 열었다. 세입자는 깊은 잠을 자고 있었다. 너무 오래 누워 있던 탓인지 형체가 녹아가는 중이었다. 현장에서 두툼한 종이책을 들췄을 때 얼굴에 빽빽이 눌어붙은 기호들을 발견하였다. 읽을 수는 없었다. 사람들은 입에서 입으로 들은 바를 옮겼다. 필사하던 공책에서 흐른 잉크가 독극물이라는 말도 있었다. 천문학과 기호학을 독학하여 해독하기 힘든 영역을 넘나들었다는 소문도 나왔다.세입자가 새로 들어왔다. 이번에는 <목구멍의 난제에 대한 몇 가지 증명>이라는 팔백 쪽짜리 도형에 대한 논문집이었다. 스프링 제본된 논문을 들추자 구멍 뚫린 얼굴이 있었다. 구멍 한 개가 관통된 것인지, 다른 구멍 두 개가 뚫리다 보니 맞닿은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얼굴을 이루는 뼛속은 비어 있었다. 이것은 먹고 사는, 이라고 시작되는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그다음 세입자는 안면 압사 사건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다. 보증금은 없었다. 방들은 충분히 어둡고 냉기가 넉넉하게 돌았다. 세입자는 노트북 크기만 한 거울을 세워두었다. 문과 마주 보는 방향이었다. 깨진 유리병 조각들을 주워 늘어놓았다. 벽과 바닥이 닿는 귀퉁이였다. 무료나눔 받은 전신 거울이거나 길가에 내놓은 팔각형 화장 거울을 들여놓기도 하였다. 차츰 벽과 창을 가득 메우고 천정에 샹들리에처럼 늘어뜨려 놓기도 하였다. 그와 이웃이 마주치기도 하였다. 사람들은 그때마다 낯설고 외로워져서 목덜미를 으슬거리곤 하였다. 건물주가 첫 발견자였다. 바닥에 떨어진 기호 하나를 주웠을 때 반사된 그것은 무수히 많은 문장들을 발성하고 있었다. 거울 속의 기호들은 소리를 복사하여 스스로 음향을 만들었다. 한없이 어깨를 부풀게 하다가 가차 없이 듣는 이의 무릎을 꺾어 주저앉게 하기도 하였다. 주소가 잘못 적힌 봉투를 찢어대는 소리가 들렸다. 헐거워진 돌쩌귀가 삐걱대는 소리와 염소가 뿔을 비벼대는 소리도 들렸다. 오래 들고 다녀서 땀에 눅눅해진 전단지가 바닥에 미끄러지고 있었다. 빠르고 불규칙하게 찍히는 개찰구의 교통카드 스치는 소리가 겹쳤다. 더 이상 듣는 이가 해석할 수 없는 영역의 소리와 굳이 알고 싶지 않은 소리들이 유리와 거울과 기호와 발견자 사이에서 되풀이되어 반사되었다. 그는 거울들 속에서 자신을 찾을 수 없었다. 밥숟가락을 입속에서 빼낼 때 이빨 부딪는 소리가 났다. 그는 자신의 얼굴을 쥐어뜯는 소리를 반사시켰다. 사물과 기호의 소리들로 가득 찬 방안에 오직 자신의 얼굴로 자신의 얼굴을 눌러 죽이며 자신의 몸에서 빠져나가는 숫자들을 보았다.
오독친숙함이 모두를 천박하게 해요. 코를 풀고 이를 쑤시고 생선 가시는 씹어요. 뱉어낸 가시에 살점과 가래가 엉겨 있네요. 흠을 견디지 못해 얼굴을 옆 사람의 목덜미 뒤로 감추는군요. 숙덕거리는. 미적지근하게 번지는 웃음. 사랑해야 하므로 고개를 주억거려요. 참을 수 없는 것은 없으나 불콰해진 얼굴로 타인의 머리통을 달걀처럼 품고 싶어요, 흐르는 식은땀. 품기 이전에는 마주친 적이 없는 머리통들에서 미열이 풍겨요. 즐탁하는 시간. 강하게 두드리시오, 발톱이 솟으려 해요. 목에 가시가 걸렸나 보다. 아니, 삼키던 가래가 기도에 걸렸어요. 부화하는 머리통. 짧은 문장은 읽지 못해요. 안긴 문장을 뱉고 싶어요. 할 줄 아는 건 계속 이어지는 중얼거림. 다른 한쪽 겨드랑이에서는 품던 알이 굴러떨어졌어요. 구토하세요. 맘껏 식도를 열어두세요. 우리 너무 오래 만났나 봐요. 당신의 패턴을 벗어야 해요, 아, 나는 생일이 없어요. 부모가 없는데 그런 날이 있을 리가요. 아침이라 여겨지는 어느 날, 해가 깊이 박힌 어느 시간쯤 문득 재생되는 날이라구요. 리셋, 재부팅. 일력을 다르게 기억하는 그런 시간이 있다는 걸 알게 되면요, 그냥 던져졌음을 알게 되는. 생일이 없는 날이 날마다 복사되어 있어요. 보름달이 여러 날째 계속되는 걸 알고 있나요. 대충 아흐레쯤 되었나요. 다르게 기억할 수가 없는걸요. 북동쪽에서 조금은 핥아질 달을 보면서 가장 외로운 시간을 달래요. 짧은 문장들은 복사하기 쉬워요. 구토하세요, 머리통에서 미열이 흘러요.
염소는 사과를 먹지 않아요복숭아는 더욱 안 먹어요.입술에 묻은 팥빙수를 핥으며 손바닥을 펼쳐 소근거려 주어요.나는 낯을 가려요.매실도 안 먹어요.오디도 먹지 않구요.긴 수염을 쓰다듬어 주세요.제 두상은 뒤집어졌어요.내려놓지 않고 띄워야 하는 풍등처럼. 대롱대롱 매달린 알전구 안에서 모래 알갱이들이 흐르네요.아, 바람에 가볍게 흔들리는 그것은벌레들이 파먹은 흔적이네요.잠의 사막에서 흘러내리는 모래인 줄 알았어요.정수리를 긁어주세요. 가볍게 손바닥으로 쓰다듬으면서손끝으로 살짝 두피를 비벼 주세요.뿔이 자라느라 가렵거든요. 딸기향 아이스바를 주세요.얼굴을 알아보지 못하더라도 삐지진 마세요.당신의 냄새와 발목에서 올라오는 기울기로 알아보거든요.아, 제 눈동자에 길게 누운 호라이즌을 알아봐 주셔서 고마워요.다를 뿐이거든요. 이제 팥빙수가 다 녹기 전에 마저 먹을래요.당신은 정수리를 마저 긁어 주세요.

  출판사 리뷰

질식에 대한 기록들

보증금을 월세로 모두 변제하고 난 뒤, 건물주는 마스터키로 문을 열었다. 세입자는 깊은 잠을 자고 있었다. 너무 오래 누워 있던 탓인지 형체가 녹아가는 중이었다. 현장에서 두툼한 종이책을 들췄을 때 얼굴에 빽빽이 눌어붙은 기호들을 발견하였다. 읽을 수는 없었다. 사람들은 입에서 입으로 들은 바를 옮겼다. 필사하던 공책에서 흐른 잉크가 독극물이라는 말도 있었다. 천문학과 기호학을 독학하여 해독하기 힘든 영역을 넘나들었다는 소문도 나왔다.
세입자가 새로 들어왔다. 이번에는 <목구멍의 난제에 대한 몇 가지 증명>이라는 팔백 쪽짜리 도형에 대한 논문집이었다. 스프링 제본된 논문을 들추자 구멍 뚫린 얼굴이 있었다. 구멍 한 개가 관통된 것인지, 다른 구멍 두 개가 뚫리다 보니 맞닿은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얼굴을 이루는 뼛속은 비어 있었다. 이것은 먹고 사는, 이라고 시작되는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그다음 세입자는 안면 압사 사건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다. 보증금은 없었다. 방들은 충분히 어둡고 냉기가 넉넉하게 돌았다. 세입자는 노트북 크기만 한 거울을 세워두었다. 문과 마주 보는 방향이었다. 깨진 유리병 조각들을 주워 늘어놓았다. 벽과 바닥이 닿는 귀퉁이였다. 무료나눔 받은 전신 거울이거나 길가에 내놓은 팔각형 화장 거울을 들여놓기도 하였다. 차츰 벽과 창을 가득 메우고 천정에 샹들리에처럼 늘어뜨려 놓기도 하였다. 그와 이웃이 마주치기도 하였다. 사람들은 그때마다 낯설고 외로워져서 목덜미를 으슬거리곤 하였다. 건물주가 첫 발견자였다. 바닥에 떨어진 기호 하나를 주웠을 때 반사된 그것은 무수히 많은 문장들을 발성하고 있었다. 거울 속의 기호들은 소리를 복사하여 스스로 음향을 만들었다. 한없이 어깨를 부풀게 하다가 가차 없이 듣는 이의 무릎을 꺾어 주저앉게 하기도 하였다. 주소가 잘못 적힌 봉투를 찢어대는 소리가 들렸다. 헐거워진 돌쩌귀가 삐걱대는 소리와 염소가 뿔을 비벼대는 소리도 들렸다. 오래 들고 다녀서 땀에 눅눅해진 전단지가 바닥에 미끄러지고 있었다. 빠르고 불규칙하게 찍히는 개찰구의 교통카드 스치는 소리가 겹쳤다. 더 이상 듣는 이가 해석할 수 없는 영역의 소리와 굳이 알고 싶지 않은 소리들이 유리와 거울과 기호와 발견자 사이에서 되풀이되어 반사되었다. 그는 거울들 속에서 자신을 찾을 수 없었다. 밥숟가락을 입속에서 빼낼 때 이빨 부딪는 소리가 났다. 그는 자신의 얼굴을 쥐어뜯는 소리를 반사시켰다. 사물과 기호의 소리들로 가득 찬 방안에 오직 자신의 얼굴로 자신의 얼굴을 눌러 죽이며 자신의 몸에서 빠져나가는 숫자들을 보았다.

오독

친숙함이 모두를 천박하게 해요. 코를 풀고 이를 쑤시고 생선 가시는 씹어요. 뱉어낸 가시에 살점과 가래가 엉겨 있네요. 흠을 견디지 못해 얼굴을 옆 사람의 목덜미 뒤로 감추는군요. 숙덕거리는. 미적지근하게 번지는 웃음. 사랑해야 하므로 고개를 주억거려요. 참을 수 없는 것은 없으나 불콰해진 얼굴로 타인의 머리통을 달걀처럼 품고 싶어요, 흐르는 식은땀. 품기 이전에는 마주친 적이 없는 머리통들에서 미열이 풍겨요. 즐탁하는 시간. 강하게 두드리시오, 발톱이 솟으려 해요. 목에 가시가 걸렸나 보다. 아니, 삼키던 가래가 기도에 걸렸어요. 부화하는 머리통. 짧은 문장은 읽지 못해요. 안긴 문장을 뱉고 싶어요. 할 줄 아는 건 계속 이어지는 중얼거림. 다른 한쪽 겨드랑이에서는 품던 알이 굴러떨어졌어요. 구토하세요. 맘껏 식도를 열어두세요. 우리 너무 오래 만났나 봐요. 당신의 패턴을 벗어야 해요, 아, 나는 생일이 없어요. 부모가 없는데 그런 날이 있을 리가요. 아침이라 여겨지는 어느 날, 해가 깊이 박힌 어느 시간쯤 문득 재생되는 날이라구요. 리셋, 재부팅. 일력을 다르게 기억하는 그런 시간이 있다는 걸 알게 되면요, 그냥 던져졌음을 알게 되는. 생일이 없는 날이 날마다 복사되어 있어요. 보름달이 여러 날째 계속되는 걸 알고 있나요. 대충 아흐레쯤 되었나요. 다르게 기억할 수가 없는걸요. 북동쪽에서 조금은 핥아질 달을 보면서 가장 외로운 시간을 달래요. 짧은 문장들은 복사하기 쉬워요. 구토하세요, 머리통에서 미열이 흘러요.

염소는 사과를 먹지 않아요

복숭아는 더욱 안 먹어요.
입술에 묻은 팥빙수를 핥으며
손바닥을 펼쳐 소근거려 주어요.
나는 낯을 가려요.
매실도 안 먹어요.
오디도 먹지 않구요.
긴 수염을 쓰다듬어 주세요.
제 두상은 뒤집어졌어요.
내려놓지 않고 띄워야 하는 풍등처럼.
대롱대롱 매달린 알전구 안에서 모래 알갱이들이 흐르네요.
아, 바람에 가볍게 흔들리는 그것은
벌레들이 파먹은 흔적이네요.
잠의 사막에서 흘러내리는 모래인 줄 알았어요.
정수리를 긁어주세요.
가볍게 손바닥으로 쓰다듬으면서
손끝으로 살짝 두피를 비벼 주세요.
뿔이 자라느라 가렵거든요.
딸기향 아이스바를 주세요.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더라도 삐지진 마세요.
당신의 냄새와 발목에서 올라오는 기울기로 알아보거든요.
아, 제 눈동자에 길게 누운 호라이즌을 알아봐 주셔서 고마워요.
다를 뿐이거든요.
이제 팥빙수가 다 녹기 전에 마저 먹을래요.
당신은 정수리를 마저 긁어 주세요.

  작가 소개

지은이 : 김이녘
2020년 <시사사>로 등단하였다. 2023년 시집 <더께>를 펴냈다.

  목차

● 시인의 말

제1부

검은 섬 10
트렁크를 세워 둔 유리 해변 13
장마 16
케이블카 18
관람객 20
옥상에서 하늘을 보던 날 떨어지는 서술어들 22
새였다 25
몇 시일까요 26
나는 오늘도 씁니까 28
우리, 연애하는 중인가요 31
목장의 우산 34
희게 날리는 것을 말하다. 파 36
희게 날리는 것을 말하다. 하 38
질식에 대한 기록들 40
이다 43
환승센터 44
겨울잠을 자야 해요 46
2월 48
두 개의 브라운관 52
불면하시나요 54
파묘 56
아홉 58
사막오렌지수첩 60

제2부

대외적 가족 64
식사 ― ghrelin 66
수저는 없다 68
카네이션 70
냉동실 72
만가 73
여름 74
멀바우 75
사육장 안에서 76
아니오, 지금 일하는 중이에요 77
달의 계절 80
지붕 82
울어요 84
웃다 86
버터플라이 잭나이프 88
인플루엔자 90
고등어 섬 92
하혈 94
엄마가 나를 팔았다 96

제3부

설명서 98
오독 100
오독 102
오독 103
오독 108
박수를 치는 110
소문을 잡숫는 거대한 입술에서 알지 못할 것들이 112
젓갈스러운 114
영화를 보러 간 건 아니다 115
혓바닥을 뱉어 봐 116
이상한 초대 118
염소는 사과를 먹지 않아요 120

▨ 김이녘의 시세계 | 김효은 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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