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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시 한 잔
오늘도 시를 읽고, 쓰고, 가슴에 새기다
북로그컴퍼니 | 부모님 | 2024.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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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서 소개

뜨겁게 끓고 난 차는 온몸에 퍼져 따스함으로 스며든다. 시를 읽는 일도 그렇다. 지독히 아프고, 지독히 외롭고, 지독히 사랑한 작가의 뜨거움이 마음속에 스며들 때면 때론 들뜨고 때론 훅 꺼졌던 하루가 따뜻하게 채워지는 걸 느낀다. 그래서 우리에겐 매일 매일의 시가 필요하다.

《매일 시 한 잔》은 오랜 시간 우리의 마음을 따스하게 채워준 시 79편을 직접 따라 쓸 수 있게 만든 감성 라이팅북이다. 매일 조금씩 달라지는 나의 마음을 어루만져줄 오늘의 시 한 편을 찾아보자. 차를 마시듯 시 한 편을 천천히 읽고, 따라 쓰고, 다시 읊조리며 충분히 음미해보자. 시와 함께하는하루는 분명 어제보다 더 풍성해져 있을 것이다.

  출판사 리뷰

나를 위해 준비하는,
매일 매일의 따뜻한 시(詩) 한 잔


뜨겁게 끓고 난 차는 온몸에 퍼져 따스함으로 스며든다. 시를 읽는 일도 그렇다. 지독히 아프고, 지독히 외롭고, 지독히 사랑한 작가의 뜨거움이 마음속에 스며들 때면 때론 들뜨고 때론 훅 꺼졌던 하루가 따뜻하게 채워지는 걸 느낀다. 그래서 우리에겐 매일 매일의 시가 필요하다.
《매일 시 한 잔》은 오랜 시간 우리의 마음을 따스하게 채워준 시 79편을 직접 따라 쓸 수 있게 만든 감성 라이팅북이다. 매일 조금씩 달라지는 나의 마음을 어루만져줄 오늘의 시 한 편을 찾아보자. 차를 마시듯 시 한 편을 천천히 읽고, 따라 쓰고, 다시 읊조리며 충분히 음미해보자. 시와 함께하는하루는 분명 어제보다 더 풍성해져 있을 것이다.

음미할수록 깊은 맛이 나는 명시 79편,
캘리그라피와 함께하는 감성 라이팅북


이 책은 시대와 국경을 초월해 많은 이의 마음을 어루만져준 시인들의 시를 담고 있다. 윤동주·한용운·김소월 등 이미 세상을 떠나고 없지만 우리 곁에 아름다운 시로 남은 시인들, 나태주·도종환·나희덕 등 지금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시인들, 라이너 마리아 릴케·윌리엄 버틀러 예이츠·칼릴 지브란 등 세계 문학사에 큰 발자국을 남긴 외국 시인 등 58명의 작가들이 쓴 명시 79편을 만날 수 있다. 여기에 7편의 영시(英詩) 원문을 실어, 시인의 마음에 온전히 가 닿을 수 있도록 했다. 영시가 주는 특별함을 마음껏 누려보자. 시를 즐기는 또 하나의 특별한 방법을 우리는 이렇게 알아갈 수 있다.
오늘 내 마음을 가장 잘 표현해줄 시 한 편을 찾아 책을 펼치면, 이 시대 최고의 감성 캘리그라퍼 배정애의 캘리그라피가 우리를 맞이한다. 그녀의 붓끝에서 특유의 감수성으로 재탄생한 명시는 보는 것만으로도 봄날의 설렘과 위안을 선물한다.

읽고, 쓰고, 새기며
매일 시 한 잔을 마시다


시를 읽는 일은 나 자신과 만나는 일이기도 하다. 처음 사랑을 만난 날의 황홀함, 사랑하는 이에게 내 마음을 전하던 날의 떨림, 평생 함께할 줄 알았던 사람이 영영 떠나버린 날의 슬픔…. 나보다 먼저 그 감정에 흐느꼈을 시인들의 마음이 절절히 담긴 시를 읽다 보면, 모든 시는 곧 내 이야기 내 감정인 것처럼 느껴진다. 그 시인들과 마주 앉아 시시콜콜 내 마음을 전하듯 시를 읽고, 쓰고, 마음에 새겨보자.
글씨 쓰는 게 망설여진다면 배정애 작가의 감성적인 캘리그라피를 보며 무엇이든 적어보자. 종이에 쓸 때만 느낄 수 있는 감정이 선물처럼 불쑥 고개를 내민다. 그렇게 매일의 시 한 잔과 함께한다면 나의 오늘이, 순간의 내 마음이 점점 소중해짐을 느낄 수 있다.




  작가 소개

지은이 : 강은교
연세대학교 영문학과 및 같은 대학원 국문학과를 졸업했으며, 1968년 《사상계》 신인문학상으로 등단했다. 시집 『바리연가집』, 『초록 거미의 사랑』 등을 지었으며 산문집으로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등이 있다. 한국문학작가상, 현대문학상, 정지용문학상, 유심작품상, 박두진문학상, 구상문학상 등을 받았으며, 현재 동아대학교 명예교수이다.

지은이 : 고재종
1984년 『실천문학』 신작시집으로 등단. 시집 『날랜 사랑』 『앞강도 야위는 이 그리움』 『그때 휘파람새가 울었다』 『꽃의 권력』 『고요를 시청하다』 등 다수. 에세이집 『사람의 길은 하늘에 닿는다』 『시간의 말』 등이 있음. 신동엽문학상, 시와시학상 젊은시인상, 소월시문학상, 영랑시문학상, 송수권 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지은이 : 곽재구
1981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사평역에서」가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사평역에서』, 『전장포아리랑』, 『한국의 연인들』, 『서울 세노야』 등이 있고, 산문집 『곽재구의 포구기행』, 『곽재구의 예술기행』, 『우리가 사랑한 1초들』 등이 있다. 동화집으로는 『아기참새 찌꾸』, 『낙타풀의 사랑』,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짜장면』 등이 있다. 신동엽문학상, 동서문학상, 대한민국문화예술상 등을 받았다.

지은이 : 구스타보 아돌포 베케르
스페인의 대표적 낭만주의 시인인 베케르는 가난으로 점철된 짧은 생애를 보냈다. 그는 진정한 낭만주의자로 은둔의 삶을 추구했고 절망적인 사랑에 시달렸다. 어릴 적부터 문학과 음악, 회화에 매력을 느꼈고, 해양 학교에 입학했다가 바로 공부를 그만두었다. 마드리드로 이주한 후에 재무부에서 한직에 근무했지만 시를 쓴다는 사실이 발각되어 해고당했다. 베케르는 무엇보다 시인이었지만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전설과 민담, 괴담을 바탕으로 22편의 짧은 이야기를 쓰기도 했다. 1861년부터 1863년 사이에 발표된 「혼령의 산 El Monte de las animas」도 그중의 하나다. 베케르는 34세에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지은이 : 권정생
1937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났습니다. 해방 이듬해인 1946년 귀국했으며, 안동 일직국민학교를 졸업했습니다. 1968년부터 교회 종지기 일을 하며 동화를 썼고, 그 뒤 교회 뒤편에 있는 빌뱅이 언덕 아래 작은 오두막집을 짓고 살다가 2007년 5월 17일 세상을 떠났습니다. 《강아지똥》 《사과나무 밭 달님》 《하느님의 눈물》 《몽실 언니》 《초가집이 있던 마음》 《도토리 예배당 종지기 아저씨》 《점득이네》 《하느님이 우리 옆집에 살고 있네요》 《짱구네 고추밭 소동》 《오소리네 집 꽃밭》 《먹구렁이 기차》 《밥데기 죽데기》 《또야 너구리가 기운 바지를 입었어요》 《비나리 달이네 집》 《랑랑별 때때롱》 《용구 삼촌》 등의 동화책을 펴냈습니다. ※권정생어린이문화재단 홈페이지(http://www.kcfc.or.kr)에서 더 많은 이야기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지은이 : 권태응
호는 동천(洞泉). 1918년 충북 충주에서 태어났다.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37년 일본 와세다(早稻田)대학 정경학부에 입학했다. 1939년 ‘독서회 사건’으로 일경에 검거되어 1년간 감옥 생활을 했다. 폐결핵 3기의 몸으로 귀국하여 요양생활을 하며 1944년 초부터 시조와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이후 동시 쓰기에 몰두하여 작고하기 전까지 『송아지』 『하늘과 바다』 『우리 시골』 『어린 나무꾼』 『물동우』 『우리 동무』 『작품』 『동요와 또』 『산골 마을』 등 아홉 권의 육필 동시집을 손수 엮었다. 1947년 잡지 『주간 소학생』 45호에 동요 「어린 고기들」을 발표했고, 이듬해 동요집 『감자꽃』(글벗집)을 출간했다. 1951년 전쟁 통에 병세가 악화되어 34세 나이로 별세했다. 1968년 충주 탄금대 공원에 「감자꽃」 노래비가 세워졌고, 1995년 동시선집 『감자꽃』(창작과비평사)이 간행되었다. 1997년부터 충주에서 시인을 기리는 문학제가 열리고 있으며, 2005년 정부에서는 독립유공자로서의 공훈을 인정하여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지은이 : 김광균
1914년 개성에서 태어나서 개성상업학교를 졸업했다. 1926년 『중외일보』에 「가는 누님」을 발표하면서 등단했고 1939년 『와사등』을 시작으로 『기항지』, 『황혼가』, 『추풍귀우』, 『임진화』 등의 시집을 펴냈다. 자오선 동인으로도 활동했으며 1989년 지용문학상을 받았다. 1993년 부암동 자택에서 작고하였다.

지은이 : 김기림
1908년 5월 11일(음력 4월 12일) 함경북도 학성군(후에 성진으로 편입됨) 학중면 임명동 275번지에서 부친 김병연과 모친 밀양 박씨 사이의 6녀 1남 중 막내로 태어났다. 본관은 선산(善山)이며, 아명은 인손(寅孫), 호는 편석촌(片石村)이다. 등단 초기 간간이 G. W.라는 필명으로 활동한 바도 있다.어린 시절 고향의 임명보통학교에 입학, 졸업하고 한동안 서당에서 한학을 배운 적이 있다. 13세에 성진의 농학교(중등과정)에 진학하였으나 1년 수학 직후 서울로 올라와 보성고보에 다니게 된다. 보성 3학년 재학 도중 갑작스럽게 병을 얻어 고향에 내려와 요양을 하게 되는데, 건강을 회복하고 난 후 학교로 복학하지 않고 곧바로 일본 유학을 떠나 당시 도쿄 소재의 메이쿄(名敎)중학[현재는 도쿄 근처 지바(千葉) 현 우라야스(浦安) 시 소재의 도카이(東海)대학 부속 우라야스고교]에 편입, 졸업한다. 졸업 이후 1926년 봄, 니혼(日本)대학 전문부 문학예술과로 진학하고 1930년 봄에 동 대학을 수료한다.대학 재학 기간 중 서구 모더니즘의 여러 사조에 깊은 영향을 받은 그는 귀국과 더불어 ≪조선일보≫ 사회부, 학예부 기자로 근무하면서 시 창작과 비평 발표 등의 문필 활동에도 힘쓴다. 지금까지 알려진 그의 최초의 글은 니혼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한 직후인 1930년 4월 27일에서 5월 3일까지 발표한 <오후와 무명작가들?일기첩에서>로 기록되고 있다. 일부에서는 이를 평론으로 분류하기도 하나, 엄밀히 말한다면 문학적 감상을 섞은 단상 형태의 수필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 본격적인 의미에서 최초의 평론은 같은 해인 1930년 7월 24일에서 30일까지 ≪조선일보≫ 지상에 편석촌이라는 필명(호)으로 총 6회에 걸쳐서 연재한 <시와 시인의 개념-근본적 의혹에 대하여>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이후 그는 활발하게 서구 모더니즘에 영향을 입은 시작 활동과 비평 활동을 꾸준히 병행하면서 당대 문단의 중심을 향해 자신의 입지를 넓혀 나간다. 그런 와중에 1933년 이태준, 정지용 등과 함께 모더니즘 문인들의 친목 단체인 ‘구인회’를 결성하여 모더니즘문학의 보급과 활성화를 위해 노력한다. 1935년은 그의 문단 활동이 정점에 이른 시기다. 대표작이기도 한 장시 <기상도>를 잡지 ≪중앙≫과 ≪삼천리≫에 연재하는 한편, 그의 초기 모더니즘시론의 핵심을 담았다고 평가받는 <오전의 시론> 시리즈를 ≪조선일보≫ 지면에 장기간에 걸쳐 의욕적으로 연달아 발표한다.그러나 그는 여기서 만족하지 않고 한 단계 도약을 위해 스스로 모험을 감행한다. 보다 체계적이고 심도 있는 학문 연구를 위해 재도일하여 도호쿠(東北)제대 영문과에 입학한 것이다. 도호쿠제대 재학 기간 동안 조선 내 그의 문단 활동은 잠시 주춤하는 듯한 인상을 보이기도 하나, 이 기간 그는 영문학의 새로운 학문적 원리와 이론들을 받아들여 자신의 문학관을 심화하는 한편, 보다 폭넓은 사회 역사적·철학적 토대 위에 종래 자신이 추구했던 모더니즘문학 운동의 진로에 대해 본격적으로 고민하기 시작한다.1939년 동 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한 그는 조선일보사 기자로 복직함과 함께 조선 문단 전면에 재등장한다. 복귀 후 한동안 문단 활동에 주력하지만, 1940년대로 넘어서자 점차 조여드는 일제의 압박에 회의와 위기감을 느끼고 고향으로 내려가 한동안 절필 상태로 지내게 된다. 친일 문학인들과 단체의 끈질긴 동참 권유를 뿌리치고 긴 침묵의 기간을 보낸 것이다.1945년 해방 이후 다시 가족과 더불어 서울로 올라온 그는 그간의 침묵을 만회라도 하듯 문단과 학계 양쪽에서 왕성한 활동력을 보여 준다. 그러나 1950년 6·25동란이 발발된 직후 서울 거리에서 북한 기관원들에게 연행당한다. 그 뒤 북으로 이송된 것으로 알려졌으나, 북한 내에서 그의 행적이나 활동에 대해서는 현재까지 뚜렷하게 드러난 바가 없다. 시론집으로 ≪시론≫(1947)과 ≪시의 이해≫(1950) 등이 있으며 시집으로는 ≪기상도≫(1936), ≪태양의 풍속≫(1939), ≪바다와 나비≫(1946), ≪새 노래≫(1948) 등이 있다.

지은이 : 김소월
고향이 평안북도 정주이고 그곳에서 성장하고 생활하고 사망했기 때문에 전기적 사실을 확인하기가 어렵게 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와 관련된 사람들의 회고담이나 신문 잡지에 난 관련 기사를 통해 그의 생애를 재구해 볼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소월의 본명은 정식(廷湜)으로 1902년 음력 8월 6일(양력 9월 7일) 평안북도 구성군 서산면 외가에서 태어났다. 남산학교를 졸업하고 14세 때 세 살 연상인 홍실단(원명은 홍상일)과 결혼했으며 상급 학교로 진학하지 못하고 3년간 농사일을 거들었다. 그의 재능을 아깝게 여긴 동네 사람들의 도움으로 1917년 오산학교 중학부에 입학해 수학하던 중 은사인 김억을 만나 시를 쓰게 되었다. 오산학교를 다니던 1919년 3월 3·1운동이 일어나자 동급생들과 함께 만세 운동에 참여해 학업을 중단하게 되고 오산학교도 임시 폐교되었다.1920년 스승인 김억의 주선으로 ≪창조≫에 <낭인의 봄> 등의 시를 소월이라는 필명으로 발표했다. 이때 발표한 작품은 <낭인(浪人)의 봄>, <야(夜)의 우적(雨滴)>, <오과(午過)의 읍(泣)>, <그리워>, <춘강(春崗)> 등 다섯 편이고 그 후 ≪학생계≫, ≪동아일보≫ 등에 작품을 발표했으나 소월은 이 초기의 작품들을 시집에 수록하지 않았다. 소월은 오산학교에 이어 학업을 마치기 위해서 서울로 이주해 1922년 4월에 배재고등보통학교 4학년으로 편입했다. 1923년 3월에 배재고보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상과대학 예과에 입학했으나 학자금 조달에도 어려움이 있고 9월 간토대지진이 일어나자 10월에 고향 정주로 돌아왔다. 1924년에 김동인, 이광수, 김억, 주요한, 김찬영, 전영택, 오천석 등과 함께 ≪영대≫의 동인으로 참여했으며 1925년 12월 26일 자로 시집 ≪진달래꽃≫을 간행했다. ≪진달래꽃≫은 상당히 판매가 되었는지 발행처는 같은 매문사로 되어 있지만 총판이 ‘중앙서림’으로 되어 있는 것과 ‘한성도서주식회사’로 되어 있는 것의 두 판본이 유통되었고 그 원본이 각기 현재 전해지고 있다.1924년 이후에는 그의 처가가 있는 평안북도 구성군 남시로 이주해 생활했으며 1926년 8월부터 동아일보 지국 일을 맡아 본 것으로 되어 있다. 이후 1년에 한두 편씩 작품을 발표했고 1932년과 1933년에는 작품을 발표하지 않았다. 1934년에 다시 몇 편의 시를 발표했으나 그의 생활은 극도로 피폐해졌던 것 같다. 지국 경영은 일찍이 작파해 남에게 넘겼고 시대와 자신의 삶에 대한 울분이 겹쳐 거의 매일 술을 마셨으며 아내에게 살아 봐야 낙이 없으니 같이 죽자는 말을 여러 차례 했다고 한다. 1934년 12월 23일 밤에도 술에 취해 잠이 들었는데 새벽에 남편이 괴로워하는 소리를 잠결에 듣고 불을 켜 보니 아편 덩어리를 입가에 흘린 채 죽어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소월의 사망 일자를 1934년 12월 24일 아침으로 보고 있다.소월의 사망이 알려지자 12월 30일 자로 ≪조선중앙일보≫와 ≪동아일보≫에 사망 관련 기사가 실리고 1935년 1월에 서울 종로 백합원에서 소월 추모회가 개최되었다. 여기서 김억은 소월에 대한 추모사를 낭독하고 그것을 ≪조선중앙일보≫(1935. 1. 22~26)에 <요절한 박행의 시인 김소월의 추억>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했다. 1939년 12월 김억이 소월의 시를 선정하고 다시 편찬해 박문출판사에서 ≪소월시초≫를 출간했다.

지은이 : 김영랑
전라남도 강진의 부유한 집안에서 장남으로 태어난 김영랑의 본관은 김해金海이며 본명은 김윤식金允植이다. 영랑永郞은 아호인데 《시문학詩文學》에 작품을 발표하면서부터 사용하기 시작했다. 1915년 강진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혼인했으나 불과 1년 반 만에 부인과 사별했다. 그 후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관에서 영어를 공부하고 1917년 휘문의숙徽文義塾(후에 ‘사립휘문고등보통학교’로 개칭)에 입학하여 문학에 대한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때 휘문의숙에는 홍사용, 안석주, 박종화 등의 선배와 정지용, 이태준 등의 후배, 그리고 동급반에 화백 이승만이 있어서 문학적 안목을 키우는데 직간접으로 도움을 받았다.휘문의숙 3학년 때인 1919년에 3·1운동이 일어나자 고향 강진에서 거사하려다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6개월간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0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아오야마[靑山] 학원 중학부를 거쳐 같은 학원 영문학과에 진학했다. 이 무렵 독립투사 박렬, 시인 박용철과도 친교를 맺었다. 그러나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인해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 후 고향에 머물렀다. 1925년에 개성 출신 김귀련과 재혼했다. 광복 후 은거생활에서 벗어나 사회에 적극 참여하여 강진에서 우익운동을 주도했고, 대한독립촉성회에 관여하여 강진대한청년회 단장을 지냈으며, 1948년 제헌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낙선했다. 1949년에는 공보처 출판국장을 지냈으며, 평소 음악에 대한 조예가 깊어 국악이나 서양 명곡을 즐겨 들었고, 축구와 테니스 등 운동에도 능하여 비교적 여유 있는 삶을 영위했다. 9·28수복 하루 전인 9월 27일 길에서 유탄에 맞아 세상을 떠났다.저서로는 <내 마음 아실 이>, <가늘한 내음>, <모란이 피기까지는> 등의 작품이 실린 《영랑시집永郞詩集》(1935)과 《영랑시선》(1949), 유고시집 《모란이 피기까지는》(1981) 등이 있다.

지은이 : 김춘수
경상남도 통영시 동호동에서 출생했다.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1943년 니혼대학(日本大學) 예술학과 3학년에 재학 중 중퇴하였다. 경북대 교수와 영남대 문리대 학장, 제11대 국회의원, 한국시인협회장을 역임했고, 제2회 한국시인협회상, 대한민국예술원상, 문화훈장(은관) 등을 수상하였다. 1945년 유치환, 윤이상, 김상옥 등과 〈통영문화협회〉를 결성하면서 본격적인 문학 활동을 시작했으며, 1946년 광복 1주년 기념 시화집 《날개》에 〈애가〉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대구 지방에서 발행된 동인지 《죽순》에 시 〈온실〉 외 1편을 발표하였다. 1948년에 첫 시집 《구름과 장미》를 내며 문단에 등단한 이후, 〈산악〉, 〈사〉, 〈기(旗)〉, 〈모나리자에게〉를 발표해 주목을 받았다. 주로 《문학예술》, 《현대문학》, 《사상계》, 《현대시학》 등의 잡지에 작품을 발표하였고, 평론가로도 활동하였다. 초기에는 릴케의 영향을 받아 삶의 비극적 상황과 존재론적 고독을 탐구하였으며, 1950년대에 들어서면서 사실을 분명히 지시하는 산문 성격의 시를 써 왔다. 그는 사물의 이면에 내재하는 본질을 파악하는 시를 써 ‘인식의 시인’으로도 일컬어진다. 시집으로 첫 시집 외에 《늪》, 《기》, 《인인(隣人)》, 《꽃의 소묘》,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 《김춘수시선》, 《김춘수전집》, 《처용》, 《남천(南天)》, 《꽃을 위한 서시》, 《너를 향하여 나는》 등이 있으며, 시론집으로 《세계현대시감상》, 《한국현대시형태론》, 《시론》 등이 있다. 이 외에도 《한국의 문제시 명시 해설과 감상》(공저) 등의 저서가 있다.

지은이 : 김형영
시인. 1966년 《문학춘추》 신인작품, 1967년 문공부 신인예술상 수상. 시집 『침묵의 무늬』 『모기들은 혼자서도 소리를 친다』 『새벽달처럼』 『홀로 울게 하소서』 『낮은 수평선』 『나무 안에서』 『땅을 여는 꽃들』 『화살시편』 『겨울이 지나간 자리에 햇살이』 등. 현대문학상, 한국시인협회상, 한국가톨릭문학상, 육사시문학상, 구상문학상, 박두진문학상, 신석초문학상 수상.

지은이 : 나태주
1945년 충남 서천에서 태어났다. 1963년 공주사범학교를 졸업하고 1964년부터 43년간 초등학교 교단에 섰으며, 2007년 공주 장기초등학교 교장으로 정년 퇴임하면서 황조근정훈장을 받았다.197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1973년 첫 시집 《대숲 아래서》를 출간했다. 《꽃을 보듯 너를 본다》《풀꽃》《너무 잘하려고 애쓰지 마라》를 비롯하여 시집, 산문집, 시화집, 선시집, 동화집 등 190권이 넘는 책을 썼다.한국시인협회장, 공주문화원장 등을 역임했고, 김달진문학상, 소월시문학상, 흙의문학상, 충청남도문화상, 현대불교문학상, 박용래문학상, 시와시학상, 편운문학상, 한국시인협회상, 고운문화상, 정지용문학상, 공초문학상, 유심작품상, 난고문학상, 김관식문학상, 윤동주문학대상 등을 수상했다. 2014년부터는 나태주풀꽃문학관을 설립하고 운영하면서 풀꽃문학상과 해외풀꽃시인상을 제정하여 시상하고 있다.

지은이 : 나희덕
198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뿌리에게』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그곳이 멀지 않다』 『어두워진다는 것』 『사라진 손바닥』 『야생사과』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파일명 서정시』 『가능주의자』, 시론집 『보랏빛은 어디에서 오는가』 『한 접시의 시』, 산문집 『반통의 물』 『저 불빛들을 기억해』 『한 걸음씩 걸어서 거기 도착하려네』 『예술의 주름들』 등이 있다. 현재 서울과학기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지은이 : 도종환
1954년 충북 청주에서 태어났다. 충북대 사범대 국어교육과를 졸업하고 충남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시집으로 『고두미 마을에서』 『접시꽃 당신』 『흔들리며 피는 꽃』 『부드러운 직선』 『해인으로 가는 길』『세시에서 다섯시 사이』 『사월 바다』 등이 있으며, 산문집으로 『사람은 누구나 꽃이다』 『그대 언제 이 숲에 오시렵니까』 『너 없이 어찌 내게 향기 있으랴』 『누군가를 사랑하면 마음이 선해진다』 등이 있다. 정지용문학상, 윤동주상 문학부문 대상, 백석문학상, 신석정문학상 등을 수상했으며, 제19~20대 국회의원,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을 역임했다. 현재 제21대 국회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지은이 : 라빈드라나드 타고르
1861년 5월 7일 인도 콜카타에서 출생. 아버지 마하리시 데벤드라나트 타고르(Maharishi Devendranath Tagore)의 열네 번째 막내로 출생함.1873년 그의 첫 장시 〈동경(Abhilash)〉를 씀.1876년 어머니 영면함(첫번째 육친의 죽음을 체험).1878년 영국을 방문하고 벵골로 돌아옴.1879년 시〈난파선〉 완성.1883년 12월 9일 바바타리니(Bhavatorani)와 결혼, 결혼 후 음리날리니(Mrinalini)로 개명.1884년 장시 〈봐누싱하 타쿠르의 노래의 꽃다발〉 출간.1887년 잡지 《실습(Sadhana)》를 창간.1891년 서간집 〈벵갈의 섬광(A Glimpse of Bengal)〉 씀.1892년 희곡 〈치트랑가다(Chitrangada)〉 출판.1896년 시집 《차이탈리(Chaitali)》 출판.1901년 산띠니께딴에 학교 설립. 《벵골평론》 창간.1902년 아내가 사망하고 두 아들을 잃음.1910년 희곡 〈암실의 왕〉 출간.1911년 희곡 〈우체국〉 출간.1912년 국의 인도협회에서 <기탄잘리> 출판(Yeats의 서문), 미국 방문.1913년 시집 《기탄잘리》로 노벨문학상 수상. 〈정원사〉 〈생 의 실현〉 〈초승달〉 〈치트라〉 출판.1915년 간디와 처음 만남. 영국의 조지 5세로부터 나이트(Knight) 작위 받음.1916년 일본 방문, 미국 방문, 〈시들〉 〈열매 모으기〉 〈굶주린 돌〉 〈길잃은 새들〉 출판함.1917년 〈나의 회상기〉 희곡 〈봄의 윤회〉 〈국가주의〉 〈인격론〉 출판.1918년 단편 〈애인의 선물〉 〈교차로〉 〈이모〉, 단편집 〈타고르 단편집〉 〈앵무새 훈련〉 출판.1919년 영국의 대학살 감행을 보고 나이트 사임. 〈가정과 세계〉 〈망명자〉등 출판. 로맹 롤랑과 만남.1920년 뷔슈바 바라티의 설립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영국으로 건너감.1921년 〈운명의 난파〉 〈상상의 유해〉 등 출판함. 산띠니 께딴 대학 설립, 불란서에서 강연.1922년 〈창조적 통일〉 출판함. 일본 방문.1924년 〈고라〉 〈작별의 저주〉 출판함.1925년 부에노스아이레스 방문. 희곡 〈붉은 유도화〉 〈사 중주〉 등 출판함.1926년 이탈리아 방문. 크로체, 듀아벨과 만남.1927년 동남아시아 여행. 싱가포르, 말라카, 쿠알라룸푸르, 자카르타, 자바 등지를 방문.1928년 〈반딧불〉 〈교류〉 〈최후의 시〉 〈모화〉 〈숲의 소리〉 출판.1929년 캐나다 방문, 일본 방문. 〈노래의 꽃다발〉 출판.1930년 파리 방문. 앙드레 지드와 만남. 옥스포드 대학에 서 〈인간의 종교〉 강연. 러시아 방문. 파리의 삐가르 화랑에서 개인 미전.1931년 독일 방문. 아인슈타인과 대화. 〈어린이〉 〈인간의 종교〉 출판. 벨린 모래르 화랑에서 개인 미전.1932년 페르시아 방문. 간디가 단식으로 빈사상태에 이르자 감옥으로 그를 방문. 〈황금의 배〉 출판.1940년 〈나의 소년 시절〉 출판. 간디 부처가 산띠니께딴 방문. 옥스퍼드대 명예 박사학위 수여.1941년 시 〈그대의 창조의 길을〉을 마지막으로 구술함. 8월 7일 타계함. 기타 수많은 작품들(문학, 미술, 음악, 논문 등)을 남기고 있다.

지은이 : 라이너 마리아 릴케
1875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지배를 받던 체코 프라하의 독일계 가정에서 태어났다. 1985년 국립 프라하대학교에 입학했고 문학과 철학 등을 공부했다. 이듬해 뮌헨대학교에서 예술사, 미학 등을 수학했고, 뮌헨에서 루 안드레아스 살로메를 만났다. 열아홉 살 때 첫 시집 『삶과 가곡』(1894)을 자비로 출간했고, 『가신봉폐』(1895), 『꿈의 왕관을 쓰고』(1897), 『강림절』(1898) 등 낭만주의 경향의 시집들, 이탈리아 여행기 『피렌체 일기』(1898), 체코 독립운동을 다룬 단편집 『프라하의 두 이야기』(1899), 로댕의 예술철학을 담은 『오귀스트 로댕』(1903)과 이때의 영감으로 완성한 『신시집』(1907) 등을 펴냈다. 1901년 로댕의 제자 클라라 베스트호프와 결혼했고, 클라라와 헤어진 후 로마에 머물며 20세기 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 중 하나로 손꼽히는 반자전적인 시적 소설 『말테의 수기』(1910)를 완성했다. 1911년, 두이노성에서 겨울을 보내며 1차 세계대전의 영향과 우울증으로 완성에 십 년이 걸린 만년의 대작 『두이노의 비가』(1923)를 쓰기 시작했다. 말년에 스위스의 뮈조트성에 머물며 폴 발레리 등과 교유했고, 1926년 백혈병으로 발몽요양소에서 눈을 감았다.

지은이 : 문정희
1947년 전남 보성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성장했다. 1969년 《월간문학》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남자를 위하여』, 『오라, 거짓 사랑아』, 『양귀비꽃 머리에 꽂고』, 『다산의 처녀』, 『나는 문이다』, 『응』, 『지금 장미를 따라』, 『작가의 사랑』 등 다수의 시집과 장시집을 비롯해 『시의 나라에는 매혹의 불꽃들이 산다』 등의 에세이집이 있다. 현대문학상, 소월시문학상, 정지용문학상, 육사시문학상, 청마문학상, 목월문학상과 대한민국 문화예술상을 수상했으며, 스웨덴 하뤼 마르틴손 재단이 수여하는 시카다(Cikada) 상을 수상했다. 고려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 동국대학교 석좌교수를 역임했다. 14권의 시집이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스페인어 등 10개 언어로 번역되었다.

지은이 : 조지 고든 바이런
1788년 1월 22일 영국의 런던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유서 깊은 귀족 가문이었지만, 세상 사람들의 빈축을 사 악명이 높기도 했다. 그의 아버지 잭은 이런 바이런 집안의 전형적인 인물로 재혼을 한 후에도 다시 방탕한 생활을 하고서 가족을 버리고 프랑스로 도피해 거기서 비참하게 객사하고 말았다. 그러자 캐서린은 세 살 난 외아들 바이런을 데리고 그녀의 고향인 스코틀랜드 애버딘(Aberdeen)으로 돌아갔다.어린 시절 어머니와 함께 애버딘으로 가서 적은 수입으로 세를 얻어 살았던 그는, 절름발이라는 사실에 매우 민감했던 소년 시절에 애버딘 그래머 스쿨(Aberdeen Grammar School)에 다녔다. 그가 열 살 때 자식 없이 죽은 부도덕한 큰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남작의 작위를 물려받아 ‘바이런 경’이라는 칭호를 얻게 되고 큰할아버지의 재산을 물려받게 되자, 어머니는 그를 데리고 잉글랜드에 있는 본가인 뉴스테드(Newstead)로 돌아갔다. 변호사인 존 핸슨(John Hanson)의 도움으로 바이런은 제대로 된 치료를 받고 1799년 가을에 덜위치(Dulwich)에 있는 학교에 가기도 했다.1801년에 바이런은 해로 스쿨(Harrow School)에 입학했고 곧이어 그는 케임브리지대학으로 진학하게 되는데, 학창 시절 동안 학교 공부에는 거의 신경을 쓰지 않고,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시를 쓰고 소설과 역사책을 즐겨 읽었다. 또한 그는 선천적으로 불구인데도 운동을 좋아했고 술과 나쁜 친구와 천박한 여자들을 접하고 도박에도 손을 대 빚을 지는 등 무절제하고 방탕한 생활을 했다. 그리고 진보적인 휘그(Whig)당에 관심을 갖기도 했다. 1807년 여름 바이런은 그의 초기 시들을 묶어서 11월에 ≪덧없는 시편들(Fugitive Pieces)≫이라는 시집을 자비로 인쇄했다. 그리고 이듬해 6월에는 열아홉 살의 나이에 처음으로 시집 ≪한가한 시간(Hours of Idleness)≫을 정식 출간했다. 하지만 이 시집이 <에든버러 리뷰(Edinburgh Review)>에 의해 혹평을 받자, 그는 1809년에 <영국의 시인들과 스코틀랜드의 비평가들(English Bards and Scotch Reviewers)>을 써서 비평가들을 통렬히 비난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해에 성년이 된 그는 1월에 상원의원이 되었으며, 귀족원의원이 되어 당시의 귀족 자제들의 관습에 따라 일찍부터 꿈꾸어 오던 유럽 대륙 여행길에 올랐다. 그는 포르투갈, 스페인, 몰타, 알바니아, 그리스, 콘스탄티노플까지 두루 돌아다니면서 새로운 세계에서 새로운 인생을 체험하고 문학적인 시야를 넓힌 후 1811년 7월 14일 런던으로 귀국했다. 1812년 2월 27일에 바이런은 상원의원으로서 첫 연설을 했으며, 3월 초에 출간된 ≪차일드 해럴드의 순례≫는 순식간에 사람들을 매료시켰다. ≪차일드 해럴드의 순례≫ 1·2편은 2년간에 걸친 그의 유럽 여행에 대한 기행문인 셈인데, 이 시에서 주인공인 차일드 해럴드는 동방 제국을 순례하면서 보고 체험했던 이국의 풍물과 사람들과의 관계를 노래한다. 이 시는 바이런에게 “어느 날 아침에 깨어 보니 유명해져 있었다”는 뜻하지 않은 성공을 가져다주어서 미모의 청년 귀족 바이런이 휘그당 모임에서 명사 취급을 받도록 했으며, 영국 상류 사교계의 열렬한 갈채와 찬양을 받으며 여성들의 애모와 동경의 대상이 되어 그에게 무절제한 여성 편력을 가지도록 만들었다. 1813년에 ≪이단자(The Giaour)≫와 ≪아비도스의 신부(The Bride of Abydos)≫, 1814년에 ≪라라≫와 ≪해적(The Corsair)≫, 1815년에 ≪히브리 가곡(Hebrew Melodies)≫, 1816년에 ≪코린트의 포위(The Siege of Corinth)≫와 ≪파리지나(Parisina)≫ 등 수많은 걸작 시집들을 잇달아 출판하고 호평을 받았다. 바이런은 복잡했던 많은 여자들과의 관계에서 벗어나 안정된 가정생활을 하기 위해 1814년 9월 앤 이저벨라 밀뱅크와 1815년 1월 2일에 결혼을 했다. 하지만 그 후에도 계속되는 바이런의 가정적인 추문은 런던 사회 전체에 심각한 파문을 일으키게 되었고 신랄한 비방을 자아내게 됨으로써 바이런은 사회적으로 매장당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816년 4월 바이런은 이혼을 하고 유럽으로 떠나 스위스, 이탈리아의 도처를 마음 내키는 대로 떠돌아다니면서 많은 여자들과 사랑을 나누는 생활을 했고, 다시는 영국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는 유럽에서 지내는 도중 이탈리아 비밀 혁명 단체에 들어갔으며, 이탈리아인의 생활을 어느 때보다 가깝게 접하는 한편 신성동맹에 대한 반란 운동에도 참가했다. 그러면서 1816년과 1818년에 ≪차일드 해럴드의 순례≫ 3·4편, 1816년에 ≪시용의 죄수 (The Prisoner of Chillon)≫, 1817년에 ≪베포(Beppo)≫와 시극 <맨프레드>, 1820년에 ≪단테의 예언(The Prophecy of Dante)≫과 ≪마리노 팔리에로(Marino Faliero)≫, 1821년에 ≪두 사람의 포스카리(The Two Foscari)≫와 시극 <카인(Cain)>, ≪심판의 계시(The Vision of Judgement)≫, 그리고 그의 필생의 대작인 ≪돈 주안≫을 1818년부터 1823년에 걸쳐 출간했다. 또한 시인 리 헌트(Leigh Hunt)를 계속 도왔고, 그가 편집하는 ≪리버럴(The Liberal)≫에 원고를 보내기도 했다.그는 1823년 4월 런던에 있는 그리스 위원회로부터 터키에 대항해서 독립 전쟁을 하고 있는 그리스인들을 돕는 요원으로 활동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이제 자유와 정의와 인류애를 위한 정치 운동에 정열을 불태우고자 했던 그는, 터키에서 독립하고자 하는 그리스의 독립 운동을 돕고자 스스로 원군을 조직해 7월 16일에 그리스를 향해 출범했다. 하지만 그는 1824년 1월 그리스의 미솔롱기(Missolonghi)에 상륙한 후 그리스 독립군 최고 사령관이 되어 터키와의 전투를 기다리던 중 불운하게도 열병에 걸렸고, 의사가 고집한 사혈 요법으로 인해 병이 더 악화되어 그해 4월 19일에 36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그리스 전체가 그의 죽음을 애도했으며, 곧 그는 그리스의 국가적 영웅이 되었다. 그의 유해는 영국으로 옮겨졌으나 웨스트민스터 대사원 안치가 거부되어, 7월 16일에 뉴스테드와 가까운 한 교회 묘지의 집안 납골당에 안치되었다. 그러나 145년 뒤인 1969년에 그를 추도하는 기념비가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세워졌다.

지은이 : 방정환
일제강점기에 어린이의 날을 제정하고 아동 잡지 《어린이》를 창간한 아동문학가다.1899년 11월 9일 서울의 야주개(지금의 당주동)에서 태어나, 1913년 미동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선린학교에 들어갔지만 가정 형편이 좋지 않아 그만두고 천도교에 입교했다. 1917년 독립운동가 손병희의 딸 손용화와 결혼한 뒤 경성청년구락부를 조직해 청소년 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으며, 보성전문학교에 공부하던 중인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선언문을 배포한 혐의로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고문을 받았다. 이후 일본 도요대학 철학과에 입학해 아동예술과 아동심리학을 연구했으며, 유학 중에 천도교청년회 동경지회를 조직했다. 1921년 천도교 소년회를 조직해 아동 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해 1922년 5월 1일을 어린이날로 제정하고, 1923년 소년운동을 확산하기 위해 국내 최초 순수 아동 잡지 《어린이》를 창간했으며, 색동회를 조직했다. 1928년 세계 20여 개 나라 어린이가 참가하는 세계아동예술전람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어린이날 제정과 함께 소년 운동을 주도하는 등 적극적으로 활동을 전개하다가 일제의 가중된 탄압과 스트레스로 1931년 7월 17일에 쓰러진 뒤 그 달 23일에 숨졌다. 당시 33세의 젊은 나이였다. 현재 서울시 망우리공원에 묘소가 있다. 정부는 고인의 공적을 기려 1978년 금관문화훈장, 1980년 건국포장을 수여했으며,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되었다.

지은이 : 백석
(白石, 1912~1996) 시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 가장 토속적인 언어를 구사하는 모더니스트로 평가받는 백석은, 1912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나 오산학교와 일본 도쿄의 아오야마 학원 영어사범과를 졸업했다. 1934년 조선일보사에 입사했고, 1935년 『조광』 창간에 참여했으며, 같은 해 8월 『조선일보』에 시 「정주성定州城」을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함흥 영생고보 영어교사, 『여성』지 편집 주간, 만주국 국무원 경제부 직원, 만주 안둥 세관 직원 등으로 일하면서 시를 썼다.1945년 해방을 맞아 고향 정주로 돌아왔고, 1947년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 외국문학분과 위원이 되어 이때부터 러시아 문학 번역에 매진했다. 이 외에 조선작가동맹 기관지 『문학신문』 편집위원, 『아동문학』과 『조쏘문화』 편집위원으로 활동했다. 1957년 발표한 일련의 동시로 격렬한 비판을 받게 되면서 이후 창작과 번역 등 대부분의 문학적 활동을 중단했다. 1959년 양강도 삼수군 관평리의 국영협동조합 축산반에서 양을 치는 일을 맡으면서 청소년들에게 시 창작을 지도하고 농촌 체험을 담은 시들을 발표했으나, 1962년 북한 문화계에 복고주의에 대한 비판이 거세게 일어나면서 창작 활동을 접었다. 1996년 삼수군 관평리에서 생을 마감했다.시집으로 『사슴』(1936)이 있으며, 대표 작품으로 「여우난골족」,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국수」, 「흰 바람벽이 있어」 등이 있다. 북한에서 나즘 히크메트의 시 외에도 푸슈킨, 레르몬토프, 이사콥스키, 니콜라이 티호노프, 드미트리 굴리아 등의 시를 옮겼다.

지은이 : 변영로
수주(樹州) 변영로(卞榮魯)는 1898년 태어났다. 본명은 영복(榮福)이다. 영로(榮魯)는 22세부터 쓴 필명으로 1958년 개명했다. 1912년 체육 교사와 생긴 마찰로 학교를 그만두고 만주 안동현을 유람하다 같은 해 이흥순 씨와 결혼했다. 1934년 부인이 세상을 떠나고 이듬해 양창희 씨와 재혼했다. 부천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작가의 호 ‘수주’는 고려시대 부천 지명이었다. 원래 큰형의 호였는데 변영로가 요청해서 본인의 호로 삼았다고 한다. 열세 살부터 오언절구와 칠언절구의 한시를 짓고 열여섯 살에 영시를 지어 주위를 놀라게 한 천재 문인이었다. 수주의 영민함은 집안 내력이다. 아버지 변정상씨는 19세에 과거에 급제했다. 큰형 변영만은 법률가이자 한학과 영문학에 정통했고, 작은형 변영태는 외무장관과 국무총리를 지냈다.술에 취해 보낸 40년, 그러나 단 한 줄의 친일 문장도 쓰지 않았던 일제 치하의 문인‘천하의 술주정뱅이’, ‘주장을 꺾지 않는 과격한 고집쟁이’, ‘십 대 때부터 영시를 쓴 천재 문인’. 그리고 ‘단 한 번도 일제에 변절하지 않았던 지식인’.수주 변영로에 대한 평가의 시작과 끝은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이다. 평가의 표현이 달라져도 그 바탕은 변함없었다. 금주 선언을 한 것도 여러 번이다. 그러나 이내 다시 술잔을 든다. 소설가 월탄 박종화는 ‘술을 마시지 않고는 배겨낼 수 없었던 겨레의 운명 때문’이라고 그의 마음을 이해했다. 술에 취해 몸은 비틀대도 민족을 생각하는 마음은 흔들린 적이 없었던 작가는 3.1 운동 때는 독립선언서를 영문으로 번역해서 해외로 보냈다. 1924년 민족의 울분을 노래한 시집 《조선의 마음》을 내놓았지만 발간 직후 일제에 압수되어 판매 금지당했다.군색한 형편에도 서울의 일류 양복점에서 옷을 맞춰 입었다. 구두는 중국 상하이나 홍콩에서 인편으로 주문해 신을 만큼 멋쟁이였다. 돈키호테를 닮고 싶어 하는 뛰어난 이야기꾼이었다. 1955년 제27차 비엔나 국제 펜클럽 대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했을 당시 세계 문인들에게 ‘동양의 버나드 쇼’라는 별명을 얻었다. 수주는 53세 되던 1951년 8월 20일, 40여 년 마시던 술을 끊었다고 적고 있다. 향년 63세에 타계해 고향인 부천에 잠들었다.

지은이 : 신석정
1907년 7월 7일 전북 부안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석정(錫正), 아호는 석정(夕汀), 필명은 소적(蘇笛)·서촌(曙村)이다. 시인이자 한학자였던 조부 신제하(辛濟夏)와 부친 신기온(辛基溫) 슬하에서 당시(唐詩)와 한학을 공부하며 엄격한 가풍 속에서 성장했다.첫 작품 <기우는 해>를 ‘소적’이라는 필명으로 1924년 11월 24일자 ≪조선일보≫에 발표한 후, 1930년에 상경해 동국대학교의 전신인 불교전문강원(佛敎專門講院) 국어국문학과에서 불전(佛典) 공부를 했다. 서울에 있는 동안 ≪시문학≫ 제3호에 <선물>을 발표하며 정식으로 문단 데뷔, 박용철, 정지용, 이하윤, 김기림 등과 함께 순수시를 전개한다. 1931년에는 1년 남짓한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고향으로 내려와 ‘청구원(靑丘園)’에서 도연명의 시와 매창 시집 등을 애독하며 시작(詩作)에 전념한다. 1939년 첫 시집 ≪촛불≫(인문사)을 간행한 이후, ≪슬픈 목가≫(낭주문화사, 1947), ≪빙하≫(정음사, 1956), ≪산의 서곡≫(가림출판사, 1967), ≪대바람 소리≫(문원사, 1970) 등 생전에 도합 다섯 권의 시집을 상재했다. 신석정은 시인이면서 동시에 존경받는 교육자였다. 해방이 되던 해 잠시 서울에 머무르던 그는 1946년 낙향한 후 고향을 떠나지 않았다. 1946년 40세 때부터 1950년 5월까지 부안 중학교와 죽산 중학교에서 교직 생활을 했으며, 1952년 ≪태백신문≫ 편집 고문으로 위촉되어 <토요시단>을 주재한다. 1954년부터 7년간 전주고등학교에서 근무, 이듬해 1955년부터 전북대학교와 영생대학에서 시론(詩論)을 강의했다. 1961년 5월, 5·16 직후 당시 교원노조를 지지하는 시를 발표했다는 이유로 정부에 연행되어 수일 만에 석방된다. 그해 전주고교를 떠나 김제고등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했으며, 1967년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전라북도 지부장을 역임했다. 1964년에 전주상업고등학교로 부임해 1972년 8월 정년까지 재직했다. 그는 수필 <병상의 이 여름>(서울신문, 1974. 7. 4)을 마지막으로 집필, 7월 6일 영면했다.주요 저서로는 시집 5권과 이병기와 공저한 ≪명시조 감상≫(박영사, 1958), ≪한국 시인 전집≫(신구문화사, 1959), 번역서 ≪중국 시집≫(정양사, 1954) 등이 있다. 이외에 유고 수필집으로 ≪난초 잎에 어둠이 내리면≫(지식산업사, 1974), 유고 시집 ≪내 노래하고 싶은 것은≫(창작과비평사, 2007)이 있다. 1958년 전라북도문화상, 1968년 한국문학상, 1973년 제5회 대한민국 문화예술상을 수상했다.

지은이 : 장 니콜라 아르튀르 랭보
1854년 프랑스 북부 샤를빌에서 태어났다. 군인이던 아버지는 가정사에 무관심했고 빈번한 주둔지 이동과 어머니와의 성격 차이로 거의 부재 상태였다. 이후 부모가 완전히 별거하면서 기독교적 엄격함을 내세운 어머니 밑에서 자라게 된다. 랭보는 유년 시절 아버지의 부재, 혼자 가정을 이끄는 어머니의 차가움과 엄격함에 반항하고 그러한 성향이 초기 시에 잘 드러난다. 1870년 16세에 첫 프랑스어 시인 〈고아들의 새해 선물〉을 잡지에 발표한다. 이후 시인 폴 드메니에게 자신의 시를 정리하여 건네거나 새로 나온 책들을 살피면서 돈 한 푼 없이 파리 거리를 배회하다가 한 달 만에 걸어서 돌아오는 등, 파리로 세 번의 가출을 감행한다. 1871년 랭보는 당시 파리 문학계의 유명 인사였던 폴 베를렌에게 편지를 보내고 〈취한 배〉를 가지고 베를렌과 파리에서 만난다. 이후 랭보와 베를렌은 함께 유럽 전역을 돌아다니지만 다툼이 잦아지고 결국 브뤼셀에서 베를렌이 랭보에게 총을 쏜다. 베를렌은 이 일로 2년 동안 감옥에 갇히고 랭보는 고향으로 돌아가 유일하게 직접 펴낸 시집인 《지옥에서의 한 철》을 출간한다. 1875년 독일 슈투트가르트에서 막 감옥에서 나온 베를렌을 만난 랭보는 《일뤼미나시옹》 원고를 건네며 시집 출판을 위해 제르맹 누보에게 원고를 보내달라고 부탁한다. 그리고 이 일을 끝으로 작가로서 랭보의 문학적 삶도 더 이어지지 않는다. 이후 랭보는 유럽은 물론이고 중동, 인도네시아, 아프라카 등에서 노동자, 용병, 건설 현장 감독, 상인 등으로 일한다. 1891년 무릎 병이 악화되어 아프리카에서 프랑스로 돌아와서 다리 절단 수술을 받지만 병은 호전되지 않고, 그해 11월 10일 37세의 나이로 마르세유 병원에서 세상을 뜬다.

지은이 : 기욤 아폴리네르
1880년 이탈리아 로마에서 미혼모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모나코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생애의 대부분을 프랑스에서 지내다가 죽기 2년 전에야 비로소 프랑스에 완전히 귀화하였다. 1918년 그는 전쟁에서 입은 상처와 스페인 독감으로 제1차 세계 대전 종전을 3일 앞두고 38세의 나이로 짧은 생애를 마감하였다. 1898년부터 여러 잡지에 시를 발표하기 시작, 한편으로는 전위예술에 매혹되고, 한편으로는 새로운 예술을 적극적으로 주도하면서 피카소, 브라크, 막스 자콥 등과도 교류하였던 그는 불문학사에서 상징주의의 황혼기이며 초현실주의의 문이 열리기 시작한 시기인 20세기 초에 당대의 시대정신을 가장 충실하게 구현한 시인으로 평가받는다. 『알코올』은 아폴리네르의 첫 시집으로, 1913년 메르퀴르 드 프랑스 출판사에서 발간되었다. 부제인 <시집 1898-1913>이 말하듯이 『알코올』은 아폴리네르가 시인으로서 처음 이름을 알린 이후 15년간의 결산이라고 할 수 있다. 형태와 주제, 음조와 길이가 다른 50편의 시를 혼란스럽게 늘어놓고 있지만 이 시집 전체가 지니고 있는 특이한 분위기는 거기에 어떤 <숨겨진 건축>, <초현실적 상상력으로만 이해할 수 있는 건축>이 있을 것이라는 가정을 떨쳐 버리기 어렵게 한다. 다른 작품으로는 『썩어 가는 마술사L'enchanteur pourrissant』, 『상형시집Calligrammes』, 『학살 당한 시인Le po?te assassin?』, 『앉아 있는 여인La femme assise』, 『우울한 파수병Le Guetteur m?lancolique』, 『추억처럼 부드러운Tendre comme le souvenir』, 『소년 돈주앙의 회고록Les Exploits d'un jeune Don Juan』, 『미라보 다리Le pont Mirabeau』, 『이교시조회사L'H?r?siarque et Cie』, 『입체파 화가들Les peintres cubistes』 등이 있다.

지은이 : 알렉산드르 세르게비치 푸시킨
알렉산드르 푸시킨(Александр С. Пушкин, 1799∼1837)푸시킨(1799∼1837)은 모스크바 귀족 가문에서 출생했다. 그의 어머니는 18세기 표트르 대제의 총애를 받은 한니발 장군의 손녀였다. 곱슬머리와 검은 피부를 가진 푸시킨은 자신의 몸속에 에티오피아 흑인의 피가 흐르고 있음을 항상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어린 시절에 그는 프랑스인 가정교사의 교육을 받으며 자랐고, 유모 아리나 로지오노브나로부터 러시아어 읽기와 쓰기를 배웠을 뿐만 아니라, 러시아 민담과 민요를 들었다. 또한 그는 유모를 통해서 러시아 민중의 삶에 대해 깊이 동정하고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열두 살 때인 1811년 6년제 귀족학교 리체이에 입학했다. 그는 리체이 재학 중 120여 편의 시를 썼다. 리체이를 졸업한 후 외무성 관리로서 잠시 근무하던 중 진보적 문학 서클인 ‘녹색 램프(질료나야 람파)’에 가입해 미래의 데카브리스트들과 교류했다. 그는 이 무렵 진보적인 시 <자유>, <차다예프에게>, <마을>을 발표해 러시아 남부로 유형을 가게 되었다.그는 남러시아의 캅카스에서 바이런의 작품을 읽고, 그 영향을 받아 바이런풍의 낭만적인 시를 쓰기도 했다. 그리고 키시뇨프에서는 낭만적이고 이국적인 냄새를 풍기는 작품들인 ≪캅카스의 포로≫, ≪바흐치사라이의 분수 ≫, ≪도둑 형제≫ 등을 발표했고, 운문소설 ≪예브게니 오네긴≫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그는 아버지의 영지인 미하일롭스코예 마을(이 마을에 푸시킨의 집이 있고, 이 마을의 어귀의 스뱌트이 언덕 수도원에 그의 무덤이 있음)에서 ≪예브게니 오네긴≫과 ≪집시들≫을 집필하느라 1825년에 발생한 데카브리스트 난에 참여하지 못한다. 여기서 그는 비극 <보리스 고두노프>를 완성했다. 니콜라이 1세는 데카브리스트 난을 평정한 후 푸시킨을 모스크바로 소환해 그의 작품을 직접 검열하고 감독한다. 그는 1830년 가을 볼지노 영지에서 ≪예브게니 오네긴≫, ≪벨킨 이야기≫, 4편의 작은 비극, 즉 <인색한 기사>, <모차르트와 살리에리>, <돌의 손님>, <질병 때의 주연> 등 많은 작품을 쓴다. 1828년 겨울 새해 무렵에 모스크바의 무도회에서 만난 16세의 나탈리야 곤차로바의 미모에 반한 푸시킨은 이듬해 봄에 그녀에게 청혼한다. 그러나 그녀의 부모에게 거절당하지만, 다시 청혼해서 결국 1831년 2월 모스크바에서 결혼식을 올리게 된다. 그해 가을, 푸시킨은 페테르부르크로 이주해 살던 중 1833년에 ≪예브게니 오네긴≫을 발표하고, 그해 여름에 볼지노 마을(아버지가 80채의 농가, 246명의 남자 농노, 237명의 여자 농노가 사는 이 마을을 물려주어 푸시킨이 젊은 지주가 됨)을 방문해 그곳에서 ≪스페이드의 여왕≫, ≪대위의 딸≫, ≪청동 기사≫ 등을 집필했다. 페테르부르크의 사교계에서 상당한 인기를 끈 그의 아내는 사치스럽고 호화로운 생활만을 좋아할 뿐, 남편의 문학적 재능이나 지적 활동에는 무관심했다. 니콜라이 1세와 자신의 아내와의 염문이 떠도는 중 그는 황제 시종관으로 임명되어 근무하게 되는 굴욕을 겪는다. 그는 1836년 고골의 도움을 받아 문학잡지 <동시대인>을 발행하고, 이 잡지에 ≪대위의 딸≫을 연재한다. 푸시킨은 자신의 아내와 황제의 염문에 이어 네덜란드 대사의 양자인 프랑스 청년 장교 단테스와의 염문으로 인해 고통을 당하자, 더 이상 견디지 못해 단테스에게 결투를 신청한다. 결국, 단테스와의 결투에서 치명상을 입고, 1837년 1월 7일 사망한다. 황제 정부는 국민들의 조문 시위를 두려워한 나머지 한밤중에 그의 관을 미하일롭스코예 부근의 스뱌토고르스키 수도원으로 옮겨 비밀리에 장례식을 치르도록 한다.푸시킨은 ‘러시아 문화의 등불’, ‘러시아 국민 문학의 아버지’, ‘위대한 국민 시인’ 등으로 불린다. 그는 1812년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승리로 고무된 러시아 국민(민중)의 애국주의 사상, 민족적 자각과 민족적 기운이 고조되는 역사적 시기에 창작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러시아 국민의 사상과 감정을 훌륭히 표현한 러시아 국민 문학의 창시자이자 러시아 문학어의 창시자다. 러시아 국민 생활과의 밀접한 유대, 시대의 선구적 사상의 반영, 풍부한 내용 등에 있어서 그를 따를 러시아 작가는 없다. 투르게네프가 푸시킨 이후의 작가들은 그가 개척한 길을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 것처럼 그의 문학적 영향력은 지대하다.

지은이 : 월트 휘트먼
미국의 정신을 잘 대변해 주는, 미국이 낳은 가장 위대한 시인으로 인정받는 월트 휘트먼은 1819년 5월 31일 미국 롱아일랜드의 헌팅턴타운 근교의 웨스트힐스에서 농부이자 목수였던 아버지와 퀘이커 교도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아홉 명의 자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휘트먼은 가난한 가정 형편 때문에 5∼6년 정도의 교육밖에 받지 못하고, 11세의 나이에 학교를 그만두었다. 그는 법률 사무소, 병원, 인쇄소, 신문사 등에서 잡일을 하면서 영국 낭만주의 소설과 시, 고전문학, 성경 등에 심취했다. 그러다가 17세가 되던 1836년에 교사가 되었으며, 그 후 롱아일랜드에 있는 학교에서 5년간 가르치는 일을 하다가 그만두었다. 그 후, 저널리즘에 몸을 담아 뉴욕에서 활약했는데, 1838년에는 주간지 <롱아일랜더>를 창간했으며, 1842년에는 신문사 <뉴욕 오로라>의 편집인이 되었다. 이해에 그는 에머슨이 뉴욕에서 행한 “자연과 시인의 능력”이라는 제목의 강연을 듣고 감명을 받아, 에머슨이 예언해 준 “미국의 시인”이 되고자 결심했다. 그리고 1842년 봄에 갑자기 편집 일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뉴욕 오로라>를 그만둔 후, <이브닝 태틀러>, <롱아일랜드 스타>, <브루클린 데일리 이글>과 같은 여러 신문사에서 기자, 자유 기고가, 편집인 등으로 10여 년간 활동하다가, 마침내 시인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1848년에 휘트먼은 뉴올리언스에서 발행되는 <뉴올리언스 크레센트>의 편집을 맡아 달라는 제의를 받고 뉴올리언스로 떠난다. 이때 그는 여행을 통해 그는 미국의 광대함과 다양함에 대해 인지하게 되었으며, 이때 경험한 미국이라는 나라에 대한 폭 넓은 비전은 그의 시에 스며들어 그를 미국의 위대한 시인으로 발돋움하도록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휘트먼은 뉴욕으로 돌아온 후 신문사 <브루클린 프리맨>의 편집 일을 맡았다. 그가 36세 되던 1855년 7월 4일에 첫 시집인 ≪풀잎≫을 자비로 출간했다. 또한 휘트먼은 1862년에 남북전쟁에 참전했다 부상당한 동생 조지를 병문안하기 위해 워싱턴에 갔다가 그곳에 있는 군 병원에서, 부상당한 군인들을 돌보는 간호사로 근무하기도 했다. 1865년에 출간된 시집 ≪북소리와 1875년에 출간된 ≪전쟁 회고록≫은 이때의 경험을 담은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1882년에는 그의 인생 초기의 생활, 남북전쟁 당시 간호사로서의 경험, 노년기의 일상생활, 그의 문학관 등을 담은 산문집인 ≪표본적인 나날들≫을 출간했다. 그리고 출판 및 판매 금지를 당한 덕에 오히려 사상 최고의 판매 부수를 기록한 ≪풀잎≫ 제6판과 ≪표본적인 나날들≫의 판매 수입으로, 그는 1884년에 뉴저지 캠던의 미클 가에 2층짜리 건물을 구입해 이 집에서 1892년 3월 26일 죽을 때까지 살았다. 휘트먼의 신념과 비전을 통해 나온 시가 미국 시에 끼친 영향은 가히 혁명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당대에는 주로 친구들로부터 인정을 받았을 뿐, 독자들로부터는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그러다가 20세기 중엽에 접어들면서 미국 최대의 시인으로 각광을 받게 되었고, 그의 시집 ≪풀잎≫은 세계문학의 걸작으로 인정을 받게 되었다.

지은이 :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영시 작가 중의 한 사람으로서, ‘최후의 낭만주의자’로 불리며 19세기의 낭만주의 시와 현대시의 가교역할을 한 시인이다. 1865년에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출생하여, 켈트족의 민담과 설화, 동양의 신비주의사상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졌다. 특히 민족정신 고양을 위한 아일랜드 문예부흥운동에 힘썼으며, 1923년에는 아일랜드 작가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주요작품으로는 <어쉰의 방랑>(1889), <쿨 호수의 야생백조>(1917), <탑>(1928), <나선계단>(1933) 등 많은 시집과 <시극전집>(1934), 켈트족의 민담 모음집인 <켈트의 여명>(1893), 자동기술법에 의해 자신의 독특한 사상체계를 담은 <비전>(1926, 1937) 등이 있다.

지은이 : 이성복
1952년 경북 상주에서 태어나 서울대 불문과와 같은 과 대학원을 졸업했다. 1977년 겨울 『문학과지성』에 시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남해 금산』 『그 여름의 끝』 『호랑가시나무의 기억』 『아, 입이 없는 것들』 『달의 이마에는 물결무늬 자국』 『래여애반다라』 『어둠 속의 시』 외에 시론집 『무한화서』 『불화하는 말들』 『극지의 시』, 산문집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 『나는 왜 비에 젖은 석류 꽃잎에 대해 아무 말도 못 했는가』 『고백의 형식들』 등이 있다.

지은이 : 이성부
1942년에 광주에서 태어나 경희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였다.1959년 전남일보 신춘문예에 시 「바람」이 당선되고 1962년 ≪현대문학≫에 김현승 시인의 추천완료로 등단하였다.196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우리들의 양식」이 당선되었다. 1969년 한국일보 기자로 입사해 28년간 근무하였다.경희문학상ㆍ현대문학상ㆍ한국문학 작가상ㆍ대산문학상ㆍ영랑시문학상ㆍ편운문학상ㆍ가천환경문학상ㆍ공초문학상ㆍ영랑시문학상 등을 수상하였다.시집으로 『이성부 시집』 『우리들의 양식』 『백제행』 『전야』 『빈 산 뒤에 두고』 『야간산행』 『지리산』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린다』 『도둑 산길』이 있다. 시선집 『산에 내 몸을 비벼』 『「깨끗한 나라』 『너를 보내고』 『남겨진 것은 희망이다』 산문집 『산길』 등이 있다.

지은이 : 정현종
1939년 서울에서 태어나 연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했다. 1965년 『현대문학』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사물의 꿈』 『나는 별아저씨』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한 꽃송이』 『세상의 나무들』 『갈증이며 샘물인』 『견딜 수 없네』 『광휘의 속삭임』 『그림자에 불타다』, 시선집 『고통의 축제』 『이슬』, 시론과 산문을 모은 『날자, 우울한 영혼이여』 『숨과 꿈』 『날아라 버스야』 『두터운 삶을 향하여』 등과 다수의 번역서가 있다. 한국문학작가상, 연암문학상, 이산문학상, 현대문학상, 대산문학상, 미당문학상, 경암학술상(예술 부문), 파블로 네루다 메달 등을 수상했다.

지은이 : 조지훈
본명은 조동탁(趙東卓). 경북 영양 출신으로 2대 국회의원을 지낸 조헌영(趙憲泳)과 유노미(柳魯尾)의 3남 1녀 가운데 차남으로 출생했다. 어린 시절 조부와 부친으로부터 한학과 절의를 배워 체득하였고, 혜화전문과 월정사에서 불경과 참선을 연찬하였다. 여기에 조선어학회의《큰사전》원고를 정리하면서 자연스럽게 익힌 국어학 지식이 더해져 형성된 학문적 바탕은 현대교육만 받은 사람들로서는 감히 짐작하기조차 어려울 만큼 넓고 깊었다.소월과 영랑에서 비롯하여 서정주와 유치환을 거쳐 청록파에 이르는 한국 현대시의 주류를 완성함으로써 20세기 전반기와 후반기를 연결해 준 큰 시인으로 한국 현대문학사에서 확고부동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민속학과 역사학을 두 기둥으로 하는 한국문화사 발전에 기여함으로써 한국학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또한 만해 한용운을 이어 지조를 목숨처럼 중히 여기는 지사의 전형을 보여주며 한국 근대정신사에도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경기여고 교사, 동국대 강사, 고려대 문과대학 교수를 지냈으며, 주요저서로는《청록집》,《풀잎 단장》,《조지훈 시선》,《역사 앞에서》등의 시집과《지훈전집》(《시》,《시의 원리》,《문학론》,《수필의 미학》,《지조론》,《한국민족운동사》,《한국문화사서설》,《한국학 연구》,《채근담》)이 있다.

지은이 : 칼릴 지브란
1883년 1월 6일 레바논에서 태어났다. 열두 살 때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15세가 되던 해, 다시 고향을 돌아와 대학까지 학업을 마치고, 1902년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다.미국에서 예술을 공부하고,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는 창작 활동을 시작했다. 그림 공부를 하며 뉴욕, 보스턴에서 여러 번의 전시회를 가졌다. 작품 활동 초기에 그는 주로 아랍어로 된 글을 썼는데, 아랍어 작품으로는『반항하는 영혼』(1908), 단편 『부러진 날개』(1912) 등이 있다.『예언자』는 1923년 40세의 칼릴 지브란이 쓴 대표작이다. 아랍어가 아닌 영어로 쓰였으며, 발표 당시에는 비평적으로 냉담한 평가를 받았지만 1957년 미국에서 100만 부, 1965년에는 250만 부, 1998년에는 900만 부가 팔리는 등 대중적으로는 널리 사랑받은 작품이다. 이 작품은 삶에 대한 그의 태도가 여실히 드러나는 작품으로, 시간이 지나도 변치 않는 삶의 본질을 다룸으로써 지금까지도 읽는 이에게 인생에 대한 통찰과 따뜻함을 안겨준다.칼릴 지브란은 1931년 4월 10일 결핵과 간경화 증세의 악화로 인해 48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죽기 전 고향 레바논에 묻히고 싶다는 유언을 남겼고, 1932년 그의 시신은 레바논에 있는 마르 사르키스 수도원에 옮겨져 현재는 레바논에 안치되어 있다.

지은이 : 하인리히 하이네
본명은 하리 하이네로 1797년 뒤셀도르프에서 가난한 유대인 상인 잠존 하이네와 엘리자베트 판 겔더른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호인 삼촌의 도움을 받아 본대학, 괴팅엔대학 등에서 법학을 전공하였으나 법학 공부보다는 낭만주의 이론가인 슐레겔, 아른트, 휠만 등의 문학 강의를 좋아했다. 베를린대학에서도 헤겔의 철학 강의를 듣고 라헬 파른하겐의 살롱을 드나들며 간스, 샤미소, 호프만 폰 팔러스레벤 등과 교제했다. 1825년에는 개신교로 개종하면서 이름을 ‘하리’에서 ‘하인리히’로 바꾸었으며 법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하이네는 변호사나 교수 자리를 구하려 애썼지만 유대인 출신이라는 신분과 정치적 급진성 때문에 좌절되었다. 뤼네부르크 본가에 머물던 하이네는 함부르크와 노르더나이섬을 여행하고, 『여행기』와 시집 『노래의 책』, 『로만체로』 등을 펴내면서 명성을 얻었다. 파리로 이주해 『알게마이네 차이퉁』의 통신원으로 일하면서 프랑스의 정치와 문화계 동향을 소개하는 한편, 저명인사들과 교류하며 공상적 사회주의를 주창한 생시몽주의 그룹에도 참여했다. 이후 독일을 오가며 지내다가 지병이 악화되어 1856년에 타계했다. 하이네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반영하는 시가 아니라 오히려 문제가 많은 현실을 미화하는 시, 척박한 현실과 동떨어진 미의 제국에 안주하여 고상한 운율과 형식만을 고집하는 시에 거부감을 드러냈다. 그래서 1830년대에는 시작(詩作)에 완전히 등을 돌려 에세이, 르포, 연대기 등 다양한 산문 형식을 이용해 당대 현실에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했다. 특히 『하이네 여행기』는 일반적인 기행문과 달리 탁월한 묘사로 대상을 형상화했으며, 1830년대와 1840년대 자유주의 작가들의 본보기가 되었다.『노래의 책』은 출간 이후 멘델스존, 슈만, 브람스, 차이콥스키, 슈트라우스 등 당대 최고 작곡가들의 사랑을 받아 독일어 시집 가운데 가장 많이 작곡된 시집이다. 하이네는 고통과 상실의 경험을 다양하게 변주했다. 낭만주의를 넘어선 그의 시는 독특한 아이러니를 구사하며 교묘하면서도 신랄한 풍자로 번득인다. 또한 소외와 분열이 심화된 현실을 미화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드러낸다. 그 밖의 작품으로는 『살롱Der Salon』(1833~1840), 『독일 종교와 철학의 역사Zur Geschichte der Religion und Philosophie in Deutschland』(1834), 『독일. 어느 겨울 동화Deutschland. Ein Wintermarchen』(1844), 『아타 트롤Atta Troll』(1847) 등이 있다.

지은이 : 한용운
충남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에서 한응준과 온양 방씨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자(字)는 정옥(貞玉), 속명은 유천(裕天), 법명(法名)은 용운(龍雲), 법호(法號)는 만해이다. 어려서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한 뒤, 향리에서 훈장으로 학동을 가르치는 한편 부친으로부터 때때로 의인들의 기개와 사상을 전해 듣고 큰 감명을 받았다.기울어 가는 국운 속에서 홍주에서 전개되었던 동학농민전쟁과 의병운동을 목격하면서 집을 나서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설악산 오세암으로 들어갔다. 여기서 불교의 기초지식을 섭렵하면서 수도하다가 다른 세계에 대한 관심으로 노령 시베리아 등지를 여행하기도 하였다. 귀국 후 1905년 다시 설악산 백담사로 들어가 속세와 인연을 끊고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1910년 당시 모순과 부패가 만연하던 한국불교의 상황을 개탄하면서 개혁방안을 제시한 실천적 지침서인 《조선불교유신론》을 백담사에서 탈고하였고, 그것을 1913년 발간함으로써 불교계에 일대 혁신운동을 일으켰다. 1914년 4월에는 고려대장경을 독파하고 《불교대전》을 간행하였으며, 1918년에는 본격적인 불교잡지 <유심(惟心)>을 발간하였다. 1919년 천도교, 기독교, 불교계 등 종교계를 중심으로 추진된 3.1운동 계획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고, 불교계측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는 일도 맡았다. 1919년 7월 10일에는 경성지방법원 검사장의 요구로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이란 논설을 집필하여 명쾌한 논리로 조선독립의 정당성을 설파하였다. 3.1운동 때문에 감옥에 갔다가 석방된 뒤에도 전국적으로 확산된 물산장려운동을 지원하고, 민족경제의 육성과 민족교육을 위한 사립대학 건립운동에 앞장섰다. 창씨개명 반대운동, 조선인 학병출정 반대운동 등을 펴기도 했다. 1944년 6월 29일 그토록 그리던 조국광복과 민족독립을 눈앞에 두고 입적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는 뜻으로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지은이 : 헤르만 헤세
독일 남부 뷔르템베르크의 칼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요하네스는 목사였고, 어머니 역시 독실한 신학자 가문 출신이라 기독교적 분위기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1890년 라틴어 학교에 입학했고, 이듬해 마울브론 신학교에 들어갔다. 하지만 신학교의 속박된 생활을 못 견디고 뛰쳐나와 한때 자살을 시도했다. 시인이 되기를 꿈꾼 뒤 시계 공장에서 시계 톱니바퀴를 닦으며 문학수업을 시작했다. 1895년 낭만주의 문학에 심취해 첫 시집 《낭만적인 노래》를 출간했다. 1904년 첫 장편소설 《페터 카멘친트》를 출간하여 문학적 지위를 얻었다. 그해에 피아니스트 마리아 베르누이와 결혼했으며, 스위스로 이주해 시작에 몰두했다. 그 후 인도 여행으로 동양에 대한 관심이 깊어졌으며, 아내의 정신병, 헤세 자신의 신병 등 가정적 위기를 겪었고,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스의 광적인 폭정에 저항하는 등 파란 많은 세월을 겪었다. 주요 작품으로 《수레바퀴 밑에서》, 《게르트루트》, 《크눌프》, 《데미안》, 《싯다르타》, 《나르치스와 골트문트》, 《유리알 유희》(1946년 노벨문학상 수상작) 등이 있다.1877년 7월 2일 남부 독일 칼브에서 태어남. 1881년 스위스의 바젤로 이주함. 1890년 라틴 어 학교에 입학함.1891년 어려운 주州 시험을 통과하고 마울브론의 신학교에 들어감. 1893년 칸슈타르 고교를 중퇴함.1895년 서점 견습 점원이 됨.1899년 처녀시집 《낭만적인 노래(Romantische Lieder)》와 산문집 《자정 이후의 한 시간(Eine Stunde hinter Mitternacht)》을 발간함.1901년 시문집 《헤르만 라우셔(Hermann Lauscher)》를 발간해 시인 부세의 주목을 받음.1902년 《시집(Gedichte)》을 어머니에게 헌정했으나, 어머니는 출판 직전에 별세.1904년 최초의 장편소설 《페터 카멘친트(Peter Camenzind)》로 일약 인기 작가가 됨. 9세 연상인 피아니스트 마리아 베르누이와 결혼함. 1906년 제2의 장편소설인 《수레바퀴 아래서(Unterm Rad)》를 발표함.1907년 소설집 《이 세상 이야기(Diesseits)》를 발간함. 1908년 《이웃 사람(Nachbarn)》을 발간함. 1910년 《게르트루트(Gertrud)》를 발간. 방랑벽이 심한 그와 피아니스트인 아내와의 불화로 인도 지방으로 여행함. 귀국 후 스위스 베른으로 이주함. 1911년 시집 《도상(途上, Unterwegs)》을 발간함.1912년 《우회로(迂廻路, Umwege)》를 발간함.1913년 〈로스할데(Roßhalde)〉를 씀. 이 작품에 그려진 예술가의 결혼 생활의 파국은 마침내 헤세 자신의 현실이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때 반전주의자로 지목받아 국적을 스위스로 옮겼으며, 같은 입장에 있던 R. 롤랑과 친교를 맺음. 1915년 서정적인 방랑자의 이야기 《크눌프(Knulp)》와 시집 《고독자의 음악(Musik des Einsamen)》을 발간. 전쟁의 체험과 정신병이 악화된 아내와의 이별 등은 헤세의 작품 경향을 일변시켰음. 1919년 정신 분석 연구로 자기 탐구의 길을 개척한 대표작인 《데미안(Demian)》을 발간함.1922년 《싯다르타(Siddhartha)》와 〈내면에의 길(Weg nach Innen)〉에서 불교적 해탈의 비밀을 추구하였음. 1927년 《황야의 이리(Der Steppenwolf)》를 발표. 이 작품은 내외의 분열과 고뇌를 그린 《데미안》과 일관되어 있음. 1928년 에세이집 《관찰(Betrachtungen)》을 발간함.1929년 시집 《밤의 위안(Trost der Nacht)》을 발간함.1930년 스위스에 있으면서 《지(知)와 사랑(Narziss und Goldmund)》을 발표. 이 작품은 신학자로서 지성의 세계에 사는 나르치스와, 여성을 알고 애욕에 눈이 어두워진 골드문트와의 우정의 역사를 다룬 것임.1933년 소설집 《작은 세계(Kleine Welt)》를 발간함.1942년 《시집(Die Gedichte)》을 발간함. 1943년 20세기의 문명의 비판서라 할 수 있는 미래소설 장편 《유리알 유희(Das Glasperlenspiel)》를 발표함.1945년 시선집 《꽃 피는 가지(Der Blutenzweig)》를 발간함. 1946년 괴테상과 노벨문학상 수상. 《전쟁과 평화(Krieg und Frieden)》를 발간함.1951년 《만년의 산문(Spate)》을 발간함.1954년 《헤세와 로망 롤랑의 왕복 서한》을 발간함.1955년 《악마를 부름(Beschworungen)》을 발간함.1962년 8월 9일 사망함.

지은이 : 윌리엄 블레이크
1757년 11월 28일 런던의 브로드가(Broad Street) 28번지에서 아버지 제임스 블레이크(James Blake)와 어머니 캐서린 블레이크(Catherine Blake)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2세가 되는 1769년부터 짧은 시들을 습작했고, 이때의 작품들은 ≪시적 소묘(Poetical Sketches)≫(1783)에 실려 있다. 15세 때부터 7년 동안 당시 꽤 알려져 있던 판화가 제임스 버자이어(James Basire) 밑에서 도제 생활을 했다. 그의 이른바 완성작이라고 불리는 동판화 시화집 제작에 필요한 밑그림, 수채화, 유화 등의 기술들은 이때 연마한 것이다.청년 블레이크는 남의 책에 삽화를 그려 넣거나, 판화를 제작해 돈을 벌었고, 간간이 시를 쓰기도 했다. 그는 25세가 되던 1782년에 채소 농장을 경영하던 윌리엄 바우처(William Boucher)의 딸 캐서린 소피아 바우처(Catherine Sophia Boucher)와 결혼한다. 결혼한 이듬해에 인쇄된 ≪시적 소묘≫ 이후 블레이크는 더 많은 자신의 글과 그림을 동판화로 제작하는데, ‘채색 인쇄법(illuminated printing)’이라는 자기 고유의 동판화 제작법을 고안해 내기도 한다. ≪순수와 경험의 노래≫를 위시한 그의 대표적인 작품들은 모두 이 방법에 의해 동판화로 제작되었다. 1790년 템스 강의 반대편 지역인 램버스(Lambeth)로 이사하고 이곳에서 ‘램버스 예언시’라고 불리는 일련의 예언시들을 쓴다. 이때의 블레이크는 출판업자 조지프 존슨(Joseph Johnson)의 출판물에 삽화를 그려 넣기도 하며, 그의 집에서 당시의 급진적 개혁주의자들인 조지프 프리슬리(Joseph Priestley), 토머스 페인(Thomas Paine), 윌리엄 고드윈(William Godwin), 메리 울스턴크래프트(Mary Wollstonecraft) 등과 회동하게 된 것도 이 어름이다.블레이크가는 1800년에 남부 해안의 시골 마을 펠펌(Felpham)의 조그만 오두막으로 이사하게 된다. 이곳에서 그의 장시 3부작을 구상하거나 일부 창작했다. 1803년 8월에 있었던 펠펌에서의 술 취한 국왕 직속 기병대 소속의 사병 ‘스코필드(John Schofield) 사건’은 그의 시세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그는 스코필드와 그 동료를 ≪예루살렘≫에서 악당의 한 무리로 형상화해 심판한다. 나아가 그는 후기의 장시들을 두꺼운 개인적 신화 체계로 둘러싸 시의 상징적이고 암시적인 분위기를 더욱 강화했다.만년의 블레이크는 시 창작보다는 동판화 작업에 더 경주했다. 이 시기 초서(Geoffrey Chaucer)의 ≪캔터베리 이야기≫, 그리고 <욥기> 및 단테의 작품, 밀턴의 ≪복낙원≫ 등의 삽화를 제작했다. 블레이크는 1827년 8월 12일 6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19세기 중엽 스윈번(Algernon Charles Swinburne)을 위시한 라파엘 전파의 시인들이 그의 천재성을 인정하기 시작했고, 20세기 초엽을 지나며 그의 시 세계가 지닌 독창성과 문학적 가치는 영국 낭만주의 문학의 대표적인 성취로 인정받게 되었다.

지은이 : 윌리엄 워즈워스
1770년 4월 7일 영국의 코커머스에서 아버지 존 워즈워스와 어머니 앤 쿡선 워즈워스 사이에서 태어났으나, 일찍 부모를 여의고 친척들과 이웃의 보살핌 속에 유년 시절을 보냈다. 1787년에 케임브리지 대학에 입학했으나, 학문에는 뜻이 없었다. 잠시 프랑스혁명을 지지하기도 했으나, 일련의 불행한 사건들을 겪은 후 자신의 시적 재능과 소명을 확신하게 되었다. 여동생 도러시 그리고 벗 콜리지와의 문학적 교류로 유명하며, 그 결실이 바로 낭만주의 영시의 기폭제가 된 『서정담시집』이다. 1843년 계관시인이 되었고, 1850년 4월 23일에 사망할 때까지 수많은 주옥같은 작품을 남겼다. 대표작으로 「저녁 산책」 『서술적 소묘들』 『변방 사람들』 『폐허가 된 오두막』 「틴턴 사원」 『루시 시편들』 「솔즈베리 평원 기행」 『그래스미어 고향집』 『서곡』 「마이클」 「결심과 독립」 「의무에 부치는 송가」 『영혼불멸의 송가』 『소요』 『라일스톤의 하얀 암사슴』 『마부』 『피터 벨』 등이 있다

지은이 : 글로리아 밴더빌트

지은이 : 김선우
김선우(金宣佑) 시인은 1970년 강원 강릉에서 태어났다. 1996년 『창작과비평』에 「대관령 옛길」 등 10편의 시를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내 혀가 입 속에 갇혀 있길 거부한다면』 『도화 아래 잠들다』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 『나의 무한한 혁명에게』 『녹턴』, 장편소설 『나는 춤이다』 『캔들 플라워』 『물의 연인들』 『발원: 요석 그리고 원효』, 청소년소설 『희망을 부르는 소녀 바리』, 청소년시집 『댄스, 푸른푸른』 『아무것도 안 하는 날』, 산문집 『물밑에 달이 열릴 때』 『김선우의 사물들』 『어디 아픈 데 없냐고 당신이 물었다』 『부상당한 천사에게』 『사랑, 어쩌면 그게 전부』 등을 펴냈고, 그외 다수의 시해설서가 있다. 현대문학상, 천상병시문학상, 고정희상, 발견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지은이 : 이상화
1901년 대구에서 부친 이시우와 모친 김신자의 2남으로 출생했는데, 가정은 부유했으나 7세 때 부친이 별세해, 어머니의 인자하고 후덕한 성정과 백부 이일우의 엄격한 훈도 밑에서 성장했다. 백부 이일우는 인품과 재력을 갖추었으며, 민족정신을 선도하고 국민 계도에 앞장선 지사로서, 이상화로 하여금 가내에 설치한 사숙에서 한문 수업을 받게 했다. 백부를 통해 이상화는 민족의식을 함양하고 많은 감화와 영향을 받았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상화의 형인 이상정이 독립 운동가로 활동하게 된 것 또한 이러한 가계의 영향이라 볼 수 있다. 이상화는 17세에 현진건, 백기만, 이상백 등과 함께 대구에서 ≪거화(炬火)≫라는 습작집을 프린트판으로 발간했다고 하나 전하지 않는다. 1919년 3·1운동 때에는 대구에서 백기만과 더불어 독립운동 거사 모의에 참여하나 사전에 누설되어 서울로 피신, 박태원의 하숙에 기거하게 된다. 이해 10월 서한보의 장녀 서온순과 결혼했다.1922년, 빙허 현진건의 소개로 ≪백조(白潮)≫ 동인이 된 이상화는, 시 <말세의 희탄> <단조> <가을의 풍경> <To___> <나의 침실로> <이중의 사망> <마음의 꽃>을 게재하게 된다. 이들 시에는 식민지의 암울한 시대 현실에서 오는 좌절, 권태, 우울, 애수 등이 불덩이 같은 정열로 분출되고 있음을 살펴볼 수 있다. 이상화는 열린 세계에 대한 동경을 가지고 프랑스 유학의 기회를 얻기 위해 도일했는데 도쿄 체류 기간인 1923년, ≪백조≫ 3호에 발표한 <나의 침실로>는 문단에 대단한 주목을 불러일으킨다. 상화의 <나의 침실로>는 “낭만적 상상력과 유미주의의 극한” 또는 “낭만적 에로티시즘의 정화” 또는 한국 데카당스 문학의 전형으로 미학적 성공을 거둔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이 시에는 당시 이상화가 대구에 본처를 둔 상태로 유보화와 사랑에 빠진 일 등 20세 초 청년기에 체험한 사랑과 열정, 일제의 질곡 속에서 느낄 수밖에 없었던 강박 관념, 불안 심리, 성애의 원죄 의식이 상징적으로 표출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후 백조기에는 ‘데카당이즘’으로 깊이 빠져들게 되면서 절망을 다룬 시편들을 주로 창작한다.1923년 9월 발생한 관동대진재로 1924년 봄, 유학을 포기하고 귀국한 이상화는 1925년 2월, 무산 계급 문예 운동 단체인 ‘파스큘라’에 참석하고, 1925년 8월 결성된 카프에 가담하면서 창작기의 절정기를 이룬다. 이상화는 1925년부터 1926년 사이에 시 34편, 평론 7편, 단편 2편, 감상문 4편 등 50여 편의 각종 시문을 남겼다. <가장 비통한 기욕> <이해를 보내는 노래> <빈촌의 밤> <조소> <가상> 등에는 일제의 압제와 착취 아래서 신음하는 조선인들의 빈궁상을 보여 주면서 당대 현실의 모순과 저항의식을 비유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상화는 <무산 작가(無産作家)와 무산 작품(無産作品)>과 같은 급진적인 평론을 발표하기도 했으나 카프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지는 않았다고 본다. 이렇게 이상화의 한계 지워진 계급투쟁 의식은 <가상> <조소> <폭풍우를 기다리는 마음> <비를 다고!>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등에서 살펴볼 수 있다.1926년 가을, 연인이었던 유보화가 폐병으로 사망하자 1927년, 이상화는 향리인 대구로 낙향해 카프나 중앙 문단과는 거리를 두게 된다. 서울 생활을 청산한 이상화는 대구에서 실의와 절망의 나날을 보내며 애정 행각을 벌이고 창작 활동을 하지 못해 작고하기까지 14년간 침묵기로 진입하게 된다. 그런 상황에서도 1928년 6월,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신간회에서 출판 간사직에 있던 이상화는 여러 차례 가택 수색을 당하고 구금되기도 했다. 낙향기에서 보여 주는 이러한 침체는 그가 처한 환경의 변화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즉, 이상화가 1934년 ≪조선일보≫ 경북 총국을 경영했으나, 1년 만에 문을 닫은 것도 실의와 좌절의 한 요인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1937년 3월부터 약 3개월간,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형 이상정 장군을 만난 후, 이상화는 새로운 의식으로 전환해, 교남학교에서 영어와 작문을 가르치면서 사회에 봉사하게 된다. 이에 대륜중학의 건립에 이상화의 숨은 공로가 지대했다고 전한다. 이상화의 이러한 사회적 헌신은 미래의 인재를 양성함으로써 모든 것을 잃어버린 민족의 광복을 성취하고자 하는 안타까운 충정에서 비롯했다고 본다. 그의 아호 ‘백아(白啞)’는 어둡고 불구적인 식민 치하의 고통을 실의와 자조로 표현한 것이라 볼 수 있다. 1940년, 이상화는 사회적 활동을 그만두고 칩거하며 춘향전 영역, 국문학사, 프랑스 시 평역 등을 시도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다. 1943년 4월 25일, 불치의 병 위암으로 투병하다가 타계한다.

지은이 : 이용악
1914년 함경북도 경성에서 태어났다. 1935년 3월 시 「패배자의 소원」을 <신인문학>에 발표하며 문단에 나왔다. 1937년 도쿄 산분샤[三文社]에서 첫 시집 <分水嶺(분수령)>을 펴내고 1938년 두 번째 시집 <낡은 집>을 같은 출판사에서 펴냈다. 1947년 아문각에서 <오랑캐꽃>, 1949년 동지사에서 <이용악집>을 간행했다. 1950년 월북한 후, 1955년 산문집 <보람찬 청춘>을 민주청년사에서, 1957년 <리용악 시선집>을 조선작가동맹출판사에서 발간했다. 1963년에는 김상훈과 공역으로 <풍요선집>을 조선문학예술총동맹출판사에서 펴냈다. 1971년 폐병으로 사망했다.

지은이 : 김억
1896년 11월 30일 평안북도 곽산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김희권(金熙權)이고 호는 안서(岸曙)다. 필명으로 ‘안서(岸曙)’, ‘안서생(岸曙生)’, 안서의 머리글자를 딴 ‘A. S.’, 에스페란토 이름인 ‘Verda E. Kim’ 등이 있다. 어린 시절 서당에서 한문 수업을 받았으며 1907년 정주 오산학교에서 신학문을 수학했다. 오산학교를 졸업한 후, 1913년 일본 게이오의숙(慶應義塾) 문과에 입학해 영문학을 전공했다. 그러나 1914년 부친의 사망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했으며 1916년 모교인 오산학교에 부임했다. 1924년 ≪동아일보≫에 입사해 학예부 기자, 문예부장으로 활동했으며 1930년대 ≪매일신보≫ 기자를 거쳐 1930년대 후반부터 해방 직후까지 경성 중앙방송국에 근무했다. 1941년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부 문화위원, 조선문인협회 간사, 조선문인보국회 평의원 등을 지내며 친일 활동을 했다. 해방 후, 출판사인 수선사(首善社)의 주간을 맡았고 1946년부터 한국 전쟁 때까지 육군사관학교, 공군사관학교, 서울여자상업고등학교에서 강의했다. 한국 전쟁 당시 서울에서 납북되어 북한 국영출판사의 교정원으로 배치되었다. 1956년 납북 인사들로 구성된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중앙위원으로 임명되었다가 평안북도 철산의 협동농장으로 강제 이주되었다. 그 이후의 행적은 알려져 있지 않다.김억은 1914년 일본 유학생들이 발간한 잡지인 ≪학지광≫에 <이별>을 발표하며 창작 활동을 시작했다. 초기 작품으로 <야반>, <나의 적은 새야>, <내의 가슴>, <밤과 나> 등이 있다. 이후 개인적 감정을 중시하고 감각적인 시어와 개성적 리듬을 강조한 시를 통해 한국 현대시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한편, 1916년 9월 ≪학지광≫에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 베를렌의 시를 번역한 <내 가?에 내리는 비>를 발표한 이래, 꾸준히 서구의 시와 시론을 번역·발표했다. 특히, 1918년 9월 창간된 ≪태서문예신보≫에 주로 프랑스 상징주의 시와 시론을 번역해 소개함으로써 한국 현대시에 상징주의 시풍을 정착시켰다. 1920년 ≪폐허≫ 동인으로 활동한 것을 비롯해 ≪개벽≫, ≪동광≫, ≪영대≫, ≪조선문단≫, ≪학생계≫ 등에 참여했다. 1925년 이후, 민요시 운동의 중심에 서서 한국적 정서와 가락을 담은 민요시 창작에 주력했으며 한시 번역에도 힘을 쏟았다.김억은 한국 현대시 최초의 창작 시집 ≪해파리의 노래≫(1923)를 위시해 ≪봄의 노래≫(1925), ≪금모래≫(1925), ≪안서 시집≫(1929), ≪지새는 밤≫(1930), ≪안서 시초≫(1941), ≪먼동이 틀 제≫(1947), ≪민요 시집≫(1948) 등을 상재했다. 그리고 베를렌, 구르몽, 보들레르, 예이츠 등의 시가 수록된 최초의 번역 시집 ≪오뇌의 무도≫(1921)를 필두로, 타고르의 시를 번역한 ≪기탄자리≫(1923), ≪원정≫(1924), ≪신월≫(1924), 아서 시먼스(Arthur Symons)의 시를 번역한 ≪잃어진 진주≫(1924), 한시를 번역한 ≪망양초≫(1934), ≪동심초≫(1943), ≪꽃다발≫(1944), ≪야광주≫(1944), ≪지나 명시선≫(1944) 등을 남겼다.

지은이 : 박규리
서울 출생. 1995년 《민족예술》에 신경림 시인의 추천으로 시 <가구를 옮기다가> 외 4편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2004년 <이 환장할 봄비에>(창비)가 있으며, 2010년 ‘제비꽃서민시인상’을 수상했다. 현재 동국대학교 겸임교수로, 저서로 《경허 선시 연구》가 있으며, <법정 무소유에서 드러나는 선적 사유>, <달라이라마의 행복론에서 설하는 지혜와 자비와 인문학적 고찰>, <조주 십이시가의 선시학적 특성 연구> 등 다수의 논문이 있다.

지은이 : 스와미 묵타난다
1908년에 태어났다. 1961년 스승인 바가반 니티아난다로부터 영적 깨달음의 능력을 전수받았다. 1970년대에 미국 뉴욕 주의 케츠킬 산에 시다요가 아쉬람을 세우고 서구에 진리의 가르침을 전하였다. 1982년 마하사마디에 들었다.

지은이 : 존 오도나휴
아일랜드의 시인이자 작가이며 가톨릭 학자. 아일랜드의 노스 카운티 클레어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존 오도나휴는 땅과 친밀한 성장기를 보냈다. 열두 살에 집을 떠난 그는 기숙사 학교를 거쳐 아일랜드 대학교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영문학과 철학, 신학을 공부하고, 1990년 독일의 튀빙겐 대학교에서 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또한 독일 철학자 헤겔에 대한 논문을 쓰기도 했다.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자신의 조상인 고대 켈트인들이 지니고 있던 독특한 사상에 눈을 떴다. 이때부터

  목차

일러두기
잊지 않기 위해 매일 시 한 잔을 마십니다

PART 1 마침내 피워낸 저 황홀

첫사랑 · 고재종
꽃을 위한 서시(序詩) · 김춘수
사랑하는 사람이 미워지는 밤에는 · 도종환
언제 오셔요 · 김억
입술 · 이성복
치자꽃 설화 · 박규리
사랑이 어떻게 너에게로 왔는가 · 라이너 마리아 릴케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 김영랑
밤 · 윤동주
별 하나 · 김형영
술 노래 ·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Drinking Song
사랑법 · 강은교
임께서 부르시면 · 신석정
설야(雪夜) · 김광균

PART 2 꽃이 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

‘하물며’라는 말 · 김승희
마음에 두려움이 없는 곳 · 라빈드라나트 타고르
아이들에 대하여 · 칼릴 지브란
방랑 ― 크눌프를 기억하며 · 헤르만 헤세
순수의 전조 · 윌리엄 블레이크
Auguries of Innocence
숲 · 강은교
한 숟가락 흙 속에 · 정현종
수라(修羅) · 백석
밭 한 뙤기 · 권정생
낙화 · 조지훈
깊은 물 · 도종환
사랑은 조용히 오는 것 · 글로리아 밴더빌트
미라보 다리 · 기욤 아폴리네르
나를 생각하세요 · 구스타보 아돌포 베케르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 알렉산드르 세르게예비치 푸시킨

PART 3 그대를 다 가지겠습니다

그리움 · 나태주
노래(사랑하는 이여, 내가 죽거든) · 크리스티나 G. 로세티
Song(When I am dead, my dearest)
낙화, 첫사랑 · 김선우
어느 뉴펀들랜드 개의 묘비명 · 조지 고든 바이런
꽃이 하고픈 말 · 하인리히 하이네
젖지 않는 마음 ― 편지 3 · 나희덕
다리 위에서 · 이용악
무서운 시간 · 윤동주
하늘의 무지개를 볼 때마다 · 윌리엄 워즈워스
My Heart Leaps Up When I Behold
상처받은 사람을 사랑할 때 · 존 오도나휴
님아 · 변영로
귀뚜라미 소리 · 방정환
아들에게 · 문정희
새해 아침 · 오일도
어둠 속으로 순순히 들어가지 말아요 · 딜런 토마스

PART 4 그토록 찬란했던 빛이건만

예술가 · 한용운
여유 · 윌리엄 헨리 데이비스
조용히 앉아서 · 스와미 묵타난다
초원의 빛 · 윌리엄 워즈워스
Splendor in the Grass
길 · 김기림
너는 울었다 · 이반 투르게네프
싸늘한 이마 · 박용철
달팽이 · 권태응
우리 이제 더 이상 방황하지 않으리 · 조지 고든 바이런
So We’l Go No More A-Roving
내가 박식한 천문학자의 말을 들었을 때 · 월트 휘트먼
통곡 · 이상화
마른 잎 · 헤르만 헤세
가을날 · 라이너 마리아 릴케
꿈과 상처 · 김승희

PART 5 기다리지 않아도 너는 온다

팬케이크를 반죽해요 · 크리스티나 G. 로세티
잊으시구려 · 사라 티즈데일
미움이란 말 · 김영랑
내 심장은 너무 작아서 · 잘랄루딘 루미
봄은 간다 · 김억
선우사(膳友辭) ― 함주시초 4 · 백석
씨앗 · 허영자
아름답게 나이 들게 하소서 · 칼 윌슨 베이커
Let Me Grow Lovely
임의 노래 · 김소월
돌팔매 · 오일도
사랑과 잠 · 황석우
감각 · 아르튀르 랭보
봄 · 이성부
해당화 · 한용운

시인 이름으로 찾아보기 (가나다순)
이 책에 실린 시의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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