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한명희 시인의 시에서 장소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시에 나타난 장소를 잘 따라가 살펴보면 시인의 시가 지향하는 바가 잘 드러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명희 시인의 시에 나타난 장소는 결론적으로 말하면 제의적 공간이며 시인만의 성소이며 기도처이다. 여기서 시인은 제사장처럼 혹은 사제처럼 시라는 언어형식을 통해 제의를 행하고 기도하며 자신의 깊숙한 내면과 만난다. 물론 이 공간이 현실 속의 구체적 어느 장소를 가리킬 수도 있으나 그의 시적 사유가 빚어낸 문학적 상상의 공간일 수도 있다.
깊은 내면으로 침잠하여 성찰하고 현실에서 받은 스스로의 상처를 치유하여 ‘다시 삶’을 꿈꾸며 건강한 삶으로 복귀한다는 의미에서 단순한 현실도피와는 다른 재생과 부활의 공간이라는 점을 잊지 않는다. 시인에게 시는 재생과 부활을 꿈꾸는 기도문이거나 주문이다. 현대인들은 많든 적든 심리적 압박감과 소외감 단절감 등 수많은 심리적 병리현상 등을 경험하고 때로 정신적 외상을 안고 산다. 따라서 시인이 빚어낸 공간에 동참하여 그의 기도와 같은 정결한 언어를 따라가다 보면 재생과 부활의 꿈에 젖을 수 있을 것이다.
출판사 리뷰
▣ 작품론
재생과 부활을 꿈꾸는 제의적 시학
복효근(시인)
시에 등장하는 장소는 시인의 감정과 사상을 표현하는 매개체로 작용하며, 읽는 이에게 시인의 시 세계를 더욱 생생하게 전달한다. 장소는 시의 분위기와 주제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장소는 시인의 감정을 표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런가 하면 상징적 의미를 지녀서 시의 의미를 더욱 풍요롭게도 한다. 역사적 장소가 등장하여 시의 배경을 표현해줌과 동시에 역사적 의미를 더해줄 수도 있다. 이처럼 시 작품에서 장소는 시인의 감정과 사상을 표현하고, 독자에게 시의 세계를 더욱 깊이 있게 전달하는 중요한 요소다. 따라서 시를 깊이 있게 이해하기 위해서 장소에 주목하면 효과적일 수 있다.
한명희 시인의 시에서도 장소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시에 나타난 장소를 잘 따라가 살펴보면 시인의 시가 지향하는 바가 잘 드러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명희 시인의 시에 나타난 장소는 결론적으로 말하면 제의적 공간이며 시인만의 성소이며 기도처이다. 여기서 시인은 제사장처럼 혹은 사제처럼 시라는 언어형식을 통해 제의를 행하고 기도하며 자신의 깊숙한 내면과 만난다. 물론 이 공간이 현실 속의 구체적 어느 장소를 가리킬 수도 있으나 그의 시적 사유가 빚어낸 문학적 상상의 공간일 수도 있다.
깊은 내면으로 침잠하여 성찰하고 현실에서 받은 스스로의 상처를 치유하여 ‘다시 삶’을 꿈꾸며 건강한 삶으로 복귀한다는 의미에서 단순한 현실도피와는 다른 재생과 부활의 공간이라는 점을 잊지 않는다. 시인에게 시는 재생과 부활을 꿈꾸는 기도문이거나 주문이다. 현대인들은 많든 적든 심리적 압박감과 소외감 단절감 등 수많은 심리적 병리현상 등을 경험하고 때로 정신적 외상을 안고 산다. 따라서 시인이 빚어낸 공간에 동참하여 그의 기도와 같은 정결한 언어를 따라가다 보면 재생과 부활의 꿈에 젖을 수 있을 것이다.
새라도 된 양 어디론가 날아가버리는
내 비밀한 생각의 사유와
밤마다 자리를 이탈하는 별의 향방이 궁금했다
발밑에 엎드린 별꽃에서부터 숲이 시작되었고
비로봉 만개한 철쭉의 군무가 소백을 완성했다
된바람에 살갗 터진 박달나무의 쓰라림과
골골이 흘러내리는 물소리 사이로
반음계 높은음을 내는 두견새
해 질 무렵의 저 작은 몸짓과
깃털에 묻은 어둠의 기척을 털어내면
숲이 하루의 문을 닫는다는 걸
소백에 들어서 확실히 알게 되었다
지금은 초록으로 물드는 기도의 시간
가시 돋친 말들을 물리치고
아무것도 탓하지 않는 침묵만이 남아
주름진 손을 하나로 모았다
눈물의 뿌리까지 내려갔을 때
말 대신 사라진 무언가를 위하여
마침내 숲이 숲을 부르는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숲의 완성」
시인의 시적 사유가 빚어지고 펼쳐지는 공간으로 ‘숲’이 설정되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소백산의 어느 숲이다. 시인은 어디론가 종잡을 수 없이 종횡무진하는 사유의 행방과 유성이 어디로 흐르는지 늘 궁금하였다. 일관된 철학적 사유에 대한 공복감과 아울러 변화무쌍한 우주 질서에 대한 궁금증을 말한 것이리라. 현실 생활에서 사유란 한 곳으로 모아지기가 좀처럼 어렵다. 일상의 잡다한 고민과 번뇌 크고 작은 잡념들에 쫓겨 순정한 사유를 하기란 쉽지 않은 것이다. 그러다 보면 많든 적든 남을 탓하게 되고 원망하게 되고 때로 그 화살은 자신에게 향해져 상처를 입게 된다. 깊고 일관된, 섭리라든지 진리에 대한 갈증을 말할 것도 없다. 복잡다단한 현실 속에서 돌아볼 겨를이 없다. 그럴 때 그 현실에서 한 발을 빼서 다다른 곳이 ‘숲’이다. 소백의 숲이다. 구체적으로 소백을 명시했으나 시인의 시에서는 다양한 장소로 변용되는 것을 볼 수 있다. 현실과 완전히 유리된 곳은 아니로되 자아를 깊숙이 들여다볼 수 있는 절리된 공간쯤으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시인은 이 숲이 어떻게 완성되는지 지켜본다. 숲은 발밑에 엎드린 별꽃과 같이 작은 풀꽃에서 시작하여 만개한 철쭉의 군무로 완성되는 것을 시인은 본다. “된바람에 살갗 터진 박달나무의 쓰라림과/ 골골이 흘러내리는 물소리 사이로/ 반음계 높은음을 내는 두견새” 따위가 더 필요하다. “해 질 무렵의 저 작은 몸짓과/ 깃털에 묻은 어둠의 기척을 털어내면” 숲의 하루는 온전히 완성된다. 작은 미물들의 몸짓과 소리, 심지어는 무생물인 물소리까지 숲을 이루는 요소들이다. 여기엔 “된바람에 살갗 터진 박달나무의 쓰라림”까지가 포함된다. 버릴 게 하나도 없다. 작은 풀꽃이며 새소리, 물소리, 그것들의 상처까지도 숲을 완성하는 소중한 요소인 것이다. 자연의 질서를 이루는 하나하나의 요소인 것이다. 어느 것 하나만 빠져도 숲은 완성되지 않는다.
이 소박한 진리를 깨닫기까지 시인은 하나의 숲이 완성되는 모습에 동참하여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다음 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이 작으나 엄연하고 위대한 질서 앞에서 겸손하게 손을 모으는 것이다. “지금은 초록으로 물드는 기도의 시간/ 가시 돋친 말들을 물리치고// 아무것도 탓하지 않는 침묵만이 남아/ 주름진 손을 하나로 모았다.” 시인은 “가시 돋친 말들을” 참회하고 “아무것도 탓하지 않으며” 오로지 주름진 손을 모아 기도한다. 작다고 하찮다고 못났다고 함부로 대하고 허투루 지나쳤던 것들과 낮은 자리에서 고통받는 이웃들을, 생명들을 그냥 지나쳤던 일상을 참회한다. 시인의 눈물은 저 낮은 곳에 이른다. 그때 시인은 이 성스러운 숲이 확장되는 소리를 듣는다. “말 대신 사라진 무언가를 위하여/ 마침내 숲이 숲을 부르는” 목소리를 듣는 것이다. 자아가 자아의 견고한 틀에 갇히는 대신 더 큰 자아로 태어나는 경험을 말하는 것일 게다.
시편 곳곳에서 ‘숲’은 시인에게 각별한 의미를 가지는 공간으로 그려진다. “(소나무의) 푸름과 흰꽃의 열락으로 심장이 아늑해지기도”하고 “산과 숲에서 내 피가 좀 더 뜨거워지기도” 한다. 그리고 “나는 숲의 고요 속에 들어 청산 같은 이름들과 할머니 어머니의 입말 같은 정이 담뿍 밴 은유들을 오래 생각”(「산책을 ㅅㅏㄴㅊㅐㄱ으로 느리게 걷다가」 ) 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숲’은 시인에게 영혼의 충전소이기도 하고 심신을 정화하는 성소이기도 하다. 그런가 하면 뉘우치고 참회하여 거듭나는 재탄생의 제단이기도 하다.
이곳은 애초에
햇볕이 들지 않는 습지였을까
그늘을 에두른 바위층에 이끼가 덮여 있다
죽어도 같이 살아보자고 들러붙는 저, 악착
느닷없는 동거가 생각할수록 어이없고
기분이 상했지만 훌훌 떨쳐냈다
떠도는 것들의 주특기는 틈을 노리는 것
덩치만 컸지 한 발짝도 걷지 못했으므로
어떤 방책도 마련하지 못한 바위는 속수무책이었을 것이다
사전 예고 없이
이끼들은 발끝을 세워 하나씩 일어나고
풍경의 문장들은 푸르러졌다
쉬이 경계를 좁힐 수 없는 빛과 그늘이
바위의 걸음을 떼게 할까
그나마 조그만 전구들이 반짝여
금방이라도 꼬마 요정들이 떼지어 나와서
싱싱한 웃음소리 출렁일 것 같은데
저 숨 막히는 바위의 생
언제쯤 햇살 한 줄기 바위를 열고 들어와
환한 세상을 보게 할 수 있을까
묵언 수행하는 바위에 자라는 이끼만 멋모르고 푸르다
- 「깊은 숲속에서」
다시 숲이라는 공간이 상정된다. 애초에 “햇볕이 들지 않는 습지”로 여겨질 만큼 칙칙하고 습하고 어두우며 답답한 공간으로 그려진다. 여기에서 등장하는 바위는 일단, 시적 자아와 다르지 않다. 바위에게 이끼가 사전 예고 없이 엄습하였다. 틈을 노리는 주특기를 가진 이끼는 처음엔 바위의 틈새에 안착하여 “죽어도 같이 살아보자고” 악착과 같이 들러붙는다. 느닷없는 동거가 이루어진다. 바위는 어이가 없어 떨쳐내 보지만 어떤 방책도 마련하지 못하고 속수무책이 된다.
이러한 장면에서 이끼는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다. 살아가면서 우리 인간에게 서서히 기생하기 시작하여 아예 몸과 마음을 점령하여 주인처럼 군림하는 고뇌와 번민을 경험한다. 사전 예고도 없이 틈입해서 떨쳐내 보려 하지만 그럴수록 악착같이 동거를 요구하는 번민과 고뇌는 “발끝을 세워 하나씩 일어나” 심신을 덮어버린다. “숨 막히는 바위의 생”은 그렇게 시작되어 그렇게 이어지는 것이다. 번뇌와 고뇌는 사는 게 고통일 만큼 일상화되고 삶을 고해로 규정하게 한다. 어쩌면 이 지점에서 우리는 신을 찾게 되고 또 종교를 떠올려 그것을 극복하려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앞서 살펴본 「숲」에서 ‘기도’가 생겨나는 지점도 여기다. 이 작품에서 기도에 해당하는 것이 ‘묵언수행’이다. 바위의 육중함은 묵언수행을 표현하기 위해 매우 적절한 상관물이라 하겠다. ‘기도’와 ‘묵언수행’은 한계 지워진 상황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구원의 노력이라는 점에서 같지만 ‘기도’가 자신 바깥에서의 조력을 구하는 것이라면 ‘묵언수행’은 좀 더 내면적인 의미를 지닌다. 고뇌와 고통을 자력에 의해서 떨쳐버리겠다는 의지적 행위인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이 시에서 ‘바위’와 ‘시적 자아’ 사이에 객관적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 “저 숨 막히는 바위의 생”이라는 표현을 보면 ‘저’ 지시형용사의 쓰임으로 그것을 짐작할 수 있다. ‘바위와’ 시적 자아의 거리감을 표현한 것이다. 또한 “언제쯤 햇살 한 줄기 바위를 열고 들어와/ 환한 세상을 보게 할 수 있을까”라는 문장에서도 보듯이 바위가 맞이할 환한 세상을 마치 관찰자의 입장에서 그려내고 있음을 본다. 고뇌와 고통에서 벗어나려 묵언수행하는 주체인 ‘자아’를 ‘초자아’의 입장에서 관찰하는 객관적 태도로 읽을 수 있다. 이러한 태도는 자아를 합리화하는 오류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으로 볼 수도 있다. 묵언수행하는 자아를 다시 한번 객관적으로 성찰하는 의미를 지닌다. “언제쯤 햇살 한 줄기 바위를 열고 들어와/ 환한 세상을 보게 할 수 있을까”라는 문장도 그래서 의문형으로 열려 있는 것이다.
인간의 살림살이에서 고뇌와 고통은 이끼와 같이 악착으로 달라붙는다. “묵언 수행하는 바위에 자라는 이끼만 멋모르고 푸르다.” 이끼는 언제나 푸르다. 묵언수행은 단방약이 아니어서 번뇌와 고뇌를 일순간 없애지 못한다. “깊은 숲”으로 상정된 인간 세상은 그래서 사시사철 이끼가 푸르고, 이끼가 바위를 덮은 한 묵언수행은 지속될 것이다. ‘깊은 숲’에서 시인이 삶을 어떻게 이해하는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헤쳐나가는지 그 의지와 자세가 나타나 있다고 하겠다.
빛난 이름값은 쓸모 있을 때만 유효하지
묵정밭 풀숲에 내동댕이쳐져
바싹 언 몸뚱일 손바닥만큼의 햇살에 녹이고 있을지 어찌 짐작이나 했을까
쑥부쟁이 꽃그늘로 떨어져 나가 제 기능을 잃은 뚜껑마저도
아직도 취사 끝 알림 수증기를 치-익 피워올리는 꿈을 꾸고 있는지
꽃그늘 깊은 곳에서 존재를 드러냈다
저녁이면 따끈한 밥을 품고
하룻길에 지친 발소리를 듣던 밥통이 아니던가
언제부터 노숙의 나날이었는지
반짝이던 광채가 사라진 펑퍼짐한 몸체
밤이면 꽃향기에 스며
다시, 재생의 날을 꿈꾸며 달빛을 담았다
버려진 밥통의 비애를 보듬고 싶은지
무리 진 하얀 꽃그늘이 달무리에 그윽하다
- 「밥통, 쑥부쟁이꽃」
이 시 작품의 배경은 ‘묵정밭 풀숲’이라는 공간이다. 여기에 버려진 밥통이 시의 제재다. 시인은 “빛난 이름값은 쓸모 있을 때만 유효하”다고 운을 뗀다. 세상의 통념을 표현한 것이다. 필요 유무에 따라 가치가 매겨지고 취사선택이 결정된다. 낡은 밥통은 아무리 빛나는 브랜드를 가졌을지라도 쓸모가 없어지니 버려지게 된다. 밥통은 “묵정밭 풀숲에 내동댕이쳐져/ 바싹 언 몸뚱일 손바닥만큼의 햇살에 녹이고 있을지 어찌 짐작이나 했을까”? 필요 유무에 따라 운명이 결정되는 것은 인간도 예외가 아니다. 나이를 먹고 기운이 떨어지고 그 효용가치가 없으면 직장에서 밀려나게 되고 심지어 가정에서도 소외되는 것이 인간 세상이다. “반짝이던 광채가 사라진 펑퍼짐한 몸체”는 버려져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구석으로 밀려난다.
그러나 그렇게 버려진다 해서 존재가치마저 없어지는 것일까? 밥통은 “쑥부쟁이 꽃그늘로 떨어져 나가 제 기능을 잃은 뚜껑마저도/ 아직도 취사 끝 알림 수증기를 치-익 피워올리는 꿈을 꾸고 있는지/ 꽃그늘 깊은 곳에서 존재를 드러냈다.” 시인의 눈엔 버려진 밥통은 아직도 꿈을 꾸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저녁이면 따끈한 밥을 품고/ 하룻길에 지친 발소리를 듣던 밥통이 아니던가” 마치 한 가정의 식사를 책임지던 어머니, 아내, 주부를 보는 것 같다. 그들도 늙는다. 늙음은 소외의 이유가 되어 뒷전으로 밀려난다. 그렇다고 꿈까지 없으랴?
‘신고려장’이라는 말이 등장하였다. 경제능력을 상실한 노인들은 젊은 세대에게 걸림돌이 된다. 그래서 좀 더 편리하고 안락함을 이유로 노인시설에 살도록 한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닐지라도 사회가 고령화되어가면서 이제 보편적 현실이 되어가는 것도 사실이다. 그게 보편화된다고 해서 당연한 것은 아니다. 복지, 편리, 안락함도 좋지만 노인들의 존재가치를 필요와 불필요로 나누어 그 존엄성을 지켜주는 사회적 배려는 여전히 절실하다.
시인은 밥통이 “밤이면 꽃향기에 스며/ 다시, 재생의 날을 꿈꾸며 달빛을 담았다.”고 말한다. 버려진 밥통도 “재생의 날”을 꿈꾼다. 그리고 “버려진 밥통의 비애를 보듬고 싶은지/ 무리 진 하얀 꽃그늘이 달무리에 그윽하다”고 그려낸다. 시 작품이 명시적으로 사회적 배려를 주장하지 않은 대신 서정적인 표현으로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부분인 꿈을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꿈이 있다. 노년기에 이르러 다시 육체가 새로워져 젊은 시절로 돌아갈 수는 없다 해도 늘 새로운 희망이 있고 정신적으로 영혼적으로 새롭게 태어나 새로운 꿈을 꾸고 더 나은 내일을 설계한다. 그 꿈은 자신에서 실현되지 않는다 해도 그 꿈 자체로 아름다울 뿐 아니라 지혜의 형태로 미래세대에게 전해져 좀 더 따뜻하고 인간적인 세상을 만들어나가게 한다. 그것이 시인이 시를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재생과 부활 의지가 아닐까?
일주문 들어서자, 사위가 고요하다
나부끼는 벚꽃비에 소리가 갇혀 생각이 더 깊어지는 것은
여기에 잃어버린 시간이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동안의 그리움 콕콕 새겨 단청보다 높은 돌계단을 오르며
가장자리마다 동그랗게 앉은 민들레 합장하는 노란 미소에
풍경 쫓아 걷는 길이라고 답례한다
여기서는
내가 희구해온 그 무언가 마주할 것 같아
무량수전 앞에서 배흘림기둥만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마중하러 다시 걷는다
저물녘 늙은 소나무 한 가지
액자처럼 안겨오는 곳에 섰더니
바알간 노을에 가 닿기 위해선
길게 손 뻗은
푸르른 마음부터 읽으라고 한다
늘 같은 빛깔로 아침 해를 품다가
같은 빛깔로 저녁 해를 배웅하는
소나무 한 그루 사이로
그 장엄한 협주를 바라본다
잊고 있던 시간이 노을꽃으로 차오른다
언젠가는 미리내로 떠오를 순정했던 순간들
훅, 천년의 바람 한 줄기 내 안으로 들어온다
- 「부석사,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부석사라는 공간을 배경으로 하였다. 시인의 부활, 재생에 대한 시적 지향을 읽을 수 있는 또 다른 작품이다. 부석사는 시인에게 각별한 의미를 지니는 공간이다. 그 의미가 구체적으로 그려지지 않았지만 ‘푸른 색깔’로 말해질 수 있을 것 같다. 부석사엔 잃어버린 시간이 살고 있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현실에서 잃어버린 시간을 부석사에 가면 만날 수 있다는 뜻이겠다. 현실 세계의 실생활은 천변만화하고 좀처럼 갈피를 잡을 수 없다. 거기에 마음은 울고 웃고 상처를 받고 상처를 입히고 고통과 갈등의 연속이다. 유아기 혹은 어린 시절의 순정한 마음을 지니고 살기 어렵다.
그럴 때 시인은 부석사를 찾는다. 절이다. 그러나 부처나 경전, 불도, 깨우침에 대해서 말하지는 않는다. 벚꽃이 져 내리는 봄날이다. 벚꽃을 보려는 상춘객의 발걸음도 뜸한 시간을 틈타서 부석사를 오르면 거기엔 “잃어버린 시간이 머물고 있다.” “여기서는/ 내가 희구해온 그 무언가 마주할 것 같다.” 먼저 만나는 것이 ‘고요’다. 그리고 높은 곳으로 이끄는 ‘돌계단’이다. 그다음이 “가장자리마다 동그랗게 앉은 민들레 합장하는 노란 미소”다. 그동안 저 아래 세상에서 잃어버린 것들의 목록이다. 시끄러운 소음의 소용돌이 속에서 내 안을 들여다 볼 고요할 틈이 없었다. 정신의 높은 곳으로 이끌어갈 계단도 없이 늘 낮은 진창을 헤매었다. 꽃의 미소에 눈길을 준 지가 얼마나 되었던가......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그윽히 눈길을 주던 시적 자아는 다시 그 무엇을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이윽고 “저물녘 늙은 소나무” 아래에서 발걸음을 멈춘다. 그렇다고 소나무가 최종 목적지는 아닌 듯하다. 시인이 가 닿고자 하는 곳은 노을이다. 소나무는 “늘 같은 빛깔로 아침 해를 품다가/ 같은 빛깔로 저녁 해를 배웅”한다. 그래서 소나무의 변치 않는 빛깔, 푸르른 마음부터 읽어야 한다. 태양을 우러르는 항상심을 말한 것이리라. 시인이 잃어버린 바로 그것이다. 소나무는 시인과 노을을 이어주는 다리이다. 소나무가 가리키는 하늘 꽃으로 피어나는 노을을 본다. 소나무 푸른 빛과 노을빛이 어우러진 장엄 협주곡이다. 잃어버린 시간이 노을꽃으로 꽉 채워진다. 노을은 우리가 마지막 이르러야 할 서방정토를 가리키는지도 모른다. 이윽고 노을마저 사라질 것이다. 그 자리엔 맑게, 푸르게, 밝게 되찾은 시인의 순정한 시간들이 미리내로 떠오를 것이다. 지상적 존재로부터 천상의 존재로 부활하는 것이다. 이처럼 이 시는 부석사라는 공간에서 지고지순하고 순정한 존재로 부활하고 재생하고자 하는 시적 지향을 잘 드러내고 있다고 하겠다.
육지에서 피면 그대로
길상사 꽃이 되기도 하는 바닷가의 꽃
법당 앞마당에 소담스레
말간 동자승들이 얼굴을 내밀었다
떠다니는 풍문이 바닷물처럼 적막하게 흐르다가
추녀 끝 풍경에 머문다
제주 바다 해녀처럼 뭍을 꿈꾸었을까
성북동까지는 어떻게 찾아왔는지
거친 바다를 떠나온 해국
새벽 예불 소리 듣고
함초롬한 미소에 나비가 찾아든다
이따금 풍경 쫓아 오는 어귀
저 꽃잎은 어떤 불심이 내려앉아
희망을 끌어올리는지
반드시 당도해야 할 그 어떤 곳까지
실어 날라야 할 향기가 있는지
사진을 담는 동안에도
해국은 바람과 어우렁더우렁
멀리멀리 퍼지는 꽃물결 파도 소리 내며
착착 불경을 넘기고 있다
- 「해국」
해국은 바닷가 언덕에서 자라 꽃을 피우는 식물이다. 그런데 어떤 연고로 성북동 길상사 섭당 앞에 동자승처럼 피어 있다. 이는 실제로 해국이 길상사에 핀 상황으로 이해해도 좋겠으나 또한 해국은 어떤 한 인간에 대한 은유인지도 모른다. 제 살던 곳을 떠나 전혀 다른 환경으로 이주하여 살아가는 생명이란 점에서 이주민을 떠올리게도 한다. 그러나 해국은 우연히 또는 어쩌지 못해 견디면서 사는 모습이 아니다. “반드시 당도해야 할 그 어떤 곳까지/ 실어 날라야 할 향기가 있는지” 뭍에 옮겨와서 검질기게 삶을 이어가는 해녀처럼 “해국은 저 꽃잎은 어떤 불심이 내려앉아/ 희망을 끌어올리는지” 적극적이며 의지적으로 살아 피어나고 있다. 옮겨온 해국이 정착한 곳이 사찰이란 점에 주목한다. “저 꽃잎은 어떤 불심이 내려앉아/ 희망을 끌어올리는지” “멀리멀리 퍼지는 꽃물결 파도 소리 내며/ 착착 불경을 넘기고 있”는 모습에서 수도승, 혹은 불보살을 떠올리게 한다. 그곳이 어디든 본래의 성품을 잃지 않고 향기를 발하는 해국처럼 인간 안에 갖추어진 불심을 찾아 수행하는 불자와 그 모습이 겹쳐진다. 종교적 상상으로 빚어진 이 시는 시인의 소망이 투영되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곳이 어디가 되었든 항상심을 잃지 않고 내면의 자아를 찾아 불심을 가꾸겠다는 의지로 읽히는 것이다. 거듭남의 의지로 해석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구석에 방치된 낡은 카누”에 담쟁이덩굴 씨앗이 날아와 자라게 되면서 카누는 새로운 제2의 생을 꿈꾼다. (「낡은 카누의 꿈」) 낯선 장소에 옮겨와 담쟁이덩굴이 자라면서 색색의 잎을 달고 카누와 더부살이를 한다. “강에서 쫓겨난 카누가/ 지상에서 펼치게 될 꿈의 2악장을” 그리는 것과 같이 담쟁이덩굴도 카누도 새로운 삶을 꿈꾼다.
시인은 “찻잔에 뜨거운 물을 붓고/ 꼬깃꼬깃 접혔던 생을 풀어내는/ 목련꽃을 마주한다.” (「참 미안한 일」) “칼칼한 목감기 답답한 목을 위해/ 그 여린 생의 꿈을 무참하게 하고”만 시인은 가슴 속으로 부는 매운 바람을 느끼며 “미안하다 미안하다 다독인다.” 그러면서 목련꽃에게 “순백의 향기로 꽃피어라/ 꽃피어라 기어이 다시 피어나라.” 시인은 기도한다. 그것은 목련꽃몽오리에게 하는 기도이기도 하지만 순정한 영혼으로 거듭 태어나고자 하는 시인 자신에게 거는 주문인지도 모른다. 비록 무생물을 대상으로 하고 있지만 시인의 시가 재생과 부활이라는 정신과 영혼의 주제를 천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하늘 가차이
꽃잎의 경이로운 몸짓이
번 그리고 아웃
흑과 백 선명한 보색의 옷 입은 그대
벙근 한때가 눈부셨다고
하냥 환희롭던 마음
그대 밑동 옹이에서 멈추었습니다
깊이 팬 곳에
더없이 아름답게 핀 조그만 꽃무덤
상처를 꽃으로 피워낸 뜻
신전의 뜰을 찾아든 순례자의 숭고함 같아
생애 깊이 숨긴 옹이 하나
마음 깊은 곳에서 달그락거린다고
그대 못다 한 사랑 땅으로 내려
파아란 가지 타박타박 걷습니다
남은 생의 다른 길을 길로 갑니다
- 「벚꽃, 남은 노래」
벚꽃이 화려하게 피고 진다. 신에게 가까이 닿으려는 듯 하늘 가차운 곳이다. 경이롭기 그지없다. “흑과 백 선명한 보색의 옷 입은 그대/ 벙근 한때가 눈부셨다.” 그 꽃을 보는 상춘객의 마음은 환희심에 넘친다. 그리고 벚꽃이 졌노라고, 봄이 다 가버렸다고 허망하다고, 벚꽃은 왜 그리 빨리 져버리는지 모르겠다고 한마디씩 소감을 남긴다. 그러나 시인의 눈과 사유는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벚나무 아래 옹이진 자리를 보게 된다. 거기 “깊이 팬 곳에/ 더없이 아름답게 핀 조그만 꽃무덤”을 발견한다. 나무가 상처를 입어 깊게 파인 곳에 생각지 못한 꽃이 맺혀 피어 있는 것이다. 시인은 거기서 “상처를 꽃으로 피워낸 뜻/ 신전의 뜰을 찾아든 순례자의 숭고함 같아” 잠시 숨을 멈춘다. “그대 못다 한 사랑 땅으로 내려/ 파아란 가지 타박타박 걷고” 있음을 본다. 후닥닥 피고 지는 벚꽃이라 하지만 상처가 옹이진 낮고 깊은 자리에 나머지 생을 피워내는 의지를 엿본 것이다. 그리고 “생애 깊이 숨긴 옹이 하나/ 마음 깊은 곳에서 달그락거린다.” 그 상처진 자리에서 꽃을 피우는 거듭남의 의지가 시인 자신에게로 옮겨와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 수 없다. “남은 생의 다른 길을 길로 갑니다.”라는 언술은 벚나무 상처에서 자란 가지에게 해당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시인 자신의 의지를 담아낸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어쩌면 늘 정신적으로 영혼으로 새로이 거듭 태어나고 싶은 재생과 부활의 의지가 있기에 시인의 눈에 상처에서 꽃을 피우는 벚나무가 눈에 들어왔을지도 모른다.
시인의 시집에 수록될 많은 작품에는 여러 가지 메시지와 함께 다양한 목소리가 담겨 있다. 여기서는 ‘장소’라는 것에 주목하여 시인의 시 정신을 엿보고자 했다. 여기에 언급되지 않은 작품들을 보더라도 시인의 시 정신은 범박하게 요약하면 ‘재생과 부활’이 아닐까 한다. 시인의 시는 그래서 참회와 기도와 그것을 통해 높고 새로운 정신 세계로 승화하고자 하는 의지의 흔적으로 규정할 수 있겠다. 시인의 시 창작은 삶과 영혼을 고양시키려는 일종의 제의적 행위라 명명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시인이 혼신을 다하여 시를 써야 하는 이유인 것이다. 인간과 자연에 대한 연민과 따뜻한 시선도 자아에 대한 촘촘한 성찰의 시선도 크게는 이러한 시 정신에 수렴된다 하겠다. 차분하고 정결한 언어 표현 그 안에 담긴 단단한 생의 의지가 이후에 펼쳐질 시에도 든든한 믿음을 갖게 한다.
숲의 완성
새라도 된 양 어디론가 날아가버리는
내 비밀한 생각의 사유와
밤마다 자리를 이탈하는 별의 향방이 궁금했다
발밑에 엎드린 별꽃에서부터 숲이 시작되었고
비로봉 만개한 철쭉의 군무가 소백을 완성했다
된바람에 살갗 터진 박달나무의 쓰라림과
골골이 흘러내리는 물소리 사이로
반음계 높은음을 내는 두견새
해 질 무렵의 저 작은 몸짓과
깃털에 묻은 어둠의 기척을 털어내면
숲이 하루의 문을 닫는다는 걸
소백에 들어서 확실히 알게 되었다
지금은 초록으로 물드는 기도의 시간
가시 돋친 말들을 물리치고
아무것도 탓하지 않는 침묵만이 남아
주름진 손을 하나로 모았다
눈물의 뿌리까지 내려갔을 때
말 대신 사라진 무언가를 위하여
마침내 숲이 숲을 부르는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겨울이 더 유리했다, 흔들리는 것들의 이유를 알기에는
창문을 열고
훅 치고 들어오는 아침을 맞이하다가
건너편 나이 든 감나무를 바라본다
빨강 노랑 회색 보라
어떤 색은 색깔의 범주에 들지 않는다,를 알기에는
겨울이 더 유리했다
남아 있는 시들이 허공에서 마지막 전시회를 열고 있다
화랑들은 철시를 하고
눈이 나리고
눈꽃을 둘러쓴 홍시들이 흰 고깔의 표정 같기도 하여서
여기만큼 든 나는 갑자기
큰 설산을 하나 넘어온 기분이어서
설산雪山이라는 발음을 바라보고 싶기도 하다가
겨울이 더 유리하다는 것을 알았다
흔들리는 것들의 이유를 알기에는
오래된 감나무가 내민 작은 가지 하나에는
버티는 몇 장의 잎들이 마르고 있다
그가 맨 처음 내게로 왔던 날이, 어느새
감나무 가지에서처럼 매달려 있다
네 뒷모습이 아릿해 보일 때
겨울이 시작되었다
감나무의 둥치가 흔들리는 이유를 알기에는
충분하지 않을지라도
겨울이 더 유리했다
모든 새로운 만남들 역시
그리고 겨울에서 시작되었다
그녀는 지하에서 피는 꽃
거미줄처럼 얽힌 땅속의 곡선
기꺼이 지상에서 지하로 내려가 사는 사람이 있다
레일 위를 순환하며 콩나물시루 같던 하루를 비우고
생의 잔뿌리를 찾아
종착역에 긴 몸뚱이를 누이면
쓸고 닦는 일에 더께 낀 시간은
그녀의 밑그림이 되는 어둠의 색채로 번득인다
지상은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대낮
지하의 혼곤한 어둠 속에서 아무도 모르게 피는 침묵의 꽃이 있다
그녀는 지상에 없는 사람
여지없이 새벽은 어제처럼 또 빨리 도착해
땅속 칸 칸으로 들어서 어디론가 떠나고 돌아오는 사람들을 맞이한다
길 속에 갇혀 있던 지상의 길조차
지하에서는 자유롭게 나래를 편다
지하로의 잠행은 그녀만의 삶의 활력
지상과 알맞게 깊은 지하에서 그녀의 꽃이 핀다
✽그녀는 지하철 환경미화 노동자를 칭한다.
작가 소개
지은이 : 한명희
· 2022년 《시와사람》 신인상 당선· 2022년 중앙시조백일장 6월 장원 수상·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시와 편견, 시와 글벗, 우리詩, 시와징후 회원· 시집 『참, 미안한 일』
목차
시인의 말
제1부 숲의 완성
숲의 완성
겨울이 더 유리했다, 흔들리는 것들의 이유를 알기에는
그녀는 지하에서 피는 꽃
용광로가 피워낸 불꽃
집어등 불빛도 불빛인데
깊은 숲속에서
꿈꾸는 향나무
간이역으로 간 구절초
세한송백歲寒松栢
솟대가 된 새
벚꽃, 남은 노래
징후
로봇청소기
눈썹달
석류
저녁나절에
수박을 썰다
무화과는 뒤집힌 꽃이다
나무는 달리고 싶다
제2부 물 위를 달리는 나비
이사벨 데 포르셀 부인의 초상화
물 위를 달리는 나비
왕따 나무의 허밍
부석사,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목수국 그늘이라면
민들레 꽃씨
풍선초의 비밀
색깔을 띤 소나기
덧셈 법칙
태몽이 출렁이는 방
어머니의 습작
개나리 꽃그늘
노을 그 아득함에 대하여
걱정인형
직조 수련 드로잉
견고한 가을
병산서원
낡은 카누의 꿈
제3부 봄은 계절의 안감
봄은 계절의 안감
당신, 장구채 신명은 꽃의 영혼
해국
보라, 그 고독을 버므려
깊어가는 하루살이의 밤
생을 밀어내는 죽음의 그림자
뿔, 아이러니
길고양이의 말
토란잎을 쓰면 소낙비가 앞서 달리지
달리아
그 몸짓 애틋해서
밥통, 쑥부쟁이꽃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을 연주하다
초여름 저녁이 보풀처럼 부풀 때
오월을 베어 물었더니
개복숭아와 개망초가 있는 풍경
어안렌즈
꽃숭어리, 피다
모태
제4부 그들이 사는 방식
그들이 사는 방식
작별의 계단을 오르며
참, 미안한 일
소양강 처녀가 낙조에 젖을 때
당근마켓에 내놓은 제비집
수레국화에 이끌려
사월의 창덕궁 후원
자라섬
날개의 주소
빨간 우편함
한강 드론라이트쇼
싸리꽃 피는 말
맹꽁이 노래
초록에 물들며
술래는 외롭다
산책을 ㅅㅏㄴ ㅊ ㅐㄱ으로 느리게 걷다가
담쟁이
홍옥 속엔 네가 있다
반달을 화자로 설정한, 초저녁 하늘 초고 시
꽃여울은 강물 따라
저녁나절
작품론
재생과 부활을 꿈꾸는 제의적 시학 / 복효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