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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성 오디세이아
정음서원 | 부모님 | 2026.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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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서 소개

저널리스트 백인호가 신념으로 기록한 효성그룹 성장사로, 조홍제 창업회장의 인간적 진면목을 이해할 수 있는 일화와 정보들이 담겨 있다. 삼성물산, 제일제당, 제일모직 창업 멤버로 활동하며 이병철 회장과 동업했던 시기와, 동업 청산 이후 효성그룹을 출범시키는 과정이 함께 그려진다.

이병철 회장의 동업 청산 요구의 본질과 그 배경, 그리고 조홍제 회장의 사업 성공 요인을 밝히려는 시도가 이어진다. 성리학적 선비정신을 바탕으로 성장했으나 “성냥개비” 계산법으로 모든 사안을 숫자에 기반해 풀어내며 사업을 확장했고, 동양나일론 창업과 타이어코드지 성장 등을 통해 재계에서 입지를 다졌다.

효성그룹은 스판덱스, 타이어코드, 변환·변압기 분야에서 세계적 경쟁력을 갖춘 기업으로 성장했다. 이어 조석래 회장의 경제 외교와 글로벌 네트워크를 통해 확장된 흐름까지 짚으며, 인간관계의 진실성과 인문학적 소양이 기업 성장의 기반이 되었음을 보여준다.

  출판사 리뷰

이 책은 저널리스트 백인호가 신념으로 기록한 효성 그룹 성장사이며, 조홍제 창업회장의 인간적 진면목을 소상히 이해할 수 있는 일화와 정보들 담고 있어 매우 흥미진진하다.

조홍제(趙洪濟) 효성그룹 창업회장은 최근 주목받고 있는 K-사업가 정신 벨트인 경남 함안, 의령, 진주 중 함안(咸安)에서 태어났다.
조홍제 회장은 매우 특별한 사업력을 가지고 있다. 조회장은 생애 최초로 사업을 시작, 기업인으로 재계에 발을 딛을 때 이병철 삼성 회장과 동업으로 출발한 것이다. 조홍제 회장은 인생의 황금기인 40세부터 55세까지 15년 동안 삼성(三星) 사람이었다. 조회장은 삼성물산, 제일제당, 제일모직 창업 멤버였으며, 제일제당 대표이사 사장을 역임했다.
어느 날 이병철 회장의 돌연한 동업청산 제의를 받고 조회장은 새로운 출발을 감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효성그룹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저자는 조홍제 회장과 이병철 회장을 직접 취재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저자는 이 책에서 이병철 회장의 동업 청산요구의 본질이 무엇이며 왜 그렇게밖에 될 수 없었던가를 밝혀보려고 노력했다. 또한, 조홍제 회장의 사업 성공 요인은 무엇이었나를 해명해보려고 애썼다.

조홍제 회장은 유년기에 성리학에 기반한 선비정신을 공부했고, 이윤창출이라는 기업본질과는 거리가 있어 재계에 적응하기에는 한계가 있을 것으로 추측되었다. 그러나 조회장은 그의 유명한 “성냥개비” 계산법으로 모든 사안을 숫자에 기반해서 풀어냈으며 실패를 피해 나가 성공했다. 조회장은 세계적인 화섬업체인 동양나일론은 창업했고 한국타이어, 타이어코드지를 성장시켰다. 효성그룹은 한때 재계 순위 5위에 오르기도 했다.
조석래 2세 회장도 창업 회장에 이어 효성그룹을 크게 성장시켰으며 특히 그는 경제 외교 분야에서 눈부신 활약으로 한국 경제를 글로벌 시장에서 주목받게 했다. 조석래 회장은 한·미·일 경제계에 폭넓고 깊은 인적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었으며 국가 경제 위기 때마다 이를 극복하는데 힘을 보탰다.

효성그룹은 숨은 보물을 몇 개 가지고 있다. 섬유의 반도체인 스판덱스(Spandex) 세계 1위, 타이어코드(Tirecode) 세계 1위, 변환·변압기(HVDC) 분야에서 세계 강자이다. 인공지능(AI) 데이터 센터 폭증, 신재생 에너지 확산, 노후 전송망 교체 등 요인이 변압기 산업을 크게 신장하고 있으며 구글, 아마존도 효성그룹에 줄을 서는 형편이다. 또한 K그리드(Grid, 전력망) 선두주자이자 향후 성장 잠재력이 무궁무진하다.

이 책과 더불어 이러한 효성그룹의 발전 전망에는 인간관계의 진실성과 인문학적 소양이 뒷받침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가장 현명했던 판단 (삼성을 떠나다)

조홍제(趙洪濟) 사장(당시 직책)은 마침내 삼성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1962년 9월 조사장은 15년이나 재직했던 삼성그룹을 떠나, 독자 사업의 길을 선택했다. 조 사장은 단순한 CEO(최고경영자)가 아니었다. 이병철(李秉喆) 삼성그룹 회장과 동업으로 삼성물산 공사를 창설한 투자자였다. 삼성물산 공사 초기 투자 비용은 당시 조 사장이 1,000만 원, 이병철 사장이 700만 원으로 조사장 지분이 더 많았다.
조사장이 삼성과 결별한다는 소식이 공식적으로 사내에 전해지자 사내 임직원들은 어리둥절 놀라워했고 재계에도 비상한 피문을 일으켰다. 조사장이 왜 삼성을 떠나게 됐고 이병철 사장과 무슨 불화라도 있었던 걸까? 각자 나름대로의 추측이 난무했다. 조사장과 이사장은 지난 15년 동안 6.25 전란의 혼란기에도 제일제당(설탕)과 제일모직(복지)를 설립·성공함으로써 명실공히 “삼성그룹”이라는 재계 1위 그룹을 만들어 왔던것이다. 삼성은 조홍제, 이병철 두 사람의 작품이었다. 당시 우리 재계에서는 합자회사로 출발, 재벌급 대기업으로 성공한 두 곳을 눈여겨 보고있었다. 하나는 “조, 이”의 삼성이었고 다른 하나는 구인회(具仁會)와 허만정(許萬正)의 락희금성(樂喜金星 현, LG) 그룹이었다. 한국에서는 오래전부터 한국 사람은 동업해서는 성공하지 못한다는 속설이 있어 왔다. 일본사람들도 한국 사람을 얕잡아 보는 것 중 하나로 “한국 사람은 동업을 못 해 서로 믿지 않거든.”하고 흉을 보았다.
조홍제 사장은 어느 날 서재에서 “누구나 자기 재산을 키우려 하지 않는 사람은 없겠지만 그래도 사리에 맞도록 하면서 재산을 키워야지. 그렇지 못하면 돈을 모으는 것, 그 자체가 무의미해지지 않는가? 돈도 따지고 보면 사람이 올바르게 잘 살기 위한 한 가지 수단에 불과한 것을...” 이런 생각에 잠겨 있었다. “내가 재산 관리에 너무 허술함이 있지 않았나” 하는 후회도 되었다. “그때 그때 내가 분명히 처리를 해뒀어야 했는데...” 이런 일을 당하고 보니 재산에 대한 것보다도 내 자신이 이런 일로 고민하게 되었다는 그 자체로 마음이 아팠다.
조회장은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이제는 기분상으로라도 삼성 사무실에 나가는 일이 싫어졌다. 따뜻한 인정과 서로의 마음을 믿을 수 있는 곳에 낙이 있는 것인데 사태가 이렇게 급변하니까 평소에 자주 드나들던 중역들도 조심스러워져 스스로 찾아오는 일이 뜸해지게 되었다. 사정이 이렇게 진전되어 갈 바에야 내가 하루라도 더 머물면 머물수록 그만큼 나에게 손해가 온다는 것을 뒤늦게나마 조홍제 사장은 깨닫게 되었다. 무턱대고 그의(이병철 사장) 처분만 바란다는 것은 황화(黃河)의 물이 맑아지기를 기다리는 백년하청(百年河淸) 격이며 시간을 유효하게 쓰기 위해서는 재산분배 문제로 차일피일 세월만 보낼 것이 아니라 그 정리는 뒤로 미루고 하루라도 빨리 여기(삼성그룹)를 떠나 내 독자 사업을 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독자들이어, 우리는 조홍제 효성그룹 창업 회장이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 회장과 15년 동안 이어온 동업 관계를 청산하고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려고 하는 국면을 보고 있는것이다. 당시 조, 이 사장의 결별소식은 재계에 큰 파문을 던졌고, 우리 재벌 성장사에서도 하나의 충격적인 사건으로 기록된 것이다.)
삼성 내에서도 조홍제 사장이 떠난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누가 조사장을 따라갈 것인가? 하는 문제에 큰 관심을 보였지만, 막상 이병철 사장과 재산분배를 매듭짓지 못한 채 나가게 되었다고 하니 조사장이 무일푼이라고 생각했는지 조사장을 따라가겠다고 했던 사람들도 마음을 접고 말았다. 욱일승천의 기세로 성장하는 삼성그룹을 떠날 샐러리맨은 흔치 않을 것이다.
이렇게 쉽사리 조사장이 삼성을 떠난다고 하니까 이병철 사장은 “조사장이 나가서 독자적으로 새 사업을 시작하려면 사업자금이 필요할 것인데 지금 회사에는 여유 있는 자금이 없으니까 내가 개인적으로 2억 원 정도 차용해 드릴테니 어떻소?”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처음에는 혹시 내가 잘못 들었나? 하고 귀를 의심할 정도로 도저히 있을 수 없는 말이었다. 어안이 벙벙하다는 말은 이런 경우를 두고 생겨난 말인가... “이 사람 무슨 말을 그렇게 함부로 하나, 내가 장부에 있는대로 내 지분만큼 계산하여 가지면 될 것을 무엇 때문에 돈을 빌리고 어쩌고 한단 말인가?”
그와 동업한 이래 이렇게 모욕적인 말은 처음이라 조사장은 몹시 화를 내고 그를 나무랐다. “내가 제일제당을 갖기로 합의가 되었으면 그대로 절차만 밟으면 될 것을 돈을 빌려 가라니 이 무슨 말인가? 이것은 마치 손님에게 성찬을 차려놓고 잡수시오. 잡수시오. 하다가 상을 받는 사람이 “그러면..” 하고 한술 떠서 목으로 넘길 즈음에 수저를 불끈 쥐고서 “안 됩니다.” 하고 못 먹게 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한동안이 지나도 이병철 사장은 고개를 떨군 채 묵묵부답이었다. 한참 만에 조홍제 사장은 “이사장 정히 처음부터 나에 대한 뜻이 그랬다면 왜 지금까지 나를 여기에 붙잡아 두었는가? 내 나이 이미 쉰하고도 여섯, 말하자면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들었는데 이 나이에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라는 말인가, 평가도 제대로 안 하겠다. 내 지분도 청산을 못 하겠다. 그러면 내가 이사장과 함께 투자하여 이 만큼 키운 삼성 15년의 활동을 무엇으로 보상하겠는가. 내가 할 말은 많지만 딱 한 가지만 이 자리에서 분명히 해두고 싶은 게 있네. 그것은 내가 이사장과 헤어질 때는 그동안 가장 가까웠던 사업 동지로서 내가 여기를 떠난 다음에도 예전과 다름없이 웃는 얼굴로 대하려 했는데 이건 너무하지 않는가. 사리에 어긋나지 않게 내 지분을 청산하도록 하여 우의마저 상하지 않도록 해주기를 바라네.”
조홍제 사장은 이렇게 말하고 지분정리는 뒷날로 미루고 삼성을 떠나고 말았다.

뜨거웠다 차가워지는 인심
조홍제 사장이 사유물을 챙겨 들고 사무실을 나올 때 전송해 주는 사람 하나 없이 오직 운전기사만이 동행했다. 정들었던 반도호텔(半島 호텔. 현 롯데호텔) 정문을 나서자니 조사장의 가슴은 만감이 교차했다. 당시 반도호텔은 수도 서울의 정치·경제 심장부로 한국 현대사의 역사 기록의 현장이었다. 8·15 광복으로 미 군정이 펼쳐진 3년 동안 미 8군 장성들의 지정 호텔이었으며, 장면(張勉) 국무총리 사무실도 이곳에 있었다. 당시 굴지의 민간기업들의 본사 사무실들도 이곳에 있었다. 삼성의 이병철 사장도 반도호텔 5층 전 층에 입주해 있었고, 구인회의 반도상사(현, LG그룹)도 반도호텔에 서울 사무소를 두고 있었다. 조홍제 사장도 이곳에서 일해 왔다. 친지와 사업 동지 할 것 없이, 모두가 자신을 외면하는 그때의 고독감, 이런 고독 속에서 사람은 정신적으로 성장하고 때로는 철인(哲人)이 되기도 한다던가.
조홍제 사장은 눈을 감고 되도록 이 억울하고 불쾌한 감정에 젖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깊은 명상에 잠겨들었다. 사업 동지에게까지 못 할짓을 하면서 얻은 재물, 과연 그것으로 무엇을 어떻게 하자는 것일까? 그래도 조사장에게는 기업에 대한 신념이 있었다. 사업은 무엇 때문에 하는가, 따지고 보면 주어진 인생을 훌륭히 사는 목적의 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 것을, 돈은 무엇 때문에 필요한가? 기업하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돈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기업을 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인데...
그러니 나는 앞으로 적어도 수단과 목적을 혼동하여 오명을 남기는 그런 우를 범해서는 안 되리라. 이제부터는 더욱 내 사업 활동에 못지않게 내 후손들이 한 인간으로서 올바른 길을 걸어가도록 양자손(養子孫)에 힘쓰리라. 그들이 기업을 하든 또 다른 분야에서 일하든 그들로 하여금 열선조의 가르침을 잊지 말게 하여 적어도 수단과 목적을 혼동하지 않는 현자지도(賢者之道)를 내 자신부터 그들에게 가르켜 주어야 한다.
이렇게 삼성(三星) 15년에 대한 정신적인 매듭을 짓고 나니 도리어 담담한 심경이 되는 것이었다. 조홍제 사장은 “이제부터는 좀 더 사회에 기여도가 큰 기업을 일으켜” 인생을 어떻게 살았는가고 누가 물어도 나는 이렇게 했노라고 떳떳이 대답할 수 있는 그런 인생을 살아가리라. 이병철 사장이 어떻게 해서 나에게 그토록 심한 처사를 하게 되었는지 자세히는 알 수 없으나 사업 동지로서 우리가 함께 지금까지 해 온 일들을 다시 생각해 보았다, 시간이 흘러 냉정을 되찾게 되면 그도 사리에 맞는 처리를 할 날이 있겠지.
조홍제 사장은 아무튼 이병철 사장의 처사에 대응하여 그 부당함을 법에 호소하여 청구 소송을 제기한다 해도 민사소송이라 대법원까지 가려면 적어도 3~4년은 걸리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막대한 소송비용은 고사하고 내 나이는 환갑을 맞이하게 될 것인데, 재산은 재산대로 시간은 시간대로 잃고 말 것 아닌가하는데 생각이 미쳤다. 조홍제 사장은 이 세상에 삶을 누리게 된 이래 이때만큼 자신이 열세에 처해본 일이 없다고 통감했다.
조사장은 15년이라는 장구한 세월에 걸쳐 쌓아 올린 그 성과를 무슨 성인군자 연하면서 아무런 이유도 없이 이병철 사장에게 그냥 넘겨줄 수 있겠는가고 자문자답했다. 조홍제 사장은 삼성을 그만두고 나서는 새벽잠이 없어졌다. 새벽 2시, 3시쯤이면 그만 잠에서 깨어 아무리 애를 써도 더는 잠을 잘 수가 없게 되었다. 어떻게 하면 이 난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궁리에 궁리를 거듭해도 이병철 사장이 만날 때마다 이리저리 회피를 하니 어떻게 해도 쉽게 해결의 실마리조차 잡지 못하게 되는 것이었다.
조사장은 이렇게 열세에 놓여있는지라 행여나 하고 이사장하고 가깝고 자신과 친분이 있는 재계의 모 씨를 찾아가 전후 사정을 설명하고 거중 조정을 부탁해 보았다. 그는 참으로 어려운 부탁이라고 하면서 자기가 중간에 끼어들어 조금이라도 나에게 유리하게 결말이 지어지면 이병철 사장의 성격으로 보아 당장에는 체면 때문에 할 수 없이 그 결말에 승복할지 모르지만 아마 평생을 두고 원망을 받게 되리라 하면서 완곡이 거절하는 것이었다. 또 다른 인사에게 부탁을 하였더니 이사장에 대한 자기의 친분 때문에 내가 부당한 일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풍문을 통해 듣고 가슴 아파하고 있다면서도 나서기가 매우 난처하다는 말만 했다. 이렇게 되고 보니 조사장은 누구에게 부탁해도 거중 조정을 할 수 없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세상의 인심은 억울한 일을 당한 약자를 돕기보다 그런 일을 해서 더 강하게 되는 강자를 돕게 마련이라는 것도 절감했다.

이병철씨와의 만남과 동업

(독자들이어, 조홍제 사장이 삼성 이병철 사장과의 동업 청산을 앞두고 고민을 거듭하는 사정을 좀 더 확연하게 이해하기 위해 시간을 좀 더 거슬러 올라가 보시기 바란다.)
조홍제 사장은 1944년 어느 날 명륜동 자택으로 인사차 찾아온 손님을 맞았다.
“안녕하십니까? 저를 모르시겠습니까?”
“아니 이게 누구시오?”
이병철 사장은 혜화동으로 이사를 왔다면서 인사를 왔다. 조사장과 이사장의 집은 걸어서도 2~3분이면 오갈 수 있는 거리였다. 이병철 사장의 생가는 경남 의령이고 조사장의 생가는 함안으로 군은 다르지만, 조사장의 생가 군북면은 의령군과 접해 있었기 때문에 소시적부터 지면이 있어 온 터였고 특히 이병철 사장의 형, 병각씨와 조사장은 동갑이어서 이들 형제들과는 선대의 교분에 힘입어 조홍제 사장이 장가를 들어 다소 어른 대접을 받게 되었던 15세를 전후해서는 말(馬)을 타고 자주 내왕하던 사이었다. 이병철 사장도 새로운 사업을 하고자 대구에서 서울로 올라온 처지여서 두 사람은 조석으로 내왕을 하다 보니 자연 새로운 사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조홍제 사장은 그동안 조사해 온 고철(古鐵) 사업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고, 이병철 사장은 지금은 생필품이 부족한 형편이니만큼 무역(貿易)을 하면 더 수익성이 좋을 것이라는 의견을 말하곤 했다. (조홍제 사장이 고철사업에 대해 말 한데는 그럴만한 사연이 있으며 이 책 다른 장에서 다룰 계획이다.)
그러던 얼마 후에 이병철씨가 혼자서 무역업을 시작했다면서 놀러 왔다. (이병철 사장이 시작했다는 무역업은 삼성물산공사(三星物産公社)였다.) 조홍제 사장도 대학에서 경제학(독일 경제학)을 전공한 처지여서 무역의 원리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었으므로 이병철씨가 시작했다는 무역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때 이병철씨는 “무역은 자본금의 과다에 따라 수익규모가 결정됩니다. 자금이 풍부하면 수익도 커지기 마련입니다.”고 말하면서 내가 준비해 있는 사업자금을 좀 빌려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해방 후 당시 수출무역은 전무한 상태였고, 주로 수입무역이 주류였기에 이것저것 많이 수입해오면 이익이 많이 나게 되어 있었다.
이병철 사장은 8백만원 정도 빌려 주면 좋겠다고 했고 조홍제 사장은 요구하는 전액을 빌려주었다. (이때 두사람 사이에 차용증이 작성되었는지, 금리는 어느 수준이었는가는 공식기록이 없다.) 당시 8백만원은 거금이었다. 이로부터 2개월이 지난 1949년 2월 어느 날 이병철 사장이 다시 조홍제 사장을 찾아와서 “예상했던 것보다 사업이 여의치 않아 차용금을 더 빌려달라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빌린 800만원을 갚을 형편이 못되니 그 돈을 그대로 투자(投資) 해주면 어떻겠습니까?”고 말했다. 조홍제 사장은 이 말을 듣고 “사업성이 나빠서인가 아니면 업무상의 차질 때문인가?”고 물었다. 이병철 사장은 “사업성은 결코 나쁘지 않은데 처음 시작한 일아라서 그런지 당초의 계획대로 진척이 안됩니다.”고 대답했다. 조홍제 사장은 자신이 조사해서 가지고 있는 무역업의 사업성이 당시 한국의 경제 사정으로 보아 괜찮다고 생각되었으므로 이병철 사장의 말대로 빌려준 돈을 투자로 전환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조홍제 사장은 이병철 사장에게 “내가 그 돈을 투자로 전환시키면 이익배당은 어떻게 되는가?”고 물었다. “동업이니까 지분제를 택하면 됩니다.”고 대답했다. 지분제(持分制)란 회사에 출자한 사람들이 이익이 나면 그 출자비율대로 이익금을 나누는 동업방식으로 1년마다 결산을 하고는 그 배당금을 바로 가져나가도 되고 다시 재투자해도 되었으며 재투자를 하거나 돈을 더 끌어 넣으면 그만큼 지분율이 높아지도록 되어 있는 동업방식의 하나였다. (독자들이어, 우리는 여기서 이병철 사장이 출자(出資)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투자라는 용어를 사용했고 상법에 의한 주식회사를 설립하지 않고 지분제 방식을 택한 것에 주의해둘 필요가 있다. 출자는 주식지분을 확보하기 위한 행위이고 투자는 이익 창출에 목적을 두는 행위이다. 지분제는 주로 건설업 분야에서 채택하는 것으로 1년 단위의 이익 창출 방식이다. 조홍제 사장은 이때 투자, 지분제 개념을 명백히 하지 않음으로 후일 이병철 사장과 결별할 때 난관에 봉착하게 되는 것이다.) 조홍제 사장은 이 과정을 통해 이미 빌려준 돈 800만원과 200만원을 더 보탠 1,000만원을 투자, 이병철 사장의 투자분 700만원을 합쳐서 삼성물산공사의 자본금을 삼도록 했다. 조홍제 사장이 출자한 1,000만원은 당시 화폐가치로도 눈에 띄는 거금이었다.
조홍제 사장은 그때부터 자신의 사업구상보다는 삼성물산사업 내용에 대해 더 적극적으로 관심을 갖게 되었다. 삼성물산이 본업이 되었다. 이병철 사장은 투자한 지 한달쯤이 지났는데도 역시 사업이 뜻과 같지 않게 되어간다는 것이었다. 조사장은 이 말을 듣고 “무엇이 어떻게 잘 안되는지, 무역 원리에 입각해서 나도 좀 연구하여 잘되어 나가게 해보겠으니 관계서류를 보여 줄 수 없는가?”고 말했다. 조홍제 사장은 이때까지도 이병철 사장의 구두설명과 요구를 받아드렸을뿐 회사 실황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이병철 사장은 그 말을 듣고 쾌히 제반서류를 보여주었다. 조홍제 사장은 며칠 동안 그 서류를 훑어 보면서 느낀 점도 이야기하고 이사장에게 서류에 나와 있지 않은 상황도 듣고 좋은 대책을 모색하기도 했다.

사장직 고사하고 부사장으로
조홍제 사장이 투자한지 수개월이 지나가 이병철 사장은 혼자 없무를 감당해 나가기가 힘드니 회사에 출근해서 함께 일을 보아주었으면 좋겠다는 제의를 했다. 삼성물산공사 사무실은 종로2가 영보빌딩 2층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러나 조홍제 사장은 선뜻 나서지 않았다. “내가 회사에 나가본들 지금 이상의 도움이 되겠느냐?”고 먼저 사양했으나 이병철 사장은 계속 출근을 권하는 것이었다. 조홍제 사장은 결국 회사에 나가게 되었는데 이병철 사장의 의도는 조홍제 씨를 사장 자리에 앉히려는 것이었다. 이병철 사장은 조홍제 사장이 형님의 친구이고 나이도 4살이나 위이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했던 것으로 보였다. 조홍제 사장은 사업에 대한 실무경험이 그다지 많지 않았음으로 고사했다. 그렇게 해서 이병철씨가 사장직을 맡고 조홍제씨는 부사장을 맡아 회사 일을 보도록 결정되었다.
삼성의 이·조 체제가 시작되었다. 조홍제 사장은 회사에 출근해 일을 보니 새로운 지식과 경험을 얻게 되어 보람 있는 나날이 계속되었다. 조홍제 부사장은 출근 4개월쯤 해외시장을 모르고서는 제대로 무역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때 우리나라 무역은 주로 홍콩(Hong Kong 香港)을 상대로 하였기 때문에 우선 그곳에 나가서 거래처 사람들도 접촉하고 국제상거래 실태도 알아보는 것이 좋겠다 싶어 그해 11월 홍콩으로 떠났다. 홍콩은 무역의 중계지로서 미국, 유럽, 일본 등 주요선진국의 경제 상황에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고 우리나라의 초기 수출 무역기지로도 각광 받았다.
조홍제 부사장은 홍콩으로 떠나기는 했으나 현지인들과 대화가 걱정스러웠다. 삼성물산의 거래처 중에는 화상(華商, 중국상인)이 많은데 중국어는 전혀 하지 못하는 처지였으니... 물론 중학교 때는 영어를 대학 때는 독일어를 배우기는 했으나, 시골에 박혀 근 10년을 외국어와 멀리하고 지냈던 탓으로 외국에 나간다고 해서 갑작스럽게 외국어가 제대로 될 까닭이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만해도 해외여행을 하기가 하늘의 별따기 만큼 어려웠던 시기여서 혼자 나가기도 힘든데 통역을 동행해 나간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조홍제 사장은 “어떻든 홍콩에 가서 직접 부딪쳐 보고, 정 안 되면 필담이라도 해야지...” 하는 배짱으로 부산에서 홍콩행 화객선에 몸을 실었다. 항공편이라면 2~3시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지만 8일 동안이나 출렁대는 물결에 시달리면서 도착했다. 이것 하나만 보아도 요즘 세상이 얼마나 편리하게 되었는지 알 수 있고 한국의 세일즈맨들이 온 세계를 훨훨 날아다니는 것을 보면 감회가 깊다.
홍콩에 닿자 조홍제 사장은 곧장 거래선인 “찬넬양행”을 찾아갔다. “양행(洋行)”은 원래 서양에서 수입한 물건을 취급하던 무역상점이나 회사를 의미했으나 서양과의 무역이 활발해지면서 세계로 나아가는 기업이미지를 갖게 되었다. 이 양행은 중국계상사로서 당시에는 우리나라 천우사(天友社, 1945년 미군정청의 제과장을 맡았던 전택보(全澤珤)씨가 설립)를 비롯한 우리나라의 무역업자 거의가 거래를 하고 있었다. 조홍제 사장은 국내에서는 모르고 있었던 일인데 홍콩에 와서 보니 우리 교포 서너 사람도 무역회사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중에서도 임창복(林昌福)이라는 분이 가장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조홍제 사장은 반갑기도 하고 또 잘하면 그와도 무슨 좋은 거래가 이루어질 수도 있을 것 같아 그를 찾아갔다. 임창복씨는 반갑게 대해주면서 홍콩 무역업계 사정을 친절하게 일러주었다. 이래서 임창복씨와도 거래를 가지게 되었고 좀 더 시일이 지나고 보니 이 두 거래처 중 같은 동포라고 해서 그런지 찬넬양행 보다는 임씨가 성실하게 거래를 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조홍제 사장은 홍콩에서 돌아온 다음부터는 줄곧 임창복씨하고만 거래를 했다. 조홍제 사장은 홍콩에 갔을 무렵의 한국의 외환 보유액은 보잘것없어 “달러”를 바로 주고 물건을 살 형편이 아니었고 외상거래(D/P (Document Against Payment) 또한 하기가 어려운때여서 수입자금, 즉 달러 대신 그 당시 홍콩의 인기품목이었던 국산 오징어 3백 피쿨(3만근)을 가지고 나갔다. 그런데 이것을 매각하려고 하니 중국계의 수입상과 도매상들이 “남북양행”이라는 비공식단체를 만들어서 서로 정보 교환과 담합을 해 비단 조사장의 경우뿐 아니라 우리나라의 물품들이 홍콩에 도착하기만 하면 가격을 뚝 떨어뜨리는 이른바 가격조작을 하는 바람에 울며 겨자 먹기로 헐값에 팔 수밖에 없도록 했다.
조홍제 사장은 그들이 내세우는 값으로는 팔지 않았다. 이때부터 조사장 특유의 끈기의 상술이 나타났다. 조홍제 사장은 임창복씨에게 “내가 임선생을 믿고서 이 물건을 맡기고 갈 테니 값이 적당하다 싶은 때 팔아주십시오. 임선생도 알다시피 우리나라는 달러가 부족해 한 푼도 못 가져온 처지이지만 그렇다고 여기까지 왔다가 빈손으로 돌아갈 수 없으니 이 오징어를 담보로 면사(綿絲)를 D/P(외상거래)로 가져갈 수 있도록 해주시오.” 조홍제 사장은 어려운 제안을 했다. 임창복씨는 담보물이 든든했기 때문에 면사 50곤(梱)을 주겠다고 했고 찬넬양행에서도 오징어를 담보로 면사 50곤을 내놓았다. 갑자기 면사 100곤이 확보되었다.
이런 경로를 통해 우리나라에서는 최초로 홍콩 외상 무역 즉, D/P 무역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조홍제 사장이 임창복씨와 여러 수입 가능 품목 중에서 면사를 고른 까닭은 홍콩을 떠나오기 얼마 전에 삼성물산에서 면사 6곤을 수입한 적이 있는데 그것이 그 자리에서 두 배가 넘는 값으로 팔렸던 일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당시 우리나라는 일제 강점기때 대형 면방 공장이 있었고 이를 불하받아 면직물을 생산하고 있었으나 목화산업이 발달하지 못해 면사 구하기가 대단히 어려운 상황이었다. 따라서 그 당시 면사 100곤은 대단한 물량이었다. 하기야 면사뿐 아니라 욕심이 나는 물품이 많았지만 가진 “달러”가 없으니 D/P로(외상거래) 이 정도의 물량이라도 확보한 것은 다행으로 생각하고 조사장은 귀국길에 올랐다. 하여튼 홍콩 출장에 가지고 갔던 오징어도 제 값을 받고 팔았고 D/P의 길도 열렸다는 것은 큰 성과였다.
조홍제 사장은 홍콩 출장으로 무역의 본질 같은 것을 깨닫게 되었다. 조사장은 무슨 물건이든 우리나라에 없는 물건을 그 물건을 가지고 있는 다른 나라 사람과 바로 부딪쳐 사기만 하면 큰 이득이 생겨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언어다 경험이다. 따위를 따지지 말고 외국 사람을 초청하든가 아니면 내가 찾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어렵게 생각했거나 불가능하리라 예상했던 일들이 당사자와 직접 이야기함으로써 뜻밖에도 쉽게 풀리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것이다. 조홍제 사장의 이런 깨달음은 그 후 제일제당 건설, 제일모직 창업 그리고 그가 삼성을 떠나 독자적으로 기업을 일으킬 때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이 100곤의 면사가 홍콩으로부터 들어오니 미처 창고에 들어가기도 전에 배 이상의 좋은 값으로 팔려나가 버렸다. 이리하여 1950년 2월에 결산하니 삼성물산공사의 총 재산은 무려 1억 3,500여 만원이나 되었다. 회사가 1,700만원의 자본금으로 출발한지 불과 9개월 만에 그 재산이 8배에 이르게 되었다. 이익률이 몇 퍼센트라고 따지는 것도 무의미했으니 출자자 두 사람, 조홍제, 이병철씨가 놀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때의 이익배당은 출자자의 자산에 대해서 70%, 운영자가 30%를 가지게 되어 있었는데 여기서 말하는 운영자라는 것은 사원까지를 포함해서 말하는 것이고 사원이라 해 보아야 중역을 합쳐도 6~7명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러면 이들 사원에게 돌아간 배당금은 얼마나 되었을까? 그 때 받은 배당금으로 서울의 살기 좋은 곳에 쓸만한 살림집을 마련 할 수 있었으니 대단한 것이었다. 회사에서 겨우 2년 남짓 근무하고 쓸만한 내 집을 마련했으니 꿈같은 이야기다.

  작가 소개

지은이 : 백인호
매일경제 편집국장,MBN 대표이사,YTN 사장,가천대 초빙교수[저서]장편소설 『삼성오디세이아』『현대오디세이아』『자동차왕 정몽구 오디세이아』『SK 오디세이아』『LG 오디세이아』『롯데 오디세이아』『삼성 이건희 오디세이아』『한화 오디세이아』『대한항공 오디세이아』『CJ 오디세이아』『포스코(포항제철) 오디세이아』

  목차

■ 서 문 7

제 1 부
1 가장 현명했던 판단 (삼성을 떠나다) 15
2 이병철씨와의 만남과 동업 22
3 면실박(綿實粕, cottonseed meal) 수출과 6.25동란 30
4 부산 피난 시절의 삼성물산 36
5 제당산업(製糖産業 Sugar Industry) 출범 47
6 모직(毛織, wool) 산업 진출 53
7 독일에서 배우고 느낀 일들 62
8 병명도 모르는 중병으로 사경(死境) 헤매다 70
9 조홍제 회장의 가문 80
10 일곱(7세)에 독(獨)선생의 한학공부 86
11 드디어 허락된 서울 유학 100
12 일본 유학길에 오르다 113
13 협력 거부로 일관한 일제(日帝)하 10년 121
14 해방과 더불어 서울로 활동무대 옮겨 128
15 충격의 동업 청산 제안 140
16 겨우 3억원에 낙착된 재산분배 154
17 한국타이어(Tire) 경영 착수 164
18 나일론(Nylon)사업에 운명을 걸고 175
19 동양나일론 울산 공장 완공 - 서독 짐머사기술 선택 187
20 독자적 기술 체계의 확립 197
21 대전피혁(Leathr)과 한국타이어 소생 208
22 ‘한국타이어’의 시장 확장 - 마이카 시대 개막 217
23 동양나일론, 세계 굴지 회사로 224
24 효성중공업 기술력제고 사업 확대 249
25 조석래(趙錫來) 회장 시대 전개 258
26 섬유의 반도체 스판덱스(Spandex)와 타이어코드 267
27 대한민국 경제 수장(首長) 조석래 277

제 2 부
28 만우(晩愚) 조홍제 회장 일화(逸話) 289
29 2세 경영인 조석래 회장의 진면목 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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