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문학과지성 시인선 464권. 2011년 「현대문학」 신인추천으로 등단한 송승언 시집. 송승언의 시는 텅 빈 이미지를 낯설게 바라보는 '나의 눈'에서 시작된다. 그는 감정의 파고에 휩쓸리지 않고 절제된 언어로 나와 너 사이에서 발생할 수밖에 없는 대립과 엇갈림을 집요하게 주시한다.
그 균열 한가운데서 파생되는, 의미가 증발되어버린 창백한 공간과 어떤 적요한 사건들이 불러오는 느낌은 지극히 낯설고 초현실적이다. 이 느낌은 그렇게 잠재된 주체의 기억을 깨우고, 오감과 이성의 경계를 허물어뜨리는 계기를 마련해준다. 송승언은 지금 깨어 있는 잠 속에 있다. '물과 빛이 섞이는 감정'을 고요하게 응시하는 그는 새로운 의미의 원천이 되는 언어적 가능성을 발견해가는 중이다.
출판사 리뷰
빛과 소리의 고유한 스펙트럼을 파고들며,
의미와 세계를 무한 확장하는 새로운 언어의 출현
“단호한 감정 관찰”, “말의 뜻과 방향을 제어하여 낯선 세계로 자신을 개방하는 독특한 힘”, “삶을 압축하여 간파하는 솜씨”가 남다르다는 평과 함께 2011년 『현대문학』 신인 추천을 받아 등단한 송승언이 첫 시집 『철과 오크』(문학과지성사, 2015)를 출간했다. 사물과 자연, 관계의 풍경에서 의미를 지워내듯 최소화한 이미지를 담담하게 개관하는 그의 시는, 문장의 분절과 중첩, 예측을 벗어난 독특한 배치를 통해 시적 리듬을 획득하며, 이제껏 경험해보지 않은 낯설고 기이한 세계로 우리의 의식을 무한 확장시킨다. 이번 시집에 묶인 시 55편 모두 ‘풍경의 지속―시선의 집중―시간의 채집―음악의 반복―시점의 전환―영원의 분절―죽음을 내재한 삶의 지속’이라는 재료와 의도, 설계와 구조를 띠고 있다. 그 속에서 발견되는, 절제 없는 의식의 분열이나 경계의 무력화 혹은 모호함으로 섣불리 분류될 수 없는, 시 한 편 한 편의 축조된 단단함은 송승언 시의 가장 큰 매력이라 할 만하다. 신인답지 않은 이 시적 완미함이야말로 지난 4년 동안 ‘첫 시집이 가장 기대되는 시인’으로 송승언이 주목받아온 이유일 것이다.
송승언의 시는 지금 깨어 있는 잠 속에 있다. 그 속에서 끊임없이 지속되고 반복되는 빛과 소리의 매 순간을 기록하며, 새로운 의미의 원천이 될 언어의 가능성을 발견해가는 중이다.
알 수 없는 해변을 걸었다
눈이 날리고 눈이 쌓이고
날리는 눈 사이에 흰 새가 뒤섞여 날고
회전하는 겨울 속에서 머리카락은 점점 검어지고 있다고 느꼈다
모든 게 흰빛으로 망각되는 해변에서
미처 찍지 못한 흑점처럼
〔…〕
이곳에 나를 버린 게 누구인지
생각하지 않았다 탈출을
꿈꾸지 않았다 알 수 없는
해변을 걸었다
멈추면
완성되지 못하는 침묵이 굴속에서 울었다 (「유형지」 부분)
시를 짓는 일―삶을 담담하고 명징하게 바라보는 태도
송승언의 시는 텅 빈 이미지를 낯설게 바라보는 ‘나의 눈’에서 시작된다. 시적 화자는 감정의 큰 동요 없이 다만 절제된 언어로 간명하게 이미지-풍경을 서술한다. 이렇다 할 정보나 사건 없이, 꿈속인지 현실인지, 창밖인지 심해인지, 말하는 주체가 나인지 너인지조차 쉽사리 구분되지 않는 상황이 계속된다. 대신에 아무것도 없다는, 무엇이 아니라는 인식만이 명징하게 자기 지시적으로 반복된다.
주인이 죽어 주인 없는 개도 없었고 아무도 없는 정자도 없었지 공원을 뒤덮는 안개도 없었다 모든 것이 흐린 공원이었는데 모든 것이 너무나 뚜렷이 잘 보인다
아무것도 없는 명징한 공원이었다
배후에서 갈라지는 길이 보이지 않은 (「모든 것을 볼 수 있었다」 부분)
내가 이곳을 설계했다 믿었는데 아니었던 거지
블라인드 틈으로 드는 빛이 어둠을 망친다 생각했는데 눈은 여전히 감겨 있고, 몸은 벽 너머에서 들려오는 너의 노래에 묶여 있었다
입안에 고인 물이 다른 물질이 되려는 순간
눈 속으로 하해와 같은 빛이 밀려들었다 (「녹음된 천사」 부분)
이런 ‘이미지의 현상화’는 “사물의 생각을 읽는 일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진심으로 서로를 공유할 수 없다. 사람도, 사물도, 자연도, 그 모든 풍경마저도”(『시향』 제55호, 2014년 9월 인터뷰)라고 말하는 시인의 태도에서 연유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가 아는 만큼의 색만 발견”하고 “서로의 표정에 세 들어 사는 임차인”(「변검술사」)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시인은 나와 너, 꿈과 현실, 빛과 어둠 사이에서 발생할 수밖에 없는 대립과 엇갈림을 집요하게 주시한다. 그 균열 한가운데서 파생되는, 의미가 증발되어버린 창백한 공간과 어떤 적요한 사건들이 불러오는 느낌은 지극히 낯설고 초현실적이다.
작가 소개
저자 : 송승언
1986년 출생. 2011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2015년 시집 《철과 오크》를 냈다.
목차
1부
녹음된 천사
커브
물의 감정
담장을 넘지 못하고
취재원
법 앞에서
디오라마
셰이프시프터
심부름
환희가 금지됨
모든 것을 볼 수 있었다
종소리
증기의 방
변검술사
굴
돌의 감정
2부
베테랑
이파티예프로 돌아오며
사냥꾼
숲 속의 의자
여름
기원
내 책상이 있던 교실
백조공원
공화국
야영지
성문에서
정육점이 있는 골목
새와 드릴과 마리사
드론
철과 오크
수확하는 사람
망원
축성된 삶의 또 다른 형태
유리 해골
R의 죽음
지엽적인 삶
많은 손들을 잡고
피동사
3부
저녁으로
면회
죽은 시들의 성찬
재앙
나타샤
위법
카논
그의 이름을 모른다
우리가 극장에서 만난다면
밝은 성
이장(移葬)
론도
눈 속의 잠
보트
에덴
유형지에서
해설_ 의미의 미니멀리즘 / 강동호(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