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리뷰
직하고 대담한 조선 청년의 기행문을 통해
조선통신사 행렬을 생생하게 만난다!“아버지가 한참 성균관 입학시험을 준비하고 있는 내게 일본에 같이 가자고 하셨다.
공부를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바다 너머 넓은 세상을 보는 것이 더 큰 공부라고 하셨다.
나는 시험 공부하던 책을 잠시 덮고, 아버지를 따라갈 준비를 하였다.
일본에 가면 다른 무엇보다 기행문을 쓸 것이다.
그동안 통신사가 일본에 아홉 차례나 다녀왔기 때문에
기행문이 열 권도 넘게 있지만 대부분 재미없는데다가,
내가 가장 나이 어린 기행문 작가가 되고 싶기 때문이다.”
-본문 중에서-
조선 청년의 기행문을 통해 경험하는 조선통신사 행렬《나는 조선의 가장 어린 여행 작가》는 스물네 살 홍경해가 쓴 기행문 《수사일록》을 현대어로 풀어 쓴 작품입니다. 홍경해는 아버지 홍계희가 조선통신사 정사로 임명되면서 ‘자제 군관’의 자격으로 일본에 방문합니다. 조선통신사에는 기록을 담당하는 제술관이 있어 각 행렬의 자취를 남겼으나 홍경해는 자신이 경험한 것을 기록하는 ‘여행 작가’가 되겠다는 당찬 포부를 가집니다. 공적인 업무가 아니라 개인적인 경험을 자유롭게 기록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남다른 의미를 가집니다.
약 4백 년 전 일본을 방문한 조선 청년의 솔직한 자기 기록을 통해 우리는 당시 조선과 일본의 관계, 당시 일본의 모습, 조선통신사 행렬의 특징 등을 생생하게 만날 수 있습니다.
21세기 한류 열풍의 뿌리를 확인하다전 세계적으로 ‘한류’ 열풍이 불면서 우리나라의 문화, 특히 대중음악에 대한 관심이 뜨겁습니다. 흥미롭게도 조선통신사 행렬의 자취를 들여다보면, 특히 일본에서 가지는 한국 대중문화에 대한 관심이 하루아침에 생겨난 것이 아니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조선통신사는 통신, 즉 ‘믿음을 주고받는’ 역할을 수행한 사절단입니다. 나라의 중요한 외교 문서인 ‘국서’를 전달하는 것이 주요 업무였지요. 그런데 조선통신사가 일본을 방문하면 요즘 아이돌이나 배우가 방문했을 때처럼 사람들이 몰려들고, 조선인이 쓴 글씨를 받으려고 줄을 서서 기다렸다고 합니다. 종이가 없으면 등에다 글씨를 써 달라 조르는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는군요. 특히 ‘마상재’(말을 타고 화를 쏘는 등의 재주를 선보임)의 인기가 대단히 높았는데, 이는 현재 아이돌 공연에 대한 외국 현지의 뜨거운 반응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18세기 일본으로 떠난 특별한 여행《나는 조선의 가장 어린 여행 작가》에는 한양을 시작으로 영천, 부산을 지나 쓰시마, 아이노시마, 시모노세키, 오사카, 교토, 하코네를 지나 에도(도쿄)에 도착하는 여정이 생생하게 담겨 있습니다.
조선통신사 행렬은 일단 떠나면 짧게는 6개월, 길게는 1년의 일정으로 일본에 다녀오기 때문에 사계절 옷을 준비해야 합니다. 배가 떠나기 좋은 길일을 받고 무사히 다녀올 수 있도록 바다의 신에 제사도 지냅니다. 행여 폭풍을 만나면 배에 탄 일원 모두가 목숨을 잃는 사고가 일어나기 때문에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조선을 떠나 일본에 도착한 홍경해의 눈에 비친 일본의 풍경은 낯설고 신기합니다. “머리를 길게 기른 아주머니들이 이를 검게 칠한 모습”이나 “대여섯 살 난 아이들이 자기 키만큼 큰 칼을 차고 있는 모습”은 당시 일본 서민들의 모습을 그려 보게 합니다.
조선통신사에 대한 일본의 예우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홍경해는 통신사 행렬에 제공된 음식의 종류와 양을 기록하는 것은 물론, “포구마다 금도청에서 수상한 사람들을 붙잡아 조사”했는데 이것은 조선인들을 안전하게 지켜 주기 위해서라고 밝힙니다.
홍경해는 여행 작가답게 방문하는 지역의 특징도 상세하게 묘사합니다. 아이노시마 섬을 두고 “섬 굽이굽이 푸른 벽이 둘러 있어, 옥으로 만든 소반 같다”는 대목에서는 뛰어난 문학성을, 오사카에서는 “문이나 칸막이에는 금가루를 뿌린 종이에 산수화, 인물화, 꽃 그림 들을 그려서 걸어 두었다. 이 층으로 올라가는 사다리 옆의 변소까지도 화려했다”는 기록에서는 꼼꼼한 관찰력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조선통신사와 조선 문화에 대한 일본인들의 대단한 관심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가는 곳마다 일본의 학자나 시인이 조선인과 필담을 나누려고 몰려들었고, 조선통신사 행렬을 기록한 책자 또한 여러 권 출간되어 널리 읽혔습니다. 홍경해에 따르면 “일본인들은 나이를 가리지 않고 조선인의 글씨를 얻는 것을 영광과 행운으로 생각하여” 심부름꾼 아이에게까지 글씨를 청했습니다. 무사가 지배하고 쇼군이 다스리던 일본과 달리, 조선은 유교를 바탕으로 과거 시험을 통해 관리를 뽑았기 때문에 조선 선비들이 유학 교육을 받고 시를 지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일본에 남겨진 조선 청년의 자취조선통신사의 일원으로 일본에 방문한 홍경해는 일본의 누각 ‘대조루’에 손수 글씨를 남기기도 했습니다. 조선에 돌아온 홍경해는 과거에 급제해 여러 지방의 암행어사로 활동하였으나 35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납니다. 이후 아버지 홍계희가 대역죄에 연루되면서 홍경해가 쓴 《수사일록》이나 ‘대조루’ 글씨는 일본에만 남게 되었습니다. “가장 어린 여행 작가’가 되겠다”던 홍경해의 당찬 포부를 생각하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런 아쉬움을 조금이라도 덜기 위해 《나는 조선의 가장 어린 여행 작가》는 홍경해의 자취를 현재로 가져 옵니다. 당시 홍경해의 경험을 좀 더 생동감 있게 나누기 위해, 조선 후기 화가 이성린이 그린 「사로승구도」와 그림 작가 홍선주가 그린 그림을 함께 담았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홍경해가 보고, 듣고, 느낀 18세기 일본의 모습을 조금 더 가깝게 그려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