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모:든시 시인선. 1998년 등단한 이래 20여 년 만에 펴내는 한국현의 첫 시집이다. 그의 시는 요동치는 한편으로 은유를 거부하고 동시에 의미의 짐을 떠맡고자 하며, 시종 긴장이 감돈다.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으로서 문자를 사유한다. 물상 그 자체가 하나의 문자가 되어 새겨지고 새겨짐을 당하는 어떤 차원, 문자가 도달할 수 있는 궁극의 지점이다. 이로써 문자학이 도달할 수 있는 존재의 한 풍경을 열어 보여주고 있다.
출판사 리뷰
시집 『바다철도999』는 한국현 시인의 첫 시집이다. 한국현 시인은 1998년 『시와 반시』로 등단하여 문제작들을 여러 지면에 발표하면서 시작 활동을 꾸준히 해왔다. 이번 시집은 등단 20여 년 만에 펴내는 시집이다. 한국현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부딪혀 불꽃 튀는 날/불의 얼음을 쩡, 쩡, 울리는 날// 기꺼이 침몰하리라!”(「타이타닉 호에서」)라며 죽음으로서 죽음을 침몰시키겠다는 파토스를 보여준다. “피 속을 흐르던 화약이 일제히 폭발하는 날”을 꿈꾸며 “당신의 지도에 점 하나 찍은 흔적”(「꽃」 전문)이 되기를 소망하며 그의 시는 요동친다. 한편으로 은유를 거부하면서도 동시에 의미의 짐을 떠맡고자 할 때 그의 시에는 긴장이 감돈다.
또한 시인은 바다에서 문자를 읽는다. 바다는 문자들이 가득한 경전이다. 바다도, 그도 문자의 의미를 알지 못한다. 알지 못하면서도 그것을 읽는다는 행위는 과연 의미심장하다. 그는 들숨에, 날숨에 하모니카를 불듯이 부서졌다가 다시 일어나며 몸에 새겨진 경전을 읽을 따름이다. 그 경전의 말씀이 그 소리를 듣는 만물에 새겨진다. 바다에 새겨진 문자는 의미에 대한 강박을 벗어버렸다는 점에서 해석학적 영역으로 포섭되지 않는다. 이는 의미라기보다는 이미지의 영역에 속한다. 바다는 다만 “철썩, 처얼썩”하는 기표의 연쇄를 일으킬 뿐이다. 영원히 책장을 넘기며 경전을 읽는 수행자로서 바다는 거기에 있을 뿐이다. 한국현은 어떻게 바다에서 문자를 발견하였을까. 그가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으로서 문자를 사유하였기 때문이 아닐까. 물상 그 자체가 하나의 문자가 되어 새겨지고 새겨짐을 당하는 어떤 차원, 이것은 문자가 도달할 수 있는 궁극의 지점이다. 문자는 탄생하고 또 금세 찢겨진다. 그리고 또 다시 탄생한다. 이 시집은 이렇게 문자학이 도달할 수 있는 존재의 한 풍경을 열어 보여주고 있다.
낙서를 했다 염소에 대고 염소가 뜯어먹다 가버렸다 나는 여섯 살 낙서를 했다 구름에 대고 구름이 엄마 구름 품속으로 밥 먹으러 가버렸다 나는 일곱 살 나는 여덟 살 늦은 엄마를 기다리며 담에 대고 낙서를 했다 내려놓은 보퉁이처럼 고개 수그린 엄마에게 주인집 아저씨가 마구 소리를 질렀다 갑자기 나이를 먹었다 나는 마흔 살 낙서를 했다 족보에 대고 늘 집을 비웠던 아버지가 나타나 나를 집어던졌다 울면서 세어보니 나는 백 아흔여덟 살 집을 나가 낙서를 했다 여자의 등에 대고 함께 낙서하던 여자가 낙서를 지운 등을 보이며 가 버렸다 나는 육백 일곱 살 심심해서 몸에다 낙서를 했다 그들이 옷을 벗기더니 낙서를 했다고 마구 때렸다 쓰러져 계속 누워만 있었는데도 나이는 이천 스무 살 낙서를 했다 밖에서는 악어가 내 남은 한쪽 다리를 기다리고 동굴 벽에 고래 한 마리, 고래 두 마리, 고래 열 마리를 그리는 동안 나는 만 이천 살 낙서를 했다
가슴이 뜯겨나간 사람들은 서로를 알아보는 부호를 지니고 있다
더 이상 헤아리지 않겠다는 듯 단호하게
별은 진다. 지는 별빛은
오랜 울음보다 먼저 사라진다
별이 지는 쪽으로 길이
긴 허리를 구부린다
누구나 가슴을 가로지르고
굽어 사라진 길을 두고 산다
나 또한, 너무 돌아왔거나
다만 어긋났을 뿐인 길에서
둥지에서 떨어져 가는 별을 본다
왜 새들은 가장 부드러운
가슴 깃털을 깔아 집을 짓고
바람을 낳아 날려 보내는가, 왜 달은
가슴을 뜯어내고 살얼음 낀 강가에서 뒹굴고 있는가
밀물처럼 오고
썰물처럼 가는 길, 저기
달이 지나간다
가슴이 뜯겨나간 사람들은 서로를 알아보는 부호를 지니고 있다
나비가 날았다
삼만 년 만에 내려와 바다를
따라 걷던 오솔길이
숲의 안부가 궁금해져
젖은 발목을 말리며
서둘러 돌아가는 때,
동티모르 사메시 로뚜뚜마을
초경을 한 아이가
고양이가 반쯤 떠 있는 개천 물로
샅을 씻으며 울고 있을 때,
이번 생을 싣고 사라져 가는
비행운의 궤적에서
너의 이름을 볼 때,
부처도 침묵하고
네루다도 침묵하는 때,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골목에서
예수를 닮은 소년이
곧 터질 공으로 축구를 할 때,
공중에서 문득
탄착지를 깨달은 포탄이
꽁꽁 뭉친 몸을 벗어나려고
몸부림칠 때,
작가 소개
저자 : 한국현
1998년 『시와 반시』로 등단하여 문제작들을 여러 지면에 발표하면서 시작 활동을 꾸준히 해왔다.『바다철도 999』는 등단 20여 년 만에 펴내는 시집이다.
목차
시인의 말 | 5
제1부 낙서를 했다
반구대 암각화 13
가슴이 뜯겨나간 사람들은 서로를 알아보는 부호를 지니고 있다 14
나비가 날았다 16
서랍 18
비디오를 거꾸로 틀었다 21
구름처럼 가벼운 22
맨발의 이사도라 24
꽃 26
한 입의 여자 27
오징어 29
봄날은 간다 31
까마귀를 안고 있는 여인 34
목걸이―영진에게 36
비 내리는 날 37
안개 39
이제 와서 나를 무어라 부를 것인가? 40
바다철도를 탔다 42
제2부 봉봉 노래방
타이타닉 호에서 49
한밤의 트로트―속도의 사회학 50
1984, 공단도시, 성탄전야
―기쁘다 구주救主는 오셨는데 ‘나’의 주소로 아무런 소식을 전하지 않는 구주를 찾아 나섰다 53
가짜 하루 56
봉봉 관광 59
까치 울던 날 61
유리, 묵시록 62
어리벙벙 64
봉봉 노래방 65
무화과 68
봉봉 모텔 70
고향의 푸른 잔디 72
봉봉 25시 편의점 73
봉봉 휴먼팰리스 75
하혈 77
복날 79
봉봉랜드 가는 길 80
아이스맨의 탄생 84
아아아 아이스맨 86
고양이가 돌아보다 88
제3부 달이 떠 있는 풍경
엘 콘도르 파사 93
9월 94
연가戀歌 95
첼로처럼 97
초승달 98
하모니카 99
기림사에서 길이 엇갈리다 101
바다를 떠나지 못하는 이유 105
여행 108
복숭아가 살짝 미안한 내력 110
지구는 둥글다 113
가려움에 대하여 114
커튼이 달리지 않은 창 116
바다에 이를수록 강은 서서히 몸을 풀고 117
월인천강지곡 119
경 읽는 바다 122
해설 : 문자의 탄생-안지영 | 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