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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보다 먼저 다녀간 이름들
삶창(삶이보이는창) | 부모님 | 2017.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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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서 소개

삶창시선 50권. 2004년 「제주작가」로 작품활동을 시작한 이종형 시인의 첫 시집. 4.3으로 생긴 깊은 개인의 상처가 기저음으로 깔려 있다. 이 개인의 상처는 그러나 점점 더 가지를 무성히 뻗어 역사적 사실과 만난다.

"육군 대위였다는 육지것 내 아버지"를 둔 죄로 "어머니의 작은 방/ 그 방바닥"에 파묻힐 뻔했던 갓난 화자는 훗날 "시공의 경계를 단숨에 건너/ 이제 막 돌아온 작은 생명 하나로/ 마침내 한 家系"를 이룬다. 손주의 탄생이 주었을 삶에 대한 경외는 그러나 전혀 사적이지 않다. 도리어 이런 개인의 상처와 삶의 여정을 통해 제주 4.3이 남긴 역사적 상처가 감각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출판사 리뷰

4·3이라는 개인사

이종형 시인의 첫 시집에는 4·3으로 생긴 깊은 개인의 상처가 기저음으로 깔려 있다. 이 개인의 상처는 그러나 점점 더 가지를 무성히 뻗어 역사적 사실과 만난다. “육군 대위였다는 육지것 내 아버지”를 둔 죄로 “어머니의 작은 방/ 그 방바닥”에 파묻힐 뻔했던 갓난 화자는 훗날 “시공의 경계를 단숨에 건너/ 이제 막 돌아온 작은 생명 하나로/ 마침내 한 家系”를 이룬다. 손주의 탄생이 주었을 삶에 대한 경외는 그러나 전혀 사적이지 않다. 도리어 이런 개인의 상처와 삶의 여정을 통해 제주 4·3이 남긴 역사적 상처가 감각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4·3 평화공원
각명비 위에
내려앉은 산까마귀 한 마리
검은 부리로 톡톡,
그 겨울의 이름들을
다시 새기고 있다

_「각명비」 부분

오래 전 죽임을 당한 “이름들을” “톡톡” 다시 새기는 이 행위가 구체적인 실감을 주는 것은 시인의 개인사가 밑받침해주기 때문이다. 발문에서 안상학 시인이 쓴 대로 “어긋나 버린 가계와 태생의 비밀을 담은 시들을 과감하게 던져놓는” 시들은 그러니까 첫 시집을 통한 개인적인 제의(祭儀)이면서 역사적 접근의 첫 단추가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조천읍 선흘리 산 26번지 목시물굴에 들었다가/ 한 사나흘 족히 앓”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제주도 시인들에게 4·3은 체험의 원형과 같은 것이어서 “4월의 섬 바람은/ 뼛속으로 스며드는 게 아니라/ 뼛속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제주도의 바람은 “뼛속에서 시작되는 것”이라는 방언은 그 아픔의 복판에서 태어나 자라지 않은 이가 아니라면 쉽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현실 인식의 깊이와 넓이

이런 경험과 인식은 시인의 관점을 깊게 함과 동시에 넓게 하는데, 베트남 전쟁 당시 행한 지난날 한국의 만행을 이종형은 4·3과 겹쳐서 읽고 있다. 4부 뒷부분에 배치된 일련의 ‘베트남 시편’들은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카이, 카이, 카이khai, khai, khai」 「눈과 손」 「씬 로이」 「팜 티 호아」 「木碑가 서 있는 숲」 「개민들레」 등은 시인이 직접 베트남에서 느낀 현실을 통해 얻은 새로운 인식과 정동을 통해 쓴 작품들이며 동시에 베트남 민중들에게 내미는 사과와 위로, 그리고 치유의 시편들이다.
“3킬로를 자전거로 달려와 땀범벅이 된” 베트남 사내의 “카이, 카이, 카이khai, khai, khai/ 내 말 좀 들어달라고/ 카이, 카이, 카이khai, khai, khai/ 나도 말 좀 하게 해달라”는 외침은 언어를 박탈당해 본 경험을 가진 시인에게 말할 수 없는 슬픔을 준 것은 당연했을 것이다. “꼬박 오십 년이 걸린” 그 외침은 “제주의 4월을 다시 떠올리”게 하고 “맹골수도의 찬 바다에서 아직도 돌아오지 못한/ 아이들을 기억하”게 한다. 국가에 의해 죽임을 당하거나 또는 버려진 존재들은 언제나 이렇게 “땀범벅”으로 살아가는 민중들이다. 그 사실을 시인은 자신의 고향에서도, 그리고 머나먼 이국에서도 동시에 깨달았던 것이다.
「카이, 카이, 카이khai, khai, khai」 「눈과 손」 「씬 로이」 「팜 티 호아」 「木碑가 서 있는 숲」 등의 작품들이 베트남에서 직접 느낀 걸 쓴 시라면, 「개민들레」는 제주로 이주해 와 “살아보겠다고 씩씩하게 살아보겠다고/ 연삼로 꼼장어구이 집에서 서빙하던/ 베트남 여인 꿍웬”을 통해 작은 목소리로 이른바 ‘민중 연대’를 노래한 작품이다.

토종이 아니라는 이유로
추방을 생각했던 사람들이 있었지만
작고 여린 목숨일지라도
저항의 방식 하나쯤은 있는 법
여린 홀씨 하나로
사람 사는 곳이라면 어디서나
노란 꽃대 밀어 올리는 저 견고한 힘

_「개민들레」

다소 투박하고 낯익은 표현 방식을 이용하고 있지만 어떤 연대의 힘이 느껴지는 것은 분명한데 그것은 단지 작품에 “힘”이라는 어휘가 들어가서만은 아니다. 그것보다도 시인 자신이 자신의 상처를 통해 베트남 민중들에게 개방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 이른바 ‘민중 연대’의 힘은 고급스럽게 표현할 수도 없는 가장 직접적인 층위에서 이루어지는 바 이 ‘직접적 층위’ 자체는 힘이 세차게 흐르는 영역이기도 하다. 의도된 것이든 아니든 「개민들레」가 마지막에 배치된 것, 아니 ‘베트남 시편’들이 마지막 부분에 집중적으로 배치된 것은 흥미롭다.

시를 만나서…

그러니까 이 시집은 4·3이라는 역사적 사건으로 된 문을 열고 들어가, 4·3에 휘말린 개인사에 대한 감정들에 휩싸인 다음, 새로운 생명을 얻음으로써 맞게 되는 삶에 대한 담담한 기쁨을 거쳐, 베트남 민중들에게 손을 내미는 구조로 짜여진 셈이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시인은 “생명”이란 단어를 적잖게 이 시집에서 쓰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죽음을 통해 “생명”을 얻고 있는 게 분명해 보이는 이 시집은, 앞으로 또다른 4·3 시집으로 등재될 것이다.
또 한 가지 짚어야 할 점은 이순이 넘은 시인의 첫 번째 시집이라는 것이다. ‘시인의 말’에서 직접 토로했듯이, “늦깎이로” 시를 쓰면서 자신의 과거와 화해하고 동시에 ‘우리’의 아픔을 알게 된 것은 시인의 말대로라면 시를 통해서였다. “詩를 만나지 않았다면/ 허기지고 외로운 시간들/ 생의 변곡점을 지나는 계절들을 잘 견뎌낼 수 있었을까”라는 자문은 일종의 ‘서시’로도 읽힌다. 이종형에게 시는 세상을 달리 보는 놀라운 눈이 되었던 것이다.
제주에 살면서 4·3을 알리는 데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고 또 시를 쓰는 일에도 조급해하지 않은 삶의 태도가 바로 이 시집 『꽃보다 먼저 다녀간 이름들』이다!

햇살이 쟁쟁한 팔월 한낮
조천읍 선흘리 산 26번지 목시물굴에 들었다가
한 사나흘 족히 앓았습니다

들짐승조차 제 몸을 뒤집어야 할 만큼
좁디좁은 입구
키를 낮추고 몸을 비틀며
낮은 포복으로 엉금엉금 기어간 탓에 생긴
통점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그해 겨울
좁은 굴속의 한기寒氣보다 더 차가운 공포에
시퍼렇게 질리다 끝내 윤기 잃고 시들어 간
이 빠진 사기그릇 몇 점
녹슨 솥뚜껑과
시절 모르는 아이의 발에서 벗겨진 하얀 고무신

그 앞에서라면
당신도 아마
오랫동안
숨이 막혔을 것입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나처럼
사나흘 족히 앓아누웠을 것입니다

―「통점」 전문

세 살에 아비 잃은 소년은
아비보다 더 나이 든 사내가 되었습니다

유품이라고 남겨진
새끼손가락 같은 상아 도장 하나
그 세월 긴 인연을 벗겨내기에
한없이 가엽고 가벼우나
마침내 사내는
세월을 거슬러 돌아와
소년에게 미안하다 합니다

먼 길을 돌아 걸어온 순례의 끝
죽음의 그늘을 벗기는
꽃이 피고 봄이 오고
꽃비 내리는 이 봄날에
간절한 노래는 다시 시작되나
나는 아직도 당신과 작별하지 못했습니다

―「꽃비 내리는 이 봄날에」 전문

아들이 아버지가 된다며 전화를 걸어왔다
아주 잠깐,
천지간이 기우뚱거렸다

폭설에 묻힌 산허리 어디쯤에
꼼지락거리는
복수초 꽃잎 한 점
꽁꽁 언 땅을 가만히 녹이고 있었으리

햇살 톡톡 터트리며 오시는 봄을 따라온
새 생명의 이름
너의 이름을 무엇이라 부르면 좋을까

―「생명」 전문

  작가 소개

저자 : 이종형
제주 출생. 2004년 『제주작가』로 작품활동 시작.제주작가회의 회원.

  목차

시인의 말_5

제1부
山田 12
통점 14
山田 가는 길 16
자화상 17
바람의 집 20
십자가 진 사내 22
각명비 24
검은 돌에 새겨진 子, 혹은 女 26
도령마루 28
무등이왓 팽나무 30
꽃비 내리는 이 봄날에 32
4월 34
봄바다 35

제2부
폭설 38
풍경이 울다 39
꽃잠 40
따뜻한 집 42
수화식당 44
백양사 가는 길 46
산사 풍경 48
정선 50
바이칼 1 52
바이칼 2 53
그 남자 54
레시피 56
거룩한 식사 58
묘지산책 60

제3부
생명 62
원준에게 63
오동나무 집 한 채 64
응급실 신호등 66
아버지 68
여름 이후 69
당부 70
해후 72
10월 74
비양도 75
고작 열흘 76
재회 78
가을 안부 80
애월 82
사랑이여, 안녕 84

제4부
포구, 강정江汀 88
구럼비 가는 길 90
대설주의보 92
폭설의 한계중량 94
붉은, 날들 96
레퀴엠 98
바나나 혁명 100
십일월의 詩 102
삼백 살 된 104
카이, 카이, 카이khai, khai, khai 105
눈과 손 108
씬 로이 110
팜 티 호아 112
木碑가 서 있는 숲 114
개민들레 116

발문
아름다운 아픔의 경계, 경계 지우기 | 안상학 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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