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옵서버」에 의해 현존하는 가장 중요한 프랑스 작가로 지목된 엠마뉘엘 카레르의 장편소설. 프랑스를 대표하는 작가로 시나리오 작가, 영화감독으로도 활동하는 엠마뉘엘 카레르는 독특한 발상과 날카로운 관찰력, 세련되면서도 다채로운 서술 방식으로 전 세계 독자를 사로잡았다. 그가 발표한 작품들은 3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며 동명의 영화로 제작되는 등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
카레르는 데뷔 이후 픽션과 논픽션을 넘나들며 꾸준히 빼어난 작품을 발표해 프랑스의 3대 문학상 중 하나인 페미나상(1995)을 받았다. 또한 파시옹상(1984), 보카시옹상(1984), 발레리 라르보상(1986), 클레베르 헤덴스상(1988), 뒤메닐상(2007), 글로브 드 크리스탈상(2010), 르노도상(2011) 등을 받으며 명성을 다졌다.
2014년 출간된 <왕국>은 초기 기독교 역사를 재구성한 팩션으로 프랑스에서만 50만 부 이상이 팔렸다. 그리고 같은 해 「르 몽드」 문학상 수상을 비롯하여 「리르」, 「렉스프레스」 '최고의 책'으로 선정되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미국, 영국, 독일, 스페인, 이탈리아, 폴란드 등 전 세계 10여 개국에서 출간 또는 출간을 앞두고 있다.
유장한 자전 소설이자 역사 소설인 <왕국>은 성경의 교리 이전에 하나의 믿음을 따라 움직이는, 개인의 삶에 집중한다. 작가 자신이 신앙의 세계에 첫발을 내디딘 때로부터 불가지론자로 회귀하기까지의 과정을 살피는 한편, 시간을 가로질러 사도 바오로와 복음사가 루카의 여정을 추적한다.
출판사 리뷰
-2014년 『르 몽드』 문학상 수상작
-2014년 『리르-렉스프레스』 선정 <최고의 책>
-2014년 『르 푸앵』 선정 <최고의 책>
-2014년 『텔레라마』 <올가을의 책> 중 하나로 선정
-2014년 프랑스 소설 부문 베스트셀러 종합 1위 50만 부 이상 판매!
현존하는 최고의 르포 소설가 엠마뉘엘 카레르가
독창적으로 재구성한 초기 기독교의 역사!
『옵서버』에 의해 현존하는 가장 중요한 프랑스 작가로 지목된 엠마뉘엘 카레르의 『왕국』이 열린책들에서 출간되었다. 프랑스를 대표하는 작가로 시나리오 작가, 영화감독으로도 활동하는 엠마뉘엘 카레르는 독특한 발상과 날카로운 관찰력, 세련되면서도 다채로운 서술 방식으로 전 세계 독자를 사로잡았다. 그가 발표한 작품들은 3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며 동명의 영화로 제작되는 등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 카레르는 데뷔 이후 픽션과 논픽션을 넘나들며 꾸준히 빼어난 작품을 발표해 프랑스의 3대 문학상 중 하나인 페미나상(1995)을 받았다. 또한 파시옹상(1984), 보카시옹상(1984), 발레리 라르보상(1986), 클레베르 헤덴스상(1988), 뒤메닐상(2007), 글로브 드 크리스탈상(2010), 르노도상(2011) 등을 받으며 명성을 다졌다.
2014년 출간된 『왕국』은 초기 기독교 역사를 재구성한 팩션으로 프랑스에서만 50만 부 이상이 팔렸다. 그리고 같은 해 『르 몽드』 문학상 수상을 비롯하여 『리르』, 『렉스프레스』 <최고의 책>으로 선정되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미국, 영국, 독일, 스페인, 이탈리아, 폴란드 등 전 세계 10여 개국에서 출간 또는 출간을 앞두고 있다.
유장한 자전 소설이자 역사 소설인 『왕국』은 성경의 교리 이전에 하나의 믿음을 따라 움직이는, 개인의 삶에 집중한다. 작가 자신이 신앙의 세계에 첫발을 내디딘 때로부터 불가지론자로 회귀하기까지의 과정을 살피는 한편, 시간을 가로질러 사도 바오로와 복음사가 루카의 여정을 추적한다.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천일야화 시리즈』, 『오르부아르』, 『러시아 소설』 등을 번역한 바 있는 임호경 역자는 치밀하고 세련된 엠마뉘엘 카레르의 문체를 한국어로 세심하게 옮겼다.
이 사람처럼 말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2017년 과달라하라 FIL 로망스어군 문학상 수상 작가
엠마뉘엘 카레르가 파헤친 초기 기독교의 모든 것!
『왕국』은 프롤로그와 에필로그 외 4부로 구성되어 있다. 1990년 가을, <주님의 은총을 입은> 카레르는 약 3년간 기독교인으로서의 삶을 산다. 더는 글을 쓸 수도, 타인을 사랑할 수도 없는 비참에 빠진 그에게 대모(代母)가 안긴 『신약』이 그 계기였다. 매일 「요한 복음서」를 한 구절씩 강독한 후 명상의 결실을 몇 줄의 글로 요약하는 작업을 계속해 나가면서 그는 2년간 노트 열여덟 권을 채우기에 이른다. 이후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두 아들에게 영세를 받게 하고 규칙적으로 미사에 참석하는 등 그야말로 회심한 기독교인으로서, 신실한 기독교인으로서의 생활이 이어졌다.
그로부터 20년의 세월이 지나 카레르는 초기 기독교 공동체를 다룬 글을 쓰는 한편, 2천 년 후 그들의 신앙이 어떤 모습이 되었는지를 조명한 르포르타주를 기획한다. 한때의 독실했던 신앙생활이 무색하게 과거의 기억은 휘발된 지 오래다. 거짓말처럼 신앙의 세계를 빠져나왔던 그는 또 한 번 강한 이끌림으로, 그러나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기독교를 말해 보리라 마음먹는다. 그리고 창고에 묵혀 두었던 성경 공부 노트들을 다시금 펼친다. 그는 곧 기독교 시절의 자신을 추적하는 작업에 착수하고, 이는 바오로와 루카의 행적을 뒤좇는 조사로 이어진다.
카레르는 그 자신이 신앙의 세계에 첫발을 내디딘 때로부터 불가지론자로 회귀하기까지의 과정을 차근차근 더듬어 나간다. 이 과정에서 그는 『신약』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바오로의 서신들과 루카가 집필했다고 전해지는 「사도행전」을 주의 깊게 읽어 나간다. 초기 기독교의 전파에 힘쓰고 반석을 세운 바오로와 그의 주치의이자 동료로 전도 여행에 동참한 루카. 카레르는 특히 이방인 신분의 개종자이자 복음사가인 루카에게 작가 자신을 투영한다. 현실의 증인으로서 기록자인 동시에 관찰자로서의 소명에 있어 소설가는, 복음서 기자와 일맥상통한다. 『신약』에서 그 이름이 단 세 차례 언급됐을 뿐인, 그럼에도 기독교 사상 수호성인으로 추앙받는 인물, 루카의 삶은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 무엇보다 그 조그만 유대교 신흥 종파는 어떻게 3세기도 안 되는 시간에 로마 제국을 안으로부터 집어삼키고 오늘날까지, 이렇듯 굳건하게 지속되어 왔을까.
눈앞에서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1세기 기독교도들의 삶
카레르가 보기에 루카는 문인이었으나 추상적 정신의 소유자가 아니었다. 루카는 70년대 말 무렵 복음서를 집필하기 시작했고 『70인 역 성경』, 「마르코 복음서」, 그리고 예수의 어록인 『Q』를 주로 참고한 것으로 추측된다.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예수의 여정이 쓰인 「루카 복음서」는 다른 복음서에 비해 문장이 보다 정교하고 세련된 데다 가장 내용이 길다. 또 바오로의 서신을 바탕으로 한 해석에서 그치지 않고 신앙에 관한 고유의 관점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큰 특징을 갖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호하게 처리된 부분들이 군데군데 발견된다. 카레르는 역사의 현장에서 스스로 부여한 소임에 있어 루카와 궤를 같이하지만, 현대적 의미에서의 조사자로서 좀 더 치밀하고 다각적인 분석 태도를 유지한다.
사실상 직접 예수를 대면하지 않았음에도 굳은 믿음으로 기독교에 삶을 내던진 사도 바오로와 그의 동료 루카에 대한 호기심으로 역사를 재구성하는 일은, 곧 미궁에 빠진 카레르 자신을 바깥으로 끌어내는 일과도 같다. 『신약』의 정보를 바탕으로, 카레르는 선을 넘지 않는 상상력을 가미한다. 트로아스의 회당에서 벌떡 일어나 예수의 부활에 대해 열정적으로 설교하는 바오로, 우연히 이를 목격하고 매료되어 믿음의 길로 나아가는 루카에 대한 이야기는 인물의 입김이 느껴질 만큼 생생하게 펼쳐진다. 중산층 계급 출신의 의사이자 유대교에 이끌린 그리스인, 외모적 특징조차 알려지지 않은 루카는 카레르의 관심이 집중된 인물로서 동일시의 대상이다. 무지(無知)에서 출발하여 강한 호기심으로 긴 모험에 나서고 이후, 한층 넓어진 세상에 대한 시각을 갖게 되는 과정이 작가 자신의 글쓰기 방식과 매우 흡사하다. 또한 확정된 깨달음이 아닌 순간순간 그를 덮치는 회의감에 동요당하는 루카의 인간적 면모는 『성경』의 의미를 독자로 하여금 새롭게 돌아보게 한다. 이로써 카레르는 성경이 앞세우는 교리 이전에 단 하나의 믿음을 따라 움직이는, 현존하는 삶에 눈을 돌린다. 그리하여 이율배반적인 것에 매혹되고 끝내 두려움을 벗어던진 채 투신하고야 마는 인간 본성을 낱낱이 드러내 보인다.
현실이 불만스럽고 고통스러운, 가난한 영혼의 소유자를 거두는 것이 기독교라는 카레르의 생각은 낮은 자를 향해 흐르는 거대한 물길과도 같은 <사랑>을 가리킨다. 선함에 대한 열망이 곧 기독교적 낙원이자, <왕국>이라는 것이다. 『왕국』은 절대적 진리로서의 종교 대신 인간이 선택한, 인간을 위한 믿음을 그린다.
교회를 한 번이라도 가본 사람은 반드시 읽어야 할 책!
기독교 탄생에 관한 흥미롭고도 다채로운 역사적 진실들을 발견해 나가는 동시에, 기독교가 우리 영혼의 깊은 곳을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해보는 이중의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 옮긴이의 말
카레르는 말한다. <예수가 부활했다고 믿지 않는다.> 한 인간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돌아왔다고 믿지 않는다고. 다만, 사람들이 그걸 믿을 수 있다는 사실이, 스스로 한때 그걸 믿었다는 사실이 자신을 궁금하게 만들고, 매혹시키고, 불안하게 하고,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음을 고백한다. 그는 『왕국』을 집필한 목적이 더는 부활을 믿지 않게 되었기 때문에, 그것을 믿는 이들보다, 그리고 그것을 믿었던 자기 자신보다 더 똑똑하다고 생각하지 않기 위해서라고 밝힌다. 스스로를 너무 두둔하지 않기 위해 이 책을 썼고, 이 모든 것은 다만 충실하고자 하는 염원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이다.
※ 외국 작가에게 지면을 할애하는 데 다소 인색한 미국 언론에서 이례적으로 엠마뉘엘 카레르의 『왕국』을 대서특필했다. 한글 원고지 기준 115매 분량의 기사 전문을 첨부한다.
『뉴욕 타임스 매거진』
엠마뉘엘 카레르는 어떻게 논픽션을 재창조했는가?
분류가 힘든 그의 작품들은 개인사와 르포르타주와 철학과 신학을 혼합하여 강력한 서사적 마법을 선사한다.
2017년 3월 2일
와이엇 메이슨 씀
지난 10월, 미국 대선의 혼란이 그 절정에 이르렀을 때, 나는 59세의 프랑스 작가이자 영화 제작자인 엠마뉘엘 카레르가 부끄러움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 파리의 어느 거실에 앉아 있었다. 「자신에 관련된 불쾌한 것들, 수치스러운 것들을 쓴다는 것은,」 그는 마치 정신 분석을 받는 환자처럼 검정 가죽 소파에 몸을 비스듬히 기대면서 내게 말했다. 「이것은 내게는 아무런 문제가 안 돼요. 난 부끄러움이 별로 없어요. 난 내가 나쁘다고 여기는 것들을 많이 해왔고, 또 생각해 왔지만, 난 그것들이 부끄럽게 느껴지지 않는데, 그것은 모든 사람이 자기가 나쁜 일을 했다고 느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나는 만일 독자가 어떤 책을 읽고 <오, 그도 똑같구나. 그도 마찬가지야>라고 느낀다면, 이것은 독자에겐 좋은 일이라고 생각해요.」
「어려운 점은,」 카레르는 몸을 세워 앉으며 말을 이었다. 「우리가 자신에 대해 쓸 때는, 어쩔 수 없이 다른 이들에 대해서도 쓰게 된다는 사실이에요. 자신에 대해서는 자신이 원하는 그 무엇이라도 쓸 권리가 있지만 ― 이것도 내게는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에요 ― 다른 이들에 대해 글을 쓴다는 것은 엄청난 문제를 야기해요. 우리가 자기 자신에 대해 보여 줄 수 있는 정직함을 다른 이들에게 부과할 권리는 전혀 없는 거죠.」
용모는 나이의 절반밖에 되어 보이지 않지만, 마치 끌로 파낸 듯한 깊은 주름살들이 팬 카레르는 지금 추상적으로 말하는 게 아니었다. 지난 17년 동안 그가 프랑스에서 유명해진 것은 타인들에 대해 ― 한 살인범, 한 러시아 파시스트, 그의 어머니, 그의 외조부, 그의 로맨틱한 삶 가운데 만난 여인들 ― 글을 써왔고, 각 경우마다 자신과 타인들에 대해 글을 쓰는 문제에 있어서 새로운 형식적 해결책들을 찾아내어 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카레르는 그 결과들에 대해서는 불안감이 없지 않다.
「이것은 나로 하여금 어떤 문장을 ― 정말이지 너무나 끔찍한 것이죠 ― 생각나게 해요.」 카레르는 말을 이었다. 「이것은 지금으로부터 15년 내지 20년 전에, 알제리 전쟁 때 사람들을 고문했다고 비난의 대상이 된 프랑스군의 마쉬 장군이 한 인터뷰에서 한 말이에요. 1950년대와 60년대에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던 이 프랑스의 최고위 장성은 많은 사람들을 고문했다는 아주 정당한 비난을 받고 있었어요. 인터뷰에서 마쉬 장군은 <제젠> ― 전극봉과 발전기까지 갖춘 전기 고문 ― 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어요. <이보세요, 우리 과장하지 말자고요. 전극봉이요? 그건 내가 내 몸에다 직접 실험해 본 거예요. 물론 조금 아프죠. 하지만 그 이상은 아니에요.> 정말 얼마나 말도 안 되는 말입니까! 고문에 있어서 끔찍한 점은 어떤 타인이 당신을 괴롭히는데, 당신은 그가 언제 멈출 줄 모른다는 점이에요. <그게 정말 아픈지 내가 내 몸에 직접 실험해 봤다. 그리고 아파서 멈췄다.> 이것은 고문과 정반대예요. 이건 <실험>이라고 불리는 것이죠. 마쉬가 한 이 말의 난센스와 윤리적 추악함이라니!」
「자신에 대해 나쁜 것들을 쓴다는 것은,」 카레르는 다시 뒤로 등을 기대면서 설명을 이어 나갔다. 「마쉬가 전극봉을 자신에게 사용해 보는 것과 마찬가지 일이에요. 당신은 언제 멈출 것인지 스스로 결정할 수 있지요. 다른 이들에 대해 글을 쓸 때는 엄청난 책임이 뒤따릅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난 전극봉을 나 아닌 다른 이들에게 사용해 왔어요. 그리고 그게 내 마음에 걸려요. 난 그게 좋게 느껴지지 않아요. 난 불행히도 선한 사람은 아니에요. 난 선한 사람이 되고는 싶어요. 난 무엇보다도 선함과 미덕을 아주 좋아해요. 하지만 난 아주 좋은 사람은 아니에요. 반면에 난 아주 윤리적이죠. 다시 말해서 난 선함이 어디에 있는지, 또 악함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어요. 난 문학이 우리에게 비윤리성의 권리를 준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하지만 난 아주 좋은 사람은 아니에요. 반면에 난 아주 윤리적이죠. 다시 말해서 난 어디에 선함이 있는지, 또 어디에 악함이 있는지 알고 있어요. 난 문학이 우리에게 비윤리성의 권리를 준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옳고 그름의 문제, 친절함과 잔인함의 문제, 그리고 선과 악의 문제는 문학사에 활기를 불어넣어 왔기 때문에, 오래 남는 작품들 중에서 우리가 어떻게 행동하며,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그렇게 행동하게 하는지의 문제를 모종의 방식으로 중요하게 다루지 않는 작품을 찾아보기란 힘들 것이다. 이 역사에 있어서 카레르의 경우가 주목받게 된 것은 이런 문제들을 매우 특별한 방식으로 제기해 왔기 때문이다. 픽션과 논픽션 사이를 오간 ― 카레르는 한 작가로서 이 교번적인 작업을 매우 좋아하며, 그 자신의 작품들을 통해 보여 주고 있다 ― 영화 제작자 베르너 헤어조크에 대한 책 한 권 분량의 에세이로 1982년에 커리어를 시작한 이후로, 카레르는 논픽션적 글쓰기에 대한 생각을 계속 혁신해 왔다. 극히 내밀하며, 역사적, 철학적으로 진지하면서도 강력한 서사적 마력을 지닌 카레르의 책들은 심층적 르포르타주를 신학, 철학, 심리학, 개인사, 역사 기록학 등을 아우르는 학문적 탐험에 결합시킨 혼종적 텍스트들이라고 할 수 있다. 형식적 혁신은 주로 전위적인 작가들의 관심사이고 따라서 독자층이 한정되는 경향이 있지만, 카레르의 책들은 ― 36년 동안 모두 14권을 썼으며, 3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었다 ―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 높이 상찬되는 만큼 대중적인 인기도 많다. 미셸 우엘베크가 통상적으로 프랑스의 현존하는 최고의 픽션 작가로 제시되고 있다면, 그에 못지않게 순수한 산문과 폭넓은 비전을 보여 주는 카레르는 프랑스 최고의 논픽션 작가로 여겨지고 있다.
솔직함을 무엇보다도 중요시하는 카레르의 태도는 새 책을 쓸 때마다 진실성을 보장하는 새로운 방식들과 1인칭 시점을 포함시키는 새로운 방식들을 만들어 왔다. 논픽션 서사에 대한 자의식적 접근법들, 즉 서사 과정에 있어서 보고자(報告者)인 <나>를 우선시하는 접근법들은 역사적으로 새로운 게 아니고, 18세기의 대니얼 디포, 19세기의 토마스 드 퀸시, 20세기의 조안 디디언의 예들에서도 볼 수 있듯이 오래되고도 광범위한 현상이다. 논픽션이 약간은 저널리즘적인 바탕 위에 탄생하여 너무나도 가변적인 것이 된 나머지 세 세대에 걸쳐 <신(新)저널리즘>, <곤조 저널리즘> 그리고 <창조적 저널리즘> 등으로 이름을 바꿔 온 이 시대에서도 카레르의 접근 방식은 모든 범주를 벗어난다. 카레르 자신이 이따금 그러는 것처럼, 그의 최근의 책들을 <논픽션 소설>이라고 부르는 것도 무엇이 이 책들을 그토록 특별하게 만드는지를 밝혀 주지 못한다. 카레르의 어떤 책의 메커니즘들 ― 작가 자신을 독특한 방식으로 이야기에 포함시키기, 책이 형성되는 과정을 습관적으로 포함시키기 ― 을 집어내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카레르의 작품에 있어서 진정으로 독창적인 것은 때로는 회의적이고 때로는 편집증적인 카레르의 사고방식, 그의 풍부한 지성, 그의 호들갑스럽지 않은 서정적인 산문, 부끄럼 없이 드러내는 검열되지 않은 그의 내면, 그의 지칠 줄 모르는 스토리텔링 에너지, 그의 주제들에 대한 공감을 유지하기 위한 아낌없는 시도들과 ― 더 중요하게는 ― 실패들과 섞여 들면서 이런 다양한 접근법들에 생기를 부여하는 감수성이라고 할 수 있다.
「한 권의 책을 쓰기 위해서는,」 카레르는 내게 말했다. 「당신은 자신이 이것을 쓸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는 확신을 가져야 해요.」 그의 책들 중 어떤 책들은 다른 책들보다 이 주장을 보다 명백한 것으로 만든다. 카레르의 최근작이며, 미국에서는 이번 주에 출간된 『왕국』은 그가 독실했던 기독교인이었던 시절에 대한 회고록인 동시에, 루카와 바오로가 어떻게 기독교사에서 최초의 책들을 썼는지에 대한 허구적인 설명이기도 하다. 혹은 2007년에 나온 그의 『러시아 소설』을 한번 들여다보자. 이 책은 부분적으로는 총명하지만 우울증 성향이 있으며, 러시아 혁명 후에 고국 조지아에서 유럽에 건너왔지만 프랑스의 삶에 녹아들지 못하고, 제2차 세계 대전 때에는 독일군 통역을 하며 부역자로 전락한 카레르의 외조부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어느 날 그는 사라졌고, 그 후로 본 사람도, 소식을 들은 사람도 없다고 한다. 그때 카레르의 어머니는 열다섯 살이었고, 그 후 그녀는 아버지가 사라진 사실이나 그의 운명에 대해 한 번도 얘기한 적이 없다고 한다. 카레르는 이 이야기를 최대한 충실하게 이야기하려고 노력하지만, 만일 그가 이 이야기를 하면서 동시에 2002년에 모스크바에서 기차로 열한 시간 거리에 위치해 있으며,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에 끌려갔다가 소련군의 포로가 되어 조그만 정신 병원에 갇혀 살다 53년 만에 75세의 나이로 다시 발견된 한 헝가리 병사가 살았던 러시아의 외진 소읍 코텔니치에 대한 장편 다큐멘터리를 찍은 (카레르는 작가인 동시에 영화와 텔레비전 영화 제작자 겸 시나리오 작가로서의 경력을 이어 오고 있다)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카레르의 책이 아닐 것이다. 카레르는 이 이야기, 즉 다큐멘터리를 찍은 이 이야기를 하면서, 또한 그가 이 영화를 제작했던 시기에 어느 여자와 맺었던 관계, 그와는 다른 사회 계층 출신이며, 그가 외설적인 편지를 보낸 한 여자와의 관계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그는 이 편지를 프랑스의 제일 일간지 『르몽드』에 발표하는데, 그는 이 편지가 여자에게 깜짝 선물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녀에게 이에 대해 사전에 얘기하지 않지만, 이 깜짝 선물 계획은 결국 엉망진창이 되어 버리고, 더불어 카레르의 심리적 균형도 망가져 버린다. 이 모든 이야기들은 이 책에서 치밀하게 기록되고 있는바, 실타래를 푸는 듯한 그의 이런 작업은 독자가 만날 수 있는 가장 흥미진진한 마니아적 마법들 중 하나이다. 이런 잡다한 요소들을 한데 수렴시킨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이것들은 결국 놀랄 만한 무언가를 이루게 되는데, 이것은 특히나 『러시아 소설』이 또 다른 공개 편지, 즉 카레르가 자기 어머니에게 보내는 것이며, 그들은 한 번도 그들 가족 위에 드리운 어둠에 대해 얘기를 나눈 적이 없고, 그가 이 이야기를 가장 공개적인 방식, 즉 공적인 방식으로 이야기함으로써 걷어 버리기를 바라는 어둠에 대한 공개 편지로 끝을 맺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카레르의 어머니 엘렌 카레르 당코스는 단언컨대 프랑스에서 가장 유명한 러시아 역사가이며, 단지 그녀의 전문성 때문만이 아니라 프랑스어의 존엄성과 순수성을 보존하기 위해 리슐리외가 설립한 후 382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기관인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종신 원장의 자격으로 프랑스의 TV에 항상 모습을 보이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전극봉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 착잡함을 느낀다는 카레르의 주장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음이 느껴진다.
나는 이 책을 어머니로서 읽는 기분이 어떤 것일지는 상상할 수 없지만, 이런 이야기를 품고 산다는 것이 어떤 기분일지는, 그리고 왜 이런 이야기를 품고 사는 것을 전혀 원치 않는 것이 이런 이야기를 가지고 살아가는 방법 중의 하나일 수도 있는지를 이제는 상상할 수 있다. 이런 방식을 통해 ― 이런 솔직한 방식, 처음 보기에는 극히 이질적으로 느껴지지만, 결국은 의미심장하게 서로 연결되는 요소들을 결합하는 이런 방식을 통해 ― 카레르는 걸작들을 한 편 한 편 써올 수 있었다. 경고도 없이 우리의 삶에 침범해 들어오는 폭력을 다루는 책들, 때로는 그 자체로서 이러한 폭력에 대한 폭력을 이루는 책들 말이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1969년 『보그Vogue』에서 이렇게 말한다. <한 작가의 전기에서 최상의 부분은 그가 행한 모험들의 기록이 아니라, 그의 문체의 스토리이다.> 나보코프의 자신의 삶의 이야기에도 극적인 부분들이 없지 않지만, 어떻게 그가 <메리>라는 제목의 별 볼 일 없는 첫 소설을 쓰고 나서 30년 후에 세계 문학의 고전인 『롤리타』를 쓰게 되었는지는 그의 이야기 중에서 더 풍요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으니, 이것은 오직 그에게만 관련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카레르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지금까지의 그의 커리어는 픽션에 몰두한 첫 번째 절반과 논픽션에 바쳐진 두 번째 절반, 두 부분으로 정확히 나뉜다. 그는 마흔 살이 될 때까지 다섯 편의 소설을 발표했고(그중 네 편은 20대에), 갈수록 그의 명성을 높여간 소설들은 모두가 3인칭 소설이었다. 비록 카레르가 이 작품들 대부분을 탐탁지 않게 얘기하고 있기는 하지만(자전적인 첫 번째 소설은 그가 병역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 건너가 중국인 노부인들에게 프랑스어를 가르치고, 각종 마약을 섭렵했던 인도네시아에서의 경험을 초현실적이면서도 무겁게 다루고 있고, 메리 W. 셸리가 프랑켄슈타인 이야기를 생각해 낸 1816년의 그 유명한 밤의 전후를 배경으로 설정한 두 번째 소설도 그는 첫 번째 소설만큼이나 둔중하다고 느끼고 있으며, 네 번째 소설은 아예 싫어한다고 분명히 밝힌다), 그래도 두 편에 대해서는 애정을 간직하고 있으니, 바로 『콧수염』(1986)과 『겨울 아이』(1995)이다. 이 두 작품은 150여 페이지에 걸쳐 물리적, 심리적 폭력을 포함하는 끔찍한 결말을 향해 치닫는 짧고도 강렬하고도 충격적인 책들이다.
하지만 이 두 짤막한 작품에 대해 좋게 얘기하는 그의 모습에서는 일말의 향수(鄕愁)를 느낄 수 있으니, 그는 이런 방식의 작업, 즉 거기에서 아무것도 제거될 수 없는 꽉 짜인 3인칭 단편소설의 작업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글들에 대해 얘기할 때, 비록 루소의 『고백록』이나 몽테뉴의 『수상록』(그는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그의 아이패드에서 몽테뉴의 저서의 서문 격인 <독자에게>를 찾아내어, 마치 이 글을 처음 발견하기라도 한 것처럼 경이로워하면서 그것을 큰 소리로 읽어 주었다)을 언급하기는 했지만, 그가 주로 얘기한 것은 그가 사랑하는 픽션들에 대해서였다. 도스토옙스키의 『백치』(「첫 300페이지의 힘찬 전개는 정말이지 믿을 수 없을 정도예요.」), 이디스 워튼의 『이선 프롬』과 헨리 제임스의 『나사못 회전』(그 압축미 때문에 좋아하는 작품들이라고),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픽션이 만들어 낸 가장 큰 세계의 비전>)와 『안나 카레니나』의 엔딩 부분(「보통 우리는 이 작품의 결말은 별로 좋지 않다고 말해요. 하지만 키티와 레빈의 삶은 나를 아주 감동시켰어요. 난 이게 정말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행복은 내가 삶에서 열망하는 행복이죠.」), 그리고 무엇보다도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작가로서의 그의 영원한 목표라고 한다(「내가 모방하고 싶은 책이 있다면, 바로 이 책이에요.」). 따라서 카레르가 소설 쓰기를 멈춘 것은 독자로서, 혹은 작가로서의 그의 선호(選好)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카레르는 여전히 순수한 픽션을 쓰고 싶은 욕망이 있을 것이다.
그의 글쓰기 삶의 전반부가 끝난 이후로, 카레르는 모두가 책 한 권 분량이고 1인칭으로 써졌으며, 또 모두가 제각기 다른 서사적인 논픽션 작품을 다섯 편 발표했다. 그의 커리어의 첫 번째 부분과 두 번째 부분이 어떻게 맞물리는가, 혹은 어떻게 분리되는가를 알아보는 것은 어떻게 카레르가 그만의 독창성을 찾아낼 수 있었는지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 진화에 있어서 전환점이 된 것은, 18년 동안 처음에는 자신이 의과 대학생이라고, 그다음에는 세계 보건 기구에서 일하는 의사라고 주변 사람들을 속인 프랑스인 장클로드 로망에 대한 책인 『적(敵)』의 집필이었다. 장클로드 로망은 자신의 비밀이 드러나기 시작하자 ― 그는 사기 행위를 이어 나가기 위해 거액을 횡령한다 ― 이를 감추기 위해 자신의 가족, 그러니까 자신의 아내와 두 아이와 부모를, 심지어는 그들이 키우던 개까지 살해한다. 이 사건이 터지자 1993년의 모든 프랑스 국민이 그랬듯 카레르도 경악을 금치 못했고, 그때까지 소설가 활동과 병행하여 저널리스트로서 활발하게 활동해 왔던 그는 장클로드 로망의 재판과 이를 둘러싼 상황들에 대한 깔끔한 3인칭 보고서를 한 편 썼다. 그리고 그 자신 두 어린 아들의 아버지로서 자기 자식들을 죽인 사람에 대해 그 많은 시간을 들여 글을 쓴다는 것이 갈수록 찜찜하게 느껴지긴 했지만, 카레르는 이 인물에 대해 책을 한 권 써볼 생각을 한다. 그의 모델은 미국 소설가 트루먼 커포티의 논픽션 소설, 그가 너무나도 좋아하며, 3인칭으로 써졌으며, 동시에 그가 이의를 제기하기도 하는 『인 콜드 블러드』였다. 그는 2013년에 『파리 리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걸작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책은 나로서는 윤리적으로 추악하게 느껴지는 하나의 거짓말 ― 부작위에 의한 거짓말 ― 에 의존하고 있다. 이 책의 마지막 부분 전체는 두 범죄자가 감옥에서 보낸 세월에 대한 것인데, 이 세월 동안 그들의 삶에 있어서 중심적인 인물은 바로 커포티 자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존재를 책에서 삭제했다. 그가 그렇게 한 이유는 간단한데, 그것은 그가 말해야 했던 것은 결코 말할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 두 사람과 우정을 발전시켜 왔다. 또 그는 그들에게 자기가 최고의 변호사를 찾아 주겠다, 그들의 사형 집행이 연기되도록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시간을 보냈지만, 실제로는 그들이 ― 왜냐하면 이게 그의 책이 가질 수 있는 유일하게 만족스러운 결말이므로 ― 교수형에 처해지기를 간절히 바랐던 것이다. 그가 느꼈을 윤리적 불편감은 문학사에서 거의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것이며, 난 그가 후에 글을 그리 많이 쓰지 못한 이유는 이 걸작이 그에게 불어넣은 무시무시하고도 당연한 죄의식과 관련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심리학적으로 그리 설득력 없는 주장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카레르는 프랑스판 『인 콜드 블러드』를 써보려고 시도하면서 6년을 보냈다. 다시 말해서 여러 가지 관점에서 끔찍한 이 범죄의 이야기를 써보려고, 어떤 소설가가 하는 식으로 모든 사람의 머릿속에 들어가 보려고, 즉 상상을 통해 사람들의 내면을 알아내려고 시도하면서 6년이라는 긴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그는 ― 그의 말마따나 ― 써먹을 수 없는 수백 장의 페이지만 남기고 실패했다. 이 시기가 시작되고 나서 2년 후에, 카레르는 그 섬뜩한 주제를 통해 장클로드 로망의 폭력 행위를 넌지시 암시하고 있는 그의 마지막 단편소설 『겨울 아이』를 쓴다. 하지만 6년이 헛되이 흘렀다. 카레르가 말하듯이 <하이에나처럼 이 이야기 주위를 빙빙 돈 나의 삶의 6년>이, 이 매우 생산적인 작가가 단 150페이지밖에 출간하지 못한 6년의 세월이 흐른 것이다. 그는 이 장클로드 로망의 이야기를 대체 어떻게 끝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이 프로젝트를 옆으로 밀어 놓기 전에, 카레르는 이 프로젝트가 그의 삶과 커리어에 초래한 재앙을 매듭짓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그가 <메모>라고 부르는 것을 썼다. 그 메모는 이렇게 시작된다.
1993년 1월 9일 일요일 아침, 장클로드 로망이 자기 아내와 아이들을 살해하고 있을 때, 나는 학교에서 열린 교사와 학부모 간의 미팅에 나의 아내와 우리의 장남과 함께 참석 중이었다. 내 아들은 장클로드 로망의 아들 앙트완과 같은 나이인 다섯 살이었다. 그러고 나서 우리는 나의 부모와 함께 점심식사를 하러 갔다. 장클로드 로망이 식사를 하고나서 살해한 그의 부모와 그랬듯이 말이다.
「난 그렇게 바보가 아닙니다.」 카레르는 이 행(行)들을 쓰고 난 순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이 쓰기 불가능한 책이 이제 가능해지고 있다는 것을, 내가 이것을 1인칭으로 쓰는 것을 받아들이고 나니 글이 거의 저절로 써지고 있다는 것을 곧바로 깨달았어요…… 타인들은 하나의 블랙박스라 할 수 있어요. 특히 장클로드 로망 같은 수수께끼의 인물은 더욱 그렇죠. 난 이 블랙박스에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내가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블랙박스 안으로, 즉 내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죠.」
『적』에 뒤이은 작품에서도 카레르는 계속해서 다른 이들의 삶을 보여 주는 자신을 보여준다. 이런 종류의 글이 자아도취적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독자는 이런 글에서 겸허함의 느낌을 받게 되는데, 거기에는 이유가 있다. 카레르는 『파리 리뷰』에서 그 겸허함의 근원에 대한 멋진 이야기 하나를 들려주었다.
한번은 어떤 어린 여자아이가 내 앞에서 내가 너무나도 좋아하게 된 말을 하나 했어요. 그 애는 어떤 잘못을 해서 그 애의 어머니가 꾸짖으며 이렇게 말했죠. 「다른 사람들의 입장으로 들어가 보란 말이야!」 그러니까 여자아이가 대답했죠. 「하지만 만일 내가 다른 사람의 입장으로 들어간다면, 그 사람은 어디로 가죠?」 난 내가 그 규칙들과 도덕적 의무들에 익숙해지고 있었던 이런 종류의 <논픽션> 책들을 쓰기 시작한 이후로 종종 그 아이의 말을 생각해 보곤 했어요. 난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입장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또 그렇게 해서도 안 되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자신의 입장을 최대한 충실히 지키는 것뿐이에요. 그러면서 우리는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은 어떤 것일까를 상상해 보려 하고 있다고, 하지만 이것을 상상하는 사람은 다만 우리 자신일 뿐이라고 말할 수 있을 뿐이죠. 그게 전부에요.
우리 자신의 입장을 최대한 충실히 지키는 것, 이게 바로 논픽션에 대한 카레르의 관념이다. <논픽션>이라는 단어에 붙여진 따옴표는 흥미롭다. 이 따옴표는 여기서 이 <논픽션>이라는 표현이 과연 충분한지에 대한 의문이 암시되고 있으며, 나는 소설가 카레르가 이 따옴표를 붙였다고 생각한다. 카레르의 논픽션에 대한 생각은 픽션에 대한 지배적인 개념의 유용한 반대 항을 이룬다. 이 픽션의 지배적인 개념에 대해서는 데이비드 포스트 월러스가 아마도 가장 널리 퍼진 것일 설명을 제공한 적이 있는바, 그는 1993년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진지한 픽션의 목적의 큰 부분은 독자로 하여금, 그러니까 우리 모두가 그렇듯 자신의 해골 안에 갇혀 있다고 할 수 있는 독자로 하여금 다른 자아들에 상상적으로 접근할 수 있게 해주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인간 존재의 불가피한 한 부분은 바로 고통이고, 우리 인간들이 예술을 찾게 되는 이유의 한 부분은 바로 고통의 경험, 필연적으로 간접적인 경험일 수밖에 없으며, 일테면 <고통의 일반화>라고 할 수 있는 그 경험이기 때문이다…… 실제 세계 속에서는 우리 모두가 혼자서 고통을 받는다. 진정한 공감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만일 어떤 픽션 작품이 우리로 하여금 한 캐릭터의 고통을 상상적으로 동일시할 수 있게 해줄 수 있다면, 그렇다면 우리의 고통을 동일시하는 타인들을 보다 쉽게 상상해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힘을 주고, 우리를 구원해 준다. 우리는 내적으로 보다 덜 혼자인 것이다.
월러스가 보기에 픽션은 그것의 공감의 퍼포먼스 때문에, 다시 말해서 타인으로부터 이해 받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느끼게 해주기 때문에 독자에게 위안을 준다. 카레르의 작품은 우리가 논픽션을 찾게 되는 이유는 우리 자신이 이해받는다고 상상하기 위해서가 아니요, 보다 덜 외롭게 느끼기 위해서도 아니라, 남을 이해한다는 것과 그것의 한계들을 적극적으로 상상하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이런 식으로 그의 책들은 다른 사람들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어떤 느낌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외롭다는 느낌, 하지만 우리엑 자양이 되는 외로움의 느낌이다.
이런 종류의 우리에게 자양이 되는 외로움에 대한 카레르의 가장 깊은 탐험은, 부분적으로는, 2004년에 그의 아들과 여자 친구와 여자 친구의 아들과 함께 스리랑카에서 보낸 휴가 때 행해졌다. 어느 날 아침 ― 카레르가 일행에게 절벽 위에 위치한 방갈로에서 내려와 해변에 있는 게스트하우스로 가자고 제안했다가 다수결로 거부당했는데, 이 결정이 그들의 생명을 구했다, 또 이날 아침 그들은 스노클링을 하기로 계획을 세웠었는데 카레르의 아들이 가기 싫어했고, 이 역시 그들의 생명을 구했다 ― 쓰나미가 몰려와서 인도양 다섯 개 이상의 나라에서 최소한 25만 명 이상의 목숨을 앗아 갔다. 쓰나미가 물러나고 구조 활동이 전개되면서 카레르는 사랑하는 이들을 잃은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되고, 네 살 먹은 딸 쥘리에트가 재난 중에 실종된 한 가족과 가까워진다. 『나 아닌 다른 삶』은, 부분적으로는, 그의 새로운 친구들이 어린 딸의 시신을 찾는 그 끔찍한 탐색 작업을 자세히 보여 준다. 하지만 이 책은 또한 카레르의 여자 친구의 언니 ― 그녀도 이름이 쥘리에트이며, 한 지방 채무 법원의 판사이다 ― 가 암 선고를 받고 나서의 이야기도 들려주고 있다. 또 이 이야기를 따라가다가 그녀의 동료 판사이며, 그녀처럼 어렸을 때 암에 걸려 불구가 된 에티엔과의 우정의 이야기도 등장한다. 이 세 개의 이름과 세 개의 운명의 짝짓기를 통하여 카레르는 상실에 대한 ― 자식들을 잃는 것, 어머니들을 잃는 것, 운명이 망가뜨려 버리는 우리의 삶들 ―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으며, 이 이야기는 결국 정말로 소중한 무언가를 손에 쥐고 있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한 이야기가 된다.
이 책에는 카레르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놀라운 순간 하나가 있다. 쓰나미가 스리랑카를 휩쓴 직후, 카레르는 여기 저기 걸어 다니면서 사랑하는 이들을 헛되이 찾고 있는 사람들을 만난다. 그는 한 영국 관광객, <방금 전에 자신의 레즈비언 친구를 잃은 비대한 체구에 짧은 머리의 중년의 영국 여자>를 만나게 된다.
황혼을 바라보는 그 레즈비언 커플을 생각해 본다. 영국 소도시에 살면서 각종 단체 활동에 열심인 두 사람, 구석구석 사랑으로 꾸민 그들의 집, 매년 낯선 나라를 찾아 떠나는 여행, 아기자기한 사진첩, 산산조각이 난 커플의 삶. 생존한 그녀의 귀국, 그리고 텅 빈 집. 두 사람의 이름을 새긴 머그잔 두 개, 다시는 쓸 일이 없으리라. 뚱뚱한 그녀가 주방 식탁에 앉아 머리를 움켜쥐고 흐느낀다. 이제 혼자야, 죽는 날까지 혼자 살아가게 될 거야…….
<『나 아닌 다른 삶』에서 눈에 띄는 수많은 놀라운 구절들 중에서,〉 미셸 우엘베크는 곧 발표될 예정이며, 그의 에이전트가 『더 타임스』에 제공한 카레르에 대한 한 에세이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에게 가장 가슴 아팠던 구절은 재난 중에 자신의 동반자를 잃은 늙은 레즈비언 여인에 대한 것이었다. 카레르는 너무도 참혹하게 끝난 스리랑카에서의 휴가 중에 이 여인을 실제로 만났지만, 머그잔은 그가 상상한 것이다. 내가 느끼기에 이 부분은 《모든 것이 사실》인 이 책에서 카레르가 찾아낸 발명의 여지인 듯하다. 이것은 결코 하찮은 부분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머그잔들은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눈물을 흘리고, 책을 내려놓고 몇 분 동안 더 읽어 가지 못한 것은 정확히 이 머그잔 부분에서였다.〉
재난에 대한 증인의 역할은 우리가 삶 가운데서 맡게 되는 가장 중요한 역할 중의 하나이다. 이게 없다면 우리가 다른 이들의 고통을 어떻게 상상할 수 있겠는가? 종교에서 신정론(神正論)은 어떻게 완벽한 신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을 그토록 고통스럽게 만들 수 있는지를 설명하려 하는 글쓰기의 한 분야이다. 카레르의 작품들을 바라보는 하나의 관점은 이 <악의 문제>를 보여 주는 것이다. 하지만 우엘베크는 카레르가 아주 다르고도 아주 급진적인 뭔가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선(善)은 존재한다. 이것은 악만큼이나 절대적으로 존재한다>라고 우엘베크는 설명한다. 「그리고 진정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바로 이 선의 존재 ― 전적으로 자연의 법칙에 어긋나며, 생물학적 관점에서 볼 때 비생산적이라 할 수 있는 이 선의 존재 ― 이다. 그리고 엠마뉘엘 카레르가 그의 책들의 가장 아름다운 페이지들에서 제기하고 있는 것은 유일하게 진정한 문제라 할 수 있는 이 선(善)의 문제이다.」
기독교가 세워진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 카레르의 『왕국』은 이 선의 이야기를, 타인과 연결되기를 원하는, 그리고 이 연결을 통해 타인과 교감하기를 원하는 인간의 갈증을 깊게 파고들어 간다. 불어판으로 630여 페이지에 달하는 이 책에서는 20여 년 전, 카레르가 기독교를 추구했던 이야기, 그러니까 개인적으로 매우 고통스러웠던 시기에 ― 그는 글을 쓸 수가 없었고, 결혼에 실패했고,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 독실한 기독교인이 되어 매일 교회에 나가고, 「요한 복음서」를 한 구절 한 구절 논평하면서 12권이 넘는 노트를 채우고, 열렬하게 기도하고, 다시 3~4년 후에는 신앙이 시들어 다시 길을 잃게 된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다. 이 이야기를 쓰는 동시에 카레르는 예수 그리스도 사후의 초기 기독교 교회의 역사를 기록한 텍스트들, 서사물보다도 서사에 있어 더 구멍들이 많은 이 상충(相衝)적인 초기 기록물들에 대한 자신의 연구에 대해서도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말이 안 되는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 수수께끼들로 얘기했고, 2천년 후에 20억 명의 사람들이 신의 아들로 숭배하게 될 한 남자의 죽음에 대한 서사가 어떻게 네 개씩이나 나오게 되었는가 ― 카레르는 또한 선교 사업을 시작하는 사도 루카와 사도 바오로를 허구적으로 설명하기도 하는데, 이 설명의 허구성은 기록에 존재하는 커다란 구멍들을 메우면서, 어떻게 시대를 초월하여 인류 전체를 사로잡게 된 그런 이야기를 그런 방식으로 쓸 수 있었는지 이해해 보고자 한다. 그러므로 『왕국』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이야기를 이야기하기에 대한 얘기인 동시에, 말해질 수 있는 것의 한계들을 넘어서는 스토리텔링이 어떻게 작동하는가에 대한 조사가 된다.
카레르 자신은 이 책을 일종의 걸작으로 보는데, 그것은 그의 오만함의 발로가 아니라, 5년이라는 오랜 시간에 걸쳐 완성된 체리 테이블에 미네랄 오일을 한 겹 한 겹 바른 끝에, 그것이 내부의 빛으로 은은히 빛나는 것을 스스로도 놀라면서 바라보는 한 목수의 반응이다. 카레르는 『왕국』은 자신이 작업하기를 좋아했던 책, 쓰기를 멈추고 싶지 않은 책, 그의 창조적 삶의 두 번째 부분의 말미를 장식하고 세 번째 부분의 안내자가 되기를 바라는 책이라고 내게 말했다. 이제 문제는 그가 이 책의 집필을 마친 지 3년이 흘렀지만, 새로운 시대는 시작되지 않았으며, 카레르에게 『왕국』은 그가 필사적으로 이어가고 싶었던 글쓰기의 삶을 마감하는 하나의 갓돌처럼 느껴지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는 또다시 ― 그게 픽션이든 논픽션이든 ― 제대로 된 책을 쓸 수 없게 된 것이다. 이제 그는 저널리즘과 관련된 과제를 몇 가지 작업하고 있는바, 저널리즘은 카레르가 막혔을 때 세상과 관계를 맺는 유용하고도 의미 있는 방법이 되어 왔다. 하지만 내가 그를 보았을 때, 그는 일종의 단말마 상태였다. 다시 한 번 그는 우울증에 빠져 있었다.
「난 특권적인 삶을 살아왔어요.」 라고 카레르는 내게 말했다. 「대체적으로 말해서 난 행운아라고 할 수 있어요. 난 돈 문제로 고민해 본 적도 없고, 직업적으로는 아주 빨리 성공을 거뒀으며, 건강도 좋은 편이에요. 동시에 약간 무거웠던 내 삶을 통해 내가 지녀 온 것은 우울증 성향이에요. 이따금 우울증에 노출되지 않은 해들도 있었죠. 그러고는 이게 다시 돌아오곤 해요. 여기에 대한 최고의 치료약은 일이죠. 그리고 일이 없으면 ― 그리고 내가 일이 가능하지 않다고 느끼면 ― 그 결과로서 난 아주 취약해져요.」
우리가 대화를 나눴을 때 카레르는 바로 그런 취약한 상태에 있었다. 그의 글쓰기의 연옥은 또한 가정적인 것이기도 했다. 최근 그는 자신이 어디서 살고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는 느낌을 받아 왔다고 말했다. 그는 집에서 살고 있지 않았다. 그와 그의 아내는 최근 그들의 아파트를 팔고 새 아파트를 샀는데, 이 새 아파트가 아직 거주할 만한 곳이 못되기 때문에 한 친구의 빈집에서 지내고 있는데, 그곳은 삶의 흔적이라곤 전혀 없으며 ― 책도 없고, 그림도 없고, 누군가가 개인적으로 고른 것은 아무것도 없다 ― 음산하게 휑한 기분만 든다는 것이다. 카레르가 나를 영접한 이 객관적으로는 쾌적한 아파트의 어딘가 으스스한 분위기는 ― 잎이 무성한 내정을 마주한 큰 창문들, 2층 ― 중앙에 놓인 커다란 가죽 소파, 조금은 버려진 것 같은, 주인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불쌍한 개 같은 느낌을 주는 가죽 소파로 인해 더욱 강화되었다.
내가 이러한 느낌을 장황하게 얘기하는 이유는 그날과 그다음 날 카레르와 함께 보냈던 시간의 분위기를 전달하기 위해서다. <타인들은 블랙박스다>라고 카레르는 말했지만, 그래도 블랙박스는 보이지는 않지만 어떤 순간에는 느낄 수는 있는 검은 빛을 이따금 발하곤 한다. 지극히 정중하고 항상 자신의 생각을 정확하고도 주의 깊게, 그리고 솔직하고도 유쾌하게 표현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인 카레르는 차를 대접하며, 최대한으로 좋은 모습을 보여 주려 하면서 좋은 호스트가 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 우리가 대화를 나눈 첫 번째 날은 참으로 가슴 아픈 날이었다. 그가 아주 명랑한 모습을 보였던 그 첫 네 시간 동안, 사실 그는 끔찍한 고통을 안고 있었던 것이다.
카레르의 작품은 우리가 논픽션을 찾게 되는 이유는 우리 자신이 이해받는다고 상상하기 위해서가 아니요, 보다 덜 외롭게 느끼기 위해서도 아니라, 남을 이해한다는 것과 그것의 한계들을 적극적으로 상상하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그 이상하게 음울하면서도 명랑한 아파트에서 두 시간 동안 주로 카레르가 좋아하는 다양한 종류의 예술들에 대하여 ― 조각(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이것은 너무도 경악스런 작품이에요. 그 힘없이 늘어진 상태라니! 마치 그리스도의 몸이 떨어져 내리는 것 같아요. 그것의 무게가 느껴질 정도죠. 충격적이에요.」)과 음악(밥 딜런과 레너드 코엔은 그에게 있어 중요한 예술가들이다) 분야― 대화를 나눈 후, 우리는 점심 식사를 하며 초상화들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마침 파리에 렘브란트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고, 카레르는 자신이 렘브란트를 좋아한다고 말했으므로(「이것은 조금 진부한 얘기이긴 하지만, 우리가 그려진 인물의 영혼을 느낄 수 있는 그림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정말이지 렘브란트예요.」) 우리는 점심식사 후에 같이 전시회를 보러 가기로 했다. 카레르는 우리가 같이 그의 스쿠터를 타고 가도 괜찮겠느냐고 물은 다음 헬멧 하나를 내게 건넸고, 우리는 출발했다. 그날 파리의 날씨는 화창했고, 우리는 번잡한 거리를 달렸다. 카레르는 조심스럽게 운전했다. 조금은 지나치게 조심스러웠다고 할 수 있는데, 시도 때도 없이 브레이크를 밟아 대는 바람에 그때마다 뒷좌석의 바를 두 손으로 꽉 잡고 간신히 버티고 있는 나의 커다란 헬멧이 카레르의 헬멧 뒤쪽에 부딪혀 댔기 때문이다. 난 헬멧을 부딪치지 않게 하려고 애를 썼지만, 내 척추 힘이 부족해서인지, 아니면 바이크 승객으로서 경험이 부족해서인지, 그 일은 계속 일어났다. 쿵! 타타타타…… 쿵! 타타타타타…… 쿵!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우리가 친한 친구나 형제라면, 그래서 자연스럽게 서로 몸을 기댈 수 있었더라면 지금 이 상황이 훨씬 쉬웠을 텐데…… 물론 나는 몸을 기대지 않았으니, 한 미국 기자가 파리의 대로를 털털대며 달리는 스쿠터 뒤에서 방금 전에 만난 인터뷰 상대를 꼭 끌어안는다는 것은 어색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때 나를 사로잡은 느낌은, 이상하게도 아주 강력한 느낌이었는데, 난 이 낯선 이에게 꼭 달라붙어야 하며, 그렇게 하는 것이 그렇게 이상한 일은 아니라는 느낌이었다. 만일 내가 그리하면, 단지 팔을 뻗어 그를 끌어안으면 모든 게 훨씬 좋아질 거라는 느낌이었다.
렘브란트 전시회는 자크마르앙드레 미술관에서 개최 중이었다. 이 조그만 미술관에는 관람객의 줄이 길게 늘어섰고, 그 사이를 우리는 살며시 뚫고 지나갔는데, 여러 사람이 우리에게 고개를 끄덕이거나 길을 가르쳐 주었다. 거울과 금박, 그리고 둥근 천장 등으로 꽤나 화려하게 장식된 2층의 방들, 거대한 규모와 섬세한 세부들이 인상적인 그 공간들에서 우리는 <숨겨진 렘브란트>라는 제목이 붙여진 전시회를 감상할 수 있었다. 우리는 그의 학생 시절의 작품들, 즉 기사들이 집 밖에서 둥글게 서 있는 장면들을 묘사한, 화가가 스무 살 때 그린 형편없는 그림들 (<우리가 어떤 기술을 배울 때 지금은 이 정도밖에 못하지만 나중에는 뭔가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좋은 일 아니겠어요?>라고 카레르는 말했다) 앞을 지났다. 그리고 아주 모호한 어떤 그림(카레르는 <그가 무엇을 그리려고 했는지 모르겠네요>라고 말했다)과 이 전시회에 전시된 두 점의 자화상 중 한 점(「세계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초상화들을 그린 렘브란트가 그다지 매력적인 남자는 아니라는 사실이 참 재밌네요.」) 앞을 지난 다음, 우리는 책상에 앉아, 마치 아래쪽에 놓인 보이지 않는 촛불에 비친 듯이 은은히 빛을 발하는 흰 수염의 성 바오로의 초상화 한 점과 마주쳤다(「내가 상상했던 것보다는 더 늙었네요, 난 50대 후반으로 상상했는데, 여기서는 80대 초반으로 보여요.」). 그러고 나서 우리는 두 강도에 둘러싸여 십자가에 못 박혀 있는 그리스도를 묘사한 렘브란트의 유명한 동판화 (서로 작업 상태가 다른) 두 점 앞에 이르렀다. <수난>의 첫 번째 이미지였다. 이 두 동판화는 나란히 걸려 있는데, 왼쪽에 있는 것은 마치 햇빛에 잠긴 듯이 밝고도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는 반면, 오른쪽에 있는 것은 마치 십자가형이 언덕 위가 아니라 어떤 동굴 속에서 이뤄진 듯이, 빛이 땅의 갈라진 틈으로 새어 나오듯이 어두컴컴했다. 둘 다 완성되지 않았고, 세부에 있어서 차이가 있는데 렘브란트가 프린트하기 전에 작업한 것이었다. 난 카레르에게 어느 것이 더 마음에 드느냐고 물어보았다.
<난 이쪽 것이 더 좋아요>라고 그는 왼쪽에 있는 것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쪽 것은 너무 어두워요.」
역사상 많은 책들이 어둠에서 빛으로, 그리고 불신에서 신앙으로의 길을 탐험해 왔다. 이것은 카레르가 가장 좋아하는 책 가운데 하나인 성 아우구스티노의 『고백록』부터 시작하여 하나의 큰 장르를 이룬다. 카레르 자신의 책은 불신 상태에서 독실한 신앙의 상태로의 변화를 설득력 있게 스케치하고, 또 이 신앙이 어떻게 의심으로 전락하는가를 역시 타당하게 설명한 것으로는 내가 아는 한에 있어서 이 장르에서는 유일하다. 이 책의 많은 부분은 형이상학적으로도 흥미롭지만, 카레르가 내놓는 설명의 가장 특별한 점은 이것이 또한 ― 특히 루카와 바오로의 스토리들을 이야기하려고 시도하는 자신을 묘사하는 부분들, 카레르의 책의 알맹이라고 할 수 있는 이 부분들 ― 매우 구체적이고도 물질적이라는 점이다. 이것은 역사적 픽션으로 여겨질 수 있겠지만, 나로서는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다. 이것은 팩트에 대한, 실제로 일어난 것들과 그렇게 보이는 것들에 대한 리포터의 예리한 주의가 돋보이는 르포르타주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카레르는 역사적 픽션을 쓰려는 야심이 전혀 없다. 그는 『왕국』에서 이렇게 말한다. 「어떤 사람들은 토가와 치마를 입은 고대의 인물들에 가지고서 <살베 파울루스, 나와 함께 아트리움으로 갑시다>라는 문장을 정색을 하고서 쓸 수 있지만, 난 그럴 수 없어요. 이것은 역사적 소설들이 갖는 문제이고, 고대 로마를 배경으로 한 소설들에서는 더욱 커지는 문제이죠. 난 <포럼으로 가는 길에서 일어난 어떤 웃기는 일>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어요.」 이에 비해 과거의 이런 순간들에 대한 카레르의 이야기는 어떤 생생한 증언처럼 느껴진다.
전에 신자였고 지금은 비(非)신자가 된 사람으로서 카레르는 그 해답을 찾기 위해 『왕국』에서 스토리텔러들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는 어떤 스토리를 이야기할 수 있는 조건을 이해해 보고자 한다. 그리고 그가 이번에도 찾아낸 것은 우리는 여기에서의 우리의 역할을 찾아내야 한다는 사실이다. 인간의 보다 큰 이야기 가운데서 우리가 갖게 되는 역할을 이해하려는 그 욕구가 이 아름다우면서도 어려운 책의 핵심에 위치한다. 형식에 있어서가 아니라 그 느낌에 있어서 어려운 『왕국』은 우리가 <내밀한 것>이라고 부르는 것의 모순들에 접근하는 데 성공한다.
『왕국』에는 어떤 플롯이 없다. 대신 여기에는 독자를 다양한 감정의 역(驛)들 사이를 오가게 하는 감정적 셔틀버스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책의 뒷부분에서 카레르는 한 기독교 수련원에, 예수가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어 사람들을 놀라게 한, 「요한 복음서」에 묘사된 최후의 만찬에 근거한 수련원에 가기로 결심한다. <그가 베드로 앞에 무릎을 꿇자, 베드로는 항의했다. 「스승이여, 당신이 내 발을 씻으려고 합니까?」 예수가 대답했다. 「내가 하는 일을 너희는 지금 이해하지 못하지만, 나중에 이해하게 되리라.」> 그래서 카레르는 모든 이가 예수가 한 것처럼 서로의 발을 씻겨 주는, 그리고 참가자 중에는 다양한 정신 장애를 가지고 있는 이들도 섞여 있는 한 수련원으로 간다. 카레르는 한 남자의 발을 씻겨 준다.
나는 이 발들을 내려다보는데, 정말로 묘한 기분이 든다. 낯선 이의 발을 씻어 준다는 것은 정말이지 이상한 일이다. 베랑제르가 그녀의 이메일에서 인용해 주었던 에마뉘엘 레비나스의 한 아름다운 문장이 떠오른다. 그것을 보는 순간 우리로 하여금 살인을 못 하게 만드는 인간의 얼굴에 대한 문장이었다. 베랑제르는 이렇게 말했다. 「네, 그래요, 하지만 발은 더 그래요.」 발은 더 가련하고 더 연약한 것, 정말로 가장 연약한 것, 우리들 모두 안에 들어 있는 어린아이인 것이다. 나는 이 모든 것들이 약간 어색하게 느껴지면서도, 이것을 하기 위해, 다시 말해서 세상과 자신 안에 있는 가장 가난하고 가장 연약한 것을 최대한으로 가까이 하기 위해 사람들이 이렇게 모인다는 것이 아름답게 느껴진다. 난 이게 바로 기독교라고 생각한다.
카레르도 인정했듯이, 이것은 어떤 육체적 경험에 대한 멋진 지적인 대답이라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믿음과 사랑에 휩쓸린 것은 아니었다. 그리하여 기타 연주와 춤이 시작되었을 때, 카레르는 이 경험은 거의 다 끝낸 상태였고, 자신의 이 수련원을 과거의 삶과 다시 연결되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는 자신의 비겁함에 약간의 거북함마저 느낀다.
그러고 나서 무언가가 일어난다. 난 이것을 여기서 묘사하지는 않겠는데, 그것은 이게 작품의 스포일러가 되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이것이 카레르의 책들이 우리의 예상을 뒤엎어 버리는 아주 전형적인 방식이기 때문에, 그리고 카레르의 천부적인 솔직함이 그 자신과 우리에게 선사하는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살아온 삶과 그 삶의 몸부림들이라는 어둠에 대한 탐험의 끝자락에 이르러 갑자기, 그 몸부림들은 결코 우리가 상상했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지는 계시의 순간이 온다. 잘못된 선택들이 우울증과 죽음으로 이끌지만, 한 커플이 그들 자신의 선택들을 통해 새로운 삶에, 한 아이의 탄생에 이르게 되는, 카레르가 너무나도 사랑하는 작품 『안나 카레니나』의 엔딩처럼 말이다. 이 탄생에 대해 레빈은 갈등을 느끼고, 또 나름의 생각들을 갖지만, 이 생각들은 그의 아내와는 공유되지 않고, 그것들을 드러내는 소설가의 능력을 통해 우리와만 공유된다. 이런 종류의 계시는 ―작지만 누군가의 삶에 있어서는 엄청나게 큰 것이다― 카레르의 작품에 있어서 매우 특별한 것들 중의 하나이다. 그의 책들은 끝부분에 와서 문학에 있어서나 삶에 있어서 그때까지 감추어져 있던 것을 드러낸다. 이런 책 말미에서의 작지만 강렬한 계시로의 일관된 이동은 가장 규정짓기 어려운 것인데, 왜냐하면 이러한 엔딩의 효과는 앞선 것들의 축적, 다시 말해서 독자를 그 엔딩으로 인도하는 수만의 선택들의 축적들을 통해 산출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카레르가 어둠과 비극과 악행과 살인과 슬픔과 상실에 대해서, 고문받는 사람과 고문에 대해서, 심지어는 때로는 고문하는 사람 자신에 대해서 쓰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훨씬 쉬운 일이다. 하지만 얘기를 거기서 끝내는 것은 완전히 잘못된 일일 것이다. 카레르의 진정한 주제는 악이 아니라 황홀경, 우리의 삶 가운데서 불안정하게 일시적으로 존재하는 황홀경이다. 카레르는 그것이 어떻게 사라지며, 우리는 어떻게 그것에 대해 눈이 멀어 버리며, 어떻게 우리는 그것을 찾아 헤매며, 어떻게 우리는 그것에게 삼켜지며, 또 어떻게, 만일 우리가 운이 좋다면, 결국 그것이 우리를 따라잡게 되는지에 관심이 있다. 아무리 카레르가 상실과 폭력과 고통의 문제에 사로잡혀 있을지라도, 결국 그의 책들은 조그만 기쁨의 공간을 획득하는 엔딩들을 향해 움직인다. 그것들은 ― 더 나은 표현이 없기 때문에 이 표현을 쓰는데― <해피엔드>들이지만, 작위적인 트릭이 아니라 진정으로 느껴지는 해피엔드들이다. 그것들은 그것들이 치러야 할 비용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에 의해 써진 것이다.
와이엇 메이슨은 『뉴욕 타임스 매거진』의 기고가이며, 바드 대학교 교수이다.
(번역: 임호경)
(기사 링크:
https://www.nytimes.com/2017/03/02/magazine/how-emmanuel-carrere-reinvented-nonfiction.html)
그것은 바오로의 추종자들이 자신들이 체험하게 되리라고 확신했던 그 최후의 날들, 그러니까 죽은 자들이 다시 일어나고 세상의 심판이 이루어지게 될 그 최후의 날들을 얘기하고 있어. 〈부활〉이라는 경악스러운 사건을 중심으로 형성되는 내쳐진 사람들과 선택받은 사람들의 공동체를 얘기하고 있지. 불가능한, 그렇지만 실제로 일어난 무언가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 거야.
나는 누군가가 기독교로 돌아설 때면 그로 하여금 그렇게 하게 만든 문장이, 그를 위해 존재하며 그를 기다리고 있는 저마다의 문장이 있다고 생각한다. 나의 문장은 바로 이것이었다. 그것은 먼저 이렇게 말한다. 너 자신을 내려놓아라. 이제부터 인도하는 것은 더 이상 네가 아니다. 그리고 일단 이 첫걸음을 떼고 나면, 어떤 항복으로 여겨질 수 있는 것이 크나큰 안도감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 이게 바로 〈포기〉라는 것이며, 내가 간절히 바랐던 것은 바로 이것, 나 자신을 포기해 버리는 것이었다.
루카는 그의 이야기 속 주인공들 ─ 바오로, 티모테오, 리디아, 심지어 예수까지 ─ 을 그들의 조그만 신흥 종파 밖에서는 아무도 모른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있었고, 다른 복음서 기자들과 달리 이 점을 가지고 고민했으니, 그가 글을 쓰는 대상은 이 종파 외부의 독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작가 소개
저자 : 엠마뉘엘 카레르
유례없이 문학적인 저널리즘식 글쓰기로 탁월한 역량을 인정받은 현대 프랑스 작가. <문학적 다큐멘터리>, <작가 자신의 에고를 벗어던지고 얻어 낸 문학적 성취>로 정평이 났다. 1957년 파리 16구의 부르주아 가정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파리에 살고 있다. 파리 정치 대학에서 공부했고, 인도네시아에서 2년간 대체 복무를 했다. 대학 재학 중 주간지 『포지티프』에 영화 비평을 게재하고, 영화 시나리오 작업을 하면서 글쓰기를 시작했다. 이후 다큐멘터리 제작, 르포르타주 집필 등 현실과 맞닿은 작업을 계속해 왔다. 3주 만에 완성한 데뷔작 『콧수염』(1986)으로 존 업다이크로부터 <멋지고, 번득이며, 냉혹한 작품>, 『르 몽드』로부터 <문학의 천재>라는 찬사를 받았으며, 몽상과 현실을 교묘하게 교차시키는 특이한 작가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겨울 아이』(1995)로 그해 페미나상을 받으면서 전 세계 독자들에게 알려졌으며, 클로드 밀러 감독의 동명 영화로 제작되어 칸 영화제 심사 위원상을 받기도 했다. 일가족을 살해한 실존 인물 장클로드 로망의 심리를 파헤친 문제작 『적』(2000), 뒤메닐상을 받은 『러시아 소설』(2007), 글로브 드 크리스탈상과 아카데미 프랑세즈 문학 대상을 받은 『나 아닌 다른 삶』(2009), 르노도상과 문학상의 상을 받은 『리모노프』(2011) 등 다수의 작품을 발표했다. 명실상부 세계적으로 영향력 있는 작가로서 2017년 과달라하라 FIL 로망스어군 문학상을 받았다.2014년 발표한 『왕국』은 초기 기독교 역사를 재구성한 팩션이다. 프랑스 내에서만 수십만 부 이상 팔렸으며, 같은 해 『르 몽드』 문학상을 수상했고, 『리르』, 『렉스프레스』 <최고의 책>으로 선정됐다. 유장한 자전 소설이자 역사 소설인 『왕국』은 성경의 교리 이전에 하나의 믿음을 따라 움직이는, 개인의 삶에 집중한다. 작가 자신이 신앙의 세계에 첫발을 내디딘 때로부터 불가지론자로 회귀하기까지의 과정을 살피는 한편, 시간을 가로질러 바오로와 복음사가 루카의 여정을 추적한다. 낮은 자를 향해 흐르는 거대한 물길과도 같은 기독교적 <사랑>. 카레르는 절대적 진리 대신 인간이 선택한, 인간을 위한 믿음을 그린다. 그 밖의 작품으로는 동명의 영화감독에 대한 연구서 『베르너 헤어조크』(1982), 『용기』(1984년 파시옹상, 보카시옹상 수상), 『베링 해협』(1986년 SF 대상, 발레리 라르보상 수상), 『닿을 수 없는?』(1988년 클레베르 헤덴스상 수상), 『나는 살아 있고 당신들은 죽었다: 필립 K. 딕 전기』(1993) 등이 있다.
목차
프롤로그
제1부 위기
제2부 바오로
제3부 조사(調査)
제4부 루카
에필로그
옮긴이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