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리뷰
신이 없는 세상에서 신에 대해 물음을 던지는 두 사람,
독일의 영적 스승 안셀름 그륀과 템플턴상 수상자 토마시 할리크
신의 죽음과 신의 귀환 문명 세계 일부에서 최근의 과거는 유일무이한 시절이었다. 사람들이 종교라는 현상을 접하지 않고도 삶을 꾸려 갔다. 이것은 동유럽과 북유럽의 세속화된 국가들에 적용되는데, 거기서는 그리스도교가 문화와 사회로부터 추방되거나 다른 생활양식과 사고방식을 통해 암암리에 배제되었다. 그런데 이것은 서유럽과 남유럽 국가들에도 일부 해당된다. 여기서는 그리스도교가 감지하지 못할 정도로 문화에 동화되었다. 20세기 후반에는 한 세대 전체가 부유한 서유럽 국가들에서 ‘마치 신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살 수 있었다. 니체가 말한 신의 살해는 신의 말 없는 죽음으로 바뀌었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종교가 정치 영역으로 돌아왔다. 어떤 이들은 호메이니의 이란 ‘이슬람 혁명’을 보고 이를 이미 알아챘다. 어떤 이들은 ‘2001년 9월 11일’에야 알아챘다. 또한 어떤 이들은 이슬람 급진주의 분파들의 테러를 피해 유럽으로 몰려드는 난민의 물결을 보고 그때 깨달았다. 21세기 초부터 세계인들의 마음을 졸이게 한 테러리스트들은 이슬람을 근거로 내세운다. 그들이 사용하는 이데올로기적 수사는 더 이상 나치스트들처럼 인종적 증오나 공산주의자들처럼 계급적 증오가 아니었다. 종교적 증오였다. 신은 테러리즘이란 이름으로 귀환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신이 정말 죽었으면 하고 문득 바라지 않을까? 신의 이름으로 재단하여 어떤 것은 가치 있고 어떤 것은 무가치하다고, 어떤 것은 파괴할 만하고 어떤 것은 보존할 만하다고 주장하는 목소리가 있는데, 그런 식의 신에게서 벗어나길 바라는 것도 당연하지 않을까?
니체의 선언과 바오로의 연설 20세기에 강력하게 영향을 끼친 금언을 찾는다면 어김없이 “신은 죽었다!”라는 문장을 만날 것이다. 니체는 신의 죽음을 선언한 최초의 사람도 유일한 작가도 아니지만, 누구보다 유명한 인물임에는 틀림없다. 『즐거운 학문』의 광인 이야기는 이에 가장 잘 알려져 있고 가장 영향력이 큰 설명이다. “신은 죽었다. 신은 죽어 버렸다. 우리가 신을 죽인 것이다. 살인자 중의 살인자인 우리는 이제 어디에서 위로를 얻을 것인가?” 그런데 니체의 광인 이야기를 읽을 때 흔히 못 보고 지나치는 핵심 문장이 있다. 광인의 선언을 듣는 자들이 “신을 믿지 않은 많은 사람”이었다는 내용이다.
이천 년 전 사도 바오로는 아테네 아레오파고스 한가운데서 서서 이방인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신’에 대해 연설했다. 그리스도인은 아니지만 영적 탐색의 길 위에 있는 철학자들과 토론을 벌였다. 스토아학파 철학자들은 신을 믿는다. 물론 그들이 믿는 것은 철학적 신이다. 그들에게 신은 세계 전체를 형성하고 그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로고스이다. 신은 모든 것을 움직이는 불이요, 모든 것을 관통하는 정신이다. 에피쿠로스학파는 그리스 신들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신들은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는다. 인간과 어떤 관계도 맺지 않는다. 그러니 거기서 관건은 현세의 행복과 만족이다.
신의 옥좌가 제거될 때, 곧 그 옥좌의 주인이 실각될 때 개인적, 사회적 의식의 이 빈 옥좌에 누가 앉을 것인가 하는 문제는 그만큼 시급해진다. 이 책의 사유는 프리드리히 니체의 신은 죽었다는 진단과 아레오파고스 언덕에서 사도 바오로가 행한 알려지지 않은 신에 대한 연설의 양극 사이에서 펼쳐지며, 신앙과 불신앙의 동기와 태도를 따져 본다.
할리크와 그륀, 신앙과 불신앙 신앙과 불신앙 사이, 유신론과 무신론 사이에서 중요한 것은 사상적 개념을 둘러싼 논쟁 그 이상의 것이다. 어느 한 진영이 수사적 승리를 거둔다고 해도 거기에는 큰 의미가 없다. 신앙은 실존의 방향을 정하는 일이고 불신앙도 탐색하는 실존, 깨어 있는 실존의 한 형태이다. 괴테는 신앙과 불신앙의 논쟁을 역사 전체의 본질로 여겼다. 그런데 이 논쟁은 흔히 한 인간의 내면에서 일어난다. 우리 시대에는 “신앙인인 동시에 불신앙인”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이 증가하고 있다. 이 책의 두 저자, 토마시 할리크와 안셀름 그륀은 체험에 근거한다. 과감히 자신들의 개인사에 대해 통찰을 시도한다.
안셀름 그륀은 종교적 가정에서 성장했다. 삼촌이 베네딕도회 회원이었고 고모 둘도 같은 수도회 수녀였다. 외가 쪽도 비슷한 상황이었으니, 그륀에게 신앙은 공기와 같았다. 하지만 모든 것을 신에게 걸고 수도원에 들어가자 비로소 무신론적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특히 심리학을 파고들며 ‘신은 다름 아닌 인간의 투사에 지나지 않을까?’ ‘모든 것이 그저 상상이 아닐까?’ 하는 의심에 사로잡혔다. 그렇지만 오랜 회의 끝에 ‘나는 신앙에 걸겠어’라는 결단을 저절로 내리게 되었다. 마치 파스칼의 『팡세』에 나오는 유명한 내기와 같았다.
반면에 토마시 할리크가 성장한 체코슬로바키아는 수십 년 동안 공산주의 정권이 지배하며, 무신론적 이데올로기가 공적 교육제도와 국가 주도 문화의 본질을 이루던 나라였다. 할리크는 먼저 불교와 동아시아 영성에 심취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 방에서 G.K. 체스터턴의 『정통주의』를 발견하고 그리스도교를 역설의 종교로 깨닫게 되었다. 이후 할리크는 한 순례 교회로 떠나 휴식을 취하며 ‘내가 정말로 신을 믿는가'라는 물음에 답을 할 거라고 다짐했고, 아무런 계시도 큰 깨달음도 얻지 못했지만, 주님의 기도를 외고 자신의 물음에 “네, 믿습니다”라고 침묵 중에 대답했다.
불가피하며 불가결한 물음 신앙과 불신앙은 분리된 차원이 아니라 동전의 양면이다. 게다가 때로 이 동전은 단연 신앙인의 주머니에도 들어 있다. 신앙과 불신앙은 단어와 문장과 판에 박힌 문구로 만들어진 어떤 고안물이 아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삶의 지향, 즉 신뢰와 실존적 책임이다. 이것들은 신과 함께하든, 신이 없든, 신 안에 있든 중요하다. 이것들은 끊임없이 중요하며, 행여 신을 떠났어도 중요하다.
‘신은 죽었다.’ 이 진술은 오늘날 많은 사람들에게 상식이 되었다. 그들에게 안셀름 그륀은 끝으로 묻는다. “나는 어떤 신이 죽었는지 물어보겠습니다. 그다음에 나는 삶의 의미가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삶에서 자신을 지탱해 주는 것이 무엇인지 물을 겁니다.” 또한 토마시 할리크도 물음을 던진다. “나 역시 이렇게 물을 겁니다. 어떤 신이 죽었나요? 가장 흔한 문제는 특정한 신 관념이 그 신빙성을 잃은 것입니다. 신에 대한 관념은 역사 속에서, 개별 인간의 삶에서 생겨나고 다시 소멸합니다.” 이것은 신을 신앙하는 이들에게도, 신을 부정하는 이들에게도, 또한 신에 무관심한 이들에게도 언제나 유효한 물음일 것이다. 이 책은 이 물음에 자신의 체험으로 나름의 답을 내놓으려는 두 작가의 시도이다.

막 개종한 사람의 신앙, 곧 나의 신앙이 “사춘기”를 겪고 있을 때, 나는 무신론자와의 대화를 호교론 교본의 논거들을 가지고 치르는 결투로 인식했다. 이제는 그 당시 쟁취했던 수사적 승리를 부끄럽게 생각한다. 시간이 지나며 나는 그런 대화에서 우리에게 공통적인 것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우리를 분리시킨 것 속에서, 다른 관점에서 보면 풍요로운 시선이라 여길 만한 것도 다시 찾기 시작했다. 나는 종교적이지 않은 인간에게서 어떤 거룩한 것을 찾아내고, 그것이 그에게 그처럼 가치 있는 이유를 납득하려 했다. 나는 신앙의 반대가 꼭 무신론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고, 오히려 우상숭배, 즉 상대적 가치의 절대화임을 이해했다. “무신론”이 유신론, 그러니까 특정한 신 이해에 대한 비판이라면 무신론은 신앙인에게 유용할 수 있다. 신과 관련한 모든 인간적 개념은 단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불과할 뿐, 달 자체는 아님을 무신론이 일깨우기 때문이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가르쳤다. “그대가 이해할 수 있다면, 하느님이 아닙니다”(Si comprehendis, non est Deus). (토마시 할리크, 25-26쪽)
우리는 인간으로서 늘 묻는 존재이기도 하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삶에게, 신에게 질문을 던진다. 그런데 우리도 인간으로서 의문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우리의 행위를 비판적으로 판단하는 다른 사람에게 질문을 받을 수 있다. 우리 신앙인은 무신론자에게 의문시될 수 있다. 독일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물음을 던지는 것은 밭고랑을 파는 일이다.” 우리 스스로 우리 신앙을 의문시할 수 있으면 영혼의 밭에 고랑을 팔 수 있다. 그리고 그 고랑에서 새싹이 날 수 있다. 그때는 우리 신앙이 새로 꽃필 수 있다. 우리 신앙은 딱딱한 길바닥에 그대로 있지 않는다. 신앙의 흙이 갈수록 부드럽게 부서져 더 많은 열매가 맺힌다. 질문은 우리를 점점 더 깊이 숙고하게 만든다. 나는 대체 누구일까?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인간은 무엇일까? 신은 무엇, 또는 누구일까? 그런 질문을 철저히 좇다 보면 나는 결국 신비 앞에 이른다. 예를 들어 “나는 누구일까?”라고 물을 때, 온갖 피상적인 답변에서 벗어나서 날로 더 깊이 내 영혼의 바닥으로 곧장 나아갈 것이다. 거기에서 나는 어떤 답변도 얻지 못할 것이다. 나의 진정한 자기의 이루 형용할 수 없는 신비가 열릴 것이다. (안셀름 그륀, 116-1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