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계간 「실천문학」 130호의 표제는 '비정규직이라는 그늘'로,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이철주와 임순광의 다각적인 논의를 특집으로 실었다. 또한 지난가을에 타계한 허수경 시인의 시와 추모글을 중점적으로 다뤄 누구보다 치열했던 시인의 시 정신을 기리고자 했다. <슬픔만 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에 담긴 3편의 시와 시인의 말, 송기원의 해설 및 김나영과 박형준의 추모글을 실었다. 또한 골든 맨부커상 수상작인 <잉글리시 페이션트>에 대한 박종성의 기고문과 '삶의 모습, 겨울'을 테마로 한 김나정과 임동확의 산문을 담았다.
문학 부문에서는 김해선, 신혜정, 유현아, 이사라, 이성진, 조윤진, 최종천, 한연희의 신작 시와 김하율, 우다영, 임승훈, 임회숙의 신작 소설을 만나볼 수 있다. 이 밖에도 김은경의 <우리는 매일 헤어지는 중입니다>와 박서련의 <체공녀 강주룡>에 대한 집중 서평을 실었다.
출판사 리뷰
편집 후기
오마나! 세월이 그렇게 지났군요.
『슬픔만 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 개정판 시인의 첫 마디 말. 시간과 공간의 간극을 단 몇 자로 메우며 시작한다. 그렇게 20년 세월과 대척 간 거리가 좁혀지고 8년 뒤 그녀는 갔다.
그녀의 말처럼 첫 시집에는 그녀의 뿌리가 담겨 있다. 지겹도록 정든 고향, 독 오른 뱀을 잡고, 백정집 칼잽이 돼서라도 개를 잡아 폐병쟁이 사내를 살리고자 안간힘을 쓰던 곳. 그래, 지나고 보니 슬픔은 거름이었다, 우린 그 거름을 먹고 자란 잔챙이. 그 말, 여전히 유효하지 않을까? 우연인가, 그 슬픔이 그리고 거름이 이번 《실천문학》 겨울호를 지배하는 느낌이다.
이철주는 ?비정규 인생사용료?에서 시적 언어로 딱딱한 산문을 말랑하게 풀어낸다. 말랑하지만 섬뜩하다. 특히 접두사 ‘비’가 그렇다. 깊이 천착하여 ‘비정규 노동’이라는 합법적 야만성을 날카롭게 비판한다. 나아가 임순광은 그 부분을 보다 각론적으로 파고든다. 대학 안의 유령과도 같은 존재인 시간강사문제를 다루고 있는 ?강사법령 개선안과 대학 유령의 미래?에서 그는 또 다른 종류의 슬픔을 드러낸다. 하지만 그 또한 거름이 될 수 있음을 미래 ‘강사법’에 기대를 건다.
소설도 예외가 아니다. 김하율의 「판다가 부러워」는 자고로 생존권의 기저가 되는 ‘집’ 문제를 다루는 바, 아이를 낳을 수 없게 만드는 슬픔이 생물학적 힘이 아닌 경제력에서 비롯됨을 역설한다. 그 면에선 현대인은 돈에 살고 돈에 죽는다는 임회숙의 「쓸모 있다는 것」은 정점을 찍는다. 우다영의 「창모」와 임승훈의 「초여름」 역시 슬픔을 앞의 것들보다 형이상학적으로 풀고 있을 뿐, 그 궤는 같다.
허수경 시인은 돌아가시지 않고 가셨다. 독일을 문득 갔듯, 또 다른 미지의 세계로 갔을 뿐이다. 아니, 떠날 수 없음이다. 슬픔의 남상인 그녀의 시가 존재하는 한, 언제 또 다른 편지로 오마나! 세월이 그렇게 지났군요. 말할 것 같다.
_구광렬(편집주간, 시인·소설가)
하필이면 시월에, 허수경 시인이 갔다. 허수경 시인의 시세계를 떠올리면 언제나 그 계절은 시월과 십일월 사이쯤에 존재한다. 세상 모든 쓸쓸함의 빛깔과 무늬를 쓰던 시인, 한 번도 만난 적 없지만 시를 읽는 누구나에게 ‘조선’ 누이 같고 무당 같았던 그가 훌쩍 저세상으로 떠났다.
오래전 「폐병쟁이 내 사내」나 「혼자 가는 먼 집」 같은 그의 시를 읊으며 다른 행성처럼 낯설기만 한 서울의 밤길을 건너고 아슬아슬한 벼랑들을 건넜다. 그를 얼마나 흠모했는가 하면, 예약을 해야 하는 식당에 전화를 걸 때면 예약자 이름에 종종 ‘허수경’을 올려두곤 했다. 그렇게라도 잠시 내가 그의 이름이 되는 게 좋았다.
<특집>에 원고를 써 주신 김나영·박형준 시인도 나와 다르지 않았음을 발견하며 다시 한번 그의 이름을 조용히 불러본다. 술 한 잔을 따른다. 아무 데나 막 피어나는 망초꽃 흐드러진 천국에서 휘파람을 불고 있을 당신을 향하여.
_김은경(편집위원, 시인)
‘비정규직 제로 시대’를 열겠다는 문재인 정부의 야심찬 포부가 아직까지는 노동 환경의 뚜렷한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한 듯 보인다. ‘구의역 스크린 도어 사망 사건’ 이후에도 하청 노동자들의 열악한 작업 환경은 개선되지 않았다. 가령, 작년과 올해만 해도 실습 중이던 마이스터고 학생 여럿이 목숨을 잃었고, 일급을 받고 택배 상하차 일을 하던 노동자 몇몇은 작업 도중 과로로 세상을 떠났다. 노동자들의 가슴 아픈 죽음이 여전히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은 문제적이다. 비정규 노동자의 열악한 현실은 고학력자인 대학 강사의 경우에도 별반 다르지 않다.
최근 경기 침체를 알리는 여러 지표들은 기업과 정치권, 여론을 극도로 위축시키며 노동 문제의 진전을 어렵게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번 《실천문학》 겨울호에서는 우리 시대의 노동을 다루었다. 우선, 이철주는 ?비정규 인생사용료?에서 신자유주의 논리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며, 가장자리의 언어인 시가 발설하는 비정규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기록한다. 이 글은 이기인과 박중일, 박강과 최지인의 시를 통해 비정규 노동자의 위태로운 위치를 탐색하고, 청년 세대에 드리운 불안을 응시한다. 한편, 임순광의 ?강사법령 개선안과 대학 유령의 미래?는 대학 안의 유령과도 같은 존재인 시간강사 문제에 집중하고 있다. 이 글은 극단적 고용 불안과 저임금 상태에 놓여 있는 시간강사의 처우 개선과 관련하여, 내년 시행을 앞두고 있는 ‘강사법’에 일말의 기대를 드러내며 비전임 교원들의 광범위한 연대와 저항을 역설한다.
벌써 올해의 끝자락이다. 한 해 동안 보내 주신 독자 여러분들의 성원에 마음 깊이 감사드리며, 다음 해에도 내실 있는 기획으로 찾아뵙겠다는 인사로 한 해를 끝맺는 아쉬움을 대신한다.
_박윤영(편집위원, 문학평론가)
시를 가장 읽기 좋은, 혹은 쓰기 좋은 계절은 언제일까. 개인적으로 밤이 가장 긴 겨울이 아닐까 생각한다. 기본적으로 밤은 다른 사람들은 자고 ‘나’라는 개인만 깨어 있다는 것을 상기하는 시간이다. 이럴 때는 밤을 시의 서재라고 부르고 싶다. 신이 언어를 통해 세계를 만들었다고(최종천, ?신의 전지전능?)이야기 될 수 있다면, 신이 아닌 시인은 신이 하고 있는 일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더욱이 언어로 말해지기 어려운, 더 나아가 이미지라고 부르기 어려운 것에 대해 끝끝내 그려 내려고 하는 것 역시 시의 힘이기도 하다. 이번 실천문학 겨울호는 그런 지점을 바탕으로 특히 자아 성찰에 대해 다양한 결을 느낄 수 있는 시를 선보이고 있다.
새끼 늑대에게 자신의 앞 이름을 떼어 주고, 잃어버린 그 늑대를 생각하는 것(김해선, ?늑대의 젖꼭지?)처럼 일상에서 잃어버리기 쉬운 ‘나’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을 시작으로 개미에게 개미만큼의 생의 전부가 있듯이, 각자가 가진 삶의 다른 무게에 대해 새삼 존중하게 만드는 것(신혜정, ?K?)이나 마리와 나의 역할 바꾸기를 통해서 자아를 재발견 해내는 것 역시(한연희, ?최초의 마리?) 어떤 자아 존재에 대한 성찰로 간절하다.
그런 분리된 자아는 내리는 눈과 보는 눈 사이에서 고립감으로 점철된 지금 이곳에서 다른 세계로 떠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유현아, ?상강?) 계속 생각하게 만든다. 가져본 적 없는 예쁜 우산이지만 그런 걸 가지면 비 오는 날을 기다리게 되는 것처럼(조윤진, ?우기?) 어떤 소원을 비는 방식으로 다른 세계로 나아가고 싶은 마음 역시 느껴진다. 이는 시인들의 각기 다른 개성과 문체를 통해 겨울이 가진 다른 밤들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한 방식이었다.
까닭없이 알래스카로 가고 싶다가도(이사라, ?알래스카 가는 사람들?) 가는 길 끝에는 누구든 서 있어 줬으면 하는 마음이 있다.(이성진, ?우린 저기 있었는데?) 시는 그렇게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려고 한다.
김나정의 글에서는 저자의 세 가지 에피소드를 통해 마지막이라는 상황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마지막이라는 명사는 어쩌면 ‘기억하겠다’는 동사에 가까운 이음동의어 정도는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남김없이 사라지는 건 없다고 말하는 저자의 따뜻한 시선을 통해 저무는 올 한해의 뒷모습 역시 따뜻한 겨울로 바라보면서 보낼 수 있을 것이다.
임동확의 글에서는 사후 50주년을 맞는 김수영의 시를 다루면서 떨어진다는 것의 의미를 삶의 에너지와 연동해서 살펴보고 있다. 더불어 그간 김수영이 시에서 노래한 것처럼, 젊은 시인에게 침을 뱉자고, 떨어진다는 의미도 없이 떨어지자고, 타락한 오늘에 대항해서 더 깊이 자신이 떨어지겠다고 말한다. 시는 없는 길을 가는 순례자이기에 늘 새로운 에너지를 만들어야 하는 특징을 내포하면서 동시에 그것이 시의 암묵적 의무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타성에 젖은 시를 쓰게 될 때, 또 그런 시를 읽으려 할 때 김수영은 수없이 많은 시인들과 독자들에게 호명되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마당에 떨어진 눈이 살아 있는 것처럼 말이다.
_이성진(편집위원, 시인)
이번 겨울호부터는 아쉽게도 장편이 빠지게 되었다. 먼저 1년 동안 좋은 소설을 연재해 주신 전민식 소설가에게 감사드린다. 장편 연재를 쉬게 되었지만 언젠가 여력이 된다면 다시 좋은 소설들을 소개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 대신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이번호에는 단편소설을 네 편 실었다. 각 소설들은 자기만의 독창적인 방식으로 세계를 이야기하고 있으며 잡지에 풍성함을 안겨 주었다. 김하율 소설가의 「판다가 부러워」는 현대에서 평범하게 살아간다는 것의 어려움을 집을 구하는 과정을 통해 보여준다. 결국 우리가 아이를 낳을 수 없는 것은 생물학적 문제가 아니고 사회적 문제인 것은 아닐까. 집은 무엇을 위해 지어지는 것일까. 우리들 누구나가 고민할 수 있는 지점에 대한 진솔한 이야기이다. 결국 소설은 현실의 반영이며 그로 인해 생기는 의미는 묵직하게 다가온다. 우다영 소설가의 「창모」는 나의 친구, 제목 그대로 ‘창모’라는 인물에 대한 이야기이다. 어쩌면 창모는 우리 주위 어디에나 있는 인물이다. 다만 사회에 어울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근본적으로는 혼자인 인간이다. 작가는 이 인물을 집요하면서도 감각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사회 속에서 혼자인 사람과 보편성을 살아가는 우리는 서로를 이해할 수 있을까. 창모는 우리를 이해할 생각이 없고, 우리는 창모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창모는 앞으로도 우리 곁을 떠돌 것이다. 우리는 창모를 거부하지만 계속 지켜보고 싶어할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를 비추는 거울이 아닐까. 임승훈 소설가의 「초여름」은 작가 자신과 같은 이름과 직업을 가진 화자를 내세운 일종의 메타픽션이다. 어떤 지점에서는 자신의 자살에 대한 행위를 기록하는 페이크다큐적인 모습을 띄고 있다. 현실이라 주장하는 픽션으로 현실을 바꾸려는 시도를 한다.
앞선 김하율 소설가의 소설과는 반대의 지점에서 현실은 소설의 반영이라고 주장하는 것만 같다. 이미 삼일 전에 자살한 화자는 죽지 못한 채로 별 것 아닐 수 있는 자신의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 결말을 보고 어쩌면 이 소설은 외로움에 대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임회숙 소설가의 「쓸모 있다는 것」은 장기매매가 합법인 세계의 이야기이다. 이는 픽션이지만 어딘가에서는 현실일지 모른다. 만약 사람이 자신의 신체를 팔거나 살 수 있다면 사람의 수명은 지금보다 더 돈에 좌우될 것이다. 화자는 절망적 상황에서도 끝까지 따뜻한 시선을 놓지 않는다. 사회에 대한 부조리를 직접 이야기하기보다는 개인의 감정선을 섬세하게 따라간다. 마지막 장면은 결국 이 세계에 대한 추모가 아닐까.
추운 겨울을 맞아 네 편의 단편소설은 더욱 서늘한 감각을 우리에게 선물해 주었다. 다시 한 번 잡지를 풍성하게 만들어 준 것에 대해 감사드린다. 단편 이외에도 잡지에 원고를 실어주신 모든 필자분들께 고마운 마음을 전하는 바이다.
_이태형(편집위원, 소설가)
작가 소개
지은이 : 실천문학편집위원회
<실천문학 83 - 2006.가을>
목차
시
김해선|늑대의 젖꼭지 외 1편
신혜정|K 외 1편
유현아|안녕의 노래 외 1편
이사라|알래스카 가는 사람들 외 1편
이성진|우린 저기 있었는데 외 1편
조윤진|우기 외 1편
최종천|신의 전지전능 외 1편
한연희|체체파리 여왕님 외 1편
단편소설
김하율|판다가 부러워
우다영|창모
임승훈|초여름
임회숙|쓸모 있다는 것
특집1|비정규직이라는 그늘
이철주|비정규 인생사용료
임순광|강사법령 개선안과 대학 유령의 미래
특집2|쓸쓸함이라는 무늬를 남기고 ―허수경 시인 추모
허수경|진주 저물녘 외 2편
<슬픔만 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 시인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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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만 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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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경계, 초민족, 다국적, 코즈모폴리턴 작가의 성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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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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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경, 『우리는 매일 헤어지는 중입니다』(실천문학,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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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서련, <체공녀 강주룡>(한겨레출판사, 2018)
편집 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