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실천문학 시인선 29권. 1984년 창작과비평 시집 <마침내 시인이여>로 등단하며 시작 활동뿐 아니라 후학 양성에도 힘써 온 이은봉 시인이 시집 <생활>을 출간했다. 표제작 '생활'을 비롯해 총 62편의 시가 수록돼 있다.
이번 시집은 그가 2018년 정년 퇴임 후 출간한 첫 작품집으로서, 세종시에서 밭을 일구고 땀을 흘리며 일상의 바람을 만끽하는 자연인으로서의 삶의 지혜가 넉넉하게 담겨 있으며, 시편 곳곳 이은봉 시인 특유의 낙천성과 성찰의 미학이 물 흐르듯 펼쳐진다. 추천사를 쓴 조재훈 시인의 표현대로 "보통 말을 자연스럽게 쓰면서도 발랄하고 생동감이 넘친다. 경쾌한 호흡, 번쩍이는 재치, 조금씩 숨겨 놓은 의미를 보물찾기처럼 찾아내는 재미가 쏠쏠"한 시집이다.
출판사 리뷰
이은봉의 시는 항상 삶의 현장을 토대로 구축되어 왔다. 특히 이번 시집에서는 그런 의지를 더욱 확고하게 드러내는데, 그는 ‘시인의 말’에서 이번 시집이 추구하는 바를 전면적으로 드러낸다. 이은봉 시인은 “시를 구체적인 생활에서 획득하는 깨달음의 형식으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밝히며, 이는 곧 “시를 구체적인 생활에서 획득하는 ‘발견의 형식’”이자 “‘지혜의 형식’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말한다.
아마도 시인은 시인지 산문인지 알 수 없고, 도통 난해하고,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외계어와 같은 언어들로 점철된 요즈음의 시들을 접하면서 심한 멀미를 느낀 것 같다. 그래서 더욱 본인의 시를 ‘생활’에 밀착시켜, 생활 속에 깃든 작은 아름다움, 지혜, 힘, 열망 들을 발견해내는 데 정성을 들였으리라. 거실 귀퉁이에 놓인 무말랭이와 땅콩알과 은행알에 시선이 머문 시인은 대저 자연에서 태어난 인간으로서의 본성을, 생명을 향한 경외와 겸손을 아름다운 한 편의 시로 길어 올린다.
우리 집 거실 귀퉁이에는 무말랭이가 마르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감말랭이가 마르던 곳이다 땅콩알이 마르던 곳이다 은행알이 마르던 곳이다 구린내를 풍기며
인삼주도 더덕주도 호박덩이도 함께 마르고 있는
우리 집 거실 귀퉁이
고향을 떠난 지 도대체 얼마인가
농촌을 떠난 지 도대체 얼마인가
대도시 아파트에 살면서도 나와 아내는 여태껏 농촌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고향을 오가며 살고 있다
좁아터진 거실 이곳저곳을 오가며 오늘도 아내와 나는 습관처럼 자연에서 준비해온 먹거리들을 다듬고 있다
이것들 다 나날의 목구멍이 시킨 것이지만, 나날의 생활이 시킨 것이지만&&
목구멍보다, 생활보다 중요한 것이 어디 있으랴.
-「생활」 전문
쫓기듯 바쁘게 살던 날에도 시인의 오감은 자신에게 주어진 선물 같은 순간들을 또렷이 기억해낸다. 조금 서글프고 궁색한 상황에서조차 그 상황을 전복시키는 힘이 그의 성정 속엔 깃들여 있다. 이를 테면 ‘김밥천국’에서 산 김밥이라는 “설움 두 줄”조차도 그에게는 자신을 “서울로 밀고 가”는 “눈 물 두 줄의 힘”이 되는 것이다.
검정 비닐봉지에 담겨 있는 슬픔 두 줄
왼손에 들고 역을 향해 뛴다
오른손에는 오래된 검정 가죽가방
덜레덜레 들려 있다
막 출발하는 KTX 역방향에
철푸덱이 주저앉는다
검정 비닐봉지를 펼쳐
설움 두 줄 먹어치운다
자동판매기에서 뽑혀 나온 생수병이
주둥이를 향해 거꾸로 쑤셔 박힌다
졸음 쏟아져 내리는데
이 고마움 누구에게 표해야 하나
오늘도 눈물 두 줄의 힘이
나를 서울로 밀고 간다
-「김밥 두 줄」 부분
한편 「날개 돋친 뱀」, 「걸어 다니는 절벽」, 「칼」 , 「어둠의 혀」과 같은 시에서는 스스로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으려는 시인으로서의 기개도 여전하다. ‘생활’ 곳곳으로 향한 시인의 눈은 자기 스스로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어 날카로운 사유와 발견, 통찰을 가져 오고, 그러한 눈뜸이야말로 “날름대는 변덕으로 가득 차 있는 어둠”에 저항하는 시인의 방식일 것이다. 그래야만 “역사는 줄넘기 장난을 하면서도, 달의 행로를 밟으면서도 조금씩 앞으로, 낮은 곳으로 나아간다 그렇게 믿는다 꽃피운다.”(「역사에 대하여」)고 시인은 믿는 것이다.
작가 소개
지은이 : 이은봉
충남 공주(현, 세종시)에서 출생했다. 1983년 《삶의문학》에 평론을, 1984년 신작 시집 『마침내 시인이여』(창작과비평)에 시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시집으로 『좋은 세상』, 『봄 여름 가을 겨울』, 『절망은 어깨동무를 하고』, 『무엇이 너를 키우니』, 『내 몸에는 달이 살고 있다』, 『길은 당나귀를 타고』, 『책바위』, 『첫눈 아침』, 『걸레옷을 입은 구름』, 『봄바람, 은여우』, 평론집으로 『실사구시의 시학』, 『진실의 시학』, 『시와 생태적 상상력』, 『시와 깨달음의 형식』, 시조집으로 『파편들에 대한 단상』이 있으며, 시론집으로 『화두 또는 호기심』, 『풍경과 존재의 변증법』 등이 있다. 한성기 문학상, 유심 작품상, 가톨릭 문학상, 시와시학상, 질마재 문학상, 송수권 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목차
제1부 : 붉은 고양이
파문
삶은 달걀이라고
딱딱한 슬픔
붉은 고양이
생활
대나무들
나주호 한 바퀴
마음은 금방 또
시간의 모가지를 비틀어대는 밤
돼지국밥집에서
오늘
도마뱀
정치
김밥 두 줄
초여름 밤
절벽
제2부 : 달걀이 운다
달걀이 운다
떡 든 손
저녁 산책길
사람들 지금 어지럽다
그리운 금강산
움직이는 집
지도에 없는 섬
궁시렁 할머니
날개 돋친 뱀
조촐한 가족
기차를 타고 갈 거야
굴참나무와 소나무
불빛아
좌골신경통
절망에게
걸어 다니는 절벽
제3부 : 겨울의 갈피
트럭―서울
웃는 얼굴
뒷골목―서울
달항아리
겨울의 갈피
이 지랄을 뭐라고 하나
공동의 적
쇼핑센터―서울
질주―이상에게
고인돌
수락폭포를 읽는 법
가로등 불빛
칼
을지로 지하아케이드―서울
공든 탑―국가
코 고는 여자
제4부 : 저녁의 기도
어둠의 혀
초겨울
저녁의 기도
역사에 대하여
신문지―서울
회전문―서울
딱지
반성
병풍
길―큰스님의 말씀
깜박깜박
어떤 아침
결별
TV를 켜놓고
해설 황정산
시인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