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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 곽재구
1981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했다. 시집 『사평역에서』 『전장포 아리랑』 『한국의 연인들』 『서울 세노야』 『참 맑은 물살』 『꽃보다 먼저 마음을 주었네』 『와온 바다』 등이 있다. 신동엽창작기금, 동서문학상, 대한민국문화예술상 등을 수상했다. 현재 순천대학교 문예창작과에서 시를 가르치고 있다.
지은이 : 구스타보 아돌포 베케르
지은이 : 기형도
1979년 연세대에 입학한 후, 교내 문학동아리 '연세문학회'에 입회하여 본격적으로 문학수업을 시작하였다. 1980년 대학문학상 박영준 문학상에 '영하의 바람'으로 가작에 입선했다. 그후 1982년 대학문학상 윤동주문학상(시부문)에 '식목제'로 당선되었으며, 198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에 '안개'가 당선되어 문예지에 시를 발표하기 시작했다.1981년 안양의 문학동인 '수리'에 참여하여 활동하면서 시작에 몰두하였다. 1989년 3월 7일 새벽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지은 책으로 유고시집 <입속의 검은 잎>, <짧은 여행의 기록>, 추모문집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전집 <기형도 전집> 등이 있다.
지은이 : 김기림
1908년 5월 11일(음력 4월 12일) 함경북도 학성군(후에 성진으로 편입됨) 학중면 임명동 275번지에서 부친 김병연과 모친 밀양 박씨 사이의 6녀 1남 중 막내로 태어났다. 본관은 선산(善山)이며, 아명은 인손(寅孫), 호는 편석촌(片石村)이다. 등단 초기 간간이 G. W.라는 필명으로 활동한 바도 있다.어린 시절 고향의 임명보통학교에 입학, 졸업하고 한동안 서당에서 한학을 배운 적이 있다. 13세에 성진의 농학교(중등과정)에 진학하였으나 1년 수학 직후 서울로 올라와 보성고보에 다니게 된다. 보성 3학년 재학 도중 갑작스럽게 병을 얻어 고향에 내려와 요양을 하게 되는데, 건강을 회복하고 난 후 학교로 복학하지 않고 곧바로 일본 유학을 떠나 당시 도쿄 소재의 메이쿄(名敎)중학[현재는 도쿄 근처 지바(千葉) 현 우라야스(浦安) 시 소재의 도카이(東海)대학 부속 우라야스고교]에 편입, 졸업한다. 졸업 이후 1926년 봄, 니혼(日本)대학 전문부 문학예술과로 진학하고 1930년 봄에 동 대학을 수료한다.대학 재학 기간 중 서구 모더니즘의 여러 사조에 깊은 영향을 받은 그는 귀국과 더불어 ≪조선일보≫ 사회부, 학예부 기자로 근무하면서 시 창작과 비평 발표 등의 문필 활동에도 힘쓴다. 지금까지 알려진 그의 최초의 글은 니혼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한 직후인 1930년 4월 27일에서 5월 3일까지 발표한 <오후와 무명작가들?일기첩에서>로 기록되고 있다. 일부에서는 이를 평론으로 분류하기도 하나, 엄밀히 말한다면 문학적 감상을 섞은 단상 형태의 수필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 본격적인 의미에서 최초의 평론은 같은 해인 1930년 7월 24일에서 30일까지 ≪조선일보≫ 지상에 편석촌이라는 필명(호)으로 총 6회에 걸쳐서 연재한 <시와 시인의 개념-근본적 의혹에 대하여>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이후 그는 활발하게 서구 모더니즘에 영향을 입은 시작 활동과 비평 활동을 꾸준히 병행하면서 당대 문단의 중심을 향해 자신의 입지를 넓혀 나간다. 그런 와중에 1933년 이태준, 정지용 등과 함께 모더니즘 문인들의 친목 단체인 ‘구인회’를 결성하여 모더니즘문학의 보급과 활성화를 위해 노력한다. 1935년은 그의 문단 활동이 정점에 이른 시기다. 대표작이기도 한 장시 <기상도>를 잡지 ≪중앙≫과 ≪삼천리≫에 연재하는 한편, 그의 초기 모더니즘시론의 핵심을 담았다고 평가받는 <오전의 시론> 시리즈를 ≪조선일보≫ 지면에 장기간에 걸쳐 의욕적으로 연달아 발표한다.그러나 그는 여기서 만족하지 않고 한 단계 도약을 위해 스스로 모험을 감행한다. 보다 체계적이고 심도 있는 학문 연구를 위해 재도일하여 도호쿠(東北)제대 영문과에 입학한 것이다. 도호쿠제대 재학 기간 동안 조선 내 그의 문단 활동은 잠시 주춤하는 듯한 인상을 보이기도 하나, 이 기간 그는 영문학의 새로운 학문적 원리와 이론들을 받아들여 자신의 문학관을 심화하는 한편, 보다 폭넓은 사회 역사적·철학적 토대 위에 종래 자신이 추구했던 모더니즘문학 운동의 진로에 대해 본격적으로 고민하기 시작한다.1939년 동 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한 그는 조선일보사 기자로 복직함과 함께 조선 문단 전면에 재등장한다. 복귀 후 한동안 문단 활동에 주력하지만, 1940년대로 넘어서자 점차 조여드는 일제의 압박에 회의와 위기감을 느끼고 고향으로 내려가 한동안 절필 상태로 지내게 된다. 친일 문학인들과 단체의 끈질긴 동참 권유를 뿌리치고 긴 침묵의 기간을 보낸 것이다.1945년 해방 이후 다시 가족과 더불어 서울로 올라온 그는 그간의 침묵을 만회라도 하듯 문단과 학계 양쪽에서 왕성한 활동력을 보여 준다. 그러나 1950년 6·25동란이 발발된 직후 서울 거리에서 북한 기관원들에게 연행당한다. 그 뒤 북으로 이송된 것으로 알려졌으나, 북한 내에서 그의 행적이나 활동에 대해서는 현재까지 뚜렷하게 드러난 바가 없다. 시론집으로 ≪시론≫(1947)과 ≪시의 이해≫(1950) 등이 있으며 시집으로는 ≪기상도≫(1936), ≪태양의 풍속≫(1939), ≪바다와 나비≫(1946), ≪새 노래≫(1948) 등이 있다.
지은이 : 김남조
1927년 경북 대구 출생.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국문과 졸업. 시집 『목숨』『사랑초서』『바람세례』『귀중한 오늘』등 16권과 수필집 12권, 콩트집 『아름다운 사람들』외 편저·논문 등이 있다. 한국시인협회, 한국여성문학인회, 한국가톨릭문인회 회장 역임. 한국시인협회상, 서울시문화상, 대한민국예술원상, 3·1문화상, 만해대상, 일본지구문학상 등을 받음. 2013년 현재 숙명여자대학교 명예교수, 대한민국 예술원회원.
지은이 : 김소월
고향이 평안북도 정주이고 그곳에서 성장하고 생활하고 사망했기 때문에 전기적 사실을 확인하기가 어렵게 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와 관련된 사람들의 회고담이나 신문 잡지에 난 관련 기사를 통해 그의 생애를 재구해 볼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소월의 본명은 정식(廷湜)으로 1902년 음력 8월 6일(양력 9월 7일) 평안북도 구성군 서산면 외가에서 태어났다. 남산학교를 졸업하고 14세 때 세 살 연상인 홍실단(원명은 홍상일)과 결혼했으며 상급 학교로 진학하지 못하고 3년간 농사일을 거들었다. 그의 재능을 아깝게 여긴 동네 사람들의 도움으로 1917년 오산학교 중학부에 입학해 수학하던 중 은사인 김억을 만나 시를 쓰게 되었다. 오산학교를 다니던 1919년 3월 3·1운동이 일어나자 동급생들과 함께 만세 운동에 참여해 학업을 중단하게 되고 오산학교도 임시 폐교되었다.1920년 스승인 김억의 주선으로 ≪창조≫에 <낭인의 봄> 등의 시를 소월이라는 필명으로 발표했다. 이때 발표한 작품은 <낭인(浪人)의 봄>, <야(夜)의 우적(雨滴)>, <오과(午過)의 읍(泣)>, <그리워>, <춘강(春崗)> 등 다섯 편이고 그 후 ≪학생계≫, ≪동아일보≫ 등에 작품을 발표했으나 소월은 이 초기의 작품들을 시집에 수록하지 않았다. 소월은 오산학교에 이어 학업을 마치기 위해서 서울로 이주해 1922년 4월에 배재고등보통학교 4학년으로 편입했다. 1923년 3월에 배재고보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상과대학 예과에 입학했으나 학자금 조달에도 어려움이 있고 9월 간토대지진이 일어나자 10월에 고향 정주로 돌아왔다. 1924년에 김동인, 이광수, 김억, 주요한, 김찬영, 전영택, 오천석 등과 함께 ≪영대≫의 동인으로 참여했으며 1925년 12월 26일 자로 시집 ≪진달래꽃≫을 간행했다. ≪진달래꽃≫은 상당히 판매가 되었는지 발행처는 같은 매문사로 되어 있지만 총판이 ‘중앙서림’으로 되어 있는 것과 ‘한성도서주식회사’로 되어 있는 것의 두 판본이 유통되었고 그 원본이 각기 현재 전해지고 있다.1924년 이후에는 그의 처가가 있는 평안북도 구성군 남시로 이주해 생활했으며 1926년 8월부터 동아일보 지국 일을 맡아 본 것으로 되어 있다. 이후 1년에 한두 편씩 작품을 발표했고 1932년과 1933년에는 작품을 발표하지 않았다. 1934년에 다시 몇 편의 시를 발표했으나 그의 생활은 극도로 피폐해졌던 것 같다. 지국 경영은 일찍이 작파해 남에게 넘겼고 시대와 자신의 삶에 대한 울분이 겹쳐 거의 매일 술을 마셨으며 아내에게 살아 봐야 낙이 없으니 같이 죽자는 말을 여러 차례 했다고 한다. 1934년 12월 23일 밤에도 술에 취해 잠이 들었는데 새벽에 남편이 괴로워하는 소리를 잠결에 듣고 불을 켜 보니 아편 덩어리를 입가에 흘린 채 죽어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소월의 사망 일자를 1934년 12월 24일 아침으로 보고 있다.소월의 사망이 알려지자 12월 30일 자로 ≪조선중앙일보≫와 ≪동아일보≫에 사망 관련 기사가 실리고 1935년 1월에 서울 종로 백합원에서 소월 추모회가 개최되었다. 여기서 김억은 소월에 대한 추모사를 낭독하고 그것을 ≪조선중앙일보≫(1935. 1. 22~26)에 <요절한 박행의 시인 김소월의 추억>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했다. 1939년 12월 김억이 소월의 시를 선정하고 다시 편찬해 박문출판사에서 ≪소월시초≫를 출간했다.
지은이 : 김수영
1921년 서울 종로에서 태어났다. 1935~1941년 선린상업학교에 재학했다. 성적이 우수했고 특히 주산과 미술에 재질을 보였다. 이후 동경 성북예비학교에 다니며 연극을 공부했다. 1943년 조선 학병 징집을 피해 일본에서 귀국했으며 안영일 등과 연극을 했다. 1945년 연극에서 문학으로 전향, 《예술부락》이라는 잡지에 시 「묘정의 노래」를 발표했다. 1946 ~1948년 연희전문 영문과에 편입했으며 졸업은 하지 않았다. 1949년 김경린 등과의 친교로 시론과 시를 엮은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출간했다. 1950년 한국 전쟁 발발. 북한군 후퇴 시 징집되어 북으로 끌려가 강제 노동을 하다 탈출했으나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었다. 1952년 포로수용소에서 석방. 부산, 대구에서 통역관 및 선린상고 영어교사로 지냈다. 1957년 12월, 한국시인협회상 제1회 수상자가 되었다. 1959년, 1948~1959년 사이에 발표했던 시를 모아 첫 시집이자 생전에 발간한 유일한 시집 『달나라의 장난』(춘조사) 을 출간했다. 1960년 4·19 혁명 발발. 이후 현실과 정치를 직시하는 적극적인 태도로 시, 시론, 시평 등을 잡지와 신문 등에 발표하며 왕성한 집필 활동을 보였다. 1968년 6월 15일 밤 귀갓길에 집 근처에서 버스에 치여 머리를 다쳤다. 적십자병원으로 옮겨져 응급치료를 받았으나 끝내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다.한국 현대 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김수영은 과감하고 전위적인 시작법으로 오늘날 모더니즘 시의 뿌리가 되었고 문학의 정치 참여가 가지는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한 깊은 성찰 또한 보여 주었다. “내일의 시”, “미지의 시”를 향한 그의 실험 정신은 언제까지나 신선한 충격으로 남을 것이다.
지은이 : 김영랑
전라남도 강진의 부유한 집안에서 장남으로 태어난 김영랑의 본관은 김해金海이며 본명은 김윤식金允植이다. 영랑永郞은 아호인데 《시문학詩文學》에 작품을 발표하면서부터 사용하기 시작했다. 1915년 강진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혼인했으나 불과 1년 반 만에 부인과 사별했다. 그 후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관에서 영어를 공부하고 1917년 휘문의숙徽文義塾(후에 ‘사립휘문고등보통학교’로 개칭)에 입학하여 문학에 대한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때 휘문의숙에는 홍사용, 안석주, 박종화 등의 선배와 정지용, 이태준 등의 후배, 그리고 동급반에 화백 이승만이 있어서 문학적 안목을 키우는데 직간접으로 도움을 받았다.휘문의숙 3학년 때인 1919년에 3·1운동이 일어나자 고향 강진에서 거사하려다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6개월간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0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아오야마[靑山] 학원 중학부를 거쳐 같은 학원 영문학과에 진학했다. 이 무렵 독립투사 박렬, 시인 박용철과도 친교를 맺었다. 그러나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인해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 후 고향에 머물렀다. 1925년에 개성 출신 김귀련과 재혼했다. 광복 후 은거생활에서 벗어나 사회에 적극 참여하여 강진에서 우익운동을 주도했고, 대한독립촉성회에 관여하여 강진대한청년회 단장을 지냈으며, 1948년 제헌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낙선했다. 1949년에는 공보처 출판국장을 지냈으며, 평소 음악에 대한 조예가 깊어 국악이나 서양 명곡을 즐겨 들었고, 축구와 테니스 등 운동에도 능하여 비교적 여유 있는 삶을 영위했다. 9·28수복 하루 전인 9월 27일 길에서 유탄에 맞아 세상을 떠났다.저서로는 <내 마음 아실 이>, <가늘한 내음>, <모란이 피기까지는> 등의 작품이 실린 《영랑시집永郞詩集》(1935)과 《영랑시선》(1949), 유고시집 《모란이 피기까지는》(1981) 등이 있다.
지은이 : 김용택
1948년 전북 임실에서 태어났다. 1982년 ‘창비 21인 신작시집’ 『꺼지지 않는 횃불로』에 「섬진강 1」 등을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섬진강』 『맑은 날』 『꽃산 가는 길』 『강 같은 세월』 『그 여자네 집』 『나무』 『키스를 원하지 않는 입술』 『울고 들어온 너에게』 등이 있으며, 『김용택의 섬진강 이야기』(전8권) 『심심한 날의 오후 다섯시』 등 산문집 다수와 부부가 주고받은 편지 모음집 『내 곁에 모로 누운 사람』 그리고 『콩, 너는 죽었다』 외 여러 동시집을 냈고 시 모음집 『시가 내게로 왔다』 『어쩌면 별들이 너의 슬픔을 가져갈지도 몰라』 등이 있다. 김수영문학상, 소월시문학상, 윤동주상 문학대상을 수상했다.
지은이 : 김종삼
1921년 3월 황해도 운율에서 아버지 김서영과 어머니 김신애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장남이 시인 김종문). 하지만 아버지를 따라 평양으로 이주, 그곳에서 성장했다. 1937년 평양 숭실중학교를 중퇴하고 이듬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17세 되던 1938년, 도쿄 도요시마상업학교에 편입학해, 1940년 졸업한다. 그의 일본 유학은 부모나 주위의 권유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작곡을 하고 싶어 자의로 대한해협을 건넜다. 그의 시와 삶에서 클래식 음악이 그토록 큰 비중을 차지한 것도 이때의 결심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1942년 그가 도쿄문화학원 문학과에 들어가자, 법학이나 경제학을 공부하길 원하던 아버지가 지원을 끊어 버렸다. 이때부터 1945년 해방되어 귀국할 때까지 신문팔이, 부두 하역부 등 막노동을 하며 고학했다. 문화학원 문학과는 1944년 중퇴했지만, 이 시기 그는 도스토옙스키, 바이런, 하이네, 발레리 등을 탐독하는 한편 클래식 음악에도 심취했다. 막노동을 하면서도 서양 예술과 일본의 고급 문화를 경험한 그에게 해방 직후의 고국은 적응하기 힘든 혼란스런 세계였다. 좌와 우가 갈려 맞부딪치던 해방 공간. 남과 북은 각각 정부를 세웠고, 마침내 동란이 일어나고 말았다. 김종삼이 시를 쓰기 시작한 것은 앞이 보이지 않는 캄캄한 폐허 위에서였다. 서울 명동에서 어울리던 문인과 예술가는 피란지 부산과 대구에서 다시 모였다. 전쟁이라는 시대적 비극 속에서 김종삼은 개인적 비극과 마주친다. 절친했던 벗 전봉래(시인 전봉건의 형)가 1951년 2월, 피란지 수도 부산에서 자살한 것이다. 김종삼은 1953년 ≪신세계≫를 통해 등단했다. 그가 시를 쓰기 시작한 것은 피란지 대구에서였다. “쓰지 않을 수 없어서 쓰기 시작한 시”였지만, 당시 문단에서는 그의 시를 불편해했다. 시인 김윤성이 그의 시를 ≪문예≫에 추천하기 위해 가져갔는데 심사위원들의 눈에 들지 못했다. ‘꽃과 이슬’을 쓰지 않았고, 지나치게 난해하다는 이유였다. 김종삼 시의 진가를 처음으로 높이 평가한 시인은 김춘수였다. 휴전 이후 서울에 정착한 그의 직업은 음악과 연관된 것이었다. 1955년 국방부 정훈국 방송과 음악 담당이란 직함을 얻은 김종삼은 1963년 동아방송(1980년 신군부에 의해 KBS 2 라디오로 통폐합됐다)에 입사해 1976년 정년 퇴임 때까지 근무한다. 1956년 결혼하고 두 자녀를 낳았지만 그는 성실한 생활인은 되지 못했다. 직장에 적응하기 힘들어했고, 생의 후반기에는 가정을 이끌지도 못했다. 정년 퇴임 이후 그의 삶은 불우했다. 가족의 부양은 물론 자신의 몸을 가누기조차 힘들었다. 알코올 중독이었다. 1982년 세 번째 시집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를 전후한 시들이 이 시기를 반영하고 있다. 시 속의 죽음과 현실의 죽음이 오버랩되기도 했다. 시인은 실제로 자살을 시도했다가 중환자실에서 깨어나기도 했다. 박정희에서 전두환으로, 군부 독재가 신군부로 넘어가던 시대, 자본주의가 깊숙이 뿌리를 내리던 고도성장 시대, 시인의 몸과 마음은 거의 무너져 있었다. “매일같이 스스로 죽고 있”던 그는 마침내 1984년 8월 9일 영면한다.
지은이 : 김초혜
충북 청주에서 태어나 동국대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대학 2학년 때이던 1964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했고, 그로부터 20년 만에 첫 시집 《떠돌이별》을 발표하며 화제를 모았다. 그 후 3권으로 잇달아 선보인 연작시집 《사랑굿》이 밀리언셀러에 오르며 80년대 문단의 한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엄혹했던 그 시절에 《사랑굿》은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맑은 서정으로 어우르고 위로했다. 구로공단 여공들도 시를 필사하고, 대학가 대자보에도 ‘사랑굿’이 걸리던 시절이었다. 완간된 지 30주년을 맞은 이 시집은 세대를 뛰어넘어 사랑받고 있으며, 절제된 시어가 노랫말처럼 마음을 파고들어 아름다운 삶으로 이르게 하는 사랑의 길을 보여준다.그 외에 시인의 대표작으로 시집 《섬》 《어머니》 《세상살이》《그리운 집》 《고요에 기대어》 《사람이 그리워서》 《멀고 먼 길》, 시선집 《빈 배로 가는 길》, 수필집 《생의 빛 한줄기 찾으려고》《함께 아파하고 더불어 사랑하며》, 서간집 《행복이》 등이 있다. 한국문학상, 한국시인협회상, 현대문학상, 정지용문학상, 유심작품상, 공초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지은이 : 나태주
1945년 출생으로 197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시인이 되었다. 초등학교 다닐 때의 꿈은 화가였으나 고등학교 1학년 때 예쁜 여학생을 만난 뒤로는 꿈이 시인으로 바뀌었다. 그로부터 60년 그는 끝없이 시인을 꿈꾸며 사는 사람이다.그동안 초등학교에서 43년간 교직 생활을 하다가 2007년 정년퇴임을 하였으며 8년 동안 공주문화원장으로 일하기도 했고, 현재는 공주에서 살면서 공주풀꽃문학관을 설립, 운영하며 풀꽃문학상을 제정, 시상하고 있다.그가 요즘 주로 하는 일은 문학강연, 글쓰기, 풀꽃문학관에서 방문객 만나기, 화단 가꾸기 등이다. 지은 책으로는 첫 시집 《대숲 아래서》부터 《마음이 살짝 기운다》까지 41권의 창작시집이 있고, 《좋다고 하니까 나도 좋다》를 비롯하여 산문집, 시화집, 동화집 등 100여 권이 있다.
지은이 : 나희덕
1966년 충남 논산에서 태어나 연세대 국문과와 동대학원 박사과정을 졸업했다. 198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 「뿌리에게」가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뿌리에게』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그곳이 멀지 않다』 『어두워진다는 것』 『사라진 손바닥』 『야생사과』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시론집 『보랏빛은 어디에서 오는가』 『한 접시의 시』, 산문집 『반통의 물』 『저 불빛들을 기억해』 『한 걸음씩 걸어서 거기 도착하려네』 등이 있다. 현재 조선대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김수영문학상,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현대문학상, 이산문학상, 소월시문학상, 임화예술문학상, 미당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지은이 : 노천명
1911년 9월 1일 황해도(黃海道) 장연군(長淵郡) 전택면(專澤面) 비석리(碑石里)에서 출생한다. 본래 이름은 항렬자를 따른 기선(基善)이었으나, 여섯 살 때 홍역을 심하게 앓고 소생한 후 하늘의 명(天命)으로 살았다는 의미로 이름을 고쳐 올렸다고 한다. 아버지 노계일(盧啓一)은 무역업을 통해 상당한 재산을 모은 소지주였으며, 어머니 김홍기(金鴻基)는 서울 태생의 양반 가문 규수로 교양 있는 여성이었다. 1917년 일곱 살 때 장연에 있는 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다음 해 아버지의 죽음으로 어머니의 친정인 서울로 이주한다. 아버지의 죽음과 낯선 환경으로의 변화는 이후 노천명 문학에서 드러나는 ‘향수’의 근원이 된다. 1920년에 비로소 서울 생활의 근거지(창신동 81번지 2호)를 정하고 진명보통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5학년 때 검정고시에 합격해 1926년 진명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같은 해 4월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로 진학한다. 4년간의 여고보 생활 동안 항상 상위권의 성적을 유지했고 이미 이 시절부터 시작(詩作)에 능했으며, 몸이 약한데도 달리기 선수로 활약했다. 성격은 예민한 편으로 특히 자존심이 강했으나, 평생 지우 이용희와는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다.1930년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이화여전 영문과에 입학하게 되는데, 이 겨울 모친이 57세로 죽는다. 이화여전 재학 중에 김상용, 정지용, 변영로의 가르침 속에 시작(詩作)에 집중해 교지를 비롯해서 ≪신동아≫ 등 여러 문예지에 작품을 발표한다. 1934년 이화여전을 졸업한 노천명은 ≪조선중앙일보≫ 학예부 기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한편, ≪시원≫ 창간호(1935. 2. 10)에 <내 청춘의 배는>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문단에 데뷔한다. 1937년 조선 중앙일보사를 사직하고 북간도의 용정, 연길 등을 여행했으며, 1938년 49편의 시를 수록한 ≪산호림(珊瑚林)≫을 자비 출판함으로써 시인으로서의 자리를 공고히 한다. 이화여전 은사들인 김상용, 정지용, 변영로 등과 남산의 경성 호텔에서 화려한 출판 기념회를 열었으며, 진달래빛 옷을 곱게 입고 참석한 노천명은 ‘한국의 마리 로랑생’, ‘앨리스 메이넬’로 불린다. 이후, 다시 조선일보사에서 운영하는 ≪여성≫지의 편집 기자 생활을 하면서 지속적인 창작 활동을 벌인다. 그러나 1942년부터 총독부 정책에 호응하는 친일시를 창작하고 ‘조선문인협회’에 모윤숙, 최정희 등과 함께 간사로 참여한다. 1945년 29편의 시를 수록한 두 번째 시집 ≪창변(窓邊)≫이 매일신보 출판부에서 간행된다. 해방 후 총독부의 기관지였던 매일신보가 서울신문으로 이어지면서 노천명은 문화부에 근무한다. 1947년 노천명의 형부 최두환이 갑자기 세상을 떠난 것에 이어 극진히 사랑하던 조카딸 최용자마저 맹장 수술 후 스물두 살 젊은 나이에 죽게 된다. 연이은 가족의 죽음, 특히 각별한 사이였던 최용자의 죽음은 깊은 슬픔과 허망함을 주는 사건이 된다. 이러한 면면들은 여러 편의 수필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1948년 10월 38편의 수필이 수록된 첫 번째 수필집 ≪산딸기≫가 정음사에서 간행된다. 또한 같은 해 3월에는 동지사에서 출간한 ≪현대 시인 전집≫ 제2권에 55편의 <노천명집>이 수록된다.한국 전쟁기는 노천명에게 큰 시련이었다. 미처 피난을 떠나지 못한 노천명의 부역 행위는 부역자 처벌 특별법에 의해 20년 형이 선고되어 노천명은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부산으로 이감된다. 김광섭 등의 구출 운동으로 1951년 4월 출옥하게 되며, 가톨릭에 귀의하고 공보실 중앙 방송국 촉탁으로 일하게 된다. 이러한 시련은 노천명에게 일생의 굴욕으로 다가왔으며 옥중의 심정은 여러 시편으로 형상화된다. 1953년 3월 세 번째 시집 ≪별을 쳐다보며≫가 간행된다. 1954년 7월 두 번째 수필집 ≪나의 생활백서≫를 출간하고, 1955년 12월 ≪여성 서간문 독본≫을 출간한다. 서라벌 예술대학에 강사로 출강하는 한편, 1956년 5월 ≪이화 70년사≫를 간행하는데, 이 일에 몰두했던 노천명은 건강에 무리가 온다. 결국 1957년 3월 7일 오후 3시 거리에서 쓰러진 노천명은 청량리 위생병원 1호실에 입원한다. 재생 불능성 뇌빈혈 판정을 받고, 요양과 입원을 반복하게 된다.그러나 병세가 악화되어 1957년 6월 16일 새벽 1시 30분에 종로구 누하동 225번지의 1호 자택에서 운명을 다한다. 노천명의 장례는 6월 18일 천주교 문화회관에서 최초의 문인장으로 치러졌다. 이헌구가 식사를, 오상순, 박종화, 이은상, 김말봉이 조사를, 최정희가 약력을 소개하고, 전숙희는 유작을 낭독했으며, 중곡동 천주교 묘지에 안장되었다. 후에 천주교 묘지 이전으로 경기도 고양군 벽제면으로 이장되었는데, 묘비는 건축가 김중업이 설계하고, 서예가 김충현이 시 <고별>의 일부를 새겼다.사후 1년에 42편이 수록된 유고 시집 ≪사슴의 노래≫가 한림사에서 간행되고, 1960년 12월 김광섭, 김활란, 모윤숙, 변영로, 이희승 등의 발행으로 노천명의 3주기를 기념한 ≪노천명 전집 시편≫이 간행된다. 또한 1973년 3월 시인의 유족이 주선하고 박화성이 서문을 쓴 수필집 ≪사슴과 고독의 대화≫가 서문당에서 간행되며, 1997년 7월 이화여자대학교 문인 동창회와 시인의 유족, 솔 출판사가 힘을 합해 노천명의 시와 산문(유고 포함)을 수록한 ≪노천명 전집≫1, 2권이 간행된다.
지은이 : 도종환
부드러우면서도 곧은 시인, 앞에는 아름다운 서정을 두고 뒤에는 굽힐 줄 모르는 의지를 두고 끝내 그것 을 일치시키는 문인으로 불리는 도종환은 충북 청주 에서 태어났다. 그동안 《고두미 마을에서》《접시꽃 당신》《당신은 누구십니까》《부드러운 직선》《슬픔의 뿌리》 《흔들리 며 피는 꽃》《해인으로 가는 길》《세 시에서 다섯 시 사이》《사월 바다》등의 시집과 《그대 언제 이 숲에 오시렵니까》《사람은 누구나 꽃이다》《꽃은 젖어도 향기는 젖지 않는다》 등의 산문집을 냈다. 신동엽창작상, 정지용문학상, 윤동주상 문학부문대 상, 백석문학상, 공초문학상, 신석정문학상, 용아박 용철문학상 등을 수상하였다.
지은이 : 라이너 마리아 릴케
본명은 르네 마리아 릴케였으나 루 안드레아스 살로메의 권유로 르네를 라이너로 고쳐 부름. 1875년 프라하에서 태어났다. 병약한 유년 시절을 보냈으며 아버지의 뜻에 따라 육군학교에 입학했으나 중퇴한 뒤 시를 쓰기 시작해 열아홉 살에 첫 시집을 출판했다. 뮌헨대학을 졸업할 무렵 루 안드레아스 살로메를 알게 되었는데, 그녀는 외부 세계와 접촉하는 데 참다운 안내자 역할을 해준 정신적 후원자였다. 이후 조각가 로댕의 문하생인 베스토프와 결혼했으나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두 사람 사이에 불화가 생겼고, 《로댕론》을 집필하려고 부부가 번갈아가며 파리에 머물면서 자연스럽게 별거 생활을 시작했다. 이탈리아를 여행하고 르네상스 회화에 눈을 뜨며 루 살로메에게 보내려고 쓴 《피렌체 일기》, 체코 민족 독립운동에 공감을 표한 단편집 《프라하의 두 이야기》, 루 살로메와 동행한 두 차례의 러시아 여행을 토대로 쓴 《기도시집》, 로댕의 영향으로 강한 조형성이 드러난 《신시집》, 하이데거 등이 자주 철학적 고찰의 대상으로 삼은 《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를 비롯 《형상시집》, 《두이노의 비가》 등 다수의 작품을 남겼다. 그는 말년에 병고에 시달렸으나 폴 발레리, 앙드레 지드 등 많은 프랑스 문인과의 교류는 끊이지 않았다. 1926년 스위스 발몽 요양소에서 백혈병으로 죽었으며, 나흘 후 소망하던 대로 발리스 벌판이 훤히 보이는 라로뉴의 교회 묘지에 묻혔다.
지은이 : 마종기
1939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나 연세대 의대, 서울대 대학원을 마치고 1966년 도미, 2002년 은퇴하기까지 미국 오하이오 의대와 톨레도 아동병원에서 방사선과 의사로 근무했다. 1959년 『현대문학』 추천으로 등단한 뒤, 『조용한 개선』(1960), 『두번째 겨울』(1965), 『평균율』(공동시집: 1권 1968, 2권 1972), 『변경의 꽃』(1976),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1980), 『모여서 사는 것이 어디 갈대들뿐이랴』(1986), 『그 나라 하늘빛』(1991), 『이슬의 눈』(1997), 『새들의 꿈에서는 나무 냄새가 난다』(2002), 『우리는 서로 부르고 있는 것일까』(2006), 『하늘의 맨살』(2010) 등의 시집을 펴냈다. 그 밖에 『마종기 시전집』(1999)과 시선집 『보이는 것을 바라는 것은 희망이 아니므로』(2004), 그리고 산문집 『별, 아직 끝나지 않은 기쁨』(2003)과 『아주 사적인, 긴 만남』(2009), 『당신을 부르며 살았다』(2010), 『우리 얼마나 함께』(2013), 『사이의 거리만큼, 그리운』(2014) 등이 있다. 한국문학작가상, 편운문학상, 이산문학상, 동서문학상, 현대문학상, 박두진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지은이 : 문정희
1947년 전남 보성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성장했다. 1969년 『월간문학』으로 등단했으며 『오라, 거짓 사랑아』 『양귀비꽃 머리에 꽂고』 『나는 문이다』 『다산의 처녀』 『카르마의 바다』 『응』 『작가의 사랑』 등 다수의 시집과 시극집, 에세이집을 냈다. 현대문학상, 소월시문학상, 정지용문학상, 육사시문학상, 목월문학상과 대한민국 문화예술상을 수상했다. 이밖에도 마케도니아 테토보 올해의 시인상, 스웨덴 하뤼 마르틴손 재단이 수여하는 시카다(Cikada)상을 수상했다. 고려대학교 미디어문창과 교수를 역임하고, 2019년 현재 동국대학교 석좌교수로 재직중이다.
지은이 : 조지 고든 바이런
1788년 1월 22일 영국의 런던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유서 깊은 귀족 가문이었지만, 세상 사람들의 빈축을 사 악명이 높기도 했다. 그의 아버지 잭은 이런 바이런 집안의 전형적인 인물로 재혼을 한 후에도 다시 방탕한 생활을 하고서 가족을 버리고 프랑스로 도피해 거기서 비참하게 객사하고 말았다. 그러자 캐서린은 세 살 난 외아들 바이런을 데리고 그녀의 고향인 스코틀랜드 애버딘(Aberdeen)으로 돌아갔다.어린 시절 어머니와 함께 애버딘으로 가서 적은 수입으로 세를 얻어 살았던 그는, 절름발이라는 사실에 매우 민감했던 소년 시절에 애버딘 그래머 스쿨(Aberdeen Grammar School)에 다녔다. 그가 열 살 때 자식 없이 죽은 부도덕한 큰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남작의 작위를 물려받아 ‘바이런 경’이라는 칭호를 얻게 되고 큰할아버지의 재산을 물려받게 되자, 어머니는 그를 데리고 잉글랜드에 있는 본가인 뉴스테드(Newstead)로 돌아갔다. 변호사인 존 핸슨(John Hanson)의 도움으로 바이런은 제대로 된 치료를 받고 1799년 가을에 덜위치(Dulwich)에 있는 학교에 가기도 했다.1801년에 바이런은 해로 스쿨(Harrow School)에 입학했고 곧이어 그는 케임브리지대학으로 진학하게 되는데, 학창 시절 동안 학교 공부에는 거의 신경을 쓰지 않고,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시를 쓰고 소설과 역사책을 즐겨 읽었다. 또한 그는 선천적으로 불구인데도 운동을 좋아했고 술과 나쁜 친구와 천박한 여자들을 접하고 도박에도 손을 대 빚을 지는 등 무절제하고 방탕한 생활을 했다. 그리고 진보적인 휘그(Whig)당에 관심을 갖기도 했다. 1807년 여름 바이런은 그의 초기 시들을 묶어서 11월에 ≪덧없는 시편들(Fugitive Pieces)≫이라는 시집을 자비로 인쇄했다. 그리고 이듬해 6월에는 열아홉 살의 나이에 처음으로 시집 ≪한가한 시간(Hours of Idleness)≫을 정식 출간했다. 하지만 이 시집이 <에든버러 리뷰(Edinburgh Review)>에 의해 혹평을 받자, 그는 1809년에 <영국의 시인들과 스코틀랜드의 비평가들(English Bards and Scotch Reviewers)>을 써서 비평가들을 통렬히 비난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해에 성년이 된 그는 1월에 상원의원이 되었으며, 귀족원의원이 되어 당시의 귀족 자제들의 관습에 따라 일찍부터 꿈꾸어 오던 유럽 대륙 여행길에 올랐다. 그는 포르투갈, 스페인, 몰타, 알바니아, 그리스, 콘스탄티노플까지 두루 돌아다니면서 새로운 세계에서 새로운 인생을 체험하고 문학적인 시야를 넓힌 후 1811년 7월 14일 런던으로 귀국했다. 1812년 2월 27일에 바이런은 상원의원으로서 첫 연설을 했으며, 3월 초에 출간된 ≪차일드 해럴드의 순례≫는 순식간에 사람들을 매료시켰다. ≪차일드 해럴드의 순례≫ 1·2편은 2년간에 걸친 그의 유럽 여행에 대한 기행문인 셈인데, 이 시에서 주인공인 차일드 해럴드는 동방 제국을 순례하면서 보고 체험했던 이국의 풍물과 사람들과의 관계를 노래한다. 이 시는 바이런에게 “어느 날 아침에 깨어 보니 유명해져 있었다”는 뜻하지 않은 성공을 가져다주어서 미모의 청년 귀족 바이런이 휘그당 모임에서 명사 취급을 받도록 했으며, 영국 상류 사교계의 열렬한 갈채와 찬양을 받으며 여성들의 애모와 동경의 대상이 되어 그에게 무절제한 여성 편력을 가지도록 만들었다. 1813년에 ≪이단자(The Giaour)≫와 ≪아비도스의 신부(The Bride of Abydos)≫, 1814년에 ≪라라≫와 ≪해적(The Corsair)≫, 1815년에 ≪히브리 가곡(Hebrew Melodies)≫, 1816년에 ≪코린트의 포위(The Siege of Corinth)≫와 ≪파리지나(Parisina)≫ 등 수많은 걸작 시집들을 잇달아 출판하고 호평을 받았다. 바이런은 복잡했던 많은 여자들과의 관계에서 벗어나 안정된 가정생활을 하기 위해 1814년 9월 앤 이저벨라 밀뱅크와 1815년 1월 2일에 결혼을 했다. 하지만 그 후에도 계속되는 바이런의 가정적인 추문은 런던 사회 전체에 심각한 파문을 일으키게 되었고 신랄한 비방을 자아내게 됨으로써 바이런은 사회적으로 매장당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816년 4월 바이런은 이혼을 하고 유럽으로 떠나 스위스, 이탈리아의 도처를 마음 내키는 대로 떠돌아다니면서 많은 여자들과 사랑을 나누는 생활을 했고, 다시는 영국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는 유럽에서 지내는 도중 이탈리아 비밀 혁명 단체에 들어갔으며, 이탈리아인의 생활을 어느 때보다 가깝게 접하는 한편 신성동맹에 대한 반란 운동에도 참가했다. 그러면서 1816년과 1818년에 ≪차일드 해럴드의 순례≫ 3·4편, 1816년에 ≪시용의 죄수 (The Prisoner of Chillon)≫, 1817년에 ≪베포(Beppo)≫와 시극 <맨프레드>, 1820년에 ≪단테의 예언(The Prophecy of Dante)≫과 ≪마리노 팔리에로(Marino Faliero)≫, 1821년에 ≪두 사람의 포스카리(The Two Foscari)≫와 시극 <카인(Cain)>, ≪심판의 계시(The Vision of Judgement)≫, 그리고 그의 필생의 대작인 ≪돈 주안≫을 1818년부터 1823년에 걸쳐 출간했다. 또한 시인 리 헌트(Leigh Hunt)를 계속 도왔고, 그가 편집하는 ≪리버럴(The Liberal)≫에 원고를 보내기도 했다.그는 1823년 4월 런던에 있는 그리스 위원회로부터 터키에 대항해서 독립 전쟁을 하고 있는 그리스인들을 돕는 요원으로 활동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이제 자유와 정의와 인류애를 위한 정치 운동에 정열을 불태우고자 했던 그는, 터키에서 독립하고자 하는 그리스의 독립 운동을 돕고자 스스로 원군을 조직해 7월 16일에 그리스를 향해 출범했다. 하지만 그는 1824년 1월 그리스의 미솔롱기(Missolonghi)에 상륙한 후 그리스 독립군 최고 사령관이 되어 터키와의 전투를 기다리던 중 불운하게도 열병에 걸렸고, 의사가 고집한 사혈 요법으로 인해 병이 더 악화되어 그해 4월 19일에 36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그리스 전체가 그의 죽음을 애도했으며, 곧 그는 그리스의 국가적 영웅이 되었다. 그의 유해는 영국으로 옮겨졌으나 웨스트민스터 대사원 안치가 거부되어, 7월 16일에 뉴스테드와 가까운 한 교회 묘지의 집안 납골당에 안치되었다. 그러나 145년 뒤인 1969년에 그를 추도하는 기념비가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세워졌다.
지은이 : 박인환
본관은 밀양으로 강원도 인제 출신이다. 1939년 서울 덕수공립소학교를 졸업하고 경기공립중학교에 입학하였으나 1941년 자퇴하고, 한성학교를 거쳐 1944년 황해도 재령의 명신중학교를 졸업하였다. 그 해 평양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였으나 8·15광복으로 학업을 중단하였다. 그 뒤 상경하여 마리서사(茉莉書舍)라는 서점을 경영하면서 김광균 · 이한직 · 김수영 · 김경린 · 오장환 등과 친교를 맺기도 하였다. 1948년에는 김병욱 · 김경린 등과 동인지 『신시론(新詩論)』을 발간하였으며, 1950년에는 김차영 ·김규동 ·이봉래 등과 피난지 부산에서 동인 ‘후반기’를 결성하여 모더니즘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1955년 첫 시집 『박인환선시집』을 낸 뒤 이듬해에 심장마비로 죽었다.그의 시작 활동은 1946년에 시 「거리」를 『국제신보』에 발표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이어 1947년에는 시 「남풍」, 1948년에는 시 「지하실(地下室)」을 『민성』에 발표하면서부터 본격적인 시작 활동이 전개되었다.특히, 1949년 김수영 · 김경린 · 양병식 · 임호권 등과 함께 낸 합동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은 광복 후 본격적인 시인들의 등장을 알려주는 신호가 되었다. 1950년 후반기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살아 있는 것이 있다면」, 「밤의 미매장(未埋藏)」, 「목마와 숙녀」 등을 발표하였는데, 이런 작품들은 도시문명의 우울과 불안을 감상적인 시풍으로 노래하여 주목을 끌었다. 1955년에 발간된 『박인환선시집』에 그의 시작품이 망라되어 있으며 특히 「목마와 숙녀」는 대표작으로 꼽히는 작품으로서 우울과 고독 등 도시적 서정과 시대적 고뇌를 노래하고 있다.
지은이 : 백석
1912년 7월 1일(음력 추정) 평북 정주군 갈산면 익성동 1013호에서 부친 백시박(白時璞)과 모친 이봉우(李鳳宇)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난 시인 백석(白石)의 외모는 한눈에도 두드러진다. 인터넷에 떠돌고 있는 사진을 봐도 그의 모습은 매우 모던하다. 서구적 외모에 곱슬곱슬한 고수머리. 빛바랜 흑백사진을 보면 그의 머리 모양은 참 특이하다. 1930년대에 그런 머리를 할 수 있는 감각이란 얼마나 현대적인가? 옛사람이란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 그는 시쳇말로 외모와 문학을 새롭게 디자인한 모던 보이이자 우리말의 감각을 최대치로 보여 준 시인이다. 본명은 기행(夔行)으로 알려져 있지만 기연(基衍)으로도 불렸다. 필명은 백석(白石, 白奭)인데 주로 백석(白石)으로 활동했다.1918년(7세), 백석은 오산소학교에 입학했다. 동문들의 회고에 따르면 재학 시절 오산학교의 선배 시인인 김소월을 매우 선망했고, 문학과 불교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1929년 오산 고등보통학교(오산학교의 바뀐 이름)를 졸업하고 1930년 ≪조선일보≫의 작품 공모에 단편 소설 <그 모(母)와 아들>을 응모, 당선되어 소설가로서 문단에 데뷔한다. 이해 3월에 조선일보사 후원 장학생 선발에 뽑혀 일본 도쿄의 아오야마(靑山)학원 영어사범과에 입학해 영문학을 전공한다. 1934년 아오야마학원을 졸업한 뒤 귀국해 조선일보사에 입사하면서 본격적인 경성 생활을 시작한다. 출판부 일을 보면서 계열잡지인 ≪여성(女性)≫의 편집을 맡았고 ≪조선일보≫ 지면에 외국 문학 작품과 논문을 번역해서 싣기도 했다. 1935년 8월 30일 시 <정주성(定州城)>을 ≪조선일보≫에 발표하면서 시인으로서의 창작 활동을 시작하는 한편 잡지 ≪조광(朝光)≫ 편집부에서 일한다. 1936년 1월 20일 시집 ≪사슴≫을 선광인쇄주식회사에서 100부 한정판으로 발간한다. 1월29일 서울 태서관(太西館)에서 열린 출판기념회 발기인은 안석영, 함대훈, 홍기문, 김규택, 이원조, 이갑섭, 문동표, 김해균, 신현중, 허준, 김기림 등 11인이었다. 1936년 4월, 조선일보사를 사직하고 함경남도 함흥 영생고보의 영어 교사로 옮겨 간다. 1940년 1월 백석은 친구 허준과 정현웅에게 “만주라는 넓은 벌판에 가 시 백 편을 가지고 오리라”라는 다짐을 하고 만주로 향한다. 1940년도에 들어와 백석은 한국 현대시 최고의 명편을 발표하면서 시인으로서의 자리를 굳힌다. 시적 반경도 역사적·지리적·정신적으로 대단히 깊고 넓어지기 시작한다. 1945년 해방과 더불어 귀국해 신의주에서 잠시 거주하다 고향 정주로 돌아가 남의 집 과수원에서 일한다. 1946년 고당 조만식 선생의 요청으로 평양으로 나와 고당 선생의 통역 비서로 활동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1948년 김일성대학에서 영어와 러시아어를 강의했다고 전해진다. 그해 10월 ≪학풍≫ 창간호에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 방>을 발표한 것을 끝으로 남한 정부가 월북 문인 해금 조치를 취한 1988년까지 그의 모든 문학적 성과와 활동이 완전히 매몰되고 만다. 한국전쟁 직후 백석은 평양 동대원 구역에 거주하면서 ‘조선작가동맹 중앙위원회 외국 문학 번역 창작실’에 소속되어 러시아 소설과 시 등의 번역과 창작에 몰두한다. 1962년 10월 북한의 문화계 전반에 내려진 복고주의에 대한 비판과 연관되어 일체의 창작 활동을 중단한다. 1996년 1월 7일 8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것으로 알려졌다.
지은이 : 송찬호
1987년 『우리 시대의 문학』 6호에 작품을 발표하며 시단에 나왔다. 2000년 김수영문학상과 동서문학상, 2008년 미당문학상, 2009년 대산문학상, 2010년 이상시문학상을 수상했다. 그동안 동시집 『저녁별』 『초록 토끼를 만났다』와 시집 『흙은 사각형의 기억을 갖고 있다』 『10년 동안의 빈 의자』 『붉은 눈, 동백』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 『분홍 나막신』 등을 썼다.
지은이 : 신경림
1936년 충북 충주에서 태어나 동국대학교 영문과를 다녔으며, 대학 재학 중 문예지 《문학예술》에 <갈대>, <낮달> 등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나왔습니다. 시집에 《농무(農舞)》, 《새재》, 《가난한 사랑노래》,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 《낙타》 등이 있으며, 산문집에 《시인을 찾아서》, 《민요기행》 등이 있고, 어린이책 《겨레의 큰사람 김구》, 《엄마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한국 전래 동요집 1, 2》 등이 있습니다. 만해문학상, 단재문학상, 대산문학상, 호암상(예술부문), 4·19문화상 등을 수상했고, 한국작가회의 이사장, 민족예술인총연합 의장 등을 역임했습니다. 현재 동국대학교 국문과 석좌교수와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으로 있습니다.
지은이 : 기욤 아폴리네르
1880년 이탈리아 로마에서 미혼모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모나코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생애의 대부분을 프랑스에서 지내다가 죽기 2년 전에야 비로소 프랑스에 완전히 귀화하였다. 1918년 그는 전쟁에서 입은 상처와 스페인 독감으로 제1차 세계 대전 종전을 3일 앞두고 38세의 나이로 짧은 생애를 마감하였다. 1898년부터 여러 잡지에 시를 발표하기 시작, 한편으로는 전위예술에 매혹되고, 한편으로는 새로운 예술을 적극적으로 주도하면서 피카소, 브라크, 막스 자콥 등과도 교류하였던 그는 불문학사에서 상징주의의 황혼기이며 초현실주의의 문이 열리기 시작한 시기인 20세기 초에 당대의 시대정신을 가장 충실하게 구현한 시인으로 평가받는다. 『알코올』은 아폴리네르의 첫 시집으로, 1913년 메르퀴르 드 프랑스 출판사에서 발간되었다. 부제인 <시집 1898-1913>이 말하듯이 『알코올』은 아폴리네르가 시인으로서 처음 이름을 알린 이후 15년간의 결산이라고 할 수 있다. 형태와 주제, 음조와 길이가 다른 50편의 시를 혼란스럽게 늘어놓고 있지만 이 시집 전체가 지니고 있는 특이한 분위기는 거기에 어떤 <숨겨진 건축>, <초현실적 상상력으로만 이해할 수 있는 건축>이 있을 것이라는 가정을 떨쳐 버리기 어렵게 한다. 다른 작품으로는 『썩어 가는 마술사L'enchanteur pourrissant』, 『상형시집Calligrammes』, 『학살 당한 시인Le po?te assassin?』, 『앉아 있는 여인La femme assise』, 『우울한 파수병Le Guetteur m?lancolique』, 『추억처럼 부드러운Tendre comme le souvenir』, 『소년 돈주앙의 회고록Les Exploits d'un jeune Don Juan』, 『미라보 다리Le pont Mirabeau』, 『이교시조회사L'H?r?siarque et Cie』, 『입체파 화가들Les peintres cubistes』 등이 있다.
지은이 : 안도현
1961년 경북 예천에서 태어났다. 198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했다.『서울로 가는 전봉준』 『모닥불』 『그대에게 가고 싶다』 『외롭고 높고 쓸쓸한』 『그리운 여우』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하여』 『바닷가 우체국』 『너에게 가려고 강을 만들었다』 『간절하게 참 철없이』 『북항』 등의 시집을 냈다. 소월시문학상, 윤동주문학상, 백석문학상, 임화문학예술상 등을 받았다. 『나무 잎사귀 뒤쪽 마을』 『냠냠』 『기러기는 차갑다』와 같은 동시집과 여러 권의 동화, 『가슴으로도 쓰고 손끝으로도 써라』 『백석평전』 등을 출간했다. 스테디셀러 어른을 위한 동화 『연어』는 지금까지 15개국의 언어로 해외에 번역되었다. 단국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지은이 : 알렉산드르 세르게비치 푸시킨
러시아 사람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국민작가다. 아버지는 유서 깊은 모스크바 귀족 가문 출신이었고 어머니는 한니발 장군의 손녀였다. 작가의 외증조부였던 아브람 한니발 장군은 에디오피아의 왕자로, 표트르 대제에게 선물로 보내져 황제의 제자이자 총신이 되었다. 시인은 언제나 수세기에 걸친 가문의 전통을 자각하고 있었으며 귀족가문의 후손이라는 점과 다혈질의 아프리카 혈통을 평생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18세기 표트르 대제의 개혁에 러시아가 푸시킨이라는 천재로 응수했다"는 19세기 사상가 게르첸의 표현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3세기에 걸친 몽골제국의 지배로 서유럽에 비해 상대적으로 문화 지체를 겪어야 했던 러시아는 그의 등장으로 비로소 '때늦은 르네상스'를 맞았다. 푸시킨이 살고 창작했던 19세기 전반부를 '푸시킨의 세기'라고 칭하며 특별히 기억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러시아 문화사에서 가장 찬란한 기억을 가진 시절을 기록한 푸시킨의 삶과 예술은 이로써 서유럽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해 자기화하는 데 성공한 러시아의 축적된 경험과 자부심의 척도가 된다. 푸시킨이 러시아 근대문학을 정초함과 동시에 그것을 단숨에 정점에 올려놓았다는 평가는 19세기 이전 러시아 문학의 초라한 성취와 러시아 정신의 미약한 발전상을 일거에 상쇄하기 위한 수사적인 표현에 그치지 않는다. 실제로 러시아 문학사에서 푸시킨의 시문학이 없었다면 19세기 초 러시아 서정시의 황금시대는 도래하지 않았을 것이며, 19세기 후반 비판적 리얼리즘 소설의 빛나는 성취 또한 리얼리즘을 정초한 그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나아가 20세기 초 유례없는 과감한 예술 실험을 주도했던 러시아 모더니즘의 유산 또한 시인의 혁신적 도전정신에 기대지 않았더라면 훨씬 초라했을 것이다. 현대 러시아작가들에게도 푸시킨은 여전히 마르지 않는 영감의 원천으로 남아 때로는 오마주의 대상으로, 때로는 패러디와 키치의 대상으로 끊임없이 변모하는 중이다.
지은이 : 폴 엘뤼아르
<의무와 불안>이라는 짧은 시를 모은 시집으로 문단에 데뷔. 얼마 후 초현실주의운동에 참가, 아라공과 함께 초현실주의의 3대 시인 중 한 명이 되었다. 이 당시 초현실주의 시집 <죽지 않으려고 죽다>를 발간했다. 스페인 내란을 보고 인간의 비극을 느껴 <시와 진실>, <살 만한 가치> 등을 발표했으며, 제2차 세계대전 후에도 계속하여 참여시를 발표했다. <도덕강의>, <다 말 할 수 있다>, <페닉스> 등의 시집이 있다.
지은이 : 오규원
1941년 경남 밀양 삼랑진에서 출생하였고, 부산사범학교를 거쳐 동아대 법학과를 졸업했다. 1965년 『현대문학』에 「겨울 나그네」가 초회 추천되고, 1968년 「몇 개의 현상」이 추천 완료되어 등단하였다. 시집으로 『분명한 사건』(1971), 『순례』(1973), 『왕자가 아닌 한 아이에게』(1978), 『이 땅에 씌어지는 서정시』(1981), 『가끔은 주목받는 생이고 싶다』(1987), 『사랑의 감옥』(1991), 『길, 골목, 호텔 그리고 강물소리』(1995), 『토마토는 붉다 아니 달콤하다』(1999), 『새와 나무와 새똥 그리고 돌멩이』(2005), 『두두』(2008, 유고시집)가 있다. 이 밖에 시선집 『한 잎의 여자』(1998), 『오규원 시전집』(전 2권, 2002), 『오규원 깊이 읽기』(2002)와 시론집 『현실과 극기』(1976), 『언어와 삶』(1983), 『날이미지와 시』(2005) 그리고 시 창작이론집 『현대시작법』(1990)을 펴낸 바 있다.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 교수를 역임했으며 현대문학상, 연암문학상, 이산문학상, 대한민국문화예술상 등을 수상하였다. 2007년 2월 2일에 작고했다.
지은이 :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영시 작가 중의 한 사람으로서, ‘최후의 낭만주의자’로 불리며 19세기의 낭만주의 시와 현대시의 가교역할을 한 시인이다. 1865년에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출생하여, 켈트족의 민담과 설화, 동양의 신비주의사상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졌다. 특히 민족정신 고양을 위한 아일랜드 문예부흥운동에 힘썼으며, 1923년에는 아일랜드 작가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주요작품으로는 <어쉰의 방랑>(1889), <쿨 호수의 야생백조>(1917), <탑>(1928), <나선계단>(1933) 등 많은 시집과 <시극전집>(1934), 켈트족의 민담 모음집인 <켈트의 여명>(1893), 자동기술법에 의해 자신의 독특한 사상체계를 담은 <비전>(1926, 1937) 등이 있다.
지은이 : 이성선
1941년 강원도 고성에서 태어나 고려대학교 농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 교육대학원에서 국어교육학을 전공했다. 1970년 <문화비평> 에 <詩人의 屛風> 외 4편을 발표하고 1972년 시문학 추천으로 등단했다. 1988년 강원문학상, 1990년 제22회 한국시인협회상, 1994년 제6회 정지용문학상, 1996년 제1회 시와시학상 등을 수상했다. 2001년 5월 60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시집으로 <詩人의 屛風> <늘 문을 두드리며> <몸은 지상에 묶여도> <밧줄> <시인을 꿈꾸는 아이> <나의 나무가 너의 나무에게> <별이 비치는 지붕> <별까지 가면 된다> <새벽 꽃향기> <향기나는 밤> <절정의 노래> <벌레시인> <山詩> <내 몸에 우주가 손을 얹었다> 등이 있다.
지은이 : 이육사
1904년 5월 18일 경북 안동시 도산면 원촌리 881번지에서 이가호와 허길 사이에 6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다. 본명은 원록(源祿)이다. 본관은 진성(眞城)으로 퇴계 이황의 14대손이다. 그의 형제 중 다섯째는 문학평론가로 활동하다가 월북 이후 1950년대 초 숙청당한 이원조다. 어릴 때 조부 이중직에게서 한학을 배웠다. 1919년에 신학문을 접한 보문의숙을 졸업했다. 1925년 독립운동단체인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고 1926년 베이징으로 가서 베이징대학 상과에 입학해 7개월간 다녔다.1927년 귀국했으나 장진홍(張鎭弘)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되었다. 일본 경찰이 장진홍이란 인물은 물론 단서조차 잡지 못하자, 대구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인물들을 잡아들여 고문으로 진범을 조작해 법정에 세웠다. 이 과정에서 육사를 비롯해 원기·원일·원조 등 4형제가 함께 검거되었다. 원기를 제외한 나머지 형제들은 미결수 상태로 1년 반을 넘겼다. 그때의 수인번호 264에서 따서 호를 ‘육사’라고 지었다.1930년 1월 3일 첫 시 <말>을 조선일보에 이활(李活)이라는 필명으로 발표하면서 시단에 나왔다. 1935년 정인보 댁에서 시인 신석초를 만나 친교를 나눴다. 같은 해 다산 정약용 서세 99주기 기념 ≪다산문집(茶山文集)≫ 간행에 참여했다. 그리고 신조선사(新朝鮮社)의 ≪신조선(新朝鮮)≫ 편집에 참여하면서 본격적으로 시를 발표했다.1940년 4월에 베이징으로 가서 충칭과 옌안행 및 국내 무기 반입 계획을 세웠다. 같은 해 7월 모친과 맏형 소상에 참여하러 귀국했다가 붙잡혀 베이징으로 압송되었다. 이때 베이징 주재 일본총영사관 경찰에 구금된 것으로 추정된다. 1944년 1월 16일 새벽, 베이징 네이이구(內一區) 동창후퉁(東廠胡同) 1호에서 옥사했다.
지은이 : 정지용
본관은 연일(延日), 충청북도 옥천(沃川) 출신으로 아명(兒名)은 태몽에서 유래된 지용(池龍)이고 세례명은 프란시스코[方濟角]이다. 고향에서 초등 과정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와 휘문고등보통학교에서 중등 과정을 이수했다. 그리고 일본으로 건너가 교토에 있는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시단 활동은 김영랑과 박용철을 만나 시문학 동인에 참여한 것이 계기가 되어 본격화된다. 물론 그 이전에도 휘문고등보통학교 학생 시절에 요람동인(搖籃同人)으로 활동한 것을 비롯하여, 일본의 유학 시절 『학조』, 『조선지광』, 『문예시대』 등과 교토의 도시샤대학 내 동인지 『가(街)』와 일본시지 『근대풍경(近代風景)』에서 많은 작품 활동을 하였다.이런 작품 활동이 박용철과 김영랑의 관심을 끌게 되어 그들과 함께 시문학동인을 결성하게 되었다. 첫 시집이 간행되자 문단의 반향은 대단했고, 정지용을 모방하는 신인들이 많아 ‘지용의 에피고넨(아류자)’이 형성되어 그것을 경계하기도 했다. 아무튼 그의 이런 시적 재능과 활발한 시작 활동을 기반으로 상허 이태준과 함께 『문장(文章)』 지의 시부문의 고선위원이 되어 많은 역량 있는 신인을 배출하기도 했다.유작으로는 『정지용시집』(1935), 『백록담(白鹿潭)』(1941) 등 두 권의 시집과 『문학독본(文學讀本)』(1948), 『산문(散文)』(1949) 등 두 권의 산문집이 있다.
지은이 : 정채봉
1946년 전남 순천의 바닷가 마을에서 태어났다. 197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동화부문에 <꽃다발>이란 작품으로 당선되어 등단했다. '성인동화'라는 새로운 문학용어로 만들어냈으며 한국 동화작가로서는 처음으로 동화집 <물에서 나온 새>가 독일에서, <오세암>은 프랑스에서 번역 출간되었다. 마해송, 이원수로 이어지는 아동문학의 전통을 잇는 인물로 평가받으며 모교인 동국대, 문학아카데미, 조선일보 신춘문예 심사 등을 통해 숱한 후학을 길러온 교육자이기도 했다.동화작가, 방송프로그램 진행자, 동국대 국문과 겸임교수로 열정적인 활동을 하던 1998년 말에 간암이 발병했다. 죽음의 길에 섰던 그는 투병 중에도 손에서 글을 놓지 않았으며 자신이 겪은 고통, 삶에 대한 의지, 자기 성찰을 담은 에세이집 <눈을 감고 보는 길>을 펴냈으며 환경 문제를 다룬 동화집 <푸른 수평선은 왜 멀어지는가>, 첫 시집 <너를 생각하는 것이 나의 일생이었지>를 펴내며 마지막 문학혼을 불살랐다. 2001년 1월, 짧은 생을 마감했다.대한민국문학상(1983), 새싹문학상(1986), 불교아동문학상(1989), 동국문학상(1991), 세종아동문학상(1990), 소천아동문학상(2000)을 수상했다.
지은이 : 정현종
1939년 서울에서 태어나 연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했고, 1965년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하였다. 『사물의 꿈』 『나는 별아저씨』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한 꽃송이』 『세상의 나무들』 『갈증이며 샘물인』 『견딜 수 없네』 『광휘의 속삭임』 『그림자에 불타다』 등의 시집과, 『고통의 축제』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이슬』 등의 시선집, 그리고 시론과 산문을 모은 『날자, 우울한 영혼이여』 『숨과 꿈』 『생명의 황홀』 『두터운 삶을 향하여』 외 다수의 번역서를 상자했다. 한국문학작가상, 연암문학상, 이산문학상, 현대문학상, 대산문학상, 미당문학상, 경암학술상(예술 부문), 파블로 네루다 메달 등을 수상했다.
지은이 : 정호승
1950년 경남 하동에서 태어나 대구에서 성장했다. 경희대 국문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197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동시, 1973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시, 198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이 당선돼 작품활동을 시작했으며 ‘반시(反詩)’ 동인으로 활동했다. 시집 『슬픔이 기쁨에게』 『서울의 예수』 『새벽편지』 『별들은 따뜻하다』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라』 『이 짧은 시간 동안』 『포옹』 『밥값』 『여행』 『나는 희망을 거절한다』, 시선집 『흔들리지 않는 갈대』 『내가 사랑하는 사람』 『수선화에게』, 동시집 『참새』, 영한시집 『부치지 않은 편지』 『꽃이 져도 나는 너를 잊은 적 없다』, 어른을 위한 동화집 『항아리』 『연인』 『울지 말고 꽃을 보라』, 산문집 『내 인생에 힘이 되어준 한마디』 『내 인생에 용기가 되어준 한마디』 『당신이 없으면 내가 없습니다』 『우리가 어느 별에서』 등이 있다. 소월시문학상, 정지용문학상, 편운문학상, 가톨릭문학상, 상화시인상, 공초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지은이 : 조병화
시인의 호는 편운(片雲)이다. 1921년 5월 2일 경기도 안성군 양성면 난실리에서 부친 조두원(蘭有 趙斗元, 본관 한양)과 모친 진종(陳鍾 , 본관 여양) 사이에서 5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1928년 8세 때 용인 송전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한 뒤 모친을 따라 서울로 이사해 미동공립보통학교(渼洞公立普通學校)를 다녔다. 1936년 16세에 경성사범학교(京城師範學校) 보통과에 입학해 1943년 3월 23세에 경성사범학교 보통과 및 연습과를 졸업했다. 같은 해 4월 일본 동경고등사범학교(東京高等師範學校) 이과에 입학해 물리, 화학을 수학하다가 일본 패전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했다.1945년 9월부터 경성사범학교 물리 교유(敎諭)로 교단 생활을 시작해 인천중학교(仁川中學校, 6년제) 교사, 서울중학교(6년제, 현 서울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했다. 서울중학교 재직 시절인 1949년 7월에 제1시집 ≪버리고 싶은 유산(遺産)≫을 출간해 시인의 길로 들어섰다. 아울러 1955년부터 중앙대학교와 연세대학교 등에서 시론을 강의하다가 1959년 서울고등학교를 사직하고 경희대학교 교수(시학 교수, 문리대학장, 교육대학원원장 등 역임)로 부임했다. 이후 1981년부터 인하대학교 교수(문과대학장, 대학원원장, 부총장 등 역임)로 재직하다 1986년 8월 31일 정년 퇴임했다. 이와 같은 교육과 문학의 업적을 인정받아 중화학술원(中華學術院)에서 명예철학박사, 중앙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 캐나다 빅토리아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의 시는 쉽고 아름다운 언어로 인간의 숙명적인 허무와 고독이라는 철학적 명제의 성찰을 통해 꿈과 사랑의 삶을 형상화한 점에서 특징을 찾을 수 있다. 김소월이 전원 서정을 바탕으로 민족의 정한을 노래한 데 비해 그는, 외로운 도시인의 실존적 모습, 허무와 고독으로서의 인간 존재가 꿈과 사랑으로 자아의 완성에 이르는 생의 아름다움을 이해하기 쉬운 낭만의 언어로 그려 냈다. 또한 그는 그림에도 조예가 깊었는데, 그림 역시 시 세계와 흡사해 아늑한 그리움과 꿈이 형상화된 상상의 세계로 우리를 이끈다. 그는 생전에 많은 상을 받았는데 아세아문학상(1957), 한국시인협회상(1974), 서울시문화상(1981), 대한민국예술원상(1985), 3·1문화상(1990), 대한민국문학대상(1992), 대한민국금관문화훈장(1996), 5·16민족상(1997) 그리고 세계시인대회에서 여러 상과 감사패를 받았다. 그는 이렇게 받은 상금과 원고료를 모아 후배 문인들의 창작 활동을 돕기 위해 1991년 5월 2월 편운문학상(片雲文學賞)을 제정, 시행했다. 이 상은 2016년까지 26회에 걸쳐 71명의 시인, 평론가들과 시문화단체에게 이 상을 수여했다. 그의 사후 유족들이 유지를 받들어 지속적으로 이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2003년 1월 8일 노환으로 생을 마감하기까지 그는 창작 시집 53권, 선시집 28권, 시론집 5권, 화집 5권, 수필집 37권, 번역서 2권, 시 이론서 3권 등을 비롯해 총 160여 권의 저서를 출간했다. 2013년 3월에 그의 문학을 집대성한 ≪조병화 시전집≫과 ≪조병화의 문학 세계 Ⅱ≫가 2014년 10월에는 ≪조병화의 문학 세계 Ⅲ≫이 출간되었다. 2003년 3월 8일 별세했다. 향년 83세.
지은이 : 천양희
이화여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1965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신이 우리에게 묻는다면』 『사람 그리운 도시』 『하루치의 희망』 『마음의 수수밭』 『오래된 골목』 『너무 많은 입』 『나는 가끔 우두커니가 된다』 『새벽에 생각하다』가 있다.
지은이 : 칼릴 지브란
1883년 1월 6일 레바논에서 태어났다. 열두 살 때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15세가 되던 해, 다시 고향을 돌아와 대학까지 학업을 마치고, 1902년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다.미국에서 예술을 공부하고,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는 창작 활동을 시작했다. 그림 공부를 하며 뉴욕, 보스턴에서 여러 번의 전시회를 가졌다. 작품 활동 초기에 그는 주로 아랍어로 된 글을 썼는데, 아랍어 작품으로는『반항하는 영혼』(1908), 단편 『부러진 날개』(1912) 등이 있다.『예언자』는 1923년 40세의 칼릴 지브란이 쓴 대표작이다. 아랍어가 아닌 영어로 쓰였으며, 발표 당시에는 비평적으로 냉담한 평가를 받았지만 1957년 미국에서 100만 부, 1965년에는 250만 부, 1998년에는 900만 부가 팔리는 등 대중적으로는 널리 사랑받은 작품이다. 이 작품은 삶에 대한 그의 태도가 여실히 드러나는 작품으로, 시간이 지나도 변치 않는 삶의 본질을 다룸으로써 지금까지도 읽는 이에게 인생에 대한 통찰과 따뜻함을 안겨준다.칼릴 지브란은 1931년 4월 10일 결핵과 간경화 증세의 악화로 인해 48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죽기 전 고향 레바논에 묻히고 싶다는 유언을 남겼고, 1932년 그의 시신은 레바논에 있는 마르 사르키스 수도원에 옮겨져 현재는 레바논에 안치되어 있다.
지은이 : 하인리히 하이네
괴테와 더불어 독일이 낳은 세계적 시인이자 저널리스트인 하이네는 1797년 12월 13일 뒤셀도르프의 가난한 유대인 상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비감 어린 서정미와 현실 비판 의식, 허무주의가 어우러진 시와 사설을 남겼다. 1819년 본 대학교에 입학하여 법률을 공부하였으나 이후 문학으로 바꿔 슐레겔의 문학 강의와 헤겔의 철학 사상에 심취했다. 졸업 이후 본격적으로 문학 활동을 시작한 그의 데뷔 시집은 『시집Gedichte』(1821)이다. 1824년 하르츠 지방을 여행하고 재기 넘치는 「하르츠 여행Die Harzreise」을 썼다. 이후 『노래의 책Buch der Lieder』(1827)을 내어 명성을 얻었다. 프랑스의 7월 혁명에 감동하여 1831년 봄에 파리로 건너갔다. 독일과 프랑스의 신문·잡지에 많은 글을 기고해 언론인으로서 인정받았지만 독일 정부의 미움을 사, 계속 파리에 머물면서 민주주의를 위한 논문을 내는 한편 시 창작에 몰두했다. 1835년 독일 연방 의회의 결정에 의해 <청년 독일파(派)>의 저서 발행이 금지되면서, 하이네도 활동에 큰 타격을 받았다. 1848년 척추 경련으로 사지가 뒤틀리며 부분적으로 눈이 멀게 되었다. 말년에는 프랑스에 머물면서 활동을 지속하여 『로만체로Romanzero』(1851), 『혼합 문집Vermischte Schriften』(1854) 등의 작품을 남겼다. 1856년 2월 17일 사망, 몽마르트르 묘지에 안장되었다. 『노래의 책』은 출간 이후 멘델스존, 슈만, 브람스, 차이콥스키, 슈트라우스 등 당대 최고 작곡가들의 사랑을 받아 독일어 시집 가운데 가장 많이 작곡된 시집이다. 하이네는 고통과 상실의 경험을 다양하게 변주했다. 낭만주의를 넘어선 그의 시는 독특한 아이러니를 구사하며 교묘하면서도 신랄한 풍자로 번득인다. 또한 소외와 분열이 심화된 현실을 미화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드러낸다. 그 밖의 작품으로는 『살롱Der Salon』(1833~1840), 『독일 종교와 철학의 역사Zur Geschichte der Religion und Philosophie in Deutschland』(1834), 『독일. 어느 겨울 동화Deutschland. Ein Wintermarchen』(1844), 『아타 트롤Atta Troll』(1847) 등이 있다.
지은이 : 한용운
충남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에서 한응준과 온양 방씨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자(字)는 정옥(貞玉), 속명은 유천(裕天), 법명(法名)은 용운(龍雲), 법호(法號)는 만해이다. 어려서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한 뒤, 향리에서 훈장으로 학동을 가르치는 한편 부친으로부터 때때로 의인들의 기개와 사상을 전해 듣고 큰 감명을 받았다.기울어 가는 국운 속에서 홍주에서 전개되었던 동학농민전쟁과 의병운동을 목격하면서 집을 나서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설악산 오세암으로 들어갔다. 여기서 불교의 기초지식을 섭렵하면서 수도하다가 다른 세계에 대한 관심으로 노령 시베리아 등지를 여행하기도 하였다. 귀국 후 1905년 다시 설악산 백담사로 들어가 속세와 인연을 끊고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1910년 당시 모순과 부패가 만연하던 한국불교의 상황을 개탄하면서 개혁방안을 제시한 실천적 지침서인 《조선불교유신론》을 백담사에서 탈고하였고, 그것을 1913년 발간함으로써 불교계에 일대 혁신운동을 일으켰다. 1914년 4월에는 고려대장경을 독파하고 《불교대전》을 간행하였으며, 1918년에는 본격적인 불교잡지 <유심(惟心)>을 발간하였다. 1919년 천도교, 기독교, 불교계 등 종교계를 중심으로 추진된 3.1운동 계획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고, 불교계측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는 일도 맡았다. 1919년 7월 10일에는 경성지방법원 검사장의 요구로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이란 논설을 집필하여 명쾌한 논리로 조선독립의 정당성을 설파하였다. 3.1운동 때문에 감옥에 갔다가 석방된 뒤에도 전국적으로 확산된 물산장려운동을 지원하고, 민족경제의 육성과 민족교육을 위한 사립대학 건립운동에 앞장섰다. 창씨개명 반대운동, 조선인 학병출정 반대운동 등을 펴기도 했다. 1944년 6월 29일 그토록 그리던 조국광복과 민족독립을 눈앞에 두고 입적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는 뜻으로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지은이 : 함형수
<해바라기의 비명>
지은이 : 헤르만 헤세
1877년 7월 2일, 독일 슈바벤 주의 소도시 칼프에서 출생했다. 그는 1891년, 아버지의 영향으로 마울브론 신학교에 입학한다. 하지만 평소 문학에 관심이 있었던 그는 신학교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시인이 되겠다는 일념으로 1년 만에 뛰쳐나온다.1899년, 그의 첫 시집인 『낭만적인 노래(Romantische Lieder)』와 산문집 『자정 이후의 한 시간(Eine Stunde hinter Mitternacht)』이 출간된다. 그는 1904년, 9세 연상의 피아니스트 마리아 베르누이와 결혼하고, 장편 소설 『페터 카멘친트(Peter Camenzind)』를 출간한 후 경제적으로 안정이 되어 습작 활동에 전념할 수 있게 된다. 그 후 『수레바퀴 아래서(Unterm Rad)』(1906)를 비롯해 『데미안(Demian)』(1919), 『싯다르타(Siddhartha)』(1922) 등 여러 편의 소설을 출간한다. 하지만 제2차 세계 대전 중이던 1939년부터 1945년 종전이 되기까지 그의 작품은 독일에서 출판 금지를 당하는 위기를 겪는다. 1943년, 장편 소설 『유리알 유희(Das Glasperlenspiel)』를 발표하고 1946년, 『유리알 유희』로 노벨 문학상과 괴테상을 수상한다. 1962년 8월 9일, 그는 뇌출혈로 생을 마감한다.
지은이 : 폴 베를렌느
1844년 3월 30일 프랑스 로렌 주(州) 메츠에서 공병 장교인 아버지와 부농의 딸인 어머니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너무도 귀하게 태어나 가족으로부터 맹목적인 사랑을 받으며 자란 어린 베를렌은 버릇이 없었지만, 다행히도 명민한 아이였다. 열한 살이 되자, 보나파르트 고등학교(Lycee Bonaparte)에 진학했는데, 불어, 라틴어, 그리스어 등, 특히 언어에 뛰어난 자질을 보였다. 7년 과정의 이 학교에서 베를렌은 처음 3년 동안은 분명 모범생이었지만, 4년째 접어들자 돌연 학교 공부에 흥미를 잃고 시와 소설에 몰입한 문학 소년이 되었다. 1862년 바칼로레아 시험에 합격해서 가까스로 법과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지만 대학생이 된 그는 또다시 문학에만 몰두할 뿐, 정작 법률 공부는 등한시했다.아버지의 강요로 잠시 보험회사 직원으로 일하던 베를렌은 이내 대학 공부를 집어치우고, 1864년 파리 시청의 직원 채용 시험에 합격해 등초본 계원으로 근무하면서 생활의 안정을 찾게 되었다. 그 덕에 1865년부터 베를렌은 마음 편히 문필 활동을 병행할 수 있었으며, 1869년 친구의 이복여동생인 마틸드 모테를 만나자마자 사랑에 빠져 1년의 교제 끝에 혼인했다.1871년 3월, 파리에 시민 혁명 정부인 코뮌이 수립되자 베를렌은 협력자로서 홍보 관련 일을 맡기도 했는데, 두 달 만에 코뮌이 진압된 후, 그 일로 인해 처벌받을까 두려웠던 그는 외가 친척들 집을 옮겨 다니며 은신하다가 결국 시청으로부터 파면 통보를 받았다. 이 무렵, 안면부지의 열일곱 살 문학청년 랭보가 베를렌 앞으로 자신을 소개하는 편지와 함께 자작시 몇 편을 보내왔다. 랭보의 시에 탄복한 베를렌은 이윽고 랭보를 불러 처가로 맞아들였다. 하지만 반항적인 랭보는 보름 만에 그 집에서 쫓겨나 베를렌의 친구들 집을 전전했으며, 이때부터 베를렌은 랭보와 아내 마틸드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다.1873년 7월, 브뤼셀의 한 호텔에서 지내던 베를렌의 부름을 받고 랭보가 찾아왔다. 격렬한 언쟁이 이어졌고 술에 취한 베를렌은 파리로 떠나겠다는 랭보를 향해 권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두 발의 탄환 중 한 발이 랭보의 손목에 경상을 입혔고, 베를렌은 벌금형과 함께 2년 징역형을 선고받고 곧장 형무소에 수감되었다.이듬해인 1874년 4월, 파리 법원은 마틸드의 청원을 받아들여 베를렌 부부의 법적 별거 선고를 내렸는데, 벨기에 몽스(Mons) 감옥에서 이 소식을 전해 들은 베를렌은 가톨릭에 귀의해 7월에 영성체 의식을 치렀다. 1875년 1월이 되자 마침내 베를렌은 석방되었고, 그 뒤 1880년까지 영국과 프랑스의 사립학교 몇 군데를 오가며 교사 일을 하는 동시에 꾸준히 시를 써 나갔다. 1882년 7월, 파리 근교의 한 호텔에 거처를 정한 베를렌은 지난 10년간 소원했던 파리의 문인들 곁으로 돌아왔는데, 그간에 완성한 그의 시들이 ≪현대적인 파리≫를 비롯한 여러 문학잡지를 통해 연이어 소개되었다. 나날이 깊어 가는 병세에도 불구하고 베를렌은 왕성한 필력으로 여러 편의 산문집과 시집, 희곡 작품을 발표했으며, 어느덧 프랑스 문단의 대표적인 시인이 되었다. 그리하여 1892년에 들어서면서 젊은 숭배자들의 초청으로 베를렌은 네덜란드와 영국, 프랑스를 돌며 시학 강연을 이어 갔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가장 훌륭한 시인을 뜻하는 ‘시인의 왕’이라는 영예로운 칭호가 있었다. 빅토르 위고에게서 그 칭호를 계승한 르콩트드릴이 1894년 세상을 떠나자 시인들은 새로운 ‘시인의 왕’을 뽑아야 했는데, 400명 가까운 젊은 문인들에게 설문 조사를 한 결과 당대의 유명 시인들 중에서 베를렌이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시인의 왕’에 선출되었다.하지만 살아생전의 영광도 잠시뿐. 1896년 1월 8일, 폐울혈 증세를 보이던 베를렌은 급기야 52세를 일기로 그 자신이 표현했던 “저주받은 시인”다운 처량하고 굴곡진 삶을 마감했다. 이틀 뒤 수천 명의 장례 행렬이 애도하며 그의 유해를 파리 북쪽의 바티뇰(Batignolles) 묘지로 운구했으며, 그와 절친했던 여러 문인들이 애절한 추도사를 낭독했다. 그중 한 사람이었던 시인 말라르메는 베를렌 추모비를 건립하기 위한 기금조성위원회를 발족했고, 그 결실로 마침내 1911년 파리 뤽상부르공원의 양지바른 곳에 그의 흉상을 새긴 추모비가 세워졌다.
지은이 : 로버트 프로스트
20세기 미국문학을 대표하는 시인으로, 네 번에 걸쳐 퓰리처상을 받았다. 프로스트는 이 시에도 나오는 뉴잉글랜드 시골과 연결 짓는 사람들이 많지만 사실은 누구나 흔히 쓰는 단어와 리듬을 시에 담아 온 세상 사람들이 즐길 수 있는 시를 만들어 낸 것으로 이름 높지요. 『눈 내리는 저녁 숲가에 멈춰 서서』는 평범한 문장과 깊은 생각을 결합하여 더없이 아름다운 시를 빚어내는 능력을 보여준 좋은 본보기다.
지은이 : 서안나
제주에서 출생하여 대전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제주대학교 교육대학원 국어교육과를 졸업 후 한양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저서로는 시집 『푸른 수첩을 찢다』 『플롯 속의 그녀들』 『립스틱 발달사』, 평론집 『현대시와 속도의 사유』, 동시집 『엄마는 외계인』이 있으며, 『논리적 사고와 표현』(공저) 등이 있다. <서쪽> 동인이다. 2014년 현재 한양대, 숙명여대, 추계예대에서 강의하고 있다.
지은이 : 박두진
시인. 호는 혜산(兮山). 1916년 경기도 안성에서 태어났으며, 1939년 정지용에 의해 〈향현〉, 〈묘지송〉 등이 《문장》에 추천되며 등단했다. 박목월, 조지훈과 더불어 ‘청록파’ 시인으로 불리는 그는 민족적 울분과 해방에 대한 소망을 자연과 신앙에서 구하는 시풍에서 출발하여, 현실에 대한 예언자적 고발과 영적 성숙을 위한 언어적 수행을 하나로 통합하는 시적 편력을 일관되게 보여 주었다.연세대, 단국대, 추계예술대 등 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했고, 아세아자유문학상, 서울특별시문화상, 3·1 문화상 예술상, 인촌상, 지용문학상, 외솔상, 동북아 기독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청록집》, 《해》, 《오도》, 《포옹무한》, 《수석열전》, 〈박두진 전집〉(전10권), 〈박두진 산문 전집〉(전7권) 등 다수의 시집과 산문집이 있다.그의 고향 안성에서는 그의 시 정신을 기리고 오늘에 되살리는 뜻에서 해마다 10월에 ‘혜산 박두진 문학제’가 열리며, 공모를 통해 ‘혜산 박두진 문학상’을 시상한다.(올해 제13회) 2018년 가을에는 안성시 보개면 복평리 296 안성맞춤랜드 내에 박두진문학관이 이전·개관할 예정이다.
지은이 : 이용악
1914년 함경북도 경성에서 출생, 일본 니혼대학 예술과 및 조치대학 전문부 신문학과에서 수학했으며, 1935년 「패배자의 소원」(『신인문학』)으로 등단하였다. 해방 후 조선문학가동맹.조선문화단체총연맹 핵심 요원으로 활동했으며, 세칭 ‘남로당 서울시 문화예술사건’으로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 중 6.25전쟁으로 출옥해 북한군에 합류, 월북하였다. 월북 후 조선문학동맹 시분과위원장, 조선작가동맹출판사 단행본 부주필 등을 역임했으며, 1971년 폐병으로 타계했다. 시집으로 『분수령』 『낡은 집』 『오랑캐꽃』 『이용악집』 『리용악 시선집』 등이 있다.
지은이 : 김기택
1957년 경기도 안양에서 태어나 1989년 『한국일보』로 등단했다. 시집 『태아의 잠』 『바늘구멍 속의 폭풍』 『사무원』 『소』 『껌』 『갈라진다 갈라진다』 등이 있으며 <김수영문학상> <현대문학상> <미당문학상> <지훈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지은이 : 크리스티나 G. 로세티
1830년 12월 5일 영국 런던의 샬럿 가 38번지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이탈리아 중부 지방인 아브루초에서 런던으로 정치 망명한 이탈리아 시인 가브리엘레 로세티였고 모친은 바이런과 셸리의 친구이며 내과 의사이자 작가인 존 윌리엄 폴리도리의 여동생 프랜시스 폴리도리였다. 막내딸인 그녀에게는 두 명의 오빠와 한 명의 언니가 있었는데, 오빠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Dante Gabriel Rossetti)는 빅토리아조 후기 예술가들의 문예 운동인 라파엘 전파(Pre-Raphaelite Brotherhood)를 결성하고 이를 주도적으로 이끈 화가이자 시인이었고, 또 다른 오빠 윌리엄 마이클 로세티와 언니 마리아 프란체스카 로세티는 작가였다.주로 낭만적인 시, 종교적인 시, 동시를 쓴 크리스티나 로세티는 어려서부터 문학에 조숙한 감상력을 나타냈으며, 오빠처럼 시인 기질을 타고 났는데, 열두 살인 1842년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다. 오빠 단테는 일찍이 그녀의 천재성을 인정해 시를 발표하도록 권고했는데, 열여덟 살인 1848년에 그녀는 ≪아테나 신전(Athenaeum)≫에 첫 번째 시를 발표했고, 그 후에는 “엘렌 앨런”(Ellen Alleyne)이라는 필명으로 라파엘 전파가 간행하고 오빠 윌리엄이 편집을 맡은 문학잡지 ≪기원(The Germ)≫에 여러 편의 시를 발표했다. 그리고 서른한 살 때인 1862년에는 그녀의 첫 시집이자 가장 유명한 시집인 ≪고블린 시장과 기타 시들(Goblin Market and Other Poems)≫을 출간했다. 이 시집은 많은 비평적 찬사를 받았으며 그녀를 당대 주요 여류 시인으로 확고히 서게 해 주었는데, 1861년 엘리자베스 브라우닝이 죽고 그 이듬해에 나온 이 시집은 곧바로 그녀를 엘리자베스의 계승자로 열렬한 환호를 받도록 했다. 또한 환상적인 시, 동시, 종교시, 설교문, 논설문에 뛰어난 재주를 보인 그녀에게 홉킨스, 스윈번, 테니슨 등도 찬사를 보냈으며, 후에 암이 발생하기 전까지는 테니슨의 뒤를 이을 계관시인 후보로 거론되기까지 했다. 1870년대 초부터 그녀는 고통스럽고 보기 흉한 그레이브스병(안구가 돌출되는 갑상선 기능 항진증)에 걸려 고생했다. 그리고 1893년에는 유방암에 걸려 종양 제거 수술을 받았지만, 그 이듬해에 재발해 결국 1894년 12월 29일에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생전에 미국 남부의 노예제도, 동물을 실험에 이용함으로써 학대하는 것, 미성년자를 창녀로 이용해 노동 착취하는 것 등에 대해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지은이 : 콘스탄티노스 P. 카바피
20세기 그리스의 시인으로 1863년 4월 29일 알렉산드리아에서 아홉 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청소년기에는 영국에서 생활하며 셰익스피어 등 영국의 시들을 읽고 쓰며 시적인 감성을 형성했다. 가족의 사업 실패 후 다시 알렉산드리아로 이주하는데 1882년 제1차 세계대전을 불러온 영국의 알렉산드리아 침공으로 인해 집이 파괴되자 콘스탄티노플로 이주한다. 1885년 알렉산드리아에서 공무원으로 자리를 잡아 삼십 년 동안 일한다. 1903년 그레고리오스 제노풀로스Gregorios Xenopoulos를 통해 그리스 문학계에 그의 시가 소개되지만 주류 사조와 맞지 않아 그대로 묻히고 말았다. 고대 그리스에 대한 그리움과 함께, 당대 알렉산드리아의 지하에 숨어 있던 동성애자들의 세계를 탐구하고 남성의 아름다움과 쾌락을 찬미했던 카바피의 시는 상속자이자 연인으로 알려진 알렉산더 싱고폴로스Alexander Singopoulos에 의해 사후에야 154편의 시를 엮은 《시poemeata》로 발간된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 카바피를 만난 E. M. 포스터는 그의 시를 영어권에 처음 알렸으며 카바피의 상징주의적, 낭만주의적 분위기, 관능적인 시들은 후대 예술가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특히 데이비드 호크니는 콘스탄틴 카바피의 시를 읽고 영감을 받아 〈14개의 시를 위한 삽화〉 판화 작업을 하기도 했다. 일흔 번째 생일인 1933년 4월 29일에 후두암으로 사망했다.
지은이 : 허영자
1938년 경남 함양 출생. 숙명여대 및 동 대학원 졸업. 1962년 <현대문학> 목월 선생 추천으로 등단.시집 <가슴엔 듯 눈엔 듯> <친전> <어여쁨이야 어찌 꽃 뿐이랴> <빈 들판을 걸어가면> <조용한 슬픔> <기타를 치는 집시의 노래> 외.시선집 <그 어둠과 빛의 사랑> <이별하는 길머리엔> <꽃피는 날> <말의 향기> <아름다움을 위하여> <암청의 문신> 외.시조집 <소멸의 기쁨>. 동시
일러두기
다시, 시를 잊은 나와 그대에게
PART 1. 모든 사랑이 시다
참 좋은 당신 - 김용택
알 수 없어요 - 한용운
사는 법 - 나태주
서시 - 나희덕
저녁 - 이장희
내가 사랑하는 사람 - 정호승
가을, 그리고 겨울 - 송찬호
비망록 - 문정희
내 마음을 아실 이 - 김영랑
내 나이 스물하고 하나였을 때 - 앨프리드 E. 하우스먼
사랑하는 별 하나 - 이성선
미워하지도 사랑하지도 - 하인리히 하이네
수련 - 정호승
그리고 미소를 - 폴 엘뤼아르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 김소월
사람이 풍경으로 피어나 - 정현종
사랑은 - 오스카 해머스타인
그리운 꽃편지 5 - 김용택
PART 2. 쓸쓸함과 그리움이 시다
벗 하나 있었으면 - 도종환
고독 - 김기림
겨울 바다 - 김남조
누가 바람을 보았는가 - 크리스티나 G. 로세티
고독하다는 것은 - 조병화
설야 - 노자영
미라보 다리 - 기욤 아폴리네르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 - 김영랑
나를 생각하세요 - 구스타포 A. 베케르
바람의 말 - 마종기
가난한 사랑노래 - 신경림
그릇 - 오세영
밤에 익숙해지며 - 로버트 프로스트
여승 - 백석
엄마가 휴가를 나온다면 - 정채봉
봄비 - 노천명
그리움 - 이용악
나비 - 윤곤강
빈집 - 기형도
PART 3. 청춘의 눈부심이 시다
바다와 나비 - 김기림
이타카 - 콘스탄티노스 P. 카바피
밥 - 천양희
인생 - 라이너 마리아 릴케
눈 오는 지도 - 윤동주
달빛 - 폴 베를렌
해바라기의 비명(碑銘) - 함형수
방랑하며 - 헤르만 헤세
스무 살 - 곽재구
함께 있되 거리를 두어라 - 칼릴 지브란
꽃에 물 주는 뜻은 - 오일도
15도 각도로 기울어진 - 서안나
PART 4. 매 순간이 시다
담쟁이 - 도종환
못 자는 밤 - 윤동주
초록이 세상을 덮는다 - 김기택
달밤 - 김수영
제도 - 김승희
묵화 - 김종삼
우산을 잃어버리다 - 김기택
건강한 잠 - 김소월
봄비 - 고석규
연못 - 이용악
어머니 1 - 김초혜
길 - 윤동주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 알렉산드르 세르게예비치 푸시킨
행복 - 허영자
너에게 쓴다 - 천양희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 백석
살아 있는 것은 흔들리면서 - 오규원
어느 뉴펀들랜드 개의 묘비명 - 조지 고든 바이런
PART 5. 찬란한 모든 것이 시다
하늘 - 박두진
절정 - 이육사
산유화 - 김소월
장미 - 노천명
허공을 메꾸는 계획 - 황석우
이니스프리 -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길 - 윤동주
청포도 - 이육사
별똥 - 정지용
오월의 바람 - 박인환
꽃가루 속에 - 이용악
바람에 나부끼는 - 김영랑
꿈 깨고서 - 한용운
시인 이름으로 찾아보기 (가나다순)
이 책에 실린 시의 출처
도서 DB 제공 - 알라딘 인터넷서점 (www.aladi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