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리뷰
신약성경이 기록되고 초대 교회가 세워졌던
주후 1세기 신약 시대의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갔을까?
그들은 무엇을 먹고 입었으며 어떤 일상을 보냈을까?
당시 사회를 지배한 윤리 의식과 종교, 철학은 어떤 것이었을까?
흥미진진한 신약성경 배경 연구
새로운 세대를 위한 신약 시대 입문서
신약 세계의 사회 구조, 윤리, 정치, 법률, 종교, 철학
그리고 의식주 생활을 알아보는 신약 시대 기행신약성경을 잘 이해하려면 성경이 쓰여진 당시의 세계를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2,000년이 지난 지금 유대, 그리스, 로마 문화가 복잡 미묘하게 얽혀 있던 그 세계를 어떻게 제대로 파악할 수 있을까? 앨버트 벨 박사의 『신약 시대의 사회와 문화』는 이런 궁금증을 대단히 흥미로우면서도 간결하게 풀어 준다. 풍부한 사진 자료들, 다양한 고전 문헌 발췌문들과 함께 몰입감 넘치는 신약 세계 기행을 안내하는 이 책은 신약 시대의 세계에 입문하는 새로운 세대의 독자들에게 더할 나위 없이 유익한 참고 자료가 될 것이다.
벨 박사는 고전과 역사 분야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광범위한 분야에서 연구되고 있는 신약 시대의 세계를 다중 탐구하여 유대를 비롯한 소아시아 전역과 유럽, 이집트를 아우른 헬레니즘 시대의 사회 구조, 윤리, 정치, 법률, 종교, 철학 그리고 의식주 생활 전반을 학자들이 인정하는 적확한 방법으로, 그리고 성경이나 고대 역사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을 만족시키는 쉬운 해석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는 여러 계층의 독자에게 흥미를 일으킬 만한 문체로 글을 썼을 뿐 아니라 다양한 자료들을 간결하게, 그러면서도 기억하기 쉬운 문장으로 표현했다.
우선 신약 시대에 팔레스타인에서 성행한 유대 종파들을 서술하면서 그 상황 속에서 예수님과 초대 교회의 위치를 논하였으며, 이어서 1세기 로마 제국의 황제들과 기타 유력한 통치자들의 약력을 기술한 후 로마의 법 이론과 형사 소송을 실행한 총독들에 관해 풀어 나갔다. 그리고 신비 종교를 비롯하여 복잡하기 그지없는 그리스-로마의 종교를 소개하는 한편 헬레니즘 시대의 다채로운 철학 학파를 간결하게 논한다. 또한 그리스-로마의 사회 구조를 고찰하여 독자로 하여금 당시의 사회 계급과 의식주 생활에 관하여 자세한 설명을 얻을 수 있도록 했다. 가정생활, 이혼, 문란한 성생활, 자살 등 도덕성과 인간관계를 다룬 장에서는 로마 제국의 사회 조직을 궁극적으로 취약하게 만든 요소들에 대한 논의들을 열거한다.
이 책의 경탄할 만한 업적은 그리스-로마 역사의 갖가지 사실을 완벽하고 균형 있게 다루었다는 점이다. 한정된 분량 안에 신약 시대의 역사를 약술하려면 필연적으로 내용을 압축할 수밖에 없지만, 벨 박사는 단순히 사실을 나열하는 식의 위험을 피했다. 신약성경을 읽는 독자는 이 책이 다루고 있는 주제 하나하나에서, 초대 교회의 삶의 터가 되었던 사회와 1세기 사회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한 지도층에 속한 사람들, 그리고 평민들의 일상적인 가정생활과 가정 이외의 생활 등을 보다 충분히 이해하게 될 것이다.
§ 『제3장. 로마의 통치자들』 중에서로마와 유대 사이에 맺은 가장 초기의 공식적인 협약은 마카베오 혁명이 발발하던 중에 맺은 협약이다(주전 165년경). ‘마카베오상’ 8장에 따르면, 유다 마카베오(Judas Maccabeus)는 시리아의 셀레우코스 왕들의 공격을 막아 달라고 로마에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사절단을 구성했다. 로마인들은 유다 마카베오가 사절단을 구성하기 전 벌써 한 세대 동안, 지중해 동부 지역에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이집트)와 셀레우코스 왕조(시리아) 사이의 세력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 오던 참이라, 시리아를 약화시키려는 마카베오의 노력은 우리가 아는 한에서 그 지역에 대한 로마의 정책에 딱 들어맞는 것이었다. 로마인들은 그 당시 이 지역에 군대를 파견하지는 않았다.
주전 63년에 폼페이우스 장군이 유대에 도착했다. 이 무렵은 폼페이우스가 동쪽에 있는 새로운 지역을 정복하고, 몇몇 다루기 어려운 지역에 로마의 지배를 재천명하는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던 때였다. 그 당시 유대는 마카베오 가문의 후손인 하스몬(Hasmon) 왕조의 마지막 후예들이 통치하고 있었다. 두 형제 히르카누스 2세(Hyrcanus II)와 아리스토불루스 2세(Aristobulus II)가 서로 내전을 벌이고 있을 때, 폼페이우스가 히르카누스 2세의 편을 들어 줌으로써 이 내전은 일단락되었다. 폼페이우스는 히르카누스 2세에게 대제사장이라는 직함은 갖도록 허락했으나 왕 직함은 박탈했으며, ‘백성들의 통치자’(ethnarch)라는 칭호와 함께 그의 관할 구역을 유대와 이두매 지역으로 제한했다. 폼페이우스는 예루살렘에 주둔하고 있는 동안, 수세기에 걸쳐 로마인들과 유대 백성 사이에서 반목과 오해의 근원으로 작용했던 성전의 지성소 안으로 들어갔다. 폼페이우스는 지성소 안에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알고는 대단히 놀랐다. 오랫동안 내려온 소문에 따르면 유대인들은 당나귀 머리를 숭배한다는 것이었다. 그 동물이 유대인들이 이집트에서 나올 때 그들에게 물을 주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글을 좀 읽을 줄 아는 로마인들에게, 지팡이로 바위를 쳐 물을 낸 모세의 이야기가 전해지면서 와전된 것으로 여겨진다(출 17:1-7).
아리스토불루스와 그의 아들들은 계속해서 문제를 일으켰다. 마침내 로마는 주전 57년과 55년 사이에 히르카누스 2세에게서 모든 권한을 빼앗고 유대를 시리아 총독의 관할 아래 두었다. 로마에서 발생한 내전으로 인해 로마는 제국의 변두리에 있는 작은 지방에 많은 관심을 쏟기가 어려웠다. 야심에 찬 사람이 어떤 장소를 개척할 좋은 기회였다. 히르카누스의 가장 강력한 후원자 중의 한 사람은 이두매 총독 안티파트로스(Antipatros)였다. 안티파트로스와 그의 두 아들 파사엘루스(Phasaelus)와 헤롯(Herod)은 정치 감각이 뛰어나 정치적인 향방을 잘 감지할 수 있었다. 주전 48년 안티파트로스는 알렉산드리아에서 포위되어 있던 율리우스 카이사르에게 지원군을 파견했다. 카이사르는 안티파트로스 군대의 도움을 받아 포위망을 뚫을 수 있었다. 이에 대한 답례로 카이사르는 백성들의 통치자라는 칭호를 히르카누스에게 회복시켜 주었고, 헤롯과 파사엘루스를 분봉왕으로 임명했다. 하지만 몇 년 뒤 그 당시 동쪽 여러 속주의 총독으로 있던, 카이사르 암살의 주모자 카시우스(Cassius)가 유대 지역에 세금 납부를 요구하자 안티파트로스는 요구에 응해 세금을 납부했다.
주전 40년대 말 유대 지역에서는 상당한 폭동이 발생하였고, 안티파트로스는 주전 43년에 살해되었다. 주전 40년에는 파르티아(바대)족이 침입해 들어와서 아리스토불루스의 아들을 예루살렘의 통치자로 임명하고 히르카누스는 메소포타미아로 유배시켰다. 안티파트로스의 두 아들은 이 위기를 상당히 다른 방식으로 대응했다. 파사엘루스는 자살했고 헤롯은 로마로 도망했다. 몇 년 후 헤롯은 카이사르의 전직 부관이었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유대의 왕으로 임명해 다시 유대로 돌아왔다.
§ 『제7장. 그리스-로마의 사회 구조』 중에서지중해 세계에서 하루의 중요한 사건은 저녁 식사였다. 아침 식사는 대개 빵 한 조각과 물 혹은 저녁에 먹다 남은 것으로 때웠다. 밀, 귀리 또는 (가난한 사람들이 먹는) 보리 등의 곡물이 고대 사람들의 주식이었다. 정부의 정책은 식량 공급을 얼마큼 제때에 보장하느냐에 달려 있었다. 점심 식사 역시 초라하기 이를 데 없었다. 로마 제국 내의 여러 마을에는 사람들이 먹을 것이나 마실 것을 간편하게 살 수 있는 조그마한 가게인 ‘선술집’이 있었는데, 고고학적 발굴에 따르면, 이런 곳에는 앉아서 먹을 공간이 없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다면 1세기의 사람들은 일종의 ‘패스트푸드’에 익숙했다고 추측할 수 있다.
늦은 오후가 되면 신약 시대의 보통 사람들은 주 식사인 저녁 식사를 준비했다. 헬라인들은 이 저녁 식사를 ‘(symposium)이라는 품위 있는 만찬으로 발전시켰다. 심포시움에는 음악이 곁들여지고, 초대된 손님들은 연회장이 선정한 주제로 대화를 나누었다. 로마인들은 이와 같은 식사 준비와 식사 제공을 예술로 승화시켰고, 저녁 식사를 중요한 사회 활동으로 만들었다.
저녁 식사에 초대받는다는 것은 그 사람이 사회적으로 자부심을 가질 만한 중요한 문제였다. 부자들은 저녁 식사에 많은 수의 친구와 피보호자, 그 밖에 사회의 여러 사람들을 초대했으며, 대개는 마태복음 22장 1-14절에 나오는 부자처럼 초대장을 보냈다. [중략] 사람들을 초대한 주인은 함께 식사하는 사람들이 어떤 종류의 사람인지를 통해 자기가 얼마나 유력한지를 과시하기 원했으며, 그 식사가 다른 어떤 것으로 발전되기를 기대했다. 이들은 자신이 초대한 손님들이 자기도 초대해 주기를 은근히 기대했다(눅 14:12-14).
[중략] 페트로니우스의 작품 『사티리콘』에 남아 있는 중요한 부분인 ‘트리말키오의 저녁 식사’(Dinner of Trimalchio)에는 만찬에 대한 자세한 묘사와 술을 마시며 떠들어 대는 온갖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그려져 있다. 가벼운 운동과 목욕이 끝난 후 손님들은 트리말키오의 거실에 있는 긴 침상에 자리를 잡았다. 노예들이 손님들의 손을 씻어 주고 발톱을 손질해 주었다. 이들은 하인들이 하나씩 갖다 주는 잘 차려진 음식을 맛있게 먹었다. 이 음식은 손님들의 영양을 생각해서 만들어진 것이라기보다는 보기 좋으라고 만든 것이 대부분이었다. 손님들은 앞에 차려진 음식을 다 먹어야 했다. 필요하다면 식사 도중에 잠시 자리를 비우고 화장실에 가서 위를 비우기 위해 먹은 것을 토해 내고, 다시 와서 남은 음식을 먹는 것도 사회적으로 용납되었다.
아피키우스(Apicius)가 만들었다고 간주되는 로마의 음식 조리법에 관한 책이 아직도 존재한다. 이 책은 로마인들이 음식을 오랫동안 보존하기 위해 사용한 소금 맛을 완화하려고 고기 요리에 친 ‘가룸’(garum)이라는 양념을 만드는 법을 소개한 요리책이다. 미식가들은 속을 꽉 채운 암퇘지 앞가슴살, 구운 달팽이 그리고 그 밖에 여러 가지 맛있는 요리를 찾아다니기도 하였다. 아주 유명했던 요리는 흰 빵을 그 둘레를 잘라 내어 계란과 우유를 섞은 것에 담갔다가 기름에 살짝 구워 꿀을 바른 음식이다. 영락없는 프렌치토스트다!
이런 만찬에 제공되는 음식과 관련해 종종 튀어나오는 불평은 음식의 질로 손님을 차별한다는 것이었다. 주인 가까이에 (비스듬히) 누워 있는 사람들 혹은 상을 여러 개 차렸을 경우 주인 가까이에 차려진 상에서 식사하는 사람들에게는 일류 요리가 제공되었지만, 다른 식탁에 있는 덜 존경받는 손님에게는 이류급의 음식이 제공되었다. 유베날리스가 쓴 다섯 번째 풍자시의 대부분은 이런 인색한 보호자에 대한 불평을 다룬 것이다. 그중 한 대목을 인용해 보자. “그는 생선을 최상급 올리브기름에 찍어 먹는다. 당신은 등잔불에서나 날 냄새가 배어 있는 시든 배추를 먹는다.” 플리니우스는 사람들이 일종의 잘못된 경제 의식으로 이러한 구별을 하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그는 아예 모든 손님에게 똑같이 수수한 음식을 내놓아 비용을 절감했다. 식사할 때 사람들을 구별하는 것은 고린도 교회에서 분란의 한 이유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