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독일 고전주의의 대표자이며 세계적인 문학가인 괴테의 자전적 소설. 자연을 동경하는 순수한 청년 베르테르의 편지를 모은 서간체 소설이며, 현재 일반에게 읽히고 있는 것은 1787년에 부드러운 표현으로 고친 개정판이다.
1760년대 말부터 1780년대 중반에 걸쳐 독일에서는 이른바 ‘슈투름 운트 드랑’이라는 문예운동이 일어났다. 헤르더를 주축으로 한 이 문예운동은 이성ㆍ규칙ㆍ질서에 대하여 인간의 정열, 근원적 공상력, 개성의 위대함을 강조하는 강력한 감정이입과 창조적 천재성을 문학의 기본으로 삼고, 나아가 사회적 편견, 종교적ㆍ국가적 강제로부터의 자유와 자결권 확립을 강령으로 하였다.
이 운동에 동참한 이들은 개인의 발전 가능성을 발판으로 인간의 주체적인 능동성을 작품의 핵심 주제로 설정했다. 바로 괴테가 질풍노도운동의 지지자면서, 고전주의와 낭만주의 시대에 걸쳐 작품 활동을 한 독일의 대문호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이 시기 열정의 소산으로, 1774년 괴테가 25세 되던 해 집필 2주 만에 완성한 작품이다.
출판사 리뷰
독일 고전주의의 대표자이며
세계적인 문학가인 괴테의 자전적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리커버판으로 다시 찾아왔다.
이 소설은 자연을 동경하는 순수한 청년 베르테르의 편지를 모은 서간체 소설이며, 현재 일반에게 읽히고 있는 것은 1787년에 부드러운 표현으로 고친 개정판이다.
1760년대 말부터 1780년대 중반에 걸쳐 독일에서는 이른바 ‘슈투름 운트 드랑(Sturm und Drang, 질풍노도)’이라는 문예운동이 일어났다. 헤르더를 주축으로 한 이 문예운동은 이성ㆍ규칙ㆍ질서에 대하여 인간의 정열, 근원적 공상력, 개성의 위대함을 강조하는 강력한 감정이입과 창조적 천재성을 문학의 기본으로 삼고, 나아가 사회적 편견, 종교적ㆍ국가적 강제로부터의 자유와 자결권 확립을 강령으로 하였다. 이 운동에 동참한 이들은 개인의 발전 가능성을 발판으로 인간의 주체적인 능동성을 작품의 핵심 주제로 설정했다.
바로 괴테가 질풍노도운동의 지지자면서, 고전주의와 낭만주의 시대에 걸쳐 작품 활동을 한 독일의 대문호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이 시기 열정의 소산으로, 1774년 괴테가 25세 되던 해 집필 2주 만에 완성한 작품이다.
ㆍ괴테의 자전적 체험
베츨러에서 경험한 샤를로테 부프와의 사랑과 유부녀를 사랑한 친구 예루살렘의 자살 사건을 바탕으로 쓰인 이 소설은 발표되자마자 큰 화제가 되었다. 독자들은 심각한 충격을 받았으며, 작품에 대해서는 찬반양론이 거세게 일었다. 이는 종래의 소설에 대한 상식을 완전히 타파하는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18세기의 소설은 연애소설이든, 여행소설이든 독자에게 오락을 제공하고 교훈을 주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즉 18세기의 예술이나 문학의 본질적인 기능이 사람을 ‘즐겁게 하고 유익하게 하는 것(prodesse et delectare)’에 있었던 것에 반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근본적인 인간의 삶의 방식을 문제 삼고자 했다. 독자들의 생각은 주인공이 왜 자살하지 않으면 안 되었는가 하는 점에 쏠리지 않을 수 없었다. 종래의 소설에서는 인간이 자유의지로 사랑을 죽음으로 끝맺는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이 작품에 대한 비난으로서, 이것은 자살을 변호하는 글이라는 사람도 있었다. 사실 이 작품으로 인해 자살이 유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베르테르의 숙명의 연인 로테는 결국 타인의 아내가 되었으며 세간의 규율이 허락하지 않는 사랑을 하는 베르테르로서는 영원한 사랑을 이루기 위한 길, 죽음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주인공 베르테르의 무한을 향한 충동, 풍부한 감정은 동시에 괴테 자신의 것이기도 했지만, 단 하나 결정적인 차이라 할 수 있는 것은, 작가 괴테에게서 볼 수 있는 창조적인 정신이 주인공에게 결여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오로지 자기의 감정에만 충실하고, 청춘의 모든 에너지를 자기 내부로 쏠리게 할 뿐, 현실 사회에 적응하고 거기에서 자기 생활을 구축할 줄 모르는 청년의 비극이 ‘베르테르’인 것이다. 후년 괴테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염세라는 병적 상태에서 태어난 것이고, 그 시대의 병적인 풍조였던 센티멘탈리즘을 문학적으로 기록한 소설이라고 말하고 있다.
18세기에 있어서 비극은 희곡의 독점물로서, 일반적으로 산문소설에서는 비극적인 소재를 표현하는 능력이 없다고 생각되었는데,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이러한 통념을 타파하였으며, 또 편지라는 내적인 고백 수단을 이용한 소설이라는 점에서 문학 장르에 하나의 커다란 가능성을 제시하기도 했다.
로테, 나는 창가에 다가가 하늘을 바라봅니다. 발 빠르게 움직이는 거무스름한 구름 사이로 무한한 천공의 모래알 같은 별들을 바라봅니다. 그래요, 저 별들은 떨어지지 않습니다. 영원한 신이 저 별을 가슴에 품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나도. 큰곰자리에서 끌채 모양의 별이 보입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별이죠. 밤중에 당신과 헤어져 문을 나올 때면 바로 저 별이 눈앞에서 빛나고 있었습니다. 나는 도취되어 저 별을 바라보며 그것을 내 행복의 표시, 신성한 표석이라 생각하고 두 손을 뻗치곤 했죠. 그리고 지금도-오오, 로테, 무엇 하나 당신을 떠오르게 하지 않는 것이 없군요. 당신은 나를 둘러싸고 있습니다. 나는 마치 어린애처럼, 신성한 당신의 손이 스친 거라면 어떤 하찮은 것이라도 상관치 않고 모아들이고 있으니까요.
작가 소개
지은이 : 요한 볼프강 폰 괴테
1749년 8월 28일 마인 강변의 프랑크푸르트에서 부유한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 라틴어와 그리스어, 불어와 이탈리아어 그리고 영어와 히브리어를 배웠고, 미술과 종교 수업뿐만 아니라 피아노와 첼로 그리고 승마와 사교춤도 배웠다. 괴테는 아버지의 서재에서 2000권에 달하는 법률 서적을 비롯한 각종 문학 서적을 거의 다 읽었다고 한다.괴테는 아버지의 바람에 따라 1765년부터 1768년까지 당시 “작은 파리”라고 부르던 유행의 도시 라이프치히에서 법학 공부를 시작했다. 그러나 전공인 법학 강의보다 문학 강의를 더 열심히 들었다. 슈트라스부르크에서 법학 공부를 마친 후 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프랑크푸르트에서 작은 변호사 사무실을 열었지만, 문학에 대한 열정에 더 사로잡혀 있었다. 이때 쓴 작품은 ‘질풍노도’ 시대를 여는 작품으로 ≪괴츠 폰 베를리힝겐≫과 ≪초고 파우스트≫와 같은 드라마와, 문학의 전통적인 규범을 뛰어넘는 찬가들을 쓰게 된다. ‘질풍노도’ 시대를 여는 작품인 ≪괴츠 폰 베를리힝겐≫이 1773년 발표되자 독일에서는 뜨거운 논쟁이 벌어졌는데, 독일에서 드라마의 전통적인 규범으로 여기고 있던 프랑스 고전주의 극을 따르지 않고 최초로 영국의 셰익스피어 극을 모방했기 때문이었다. 프로이센의 왕까지 가세한 이 논쟁으로 인해 괴테는 독일에서 일약 유명세를 타게 되었다. 1974년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발표되자 괴테는 일약 유럽에서 유명 작가가 되었다. 전국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이 젊은 작가를 만나기 위해 프랑크푸르트로 몰려들었다.자신의 장래에 대해 어떤 결정도 내리지 못하고 망설이던 괴테를 18세에 불과했던 바이마르(Weimar)의 카를 아우구스트(Karl August, 1757∼1828) 공작이 초청했다. 처음에는 잠시 체류하면서 자신의 미래에 대해 생각해 보고 아버지의 권유대로 이탈리아로 여행을 다녀올 예정이었다. 그러나 괴테는 이미 유럽에 널리 알려진 유명 작가로 그곳에서 극진한 환대를 받았고, 빌란트(Wieland)를 비롯해 많은 예술가들이 모여 있는 바이마르의 예술적 분위기와 첫눈에 반해 버린 슈타인 부인의 영향으로 그곳에 머무르게 된다. 괴테에 대한 공작의 신임은 두터웠고 공국의 많은 일들을 그에게 떠맡기게 되었다.여러 해에 걸친 국정 수행으로 인한 피로와 중압감으로 심신이 지친 괴테는 작가로서의 침체기를 극복하기 위해 바이마르 궁정을 벗어나 이탈리아로 여행을 감행했다. 1년 9개월 동안 이탈리아에 체류하면서 괴테가 느꼈던 고대 예술에 대한 감동은 대단한 것이었다. 이탈리아 여행을 통해 얻게 된 고대 미술의 조화와 균형, 그리고 절도와 절제의 정신을 자기 문학을 조절하는 규범으로 삼아 자신의 고전주의(Klassik)를 열 수 있었던 것이다.독일 문학사에서는 괴테가 이탈리아에서 돌아온 1788년부터 실러가 죽은 1805년까지를 독일 문학의 최고 전성기인 “고전주의” 시대라고 부른다. 이 시기에 괴테와 실러는 바이마르를 중심으로 자신들의 고전주의 이상을 실현하는 활동을 했는데, 개인의 “개성”을 존중하면서도 “유형(類型)”을 통해 “유형적인 개성”으로 고양(高揚)되는 과정을 추구했던 것이다. 괴테와 실러의 상이한 창작 방식은 상대의 부족한 면을 보충해 주어 결과적으로 위대한 성과를 올릴 수 있게 해 주었다. 실러의 격려와 자극으로 괴테는 소설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 시대≫를 1796년에 완성하고, 프랑스 혁명을 피해 떠나온 피난민들을 소재로 한 ≪헤르만과 도로테아≫를 1797년에 발표해 대성공을 거두었으며, 미완성 상태의 ≪파우스트≫ 작업도 계속 진행해 1808년에 드디어 1부를 완성하게 된다. 실러는 지나친 의욕과 격무로 인해 1805년 5월 46세의 나이로 쓰러지는데, 실러의 죽음은 괴테에게도 커다란 충격이었다.1815년 나폴레옹이 권좌에서 물러나자 바이마르 공국은 영토가 크게 확장되어 대공국이 되었다. 괴테는 수상의 자리에 앉게 되지만 여전히 문화와 예술 분야만을 관장했다. 1823년 ≪마리엔바트의 비가≫를 쓴 이후로 괴테는 대외 활동을 자제하고 저술과 자연연구에 몰두해 대작 ≪빌헬름 마이스터의 편력 시대≫(1829)와 ≪파우스트 2부≫(1831)를 집필하게 된다. 1832년 3월 22일 낮 1시 반, 괴테는 심장 발작으로 사망한다. 그는 죽을 때 “더 많은 빛을(Mehr Licht)” 하고 말했다고 전한다. 그리고 3월 26일 바이마르의 카를 아우구스트 공작이 누워 있는 왕릉에 나란히 안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