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옹기시인선 1권. 2000년 「시문학」으로 등단한 장흥진 시인의 첫 시집이다. 그는 등단 이후 20여 년 동안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로, 생활인으로 살아오면서도 '시를 생각하지 않은 날은 하루도 없었다'고 고백한다.
그는 틈만 나면 '손바닥만 한 수첩에, 손전화기 메모장에 두서없이 끄적거리며, 잠들면서도 잠 깨면서도 시를 떠올'리며 시 쓰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 시는 바쁜 일상 속에서 자칫 멀어질까, 잊혀질까 두려운 신앙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장흥진의 시에는 현란한 수사나 넘치는 비유도, 섣부른 선언 같은 것은 없다. <야윈 당신> 속 69편의 시들은 먼 길을 떠나는 여행이 아닌 담담한 산책이다. 시인의 시선이 오래 머무는 곳 또한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의 자리들이다.
그 일상의 시간 혹은 일상에서 만나는 사물들 역시 그리 귀하다고 할 수 없는-거실 한 귀퉁이의 '늙은 호박', 이삿짐 속에서 찾은 낡은 '이 인분의 냄비', 골목길을 지나다 본 '담장의 균열', 절집 한쪽에 수도관을 감싸고 있는 누군가의 '낡은 외투' 같은-것들이다. 그러나 곱씹을수록 시편마다 어떤 단단함이 느껴지는 것은 그 중심에 시 본연의 진정성이 오롯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출판사 리뷰
시를 생각하지 않은 날은 하루도 없었다. 틈만 나면 손바닥만 한 수첩에, 손전화기 메모장에 두서없이 끄적거리며, 잠들면서도 잠 깨면서도 시를 떠올렸다. 가릴 것도 감출 것도 없이, 자연스레 찍힌 내면의 발자국 그대로, 스무 살 무렵부터 지금까지 써 온 시들을 묶어 보았다. 어떤 것은 굳고 어떤 것은 연하다. 어떤 것은 떫고 어떤 것은 쓰다. 노래에 날개가 있듯이 시에도 날개가 있다고 믿는다. 내 품에서 날아갔으니 시들은 앞으로 저희가 알아서 깃들거나 떠돌 것이다.
― <나의 시, 나의 시쓰기>에서
담담함 속에 오롯이 담긴 일상의 단단함
혹은 일상의 시간과 언어로 빚어낸 시의 진정성
『야윈 당신』은 2000년 『시문학』으로 등단한 장흥진 시인의 첫 시집이다. 그는 등단 이후 20여 년 동안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로, 생활인으로 살아오면서도 ‘시를 생각하지 않은 날은 하루도 없었다’고 고백한다.
자투리 시간이라도 아껴 글을 쓰고 싶은 내게 시간은 늘 부족했다. (…) 일을 가진 나는 식구들 밥상도 후다닥 차리고, 집안일은 몰아서 대충대충 하곤 했다. 빛의 속도로 출근 준비를 하고, 밖에 나서면 나도 모르게 뛰거나 경보 선수처럼 걷는다. 누구와 길게 통화한 적도 거의 없다. 그러나 그렇게 노력을 하는데도 시에 몰입할 시간을 얻기 힘들었다(산문, 「나의 시, 나의 시쓰기」에서)
하지만 그는 틈만 나면 ‘손바닥만 한 수첩에, 손전화기 메모장에 두서없이 끄적거리며, 잠들면서도 잠 깨면서도 시를 떠올’리며 시 쓰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 시는 바쁜 일상 속에서 자칫 멀어질까, 잊혀질까 두려운 신앙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첫눈」은 아름다운 연시(戀詩)로 읽히지만 한편, 시에 대한 시인의 신앙고백과도 같다. ‘당신’의 자리는 곧 ‘시’의 자리일 것이다.
당신에게 내려도 된다면/ 내가 그 뜰을 온통 채워도 되는/ 첫눈이라면/ 어느 날 밤 예고도 없이/ 그렇게 몰래 내리지 않겠습니다/ 뒷모습만 남기고/ 차가운 옷자락을 끌며 그렇게/ 황망히 스쳐 가진 않겠습니다/ 붉게 충혈되어/ 까맣게 목이 타 울며 내리게 될지라도/ 내가 당신의 첫눈이라면/ 먼저/ 내가 지닌 빛깔과 향기/ 물소리와 바람 소리를 총동원하여/ 오래전부터 당신 집 앞을 서성이겠습니다/ 그 뜰에 피고 지던 마른 잎이/ 뒹굴어 한 줌 남김없이 떠나고 난 뒤/ 눈 둘 곳 없어 추운/ 나뭇가지/ 당신이 자꾸 하늘을 올려다볼 때쯤/ 나 서서히 길 떠날 채비를 하겠습니다/ 그 어깨를 만지러/ 내가 채색한 눈부신 하늘을/ 그 어깨에 얹으러/ 함박눈으로 부드럽고 희고 한없이 따뜻하고 슬픈/ 당신이 그리던/ 당신을 그리던 그 모든 것들을 이끌고 훨훨/ 어지럽게/ 어지럽게 당신 속으로/ 당신의 가슴 밖으로도 내리겠습니다/ 온 세상 가득히/ 당신의 이름을 쓰겠습니다(「첫눈」 전문)
장흥진의 시에는 현란한 수사나 넘치는 비유도, 섣부른 선언 같은 것은 없다. 『야윈 당신』 속 69편의 시들은 먼 길을 떠나는 여행이 아닌 담담한 산책이다. 시인의 시선이 오래 머무는 곳 또한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의 자리들이다. 그 일상의 시간 혹은 일상에서 만나는 사물들 역시 그리 귀하다고 할 수 없는-거실 한 귀퉁이의 ‘늙은 호박’, 이삿짐 속에서 찾은 낡은 ‘이 인분의 냄비’, 골목길을 지나다 본 ‘담장의 균열’, 절집 한쪽에 수도관을 감싸고 있는 누군가의 ‘낡은 외투’ 같은-것들이다. 그러나 곱씹을수록 시편마다 어떤 단단함이 느껴지는 것은 그 중심에 시 본연의 진정성이 오롯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멀리서 왔다/ 성자처럼 늙은 호박 한 덩이/ 흙먼지를 털고 보얗게 몸을 씻었지만/ 번쩍이는 고층 아파트 가구들과는 어울리지 않는 매무새 // 거실 한 귀퉁이에 정좌한 채/ 아찔한 빌딩 숲을 한없이 굽어보다가/ 밤에는 식구들과 늦도록 텔레비전을 본다(「호박이 있는 풍경」 부분)
이삿짐을 정리하다 발견하였다/ 이 인분의 앙증맞은 찌개 냄비 (…) 아이들이 부모의 키를 넘을 만큼 자라는 동안 (…) 그릇장 맨 아래 칸에 숨어 살며/ 때가 오기를 기다렸나 보다 (…) 그 시절 요리의 주된 재료는 공들인 시간이었을 것이다 (…) 오늘 최선을 다한 냄비를 공들여 닦으며/ 은둔자처럼 견딘 시간의 엉덩이를/ 가만가만 토닥여 주고 싶은 저녁(「신혼 냄비」 부분)
날마다 지나다녔지만/ 그 담장의 안쪽은 짐작조차 못 했다/ 저 홀로 높고 견고하게 세상으로부터 돌아서서/ 제 가슴에 금을 긋고 있는 줄은 미처 몰랐다/ 언 땅을 덮고 녹지 않는 눈/ 바람이 불어도 날아가지 않는 쓰레기들/ 사철 두터운 그늘 아래/ 웅크린 시간들을 껴안고 눈 감은/ 눅진한 비애들 (…) 출근길 엘리베이터 앞에서 의식을 잃은/ 병명도 모르는 채 끝까지 누워 지내야 한다는 그는/ 막강한 담장이었다(「틈」 부분)
사람 몸을 감싸던 책무는 이제 끝난 듯하다/ 소매 끝은 닳아 너덜거리고/ 장식 단추도 떨어져 나갔다 (…) 사람의 몸 대신 오늘은 수도관을 안고 있다/ 제 몸태를 버리고/ 수도관의 구부러진 모양새를 따라/ 살집인 듯 달라붙어 있다/ 저렇게 완강히 그러안고 있으니 (…) 외로움은 더 이상 차가워지지 않고/ 따스한 속살을 지킬 것이다(「외투」 부분)
‘일상이/ 멈칫멈칫/ 굳은 어깨로 다가와/ 입맞춤을 시도’(「새벽」)하는 이십여 년의 산책길에서 이제 시인은 또 다른 길을 발견한 것일까. 그는 시집 『야윈 당신』의 마지막 시 「산문山門」에서 내면의 발걸음을 잠시 멈추고 고요히 서 있다.
산의 첫 문은 어디일까/ 푸르름이 짙어지는 곳일까/ 산새 소리 들리기 시작하는 곳일까/ 바람이 잎을 데리고 다니는/ 물결이 잎을 데리고 다니는 곳일까/ 이끼 낀 바위를 지나두 그루의 나무가 문지기처럼 서 있는 곳일까/ 솔향기 코끝을 간질이는 곳일까/ 나뭇잎 그림자 밟히는 곳일까/ 마음에 산을 들인 순간/ 까닭도 없이 경건해지는 그 시간부터일까/ 어쩌면 나를 들여놓지 않을지도 모르는/ 산문의 열쇠를 찾으려고 한동안 두리번거리다/ 걸음을 멈추고 고요히 서 있다(「산문」 부분)
이십여 년 만에 첫 시집을 묶어내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다. 어쩌면 그것은 새로운 시의 세계로 들어서겠다는, 이전까지와는 또 다른 고난을 감내해보겠다는 굳은 다짐이다. 장흥진 시인은 시집 후기에 이렇게 썼다.
써 놓은 시들을 몇십 년 동안 품에 안고 있으니 꽃처럼 시들지 않았고, 새처럼 날아가지 않았다. 그러나 별처럼 빛나지 않았다. 종소리처럼 울려 퍼지지도 않았다. (…) 가릴 것도 감출 것도 없이, 자연스레 찍힌 내면의 발자국 그대로, 스무 살 무렵부터 지금까지 써 온 시들을 묶어 보았다. 어떤 것은 굳고 어떤 것은 연하다. 어떤 것은 떫고 어떤 것은 쓰다. (…) 노래에 날개가 있듯이 시에도 날개가 있다고 믿는다. 내 품에서 날아갔으니 시들은 앞으로 저희가 알아서 깃들거나 떠돌 것이다. 이제 열린 창을 닫고, 고요히 정좌할 시간이다.
겨우내 잊고 있던/ 김장철에 사들인 양파 한 자루/ 어둑한 창고의 선반에 올려 두고 오늘에서야 문득 들여다본다/ 양파는 온데간데없다/ 가뿐해진 자루를 안아다 햇살 아래 부리고 보니/ 그물망 속이 온통 환한 연둣빛이다 (…) 무거움이 사라진 것이다/ 무거움은 어느 날 슬며시 제자리에서 일어나 뒷짐 지고 서성이는 척/ 아직은 춥고 어두운 모퉁이를 돌아/ 천천히 걸어갔을 것이다(「가벼움에 대하여」 부분)
쓰레기장 입구/ 부서진 의자에 기대어 비 맞고 있다/ 줄은 낱낱이 끊어져 뒤엉켜 있고/ 활도 사라졌다/ 울타리 너머 큰길을 지나던 바람이/ 사나운 소리를 내며/ 헤어졌던 오랜 혈육을 만난 듯 달려들어/ 그의 눅눅한 몸을 얼싸 안는다 (…) 그가 평생 불렀던 노래는/ 다 어디로 갔을까 (「첼로」 부분)
늦은 저녁 세숫물을 받으며/ 낮은 곳으로만 흐른다는 물의 속성을 떠올린다/ 이렇게 맑은 채로/ 내게 닿기까지 물은 얼마나 스스로를 낮추었을까/ 어귀마다 두고 온 것은 얼마나 많을까/ 좁고 캄캄한 관管 속을 통과해 오느라 일부러 버린 것은 또 얼마나 많을까 (…) 세수를 마치고 보니 세면기에는/ 투명한 물의 얼굴 대신 흐린 내 얼굴이 떠 있다(「세수를 하며」 부분)
작가 소개
지은이 : 장흥진
충남 홍성에서 태어나 공주교육대학, 춘천교육대학 대학원을 졸업하고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며 틈틈이 시를 쓰다가 2000년 <시문학>으로 등단했다. 아직은 좋아하는 시집이 최고의 소장품이며, 밝은 눈으로 시를 누릴 수 있음을 최고의 영예라 생각한다.
목차
시인의 말
제1부
산벚꽃 연서/ 내게로 오시는 길/ 가벼움에 대하여/ 숲에? 온? 이유/ 숲길/ 세수를 하며/ 가족사진/ 매듭/ 딸에게/ 여름밤/ 밤 기침/ 틈/ 첼로/ 송곳/ 외투/ 꽃길에 대하여/ 유턴/ 터널
제2부
호박이 있는 풍경/ 불현 듯/ 길을 감고 오다/ 울고 넘는 박달재/ 대代/ 신혼 냄비/ 아버지의 노래/ 작황 일기/ 사과 한 알이/ 유고/ 부재不在/ 아파서 피다/ 거울/ 처서 무렵/ 가을의 삼보일배/ 마애석불의 미소/ 회복기/ 새벽/ 오시는 눈/ 호루라기
제3부
산책 일기/ 사월의 숲/ 빛의 연가/ 초승달/ 수국 아래서/ 나무를 안으면/ 산꽃/ 우리 아이들/ 우리 아이들 2/ 무명 교사의 시/ 도라지꽃/ 꽃씨/ 이별/ 기다리면서/ 첫눈
제4부
마흔 너머/ 독毒/ 화장터에서/ 멍/ 혓바늘/ 지퍼에 대한 오해/ 평화에게/ 길안?사과/ 호박 안부/ 잠든 척 뒤척이다/ 꽃을 안고/ 귀뚜라미/ 새미원에서/ 어떤 분홍빛/ 다시 사월 꽃보라/ 산문山門
나의 시, 나의 시쓰기: 일상은 내 시의 자양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