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파란시선 65권. 2016년 <시작>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한 이세화 시인의 첫 시집. 시인이 펼쳐 놓는 개진과 은폐의 길항 관계, 그 방법론적 장치로서의 힘과 긴장의 미학은 다른 한편으로 파울 클레가 현대 미학의 첨단의 문제틀로 제시했던 ‘보이지 않는 것의 현시’라는 방법론과 연동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출판사 리뷰
처음으로 나를 사랑하기 위해서였다시인이 펼쳐 놓는 개진과 은폐의 길항 관계, 그 방법론적 장치로서의 힘과 긴장의 미학은 다른 한편으로 파울 클레가 현대 미학의 첨단의 문제틀(problmatique)로 제시했던 ‘보이지 않는 것의 현시’라는 방법론과 연동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가령 “잘 보이지 않는 모습과/잘 들리지 않는 말이 있었지만”(속기), “이미 일어난 일을/숨기는 것과 보여 주는 것의 차이라고”(뉴페이스), “삶을 놓아 버린 사람에게/대화는 중요하지 않았다/도대체 뭐가 괜찮은 건데, 같은 말은/배 속에서/산산이 찢어 두기로 한다”(과조), “오래전 어둠 너머로 돌아간 네 형상을 상상하며/소리를 질러 보겠지 저 멀리/닿지 않는 메아리를 믿어야겠지”(인간의 숲) 같은 이미지들을 떠올려 보라.
<감각의 논리>에서 들뢰즈가 ‘어떻게 비가시적인 힘들을 가시적으로 만들 수 있는가?’라는 의문을 제기했던 것처럼, 이 시집에서 빈번하게 활용되고 있는 낯설고 특이한 문법 가운데 하나는 “잘 보이지 않는 모습과/잘 들리지 않는 말”로 표상될 수 있을 듯하다. 이는 비감각적인 것들을 거죽 위로 끌어올려 마치 감각적인 형상들처럼 돋아나게 만드는 예술적 방법론 또는 현시의 미학이 이 시집의 중심부를 가로지르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달리 말해, 이세화의 여러 시편들엔 감각이란 통상적인 방식으로는 결코 감각되지 않는 것들을 감각해야 하는 역설적 과정 자체를 가리킨다고 진술한 들뢰즈의 감각론으로 수렴될 수 있는 이미지 조각술과 미학적 구도가 관통하고 있다.(이상 이찬 문학평론가의 해설 중에서)
이세화 시인은 2016년 <시작>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허물어지는 마음이 어디론가 흐르듯>은 이세화 시인의 첫 번째 신작 시집이다.
속기나는 당신을 아주 빠르게 받아 적는다
잘 보이지 않는 모습과
잘 들리지 않는 말이 있었지만
이것은 예비의 착상이었기에
모호함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가볍게 넘기며
어떠한 점과 글자들이 지나가고 기록이
너무 빠른 나머지
스케치를 하듯이
당신은 이제 선 하나로 설명이 된다
추상적이다 피카소의 소처럼
나는 당신을 아주 잘 알고 있다고 안도한다
당신은 당신이 아니게 되었지만
전부라고 해도 무방하다
당신은 지긋지긋하게도
거의 모든 곳에서 생겨나고 있다
당신은
나의 신이다 ***
처음으로 나를 사랑하기 위해서였다내 팬티에서 네 불알 냄새를 맡았다
발아래로 별이 가득 박혀 있는 한밤의 비행기 안이었다
나는 오랫동안 화장실 안에 갇혀 있던 공기를 들이마시며
지난날 동네 구멍가게에 두고 온 정오를 생각한다
차양 막에 쌓인 먼지를 쓸어내리며
바람은 가끔 넘쳤고
내부는 흔들리고 있었다
파충류의 살을 유린한 적이 있는가
문 없는 냉장고의 눈은 이 동네에서 가장 밝은 빛이다
물병에 붙어 있던 도마뱀이
손등 위에서 화상을 입는 동안
누군가 꿈이라고 말해 주었다
이 세계와 풍경을 견디지 마라
죄는 눈먼 바람을 따라 유목하는
다리가 긴 짐승이다
이 사이로 새어 가는 바람에 손가락을 넣고
도둑의 노래를 연주한다
곧 겪어 본 적 없는 비가 올 것이라 했다
물줄기가 하늘에서 쏟아지면
땅은 더 깊어질 것
세상에 비밀이 더 많아질 것
구름이 지난다
유통기한이 지난 우유 너머로 멀리
시린 공기가 닿지 못하는
저 국가, 지상 위의 사람들
살아서 아름다운 사람들
행선지를 묻는 사람들에게 천국에 다녀온다고 하였지만
살아서 별보다 높은 곳에 설 일은 없다
사라진 자들만이 그리운 마음
미래를 끌어와 사는 것 같다
스치는 것에 익숙해져야 한다
사랑한다고 빛을 다 담았다면
우리는 금방 터져 버리고 말 것이다
무너지는 척추뼈를 지나
밀려오는 꽃가루
밀실로 사라지듯이
빛을 지우는 긴 머리카락을 밟으며
입을 벌리고 자는 사람들 위를 걸어가는데
이곳은 아름답고 어린 땅
지상은 살아 있는 것들이 가득한
꿈보다도 더 꿈같은 세계
이 하늘을 넘어가면 낮과 밤이 없어진다지
다리 사이에 고인 솜바람
잔잔히 가라앉는 네 목소리
습한 살냄새 눈앞을 가리고
폐 속에 모아 온 사람들이 늪처럼 뒤섞일 때
나는 어머니가 갓 지은 밥을 덜어 내듯
한쪽 가슴을 덜어 내면서
한 번도 마주한 적 없는
내 아랫도리의 모습을 상상해 보는 것이었다 ***
작가 소개
지은이 : 이세화
2016년 <시작>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시집 <허물어지는 마음이 어디론가 흐르듯>을 썼다.
목차
시인의 말
제1부 누가 오늘을 기억할 것인가
기질 - 11
말씀 - 12
아가씨 - 15
경계 - 20
10월 - 23
환생 - 25
밤의 호수 - 27
안구건조증 - 29
신기루 - 31
거인 - 33
제2부 손을 맞잡은 아이들의 목 안으로 밤이 차오른다
속기 - 37
대결 - 38
뉴페이스 - 40
물감 - 43
부정교합 - 46
오늘의 풍경 - 50
춘곤증 - 52
플라스틱 러브 - 53
처음으로 나를 사랑하기 위해서였다 - 56
제3부 크림은 죄와 같은 속성이다. 무엇을 짜든 크림은 나온다.
믿음의 풍경 - 61
수채화 - 64
상담 시간 - 66
크림 - 68
사진 - 70
모르는 일 - 73
해독 - 76
면(面) - 78
꽃자리 - 80
서정 - 82
과조(寡照) - 84
제4부 백색소음
화분 - 87
만남 - 90
백색소음 - 94
역사 - 96
선인장 - 98
우울한 봄 - 101
회귀 - 104
다면체 - 106
라지의 엄마 - 108
바가지탕 - 110
제5부 영원히 잊지 않을게, 같은 말은 하지 않기로 하자
인간의 숲 - 115
수은 - 117
미래에게 - 119
편지 - 124
해설 이찬 감각의 현시와 다중 초점의 풍경들 - 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