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1991년 《동서문학》으로 등단한 박완호 시인의 일곱 번째 시집. 김정배 문학평론가는 박완호의 시를 ‘경험하는 주체’와 ‘기억하는 주체’ 모두를 하나의 시상으로 불러낸다고 분석했다. 어떤 하나의 의미나 개념으로 환원되기를 꺼리는, 그래서 시인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순간의 경험에 붙들리고, 자신도 기억하지 못하는 기억에 호명되어 불행과 행복 모두를 껴안게 되는 시인의 숙명을 다뤘다.
출판사 리뷰
치명적으로 붉은, 검정(어둠)의 세계
1991년 《동서문학》으로 등단한 박완호 시인의 일곱 번째 시집 『누군가 나를 검은 토마토라고 불렀다』가 시인동네 시인선 138로 출간되었다. 김정배 문학평론가는 박완호의 시를 ‘경험하는 주체’와 ‘기억하는 주체’ 모두를 하나의 시상으로 불러낸다고 분석했다. 어떤 하나의 의미나 개념으로 환원되기를 꺼리는, 그래서 시인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순간의 경험에 붙들리고, 자신도 기억하지 못하는 기억에 호명되어 불행과 행복 모두를 껴안게 되는 시인의 숙명을 다뤘다.
■ 해설 엿보기
궁금했다. 처음부터 한 몸이었을 행복과 불행이 이 시집의 텃밭에서 어떻게 자라는지. 시인이 경험하는 세계와 기억하는 세계 사이에서 지금껏 어떤 질문을 파종하며 살았는지. 궁금증과 호기심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의 작품에서 읽어낼 수 있는 ‘경험하는 주체’와 ‘기억하는 주체’에 대한 환기가 필요하다. 행동경제학자인 대니얼 카너먼(Daniel Kahneman)은 인간의 행복을 논하는 자리에서 ‘경험하는 주체’와 ‘기억하는 주체’를 구분하여 언급한 바 있다. 또한, 그는 인간이 좀 더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경험하는 자기(experiencing self)보다는 기억하는 자기(remembering self) 쪽에 무게중심을 옮겨놓아야 한다고 말한다. 인간은 순간을 기억할 수 없고, 모르는 것을 경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카너먼의 말에 동조한다면, “기억과 경험은 다르며, 미래란 기억을 예상하는 것”이 된다. 행복은 곧 기억하는 주체의 몫으로 작용한다.
불행의 경험과 행복한 기억은 때로 치명(致命)에 가닿기도 한다. 박완호 시인에게 치명은 “붉은 생각”「(토마토 베끼기」을 품고 있어, 한번 손에 쥐고 나면 놓치고 싶지 않은 것들로 채워진다. 혹은 “모래 속에 몸을 숨긴 채 꼬리만 살짝 내놓은”「(치명적인,」) 존재(들)로 받아들여진다. 그 치명적인 유혹을 감내하는 것은 시인만의 몫이 아니다. 무방비로 서 있는 수많은 ‘나’와 ‘너’다. 이때의 ‘나’는 ‘경험하는 주체’에 가깝다. 시인은 그 시적인 장면을 “적막의 자궁을 제 손으로 찢어가며 울음도 없이/홀로 태어나는”「(별책부록?K」) 현재의 순간으로 환원시킨다. 그 울음이 ‘너’라는 존재의 ‘기억하는 주체’로 인식되기 위해서는 보다 유기적인 이해의 관계망이 필요하다.
토마토의 불안을 본다, 는 문장을 쓰고 있을 때 그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마침표를 찍기 전이었다 마침표를 찍을까 말까를 고민하던 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토마토는,
치명적으로 붉은 생각을 품은, 손바닥으로 살짝 감싸기에 알맞은 크기의, 한번 손에 쥐고 나면 놓치고 싶지 않은, 말랑말랑하고도 질긴 근육질의, 처음인지 마지막인지 자꾸 되묻는 연애처럼 비릿해지는
식물성의 혈통으로 붉게 술렁이는 생즙, 마시고 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을, 벼락 맞은 나무처럼 창백해지는 유리잔, 피톨처럼 묻은 알갱이들, 엄마, 라고 하면 상투적인 것 같아 다른 발음으로 부르고 싶어지는
한 사람을 본다 사랑, 이라고 쓰면 그게 누구야 하는 질문들 비좁은 틈바구니를 가까스로 빠져나온, 토마토와 나의
낯빛이 짙붉게 포개지는 순간, 누군가 나를 검은 토마토라고 불렀다 나는 문득 낯부끄러운 꿈을 꾸다 들켜버린 토마토가 되고 말았다
- 「토마토 베끼기」 전문
왜 토마토일까? 시인이 마주하는 토마토는 “치명적으로 붉은 생각을 품고” 있는 자기 기억의 편린 중 하나이다. 이때의 토마토는 순간(경험)의 존재라기보다는 어떤 기억의 과정에 놓인 관계의 사물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이에 대해 시인은 “왜 토마토냐고요?/사과는 많이 건드렸으니까요”「(토마토 기분」)라고 고백한다. 토마토와 사과를 비교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확인하게 되는 것은 시인이 현시하는 단순한 시적 언술이 아니다. 그 시적 언술 안에 내재한 경험과 기억에 대한 불안이다. 기본적으로 그 불안은 사과의 느림과 토마토의 빠름이 대비되면서, 하나의 존재가치를 기억하고 경험하는 복합적인 방식으로 증언된다. 시인이 토마토의 기분을 지향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현재 토마토의 기분을 느끼고 있는 시인은 토마토를 토마토로 보지 못하는 많은 자아와 고투 중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빨간 토마토가 되지 못하고 파란 토마토에 머물러 있는 시인의 불안한 심리가 내재한 것이다. 그런데도 시인은 조금은 파랗고 탱탱하기까지 한, 빨개지기 직전의 어떤 감정을 경험의 시적 순간으로 농축해낸다. 시집의 표제작이기도 한 「토마토 베끼기」는 그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 「토마토 기분」에서 표출되는 감정을 스스로 유지하고 싶지만, 시인에게는 그것조차 만만찮은 일이다. ‘너’로 대변되는 치명적인 존재들이 끊임없이 ‘나’라는 존재가 지닌 기억과 경험의 순간을 복잡하게 와해시킨다. 그 지점에서 파생되는 불안을 단순히 타자의 탓으로만 돌릴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토마토의 불안을 생성하는 것은 바로 시인(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불안’이라는 문장에 마침표를 찍느냐 마느냐에 따라 그 의미는 언제든지 달라질 수 있음을 환기한다.
― 김정배(문학평론가·원광대 교수)
오래된 당신의 필체를 쏙 빼닮은 바람의 수화를 읽는다 폐쇄된 간이역의 녹슨 출입문처럼 뻐걱거리는 신호 대기음 앞에서 자꾸 주춤거리는 글자들, 지금은 아무에게도 전이되지 않을 슬픔의 철자법을 따로 익혀야 할 시간이다
느린 걸음으로 골목을 빠져나가는 키 작은 그림자, 휑한 옆구리 쪽으로 글썽해진 바람이 비껴간다 갈팡질팡하는 나뭇가지에 불규칙적으로 내려앉는 눈발들, 우편함에 쌓이는 주소불명의 편지들, 낯선 곳을 지나고 있을 사람의 안부가 문득 궁금해졌다
언젠가 무너지기 위해 똑바로 서는 기둥들처럼 나는 또 어디선가 무릎을 감싸고 주저앉기 위해 이 자리를 단단히 버텨야 한다 어딘가에서 첫 햇살에 아려오는 눈을 비비고 있을 오늘의 당신이듯
― 「오늘의 당신」 전문
신이 인간을 만든 까닭은 외로움을 견디기 싫어서였을 거야
텅 빈 우주, 저 혼자밖에 없는
공허를 감당하기가 버거웠던 탓일 거야
창조란 무릇,
적막의 자궁을 제 손으로 찢어가며 울음도 없이
홀로 태어나는 법
적막조차도 없던, 무어라고 부를 만한
어떤 것도 보이지 않던 그때, 신은
저를 불러줄 누군가가 필요했을 거야
하늘이, 땅이, 구름이, 온갖 풀과 나무와 새와 물고기들이 한
목소리로 제 이름을 부르는
최초의 음악을 누군가와 함께 듣고 싶었을 거야
갓 데뷔한 지휘자인 그는
세상의 온갖 것들과 나란한 사람의 합주를 들으며
비어 있는 칸들을 하나씩 채워나갔을 거야
신이 인간을 만든 건
저 혼자만으로는 감당하고 싶지 않은
그 지독한 허기,
― 「별책부록―K」 전문
우리, 세상 같은 건 이제 없는 셈 쳐도 되지요
세상에나!
이곳을 지옥으로 만들어야만
그 빌어먹을 천국이 온다잖아요
돈 같은 거야 이미 다 가진 셈 치고
멋진 애인도 오래전에 생긴 셈 치고
두 동강 난 땅 따위야 애초에 하나인 셈 치고
까짓 천당이야 한 천 년쯤 전에 다녀온 셈 치지요
불멸의 노래와 사랑을
누구에게는 주고 누구에게는 안 주는
이상한 평등은 아예 없는 셈 치는 게 나을까요
당신이나 나나 아무것도 아닌 셈 치고
나비처럼 새처럼 어디로 날아간 셈 치고
삶이든 죽음이든,
불행이든 행복이든,
뭐든 처음부터 한 몸이었을 거라고
모르는 척,
그냥 속은 셈 치면 될 테니까요
― 「셈 치기」 전문
작가 소개
지은이 : 박완호
충북 진천에서 태어나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1991년 《동서문학》으로 등단했으며, 시집으로 『기억을 만난 적 있나요?』 『너무 많은 당신』 『물의 낯에 지문을 새기다』 『아내의 문신』 『염소의 허기가 세상을 흔든다』 『내 안의 흔들림』 등이 있다. 〈김춘수시문학상〉, 〈시와시학 팔로우시인상〉을 수상했다. 〈서쪽〉 동인. 현재 풍생고등학교에서 국어 교사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목차
제1부
오늘의 당신 13
토마토 베끼기 14
블랙 코드 16
별책부록 18
치명적인, 20
한 무정부주의자의 기억 22
모르는 쪽으로 고개가 돈다 24
외길 26
파꽃 28
안녕, 가세요? 30
봄을 의심하다 32
양계장 34
결 36
사월 초하루 38
제2부
구부러진 골목 41
허무답보(虛無踏步) 42
진위천 44
물로 뛰어든 개구리를 보고는 46
엄마를 버리다 47
야사 읽는 밤 48
진심, 괴물 50
셈 치기 52
어떤 달이 소식을 물어왔다 54
시인의 근친 55
슬프지 않은데도 눈물 나던 56
토마토 기분 58
백곡 단장(斷章) 60
봄 꿈 61
꼭 시가 아니라도 62
행성 번호 210 64
제3부
오늘의 나는, 67
경계를 서성이는 동안 68
한낮을 헤매다 70
장미의 저녁 72
당신의 발음 73
개구리 74
모란 사구(四九) 76
乙 78
탄천 79
실낙원 80
나사못 82
소낙비 84
피아노 85
나비의 전언 86
제4부
이슬 비친다는 말, 89
나의 새들, 90
폐가로군요 92
페달 소리 94
슬플 때는 왼손을 써요 96
빈집 98
남해 여자 99
나는 전속력이다 100
간절곶 102
춘설(春雪) 104
도돌이표 엄마 105
몸빛, 아버지 106
쑥꽃 108
마성(麻城) 터널 109
막차 110
해설
치명적으로 붉은, 검정(어둠)의 세계 111
김정배(문학평론가·원광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