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리뷰
'사람과 글과 약이 있는 인문약방' 지은이 인터뷰1. 책 제목이 ‘사람과 글과 약이 있는 인문약방’입니다. ‘인문약방’이 어떤 곳인지 설명 부탁드립니다.
‘인문약방’은 인문학 공동체인 문탁네트워크(이하 문탁)에서 공부하는 네 명이 모여서 만든 공부와 활동의 현장입니다. 인문 + 약방이라는 조합에서 예상할 수 있듯이 인문학 전공자와 약학 전공자가 그 구성원입니다. 간단히 말한다면 이 두 분야의 통합을 시도한다고 할 수 있고, 더 근본적으로는 건강한 삶 또는 좋은 삶(양생)에 대해 연구하고 실천하고자 다양한 실험을 하는 곳입니다. 그래서 정식 명칭은 <마을양생 실험실, 인문약방>입니다.
우리 넷은 인문약방에 모여 공부하고, 그 공부를 기반으로 먹고살고, 글을 쓰는 등 여러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공부의 중심은 1년에 걸쳐서 진행하는 ‘양생프로젝트’라는 기획세미나입니다. 그리고 구성원별로 개별 세미나를 꾸려서 자신의 공부를 심화합니다. 올해(2021) ‘양생프로젝트’에서는 페미니즘, 『동의보감』 그리고 마음에 대해 공부합니다. 실천적으로는 몸의 일기를 쓰고 명상을 해보려고 합니다. 저는 한의학과 명리학의 기반이 되는 황로(黃老)사상을 공부하는 세미나를 열었습니다. 그리고 <일리치 약국>을 곧 오픈합니다. 처방전을 받지 않는 약국으로 그간 공부한 동서양의 의학 지식과 임상 경험을 살려 비싸지 않은 일상보약을 판매하려고 합니다.
또 구성원들 각자는 글쓰기를 하고 있습니다. 공부가 일상을 만나 글쓰기로 정리된다고 말해야 할까요? 글쓰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수행의 도구입니다. 어머니를 간병하는 이야기인 ‘간병블루스’, 인문학공동체 10년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공동체가 양생이다’, 지인들의 증상에 적합한 문학 작품을 처방하는 ‘문학처방전’을 각자 써서 문탁 홈페이지에 게시하고 있습니다. 저는 인문학적 시선으로 본 약과 의료에 대한 글을 썼는데 이번에 『사람과 글과 약이 있는 인문약방』이라는 책으로 나오게 되었습니다.
<인문약방, 호모큐라스를 위한 처방전>이라는 팟캐스트도 진행하고 있습니다. 책을 중심으로 의료, 몸, 치유 나아가 삶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작년 말에는 <한국도서관협회>의 공모사업으로 유튜브에 책을 소개하는 ‘북튜브’를 진행했습니다. 생각보다 주변의 반응이 좋아서 자체적으로 올해는 책 소개나 양생 실천의 팁 등을 짧고 재미있게 만들어 유튜브에 올릴 계획입니다.
2. 이 책에 나오는 약사로서의 선생님의 이력이 흥미롭습니다. 종합병원의 약사, 천식을 앓고 있으면서 그것을 드러내고 싶어하지 않는 약사, 힐링프로그램을 전전하는 약사 등을 거쳐 현재는 알바 약사로 일하시며, ‘인문약방’의 약사로 활동하고 계시는데요. 이 이력의 변천이 선생님께서 몸(병)이나 삶을 바라보는 관점의 변화와도 궤를 함께하지 않나 싶습니다. 간단히 얘기해 주실 수 있을까요?
저는 과학을 신봉하는 이과 출신으로 오랫동안 과학주의자로 살아왔습니다. 약학도 생물과 화학이 중심이 되는 학문으로 기계적이고 공식적인 과학적 체계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저 또한 몸을 공식에 대입되는 기계처럼 대했습니다. ‘어떤 약을 복용하면 몸속에서 어떻게 대사가 되어서 어떤 작용을 하고 어떻게 배설되어 몸 밖으로 나온다’라고요. 사람들 각자의 특이성이 삭제되어 구성된 학문이었지만 과학이라서 의심 없이 받아들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 제게도 삶은 몇 개의 공식만으로는 풀어지지 않는 복잡한 것이었어요. 그래도 노력해서 능력과 돈이 생기면 다 잘 풀릴 것이라고 생각했었죠.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내가 노력해도 안 되는 게 있다는 걸 알고 신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보통 ‘회심’이라고 하죠. 하지만 ‘영성’을 미신적이고 기복적으로 접근했습니다. 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지요. 이번에는 영적으로 치유돼야지 완전무결하게 몸이 치유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치유가 되지 않는다는 것은 내 믿음에 문제가 있든지 아니면 내가 모르는 신의 깊은 뜻이었습니다. 극과 극은 통합니다. 무언가에 절대성을 부여하고 의존하는 이런 삶의 태도는 형태만 달랐지 동전의 앞뒤처럼 밀착되어 있었죠.
인문학 공부는 이런 극단적인 저의 성향에 균형을 주었습니다. 이데올로기나 도그마로부터 벗어나 내가 절대적으로 옳다고 믿고 있는 바로 그 지점에 질문을 던질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인문학이 말하는 ‘영성’은 ‘자기 변형’입니다. 그것은 끊임없이 변하고 있는 지금을 잘 살아가기 위한 것이지요. 똑같은 자기를 재생산하거나 강화하는 삶을 살아가지 않기 위해서 공부를 합니다.
인문학을 공부하고 나서 더이상 몸을 정상과 비정상의 이분법으로 나누지 않게 되었습니다. 아픈 몸도 건강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아픔은 삶에서 조절하며 그 의미를 바꿔 갑니다. 이제 건강이란 나와 세상과의 관계성으로 이해합니다. 생생하고 활발하게 통하는 관계성이 바로 건강입니다. 즉, 나의 건강에서 타자를 배제할 수 없습니다. 타자와 관계를 통한 자기 변형이 좋은 삶을 살아가는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3. 선생님께서는 책을 굉장히 싫어하셨다고 했는데, 책을 많이 읽고, 공부도 하고, 글도 쓰게 되셨습니다. 문탁네트워크라는 인문학 공동체 안에서 활동하셨기에 가능하셨던 일이 아닌가 싶은데요, 선생님께 공동체란 어떤 의미인가요?
‘공동체’, 하면 저는 ‘공부’와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처음 문탁에 접속한 것도 공부에 대한 관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때는 지금과 공부에 대한 상이 전혀 달랐어요. 공부란 나보다 뛰어난 사람에게 가르침을 받아서 내가 습득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세미나 형식으로 공부하고, 그것을 에세이로 정리해 본 적은 공동체로 들어오기 전에 단 한 번도 없었거든요.
제일 특이했던 것은 다양한 나이의 사람들이 모여서 전문성이나 전공과는 관계없이 하고 싶은 공부를 ‘맨땅에 헤딩’하는 식으로 한다는 점이었습니다. 물론 세미나에 따라 튜터가 있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세미나는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사람들마다 저마다 지식의 수준도, 살아온 커리어도, 분야도 달랐지만 그렇기 때문에 같은 텍스트를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었습니다. 함께 공부하면 자신의 좁은 시야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공부한 내용이 새로운 가치가 되어 조금이나마 실천으로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은 함께 공부한 친구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가치들이 지금 세상의 가치와는 달랐지만 함께였기에 용기를 가지고 내 삶에 적용할 수 있었고 공동체에서 실험해 볼 수 있었습니다. 물론 항상 확신에 차서 무언가를 시도하는 것은 아닙니다. ‘함께’는 두려움에 반대쪽에 있는, 다른 말로 한다면 ‘이성’ 또는 ‘지혜’에 더 가까워질 수 있는 있는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떨 땐 친구들의 따끔한 충고에 정곡이 찔려 괴로울 때도 있지만 공부는 그런 충고에 마음을 열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듣기 좋은 말로 서로 끈끈함을 키우는 게 우정이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다른 ‘우정’을 경험하게 되었죠. 여러 명이 함께 복닥거리다 보면 갈등도 있기 마련이지만 여러 친구들의 우정이 가세하면 갈등에 대한 객관성도 생기게 되고 결국 벗어나게 되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이런 과정이 늘 성공하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서 공동체 자체도 늘 성찰하는 기능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결국 공동체란 제게 ‘스승’이고 ‘우정’이고 ‘삶의 방식’입니다.
4. 선생님처럼 특별한 전문적 지식이 없는 일반인들이 의료서비스에 무작정 의존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몸을 스스로 돌보는 삶을 어떤 식으로 실천할 수 있을까요?
스스로 자신의 몸을 돌본다는 것은 의료 지식과 정보를 스스로 갖춰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의료서비스와 담을 쌓고 살라는 말도 아닙니다. 무작정 의존하는 것이 왜 문제가 될까요? 의료가 내 몸에 저항할 수 없는 권위가 되어 버릴 때, 나에게 그 권위를 판단하고 비판할 수 있는 힘이 없을 때 문제가 됩니다. 의료서비스를 이용할 돈이 없다면? 과잉 진료와 치료가 몸에 해를 준다면? 무엇보다 의료 없이 스스로 건강하게 살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되어 버리는 게 가장 큰 문제일 겁니다.
이런 편견들이 의존성을 키웁니다. 무엇보다 ‘아픔’ 또는 ‘질병’을 ‘비정상’이나 물리쳐야 할 ‘적’으로 생각해 버린다면 우리의 삶은 비정상이 됩니다. 왜냐하면 모든 생물은 아픔을 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겪는 ‘아픔’에 대한 부정은 ‘죽음’에 대한 부정으로 이어집니다. 결국 아플 수밖에 없고 죽을 수밖에 없는 삶 자체에 대해 부정적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이지요. 저는 ‘아픔’을 삶의 한 모습으로 일단 인정해야 아프건 아프지 않건 일상을 잘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다음은 내 몸에 대한 ‘앎’을 일상 속에서 쌓아 가야 합니다. 그러한 앎이 스스로를 돌보는 힘이 됩니다. 예컨대 우리는 어렸을 때 감기나 상처 등 사소한 ‘아픔’을 겪으면서 면역력을 키워 옵니다. 바이러스나 세균들에 대한 앎을 몸 자체가 습득하는 과정에서 면역시스템이 구축됩니다. 또 어떤 음식을 먹었을 때 탈이 난다거나, 얼마나 먹었을 때 문제가 생긴다거나 등 이런 경험들이 쌓여야 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만 아파도 바로 약을 먹어 버리기 때문에 왜 아픈 건지, 좀 있었으면 괜찮아졌을지 어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충분히 앓아야 앎이 생깁니다. 무조건 참으라는 말은 물론 아닙니다. 결국 일상 속에서 매번 어떤 선택들을 스스로 하고 그 결과를 감당하는 과정에서 앎이 생깁니다. 의존이라는 편함이 아닌 스스로 감당하는 불편함을 선택하고 실천하는 윤리를 스스로 구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럴 때 음식, 운동, 수면 등 상식적 수준에서 몸을 관리한다면 건강한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5. 끝으로, 현직 약사로서 선생님께서 생각하시는 ‘양생’(養生), 좋은 삶이란 어떤 것인지 듣고 싶습니다.
앞의 질문들의 합이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되지 않을까요? 먼저 양생이란 말을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생(삶)을 기른다’입니다. 즉, 양생이란 삶을, 일상을 잘 살아가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몸의 건강에만 국한된 개념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따라서 ‘스스로 자신의 몸을 돌보는 삶’과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자율적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전문가에 의존하거나 기존의 이데올로기 등에 매여서는 양생은 불가능합니다. 즉, 스스로 자신의 윤리를 매번 구성하고 실천하는 삶이 양생입니다. 자신이 구성한 윤리라도 고정된다면 이미 양생이 아닙니다.
변화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어디에 의존하고 있지 않다는 자율을 조건으로 삼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지속적으로 공부하는 방법밖에는 없는 것 같습니다. 특히 고전으로 불리는 인문학 책 속에는 삶의 지혜가 담겨 있고 우리는 공부를 통해 그 지혜에 다가갈 수 있습니다.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성찰하고 거기서 무언가를 깨닫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겁니다. 이런 성찰적 삶의 자세는 말만큼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나마 공부를 하다 보면 더 가능성이 있겠지요. 저도 잘하지는 못하지만 과하지 않게 꾸준히 공부하려고 노력 중입니다. 공부도 과하게 욕심으로 하면 독이 되는 것 같아요.
양생의 삶은 혼자서는 더 어려운 것 같습니다. ‘거울’이 되어 주는 타자를 통해 나를 비춰봐야 성찰도 가능합니다. ‘공부’와 ‘친구’는 나를 비추는 타자로서 결국 나에게 ‘스승’이었습니다. 더 나아간다면 ‘자연’도 그런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동의보감』을 공부하고 자연의 변화와 시절과 인연에 리듬을 맞춰 살아가는 게 중요하다는 걸 알았습니다. 이는 결국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때에 맞춰 일상을 잘 조절해가는 삶이 아닐까 싶습니다. 요새는 너무 넘쳐나는 세상이라 오히려 줄이고 덜어내는 삶이 더 양생에 가까울지도 모르겠습니다.

내게 타인은 신의 사랑을 실천할 대상이었고 나는 신에게 선택된 사람이었다. 신에게 선택된 만큼 그에 걸맞게 살려고 노력하며 살았던 것 같다. 심하게 말하면 내가 착해지고 특별해져 구원받는 게 제일 중요했다. 하지만 스피노자에 따르면 우리는 원자적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끊임없는 관계 속에서 존재하고 있다. 수많은 상호 영향 속에서 그때그때 나는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타인들 속에서, 타인들은 내 속에서 존재하고 있다. 이런 존재들 사이에 더 낫고 못나고는 없다. 스피노자는 모든 존재들은 완전하다고 말한다.
나는 ‘타인’에 대해 화두를 갖게 되었다. 늘 나와 경계 짓고 나와는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던 존재들에 대해서. 이제 나 혼자 잘해서 잘 살 수 있는 건 불가능함을 안다. 스피노자는 우리가 자유로워진다는 것은 정념에 휘둘리지 않는 능동적인 상태가 되는 것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혼자서는 힘들다고 말한다. 타인들과 공통의 감각을 키울 때 우리는 훨씬 더 자유로워질 수 있다. 바꿔 말한다면 내 존재적 조건인 외부와의 관계에서 정념도 어쩔 수 없이 생기지만, 정념을 넘어 이성 또는 지혜를 만드는 조건도 다름 아닌 타인과의 관계이다. 타인과 (공)통할 수 있을 때 그 차이도 받아들일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스피노자가 말하는 ‘우정’이고 지혜이다.(「프롤로그: 인문약방, 여기가 로두스다!」)
하지만 약사가 된 나는 돈 많이 벌겠다는 목표와는 한참 먼 지점에 서 있다. 뭐든 열심히 했고 그렇다고 돈과 무관하게 산 것도 아니지만 말이다. 전문직이라는 철옹성에서도 자본주의 사회가 원하는 대로 살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또 여기저기 샛길로 빠지면서 철옹성에서 정주하고 싶지도 않았다. 지금은 적게 벌고 적게 쓰자고 일주일에 이틀 알바 약사로 일한다. (……) ‘전문성’ 자체가 ‘상품’이다(이반 일리치는 『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 허택 옮김, 느린걸음, 2014에서 전문성을 상품으로 말하고 있다). 점점 더 세상은 이 상품을 구매하지 않으면 살 수 없게 될 것이다. 약사가 되어 돈을 많이 벌겠다는 생각은 전문성이라는 상품에서 기인했다는 걸 이제 알겠다. 약사가 되어 부자로 살길 원했던 엄마의 기대를 저버린 딸이 되었지만 오히려 나는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번 돈으로 부유해졌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그런 삶이 건강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우선은 이런 전문성과 상품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거두고 자신의 자율성을 믿어 봤으면 좋겠다. 나 역시도 전문가이지만, 전문성에 대항할 수 있는 길을 찾아보고 싶다. 자율성을 회복하는 일은 혼자서는 어려울 거다. 함께할 친구들을 찾아보자. 삶을 소비가 아닌 자율적 생산으로 함께 채울 친구들 말이다.(「1장: 약사가 되면 돈 많이 벌 줄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