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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사시로 쓴 안희숙, 석영 딸의 못다한 이야기
서고 | 부모님 | 2021.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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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서 소개

안희숙(安熙淑) 연세대 명예교수의 두 번째 책이 출간됐다. 2년 전 펴낸《인생의 건반을 두드리다》(서고, 2019)에 담지 못한 이야기를 모았다. 안희숙 교수는 원로 피아니스트로 ‘개척기’ 연세대 음대의 산 증인이다. 29년여 동안 수많은 제자들을 전문 연주자, 교육자로 길러냈다. 안 교수 스스로도 연주자의 길과 교육자의 길을 병행하며 예술가의 길을 걸어왔다.

이번에 안 교수는 ‘서사시’ 형식을 빌려 새로운 글쓰기에 도전했다. ‘못다한’ 이야기라는 콘셉트로 가슴 속에 담아 두었던 기억을 문장의 형식으로 만들었다. 문장이 생명을 얻어 봄꽃처럼 피어났다. 그 개화(開花)의 책이 바로 《안희숙, 석영 딸의 못다한 이야기》(서고)다.

  출판사 리뷰

원로 피아니스트 안희숙 교수의 못다한 이야기
▶‘서사시’라는 새로운 글쓰기 장르 도전… ‘삶의 글밭’ 거닐어
▶외조부 김일선 선생… 황해도 ‘개성부자’로 민족 근대화 교육에 헌신
▶아버지 안석주… 근대화 문화예술의 팔방미인이자 무소불능 재인(才人)
▶어머니 김흥봉… 10남매를 열과 성으로 길러낸 ‘훌륭한 어머니’


안희숙(安熙淑) 연세대 명예교수의 두 번째 책 《안희숙, 석영夕影 安碩柱딸의 못다한 이야기》가 출간됐다. 2년 전 펴낸《인생의 건반을 두드리다》(서고, 2019)에 담지 못한 이야기를 모았다.

안희숙 교수는 원로 피아니스트로 ‘개척기’ 연세대 음대의 산 증인이다. 29년여 동안 수많은 제자들을 전문 연주자, 교육자로 길러냈다. 안 교수 스스로도 연주자의 길과 교육자의 길을 병행하며 예술가의 길을 걸어왔다.

이번에 안 교수는 ‘서사시’ 형식을 빌려 새로운 글쓰기에 도전했다. ‘못다한’ 이야기라는 콘셉트로 가슴 속에 담아 두었던 기억을 문장의 형식으로 만들었다. 문장이 생명을 얻어 봄꽃처럼 피어났다. 그 개화(開花)의 책이 바로 《안희숙, 석영 딸의 못다한 이야기》(서고)다.

그 연세만큼이나 문장이 익었다는 점에 박수를 보낸다. 화려한 미사여구의 문장이 아니라 단단하게 채워진 삶의 글밭이랄까. 출판사 편집자는 “손 댈 문장이 별로 없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의 일생(一生)이 작품이 되었다. 그 글이 때로 독자를 웃게 만들고 때로 울게 한다.

나의 어머니,
자그마한 키에 미인은 아니셨지만
하얀 피부에 선한 큰 눈의 소유자셨어.
어머니는 가끔 이런 말씀 주셨지.

어느 날 우리집을 지나던 스님이 집 안 기웃거리다가
어머니와 눈이 마주쳤지.
문 열고 들어와 어머니 찬찬히 본 뒤
이렇게 내뱉는 것이었어.

“부인! 키가 한치만 더 컸더라면, 정승 부인이 되었을 것을….”

이렇게 말하며 혀를 찼다나?
우리집이 가난해지자 어머니는
아쉬운 듯 그 말씀을 자주 하셨지
- 14쪽

연과 행을 나누는 시(詩)의 형식보다 서사의 한 대상을 포착해 이야기 형식으로 풀어내는 글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비록 등단 작가는 아니나 담백하면서도 개성이 느껴지는 표현이 독자에게 읽는 재미를 준다. 이런 재능을 오랜 동안 숨겨온 사실이 놀랍기만 한데, 안 교수가 우리나라 근대화 초기 문화예술계의 팔방미인으로 불린 석영(夕影) 안석주(安碩柱·1901~1950) 선생의 딸이라는 점을 떠올리면 그리 놀랄 일이 아닌 듯하다.

진명여고 역사의 한 페이지

안희숙 교수의 외조부 이야기는 흥미롭다. 김일선(金一善·1872~1935) 선생은 경성보육원 설립자 겸 이사, 인창학교 설립자 겸 교장, 홍동학교 설립자 겸 교장, 삼흥보통학교 부교장, 중앙기독청년회 이사, 보린회(保隣會) 이사,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 이사 등을 역임한 근대화 초기 교육가이다.
안 교수 회고에 따르면 김일선 선생은 서울 장안에 이름난 예수교 장로였다. 그의 부고 기사가 조선일보에 크게 실릴 정도였다.

이런 일화도 흥미로운데 진명여고가 운영난을 겪자 훗날 교장을 역임한 이세정 선생이 매일 같이 김일선 선생을 찾아왔다고 한다. 결국 안석주 김흥봉의 간청으로 진명이 어려움을 해소했는데 얼마 후 학교 논두렁에서 금이 쏟아졌다고 한다. 하늘이 도운 것이 틀림없다. 진명여고는 이 사실을 알고 있을까.

진명여고가 경제적으로 위기에 처했을 때
훗날 교장 선생님이 되셨고 당시 체육 선생님이신
이세정 선생님이 외할아버지의 사무 정에
저녁이면 매일같이 찾아오셨어.
“제발 진명에 오셔서 도와주세요.”
몇 시간을 꿇어앉아 간절히 조르셨다고 해.

이 이야기는 우리 부모님 통해 전해 들었는데
“몇 달간 저렇게 지성(至性)으로 조르는데 들어주세요.”
부모님이 장인어른에게 그리고
친정아버지에게 청을 드렸다고 해.
외할아버지는 자식 청은 외면하기 어려웠던지
결국 진명에 가셔서 잘 해결해 주셨어.

얼마 후, 이게 웬일인가.
학교 소지 논두렁에서 돌연 금이 쏟아지다니….
그 후 진명이 다시 부흥하여
지금의 일류학교가 이루어진 것이고….
-27~28쪽

석영 안석주, 아버지에 대한 추억

안희숙 교수의 선친인 석영 안석주는 “못하는 게 없는” 전방위 예술인이었다. 신문기자이자 삽화가(당시 신문 삽화는 일본에서 유행하던 만문만화[漫文漫畵]로, 시사나 풍자적 소재를 바탕으로 한 만화를 일컫는다), 연극배우, 영화감독, 시나리오 작가, 시인, 소설가이자 화가였다.

근대 예술을 종횡무진 달리며 화려하게 꽃을 피웠으며 예술적인 성취를 이루었다. 소설가이자 《매일신보》 학예부장, 고려대 교수를 지냈던 조용만(趙容萬·1909~1995)은 “글 잘 쓰고 그림 잘 그리고 노래 잘 부르는 무소불능의 재인(才人)”이라 석영을 명명했다.

안희숙 교수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석영은 피아노, 바이올린, 성악을 어느 정도 즐길 수 있는 경지에 있었고 노래도 잘 불렀다. 그런 천부적 재능 덕분인지, 10남매 자녀들도 음악인으로 성장했다.
석영의 장남은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작곡한 안병원(安丙元·작고), 차녀는 피아니스트 안희숙 연세대 명예교수, 삼녀는 ‘안희복 오페라단’을 만든 안희복(安熙福) 한세대 명예교수 등이다. 다른 자녀들도 음대, 미대에 진학할 만큼 음악적 재능이 뛰어났다.

아버지는 정말이지 전 방위적 예술가셨어.
특별히 배운 일 없으시면서
만돌린, 플루트, 기타, 바이올린
만지기만 하면 저절로 음악이 되었어.
피아노에 앉으시면 무엇이든 잘 치셨고.
정말 천재가 아닌가!
이탈리아 민요 <바다로 가자>를
유별나게 좋아하셨던 아버지.
함께 불렀던 일도 있었고
술좌석에서 늘 그 노래 부르셨는데
너무 잘 부르셨다지.

“물결 춤춘다. 바다 위에서
백구 춤춘다. 바다 위에서
흰 돛단배도 바다 위에서
바다 그 바다 끝이 없다.
해가 서산을 넘어서 가면
달은 동녘에 솟아오네.
크고 끝없는 그 바다 위로
나를 불러서 오라는 듯
바다로 가자 바다로 가자
물결 넘실 뛰노는 바다로 가자.”

아버지는 유난히 이 곡 좋아하신 이유는
아마 생전에 하고 싶은 것이 많으시고
포부가 크셔서 깊고 넓은 바다
좋아하신 것은 아닐까.
-51~52쪽

조선일보 기자들이 쓴 《조선일보 사람들》(2004)에 따르면 안석주는 배우로 먼저 이름을 날렸다. 22세 때인 1923년 최초의 신극단체인 토월회의 연극 <부활>에서 남자 주인공 ‘네플류도프 공작’ 역을 맡아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카추샤’ 역을 맡은 여배우 이월화(李月華)와 함께 부른 ‘카추샤 애처롭다 이별하기 서러워’라는 노래는 장안의 유행곡이었다고 한다.

안석주는 한국 최초의 근대 미술단체인 ‘서화협회’에서 만화를 배우고 모교인 휘문고보에서 도화 강사(미술 교사)로 일했다. 1922년 《동아일보》에 연재된 나도향의 소설 <환희>에 삽화를 그리며 신문에 데뷔했다.

1927년 《조선일보》에 입사한 후 시를 쓰기도 하고 <청충홍충(靑蟲紅蟲)>(1929), <성군(星群)>(1932), <춘풍> (1935), <월파선생>(1936) 등 연재소설을 썼다. 또 신문 삽화를 그리면서 진가를 발휘했다. 특히 홍명희(洪命熹·1888~?)의 대하소설 <임꺽정>의 삽화를 그리면서 큰 주목을 받았다. 당시 사회부 기자 김을한은 “석영이 옛날 풍속을 그리는 삽화는 처음이건만 어찌나 삽화를 잘 그렸던지 벽초(홍명희)의 소설도 걸작이지만 석영의 삽화 때문에 더욱 빛이 난다고들 하였다”고 회고한 일이 있다.

작가이자 화가로서 다양한 활동을 벌였던 석영이 영화와 본격적으로 인연을 맺은 것은 소설 <상록수>의 심훈(沈熏·1901~1936)이 감독한 영화 <먼동이 틀 때>(1927)의 미술감독을 맡으면서다. 또 신문 연재소설 <춘풍>을 영화로 만들어 흥행에 성공했다고 전한다. 석영은 자신의 재능을 간파, 이후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영화를 제작했다.

광복 후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부회장, 대한영화사 전무이사, 대한영화협회 이사장 등을 맡아 좌우로 갈린 영화계 재건에 힘썼다. 석영은 《조선문화30년사》를 집필하던 중 쓰러지게 되고 그 와중에 여순반란사건을 소재로 ‘뉴스 영화’를 제작하다 끝내 일어서지 못했다. 1950년 2월 24일 오전 5시. 50세의 일기로 서울 신당동 291-33번지 자택에서 영면했다.

훌륭한 어머니 김흥봉 여사

석영의 아내인 김흥봉 여사는 10남매를 홀로 키우며 뒷바라지를 했다. 심지어 부산 피란 시절, 국방부 산하 ‘정훈 어린이 음악대’가 조직되었을 때 식솔들의 밥과 빨래를 도맡아 살림을 살았다. 역사는 전면에 나선 사람만 주목하지만, 이면에 헌신한 이들을 부각시키는 장르가 문학이다. 안희숙 교수는 회고의 형식을 빌려 자신의 기억에 생명을 불어 넣었다.

어머니가 자주 하시던 말씀 들려줄게.
어머니 왈(曰),

“내 나이 열일곱, 너희 아버지(안석주) 열아홉에 결혼식을 올렸단다. 신축한 기와집에서 신혼살림을 살고 있었지. 그때가 아마 네 큰언니 희원이를 갓 낳을 때였을 게다.
어느 날 우리 식구가 내 친정에 가 있는 동안 그 기와집이 왕창 무너졌어. 그건 최창악이란 건축가가 돈을 떼어먹고 엉성하게 집을 지었던 거지. 지금이나 그때나 협잡꾼은 늘 있던 것 같아. 아차, 하면 우리 식구가 다 죽을 수도 있었지…….
하는 수 없이 너희 외할아버지 댁에 들어가 살게 되고 뜻 아니게 처가살이를 하게 된 거란다.
그 시절, 우리 결혼이 이른 나이도 아니었지. 난 인력거를 타고 배화학교를 졸업도 했지.”
-17쪽

어머니는 서교동 아들네에 사셨지만
자주 딸네 집에 오셨어.
오시면 맛있는 요리 늘 해주셨지.
내가 좋아하는 신선로(神仙爐) 만들고
‘사위는 장모 사랑’이라고 그가 좋아하던
냉면 삶아 주셨어.
어린 시절 이북에 살던 남편
“어머니가 메밀로 냉면해주셨다”고
그 맛 잊지 못한다 평소 얘기했어.
그런데 우리 어머니는
서울식 밀가루 국수로 만든 냉면에
갖은 고명 올려 만드셨어.
사위는 “장모님 최고” 엄지 척하며 좋아했어.
-129쪽

《경향신문》 1971년 4월 8일자 7면에 이런 기사가 실렸었다. ‘한국소년지도자협회(회장 정홍교)는 5월 5일 49회 어린이날을 맞아 소년소녀 선도에 공이 큰 김흥봉 여사에게 훌륭한 어머니상을 수여했다.’ 10남매를 열과 성으로 모두 훌륭히 키워낸 것이다.
큰아들(안병원)을 따라 캐나다로 떠난 어머니가 잠시 귀국했을 때 안희숙 교수와의 만남도 감동적이다. 그 만남이 마지막이 될 줄은 누구도 몰랐을 것이다. 안 교수는 한 달 동안 정성을 다해 어머니를 모셨다.

특별히 언니가 어머니 모시고
서울 봉원동 집으로 왔어.
다시 못 뵐 줄 알았는데
반가움 이루 다 말할 수 없었지.
어머니를 새로 지은 2층 방에 안내했어.
오랜 만에 만난 외손자 진호
제일 반가워하셨어.
그 애 귀여워하고 늘 기도해 주셨어.
그리고 어머니 따르던 옛 여인들,
두꺼비 아주머니, 경난 아주머니, 희봉 언니
모두 만나 못다 한 회포
다 푸시고 석별의 정 나누셨어.
우리는 어머니 모시는 동안
최선을 다하려 힘썼고
그 시간이 정말 행복했어.
하지만 짧은 한 달의 만남도
쏜살같이 지나가 버렸어.
떠나시기 전날,
중국 음식점에서 송별회 가졌어.
얼마나 맛있게 드시던지….
-148~149쪽

김흥봉 여사는 캐나다로 돌아간 직후 위암 판정을 받았다. 암 투병으로 심신이 힘들었을 테지만 자식들 먹이려 김을 1000장이나 재웠다고 한다. 훗날 그 이야기를 전해 듣고 안희숙 교수는 가슴이 미어졌다는 것이다. 어머니 김흥봉 여사는 간호사들이 고생할까봐 돌아가시기 며칠 전 곡기를 끊었다. 그리고 많은 자식들의 축복 속에 캐나다 토론토의 가톨릭 성당 공원에 묻혔다.

사제동행 ‘희연회’

안희숙 교수는 연세대 음대 피아노과에서 29년여 동안 가르쳤다. 셀 수 없이 많은 제자가 그의 손을 거쳐 갔다. 은퇴하고 얼마 후 교회, 혹은 교육계, 사회에서 활약하고 또 음악을 사랑하는 제자들이 한 명 한 명 모이기 시작해 현재 26명에 이르게 되었다.
안 교수와 제자들은 ‘희연회’라는 모임을 결성했다. 희연회의 ‘희’자는 안희숙의 ‘희’를, ‘연’은 연세대 ‘연’자를 합한 것이다.
친목과 수다 떠는 일에 그치지 않고, 의논 끝에 정기 연주회를 갖기로 했다. 연주회마다 타이틀을 달리 정했는데 곡에 따라 ‘봄의 향연’, 어느 해는 ‘심포니의 밤’, 또 ‘춤곡의 향연’ 등으로 명명했고 한 해는 독주, 한 해는 앙상블 등으로 변화를 주었다. 희연회는 점차 활동 범위를 넓혀 학생들을 위한 정기 마스터클래스, 혹은 지방공연, 국외 연주여행 등을 펼치고 있다.

희연회는 ‘의리의 모임’이지만, 나는 기꺼이 ‘천사의 모임’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각박한 이 세상을 음악으로 화합하고 또 따뜻한 우정으로 서로 돕고, 사랑하는 그 마음이 합하여 앙상블을 이루는 일은 정말 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현재 희연회 멤버들은 코로나 시대를 극복하기 위해 뭔가 생산적인 일을 계속하고 있다. 디지털 시대에 맞게 유튜브, 인스타그램 라이브, 모바일 음원 스트리밍 등을 통한 연주와 연구 활동을 병행하고 있어 날 놀라게 한다.
-198쪽

좋은 삶이 좋은 문장을 낳는 법이다. 안희숙 교수가 살아온 삶이 좋은 글로, 좋은 책이 되었다. 평생 피아니스트로 살아온 삶이 행간마다 문향(文香)으로 가득하다. 책을 출간한 계절이 봄이어서 단어 하나하나, 문장 한 줄이 더 화사하게 느껴진다.

  작가 소개

지은이 : 안희숙
연세대 명예교수는 태동기 한국 문화예술계를 밝힌 석영(夕影) 안석주(安碩柱) 선생과 김흥봉(金興奉) 여사의 10남매 중 셋째 딸로 태어났다. 국민 동요인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작사한 이가 아버지 안석주, 작곡한 이가 큰오빠 안병원이다. 김흥봉은 ‘훌륭한 어머니’(1971년 한국소년지도자협회)로 선정됐다.서울혜화초등학교와 진명여중고교, 이화여대 음대와 동 교육대학원을 졸업했으며 뉴욕 맨해튼 음대에서 수학했다. 6·25 사변 당시 큰오빠가 국방부 산하 ‘정훈 어린이 음악대’를 조직하자 안희숙은 피아노 반주를 도왔다. 실의에 빠진 피란민과 일진일퇴 생사를 넘나들며 싸우던 군인을 희망의 음악으로 위로하는 일에 일조했다. 어머니가 생전 “10남매 중 희숙이가 제일 고생을 많이 했다”며 특별히 하나님께 기도를 많이 해 주신 것을 잊지 못한다. 훗날 어린이 음악대원 모두 국내외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음악가로 성장했다.안희숙은 정전 후 처음 개최된 조선일보 신인음악회를 시작으로 한국일보의 특별후원으로 독주회, 귀국독주회, 서울시향 협연(’피아노 협주곡의 밤’) 등을 거치며 국내 학계와 음악계를 대표하는 피아니스트로 거듭났다.29년여 동안 연세대 피아노과 교수로 재직하며 강의와 연주를 병행했다. 피아노 독주회와 피아노 협주곡 협연 등 8회 개최, 피아노 듀오 연주회 3회 개최, 사제 모임인 ‘희연회’ 연주회 15회 개최, 성악가 아들(최진호)과의 모자음악회도 두 차례 열어 갈채를 받았다.특히 연세대 음대 학장을 지낸 나운영 선생의 신곡을 서울시향 협연으로 연주한 기억도 있다. 이후 박재열, 이영자, 김동환, 이찬후, 나인용, 김청묵 등 유명 국내 작곡가 수십 명의 신곡 발표를 도맡아 연주했다.이밖에 초창기 한국피아노학회 부회장, 한국피아노 듀오협회 부회장, 동아일보·한국일보 콩쿠르 심사위원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한국피아노학회 이사다. 국민훈장 무궁화상을 수상했다.

  목차

인사의 말씀 / 4
추천사 / 6

1장
어머니의 기도·13
정승 부인 / 14
행복했던 나의 어린 시절 / 22
부자 외할아버지 / 26
14칸 기와집 / 30
내가 그린 혜화동성당 수채화 / 34
완고하신 아버지 / 38
아버지는 애국자 / 40
빛바랜 교복 / 47
바다로 가자. / 49
아버지의 장례식 / 53
그 장학금만 있었더라면 / 64

2장
환경의 변화·79
새로운 시작 / 80
6?25 전쟁과 피난 / 83
새언니를 맞으며 / 88
이승만 대통령과 큰아버지 안택주씨 / 92

3장
진명여고 교사 시절·97
강당 3·1당 / 98
청춘을 불사르다 / 104
면사포와 4?19 / 112
두 번째 신혼여행 / 119
우리 가족의 첫 소풍 / 122

4장
안씨 집안의 대이동·125
빚을 갚다 / 126
존경하는 이모 김갑순 여사 / 131
드디어 우리도 집을 마련하다 / 134
집을 짓다 / 137
신앙생활 / 141
어머니와 마지막 만남 / 144

5장
제자들 이야기 - 충격과 기쁜 일들·153
바람 부는 어느 날 / 154
왜 또 이런 일이 / 156
가엾은 제자 / 158
너무나 아쉬웠던 제자 / 164
희한한 독주회 / 169
겸손은 나의 스승 / 171

6장
건강이 제일이야·173
남편을 보내며 / 174
좋은 친구들 / 182

7장
희연회의 탄생·187
피아노란 이런 것 / 188
희연회의 활동 / 195
되돌아본 희연회의 일본 연주여행 / 198
* 카와이 악기사 초청 연주회 Program / 204

8장
사랑의 모임·205

9장
마무리를 하면서·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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