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김명이 시인은 여선장이라는 별명이 있다.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동면 광암으로 20대에 시집와서 바다와 함께한 시인이다. 지금도 칠순의 나이에 건강하게 미더덕을 까며 바다를 지키고 있다. 주민들이 시비를 광암 해변 입구에 세워준 명실상부한 지역이 인정한 시인이다.
파도를 직접 몸으로 헤치며 살아온 누구보다도 바다를 잘 아는 시인이다. 바다가 언제 눈을 뜨는지 바다가 언제 몸을 비우는지, 아침저녁으로 바다 위로 솟는 해가 산 너머 지는 것을 바라보며 바다와 매일 대화를 나누는 시인이다. 그래서 그녀의 시에서는 바다의 비린내와 세상에서도 썩지 않을 소금의 지혜가 문장의 행간마다 들어있다.
출판사 리뷰
절반의 시작을 넘어 당당하게 나아가다
마경덕 (시인)
오월은 연둣빛 일색이다. 나무도 잡초도 화초도 하나의 빛으로 버무려져 한 덩어리로 보이지만 찬찬히 들여다보면 생김새가 사뭇 다르고 다양한 층위가 존재한다. 차를 타고 오가며 무심히 바라보았던 길가 화단에 미처 알지 못한 ‘각각의 이름’이 있었다. 대수롭지 않은 그 많은 것들이 ‘봄의 구성원’이라는 것을 초록을 보며 깨닫는다. 보고도 금세 잊어버리는 인간의 불완전한 기억과 달리 그들은 약속인 듯 일제히 “초록에 집중하고” 오월의 길목을 열고 있다. 시를 쓰기 위해서도 이렇듯 대상에 대한 집중이 필요하다.
“눈이 녹은 뒤 충남 아산 현충사, 이순신 장군의 사당에 여러 번 갔었다. 거기에, 장군의 큰 칼이 걸려 있었다. 차가운 칼이었다. 혼자서 하루 종일 장군의 칼을 들여다보다가 저물어서 돌아왔다.”
소설가 김훈이 ‘칼의 노래’ 초판 책머리에 쓴 글이다. 날이 저물도록 들여다본 것은 ‘칼 한 자루’였다. 그때 작가는 칼을 감싼 ‘서늘한 적막’ 속에서 피비린내 나는 몇백 년의 시간과 대면하고 있었다. 고요히 입을 다문 ‘칼 한 자루’에 얼룩진 “죽음의 공포를 헤아리며” 기어이 칼의 입을 열어 ‘칼의 말’을 기록해야 한다고, 차디찬 침묵을 종일 들여다보았을 것이다. 칼에 집중한 혼자만의 간절함이 없었다면 소설 ‘칼의 노래’는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늘 보면서도 미처 보지 못한 뒤편에 존재하는 대상을 찾아내려면 나뭇잎의 정교한 잎맥처럼 시인의 감각도 섬세해야 한다. 시인의 가슴에는 “참을 수 없는 것들”이 도사리고 있다. 그 참을 수 없음이 차올라 견딜 수 없을 때 시는 태어난다.
닫힌 “시의 입을 열게 하는” 시 쓰기는 백지 한 장에서 홀로 치르는 지루하고 외로운 싸움이기에 시인은 원하는 한 문장을 찾기 위해 피를 말린다.
최인훈 소설가의 1960년이란 작품에 “바다는, 크레파스보다 진한, 푸르고 육중한 비늘을 무겁게 뒤채면서, 숨을 쉰다”라는 문장이 있다. 수차례 개정판을 내면서 고치고 고친 문장이라고 한다. 그 한 문장 속에 깃든 ‘피와 땀’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다.
‘청일호’ 여선장이었던 김명이 시인에게 바다는 “시의 축을 이루는 중심”이다. 바람과 파도와 물길을 속속들이 파헤쳐 ‘피와 땀’을 바쳐야만 바다 한 자락을 얻을 수 있었으니 시인이 홀로 감당한 “고독한 시간들”은 바다 밑 어디엔가 수북이 쌓였을 것이다.
늦깎이로 만난 시 역시 운명처럼 다가왔다. 시를 쓴지 어언 20년, 『시작이 반이다』라는 시집 제목은 ‘피와 땀’으로 얼룩진 “초심의 결기”를 잊지 않기 위함이었다.
어린 시절 6.25 전쟁을 겪으며 가난의 굴레를 묶여 초등 3년 여름에 학업을 접어야 했기에 시에 대한 열정은 남다를 수밖에 없다. 덜 익어 부족한 민낯을 드러내는 것은 “황반변성”으로 날이 갈수록 시력이 약화 되고 기억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라 한다. 늦기 전에 선택한 결정이 다소 미흡하더라도 시인에게는 최선이었고 그 간절함이 시집으로 태어났다. 과정은 생략하고 결과만을 중시하는 세상이지만 김명이 시인에게 시를 쓰는 과정은 어쩌면 결과보다 더 소중한 시간일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게는 낭만의 바다요, 지친 삶을 위로하는 휴식의 바다겠지만 시인의 바다는 변화무쌍한 바다의 심중을 헤아리며 세상의 파고波高를 피해 구석구석을 훑고 헤매던 “노역의 장소”이다. 그 현장에는 “예측할 수 없는” 일들이 도사리고 있다.
새벽 3시
캄캄한 바다에?
사나운 불길이 치솟았다
부둣가 수협 건물 앞
육지도 아닌 바다에서
펑, 펑, 펑,
연이은 폭발음
온 동네가 발칵 뒤집힌
기관실 기름 탱크 터지는 소리
물과 기름은 섞이지 않아
기름은 물 위에서 타고 있었다
소방차 사이렌 소리
119 구급대원들 발 빠르게 달려오고
용광로 같은 불길 속을
목숨 걸고 뛰어드는 소방대원들
위험도 불사하는 용감한 그 행동에 반해
내 손자도 대학 소방과에 지원했다
불길은 이 배에서 저 배로
불화살 되어 휙휙 날아
손쓸 겨를도 없이
삽시간에 번졌다
바다마저 집어삼킨 불바다
알아볼 수 없는 배들의 형체는 참혹했다
수억의 재산을 삼켜버린 화마
다행히 인명 피해는 없었지만
크고 작은 7척의 선주들
타버린 흉측한 배처럼
처절한 몸부림이 바닥에 뒹굴었다
― 「바다는 불바다 되고」 전문
‘불’을 제압하는 것은 ‘물’이다. 그런데 바다가 맹렬하게 타고 있다. 물보다 가벼운 기름은 해수면을 떠다니며 물리적 강제력을 행사한다. ‘불’에 휩싸인 바다는 위협적이다. 달려온 119 소방대원들이 용광로 같은 불길 속으로 뛰어들고 화재는 진화되었지만 발화된 불씨는 삽시간에 번져 7척의 배가 전소全燒되었다. 바다에서 시인이 목격한 사건 현장은 처참하다. 인명 피해는 없었지만 어선을 담보로 살아가던 선주들의 “막막한 생계”가 바닥에 뒹군다.
하루에 70만 번의 파도를 일으킨다는 바다는 흔들리면서도 견고한 뿌리를 지녔다. 군데군데 떠 있는 섬의 뿌리를 본 적이 없듯이 수많은 “각각의 방”으로 그 많은 생명을 키우는 바다를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짠물을 마시며 살아가는 물고기의 살에서 ‘단맛’이 나는 것은 또 어떤 연유인지 알지 못하며 우리는 바다를 낚아 올리는 것이다.
그동안 바다의 ‘겉모습’만 보고 살지 않았던가. 김훈 소설가는 ‘칼의 노래’ 첫 문장에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 꽃 피는 숲에 저녁노을이 비치어, 구름처럼 부풀어 오른 섬들은 바다에 결박된 사슬을 풀고 어두워지는 수평선 너머로 흘러가는 듯싶었다. 뭍으로 건너온 새들이 저무는 섬으로 돌아갈 때, 물 위에 깔린 노을은 수평선 쪽으로 몰려가서 소멸했다. 저녁이면 먼 섬들이 박모薄暮 속으로 불려가고, 아침에 떠오르는 해가 먼 섬부터 다시 세상에 돌려보내는 것이어서, 바다는 늘 먼 섬이 먼저 소멸하고 먼 섬이 먼저 떠올랐다.”라고 묘사했다. 글로 그려낸 그림 같은 풍경이 눈앞에 펼쳐지고 문장에서 연상되는 장면에 독자는 매료된다.
바다를 생각하면 낙조에 물든 바다와 끝 간 데 없는 아득한 수평선과 그림처럼 떠 있는 섬들이 다가온다. 풍랑과 해일이 잠복한 바다는 낭만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기복起伏이 심한 바다의 지배 아래 살아가는 어부들은 암초를 피해 정해진 항로를 따라야 하고 날씨와 물때가 맞지 않으면 조업을 중단하고 그물을 걷어야 한다. 자연에 순응하며 바다가 내주는 것만큼 거둘 수 있는 것이다. 예기치 못한 사건이 벌어지는 바다는 삶이 호락호락하지 않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구름 한 점 없는 상쾌한 아침
폐선 한 척이 나의 발길을 붙잡는다
가던 길 멈추고
태풍 링링에 휩쓸려
갯가까지 떠밀려 온 처참한 모습을 바라본다
어디서 예까지 밀려왔을까
부부가 같이 타던 배였을까
피붙이 같은 배를 살려보려고
애간장 태우며 발버둥쳤을 모습이
눈앞에 선하다
파도에 너덜너덜 살점이 찢기고
뼈대만 앙상한 빈 배 안에서
내외간의 정다운 웃음도
애간장 녹을 듯한 울음도
흥겨운 뱃노래까지도 환청으로 들린다
갑판 위에 팔딱거릴 고기는 밀어내고
선체 안에 전리품인 양 온갖 잡동사니 다 끌어다
가득 채워 놓은 태풍의 흔적
만선을 꿈꾸며 평화로웠던 그림 한 장만
내 눈앞에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 「산책」 전문
하늘에 구름 한 점 없는 쾌청한 날, 사방을 둘러봐도 파도는 잔잔하고 바다는 평화롭다. 산책을 나온 시인에게 ‘폐선 한 척’이 눈에 띈다. 갯가로 밀려온 폐선은 만신창이다. 고요한 바다의 얼굴 뒤편에 태풍 ‘링링’으로 날뛰던 바다가 있었다. “파도에 부서지고 부서져/ 너덜너덜 살점이 찢기고/ 뼈대만 앙상한 빈 배 안에서/ 내외간의 정다운 웃음도/ 애간장 녹을 듯한 울음도/ 흥겨운 뱃노래까지도 환청으로 들린다”고 한다. 폐선 한 척에는 인간의 희로애락이 다 들어있다. 보지 않고도 충분히 짐작되는 상황은 어쩌면 시인이 격동의 시절을 살아낸 그것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현장에서 몸소 치른 체험이 고스란히 저 폐선에 담겨있다. “부서지고, 너덜너덜 살점이 찢기고 빼대만 앙상한”에서 알 수 있듯이 폭풍에 휘말린 흔적이 처참하다. 그러나 시인은 “만선을 꿈꾸며 평화로웠던 그림 한 장만/ 내 눈앞에 주마등처럼 스쳐간다”고 위로한다.
그것은 마치 괴로웠던 기억들이 시간이 흐르면서 “그리움으로 전환되는” 것과 비슷한 현상이다. 받아들이고 싶은 것만 선택하는 인간의 기억은 생각보다 치밀하지 못하다. 상처가 아물고 그 자리에 새살이 돋는 것처럼 일정 시간이 지나면 괴로운 기억은 지워지고 과거는 긍정적으로 치환된다. 그 반경 안에서 존재하던 ‘삶의 편린’도 대부분 시간의 흐름에 따라 퇴색하는 것이다.
“험난한 세상을 치열하게 살아온 발자취라는 의미로 시집을 읽어주시면 더없이 고맙겠다”는 김명이 시인, 남들의 눈에는 하찮을지 몰라도 그동안의 결실을 매만지며 정리하고 갈래짓는 과정이 보람이며 행복이라고 고백한다. 시인이 직접 몸으로 대면한 바다를 시로 쓰며 스스로 상처를 치유하고 있다. 남편을 잃고 어쩔 수 없이 택한 여선장, 40년 생계를 걸어둔 바다에서 은퇴하고 이제 그 소용돌이를 먼발치로 바라보는 여유가 곧 ‘산책의 시간’이다.
스물네 살 새색시가
물결이 높이 설레는 링 위에서
사투를 겨룰
사공이란 초급 벨트에 도전장을 내민다
속이 메스꺼울 만큼 몸이 흔들리고
밤은 깊어 삼경인데 어둠 속에
떠밀리지 않으려 닻을 내리는
풍덩 소리에 누군가 다가서는 듯하다
달님이 지켜주는 헛기침에
놀란 별들이 쏟아져
무서움이 왈칵
머리끝이 쭈뼛쭈뼛
망망대해 아무도 없는데
두 눈은 말똥말똥
몽둥이와 칼 하나 곁에 놓고
치마를 머리까지 뒤집어써본다
불안과 공포감이 교차하는 순간
사지가 오그라든다
밤이 새도록 엎치락뒤치락
작은 어선과 나
둘만의 첫날밤은 그렇게
단 한 번의 정사에 이르지 못한 채
드디어 동녘이 밝아온다
― 「도전장 내민 첫날밤」 전문
“철없이 함부로 덤비는 경우”를 이르는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는 속담이 있다. 스물네 살 새색시가 감히 바다에 도전장을 내민 밤, 너울에 멀미를 하며 어둠 속에 떠밀리지 않으려 닻을 내리고 있다. 풍덩! 닻이 빠지는 소리에도 제풀에 놀라는 바다의 하룻강아지인 셈이다. 처음 어로漁撈에 나선 망망대해에서 지샌 하룻밤의 두려움에 사지가 오그라든다.
해상에서 닻을 내리고 운항을 정지하는 것이 ‘묘박’이다. 어쩔 수 없이 바다에 머물러야 할 때 오로지 ‘닻의 무게’에 의지해 정박해야 한다. 파도의 힘에 어디론가 흘러갈 수도 있으니 조마조마하다. 사실 바다보다도 더 두려운 건 어둠 속에서 만나는 ‘낯선 사람’일 것이다. 망망대해 아무도 없는데도 ‘몽둥이’와 ‘칼’ 하나 곁에 놓고 치마를 머리까지 뒤집어썼다고 한다. 새색시가 작은 어선과 대면한 첫날밤이다.
“밤이 새도록 엎치락뒤치락/ 작은 어선과 나/ 둘만의 첫날밤은 그렇게/ 단 한 번의 정사에 이르지 못한 채/ 드디어 동녘이 밝아온다”고 한다. 이 급박한 상황에서 보여주는 뜻밖의 반전이 웃음을 짓게 만든다. 작은 어선을 신랑처럼 의지한 새색시의 ‘첫날밤’은 가슴만 졸이다가 끝이 났다. 이렇듯 슬픔 속에 깃든 작은 여유를 발견한 것은 그 시절을 한참 지나서이다.
김명이 시인의 시적 영토는 바다이다. 고뇌하면서 뜨겁게 껴안는 사유의 스펙트럼은 바다처럼 넓다. 노련하게 바다를 끌고 종횡무진 누비던 여선장의 이력이 운명에 내던져진 새색시의 시절을 들여다보며 바다의 “기척에도 두려워하던” ‘첫날밤’에 연민의 눈길을 보내고 있다.
바람에 배가 밀린다
여자는 떠밀리지 않으려고 노를 저어보지만
남편의 벽력같은 고함소리 연이어
밀대가 휙 날고
뱃전은 피 냄새를 킁킁 맡아 본다
사내의 손에 감아쥔 머리카락 그림자가
바닷속의 너풀거리는 해초와 겹쳐지는데
뱃전 구석에 처박힌
여자의 일그러진 얼굴을 바다가 출렁거려 비틀고
시끄러운 기계 소리로
여자의 앙탈은 들리지 않고
쥐어뜯긴 산발 된 머릿속에
울분만이 가득 찬 채로
미친 듯이 통발을 끌어 올린다
통발 하나 뱃전에 확 패대기치자
와르르 쏟아지는 장어들
구석진 곳을 찾아 둘둘 꼬아 감는 모습은
마치, 남녀가 음침한 곳에 뒤엉킨 그것과 흡사하다
어부의 분노를 삽시간에 다 먹어 치운 장어
여보, 빨리 잡아요 빨리
아, 저기 저 구멍으로 다 빠져가네
금방 둘은 한마음 되어
바삐 움직이는 겹쳐진 둘의 손놀림 끝에
막내의 쉬 마려운 고추처럼
힘차게 빠져나가는 장어 머리
어부들은 어제가 오늘인 듯 또 하룻밤은 그렇게 가고
― 「어부의 밤 풍경」 전문
바다를 움직이는 것은 ‘바람의 힘’이다. 여자는 고작 ‘노’를 저어 바람을 밀어낼 뿐, 바람보다 더 두려운 것은 ‘벽력같은 고함’과 여자를 향해 날아오는 ‘밀대’와 머리채를 감아쥐는 ‘사나운 주먹’이다. 폭력을 행사하는 남편에게 여자는 화풀이 대상이다. 자신의 주체적 권리를 상실한 여자는 남자에게 귀속되어 지배를 받고 있다. 여자는 분노를 삭이며 미친 듯이 통발을 끌어올린다. 적의에 찬 미움이 애먼 통발로 쏟아지고 뜻밖의 ‘반전’이 기다리고 있다.
“통발 하나 뱃전에 확 패대기치자/ 와르르 쏟아지는 장어들/ 구석진 곳을 찾아 둘둘 꼬아 감는 모습은/ 마치, 남녀가 음침한 곳에 뒤엉킨 그것과 흡사하다”는 것이다. 뒤엉킨 장어를 통해 시인이 보여주는 것은 부부생활로 얻어지는 ‘삶의 활력’이다. “남녀가 음침한 곳에 뒤엉킨” 선정적인 표현은 부부의 은밀한 관계를 암시하고 있다.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란 말도 있다. 죽일 듯이 서로 으르렁대다가도 하룻밤 자고 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 화해를 하는 것이 부부이다. 남들이 보면 하루도 못 살 것 같지만 살을 붙이고 자식 낳고 사는 비결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값이 나가는 장어는 어부의 분노를 삽시간에 가라앉힌다. 남편에 대한 미움도 장어가 다 날려버렸다. “대가리를 꼿꼿이 세우고” 구멍으로 빠져나가는 장어를 두 사람은 의기투합해서 잡아내고 있다.
시의 결구에서 짐작하듯이 “어제가 오늘인” 대부분 어부들은 일정한 ‘삶의 패턴’에 갇혀 지루한 삶을 반복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장어통발로 미움을 뛰어넘는 순간 기울어진 부부의 잣대가 수평을 이룬다. 언제 그랬느냐는 듯 두 사람은 다정한 관계로 돌아오고 쓸쓸한 밤의 풍경은 활기찬 밤으로 바뀌었다.
이렇듯 예측불허인 바다의 가변적可變的인 두려움은 양면성을 드러낸다. 시인의 시선은 바다를 향해 활짝 열리고 비릿한 아픔을 긍정적인 삶의 진득함으로 우려내고 있다. 고된 ‘삶의 갈피’에 이렇듯 한 장의 위로 같은 “기쁨이 꽂혀있는” 것이다.
창틀을 흔드는 기척 누굴까
배시시 열린 창밖을 보니
강풍을 동반한 눈이
미친 듯이 내린다
저들도 추위에 온돌방이 그리운지
비좁은 틈새로 밀고 들어온다
세상을 온통 하얗게 깡그리 덮어놓고
바다만 왜, 파란 눈이 내릴까
내리고 내려도
내리는 눈은 파랬다
푸른 눈이 제아무리 내려도
흔적 없이 다 먹어 치우는 바다
산간지방 영하 30도를 넘는 혹한의 4월
바다에 푸른 눈은 계속 내리고
― 「푸른 눈은 내리고」 전문
무너져내리는 눈사태도 “덮치지 못하는” 곳이 있다. 허공을 가득히 채운 눈은 흰 꽃잎처럼 나풀거린다. 내리고 내려도 “채우지 못할” 공간으로 가득히 쏟아지는 눈은 파란빛이다. 짙푸른 바다에 닿는 순간 녹아버리는 눈, 몸을 비비며, 몸을 겹쳐도 쌓이지 못하는 눈은 물빛처럼 푸르다. 선상에서 바라본 눈 내리는 겨울바다는 참으로 하염없을 것이다. 한 장의 꽃잎처럼 가볍게 사라지고 사라지는 것들이 “쓸쓸한 각도”로 기울 때 개별적인 눈의 조각들을 파란 덩어리로 감각된다.
왜 굳이 바다에 내려 침몰하는 것일까. ‘가벼운 존재들’이 쌓이고 쌓여 눈덩이가 되고 눈사태를 유발하지만, 영하 30도를 넘는 혹한의 4월, 눈사태로 길이 끊어진 날에도 바다엔 눈이 쌓이지 않는다. 해수면에 닿는 순간, 무無로 돌아간다. 그 어떤 것도 다 받아 삼키는 겨울바다는 ‘거대한 존재’로 다가온다. 그 누구도 딛지 못할 ‘큰 허방’이 저 바닷속에 있다.
“눈이 파랗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바다에 나가 몸소 체험해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일이어서 파란 눈은 참 ‘쓸쓸한’ 눈이다. “푸른 눈이 제아무리 내려도/ 흔적 없이 다 먹어 치우는 바다”이기에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다에 대한 “경외감과 두려움”이 ‘파란 눈’으로 변용되고 있다.
나른한 오후
축 처진 마음이 마실을 가다가
한곳에 우뚝 선 채
어!
동그랗게 눈을 떴다
늘 푸른 바탕에
백 갈매기 호위병 삼아
붉은 도미가 하늘을 날다
무엇이 저리도 기쁠까
삐뚤어진 저 입
동그란 눈에 크게 벌린 입
소리치고 웃는다
나도 웃는다
아! 예쁘다
보면 볼수록 귀여운
도미야
깜찍한 네 유혹에 나도 윙크를 보낸다
― 「벽화」 전문
수협 벽면에 그려진 벽화를 보며 스쳐 간 짧은 생각이 모처럼 즐겁다. 푸른 바탕에 흰 갈매기를 호위병 삼아 ‘붉은 도미’가 벽을 붙잡고 날고 있다. 시인은 삐뚤어진 입으로 웃고 있는 도미에게 “웃을 일 없는 세상에 무엇이 그리 기쁘냐”고 묻는다. 가만히 살펴보니 동그란 눈에 크게 벌린 입이 소리치고 웃는다. 따라서 웃다보니 비뚤어진 입도 참 예쁘다. 자연스럽게 일상에 녹아있는 바다에서 마주한 것들이 뭍에 오르니 다르게 보인다. 늘 어획물은 소득으로 계산되고 그동안 ‘도미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볼 겨를이 없었을 것이다. 입이 비뚤어진 도미 한 마리가 시인에게 건네준 웃음은 모처럼 느껴본 ‘마음의 여유’이다. 예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소박한 것들이 삶의 행복인 것을 깨닫고 시인은 가벼운 윙크를 보낸다. 아무것도 아닌, 사소한 행위지만 작은 것에 감사하는 변화된 시인의 심경心境을 읽을 수 있다. 「기분 좋은 날」 에서도 이와 유사한 맥락으로 이어진다.
아침 산책길
우연히 눈길이 마주친 별 하나
구월 그믐 아침
제 몸이 실낱같아
솔가지에 감긴 눈썹달
푸르게 젖은 눈빛이 애처로워
가지 째 꺾어서 주머니에 담았다
- 중략 -
무심코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꼼지락거리는 눈썹달
손안에 꿈틀
가슴에 파도가 일렁인다
시인이 주머니에 넣은 것은 솔가지에 감긴 실낱같은 눈썹달이다. “눈빛이 애처로워” 가지째 꺾어 주머니에 담았다가 무심코 주머니에 손을 넣으니 손끝에 닿는 ‘달’이 꿈틀거린다. 순간 ‘파도’가 일렁인다. 결국 시인의 ‘심미적 공간’에는 떠나온 바다가 출렁거리고 있었다. 모서리가 다 닳아버린 기억들이 아직도 건재하다. 바다를 만나면 기분이 좋아지고 실낱만큼 남았다고 믿어온 그리움은 아직 진행형이다. 시인의 ‘지향점’은 여전히 떠나온 바다를 향해 있는 것이다. 이 지독한 ‘바다앓이’를 치료하는 것은 ‘시 쓰기’이다. 그 시 속으로 바다를 데려와 갯내와 함께 한껏 너울거리는 것이다.
시집 『시작이 반이다』의 내부충동을 일으키는 ‘모티프’는 바다이다. 시인은 바다뿐만이 아니라 그 안에 존재하는 여러 관계에도 주목하며 주변을 관찰한다. 바다와 시는 서로를 보완하고 순환하는 구조 안에 존재한다.
김명이 시인은 생생한 바다의 체험을 ‘스토리텔링’ 방식으로 전하고 있다. 시인이 구성한 ‘내러티브’는 가파른 ‘삶의 갈피 갈피에 야박한 현실을 이겨낼 수 있는 ‘온기 한 줌’을 끼워 넣어 ‘불완전한 자아’를 위무한다는 것이다. ‘희망’이라는 ‘긍정의 힘’이 불행을 치유하며 각박한 세상과의 거리를 좁혀나간다. 어떤 상황에서도 “여유를 잃지 않는” 것은 질곡의 세월, 느닷없는 이별을 버텨내기 위해 시인이 스스로 터득한 ‘결과물’일 것이다.
시집 『시작이 반이다』는 ‘절반의 시작’을 넘어 앞으로 당당하게 나아가는 자신에게 보내는 용기이며 위로이다.
작가 소개
지은이 : 김명이
마산합포구 진동면 광암 출생, 경남대학 평생교육원 시 창작 과정 및 수필 창작 과정 수료.<미래문학> 시 부문 등단(2005), <다산문학> 수필 부문 등단(2007)<시와 늪> 작가상, <시와 늪> 문학상, 한국해양문학상 장려상, 수협중앙회 창립 50주년 수기 공모전 장려상 수상, 마산 여류문학 시낭송 입상.경남문인협회, 마산문인협회 회원, 시와 늪 문학회 고문. 저서시집 『그 사람이 보고 싶다』, 『바다가 쓴 시』, 『늙은 고래의 푸념』, 『시작이 반이다』수필집 『바다는 성추행을 해도 왜 죄가 되지 않을까』E-mail : k6067012@hanmail.net
목차
시인의 말
1부_도전장을 내민 첫날 밤
바다와 하늘의 포옹
산책
바다는 불바다 되고
해일
도전장을 내민 첫날 밤
어부의 밤 풍경
바닷속 내 일기장
파란만장
별빛이 옷깃 속으로
등대로 가는 길
저 별은 내 가슴에
매미 타고 온 해일에
꽃샘추위
벽화
여선장
미더덕
상족 바다
푸른 눈은 내리고
봄이 오면
시작이 반이다
겨울 바다
새벽 종소리
2부_인심은 조석변이더라
저녁놀에 취하다
입덧
적석산에서
봄날
기분 좋은 날
마음 가는 대로 살았으면
그때가 그립네
벚꽃놀이
어느 봄날에
운주사 석모石母
반란
바람
인심은 조석변이더라
내일은 맑음
은하수
아름다운 환청
봄이 오는 소리
차 한 잔의 여유
머위잎 편지
만날제
바구가 없다
인동초
3부_배움의 터전 진동초등학교
업둥이
진동초등학교
유년의 고향 바다
내 고향 진동
개교 백 주년 기념행사 축시
졸업 50주년 기념 나들이에서
오늘만이 내 날 일세
세상은 요지경
운명
인연
얼굴 없는 인연
그리운 추억
맹종죽 테마파크에서
보고 싶어
봉명산 고사목
세모歲暮의 허허로움
포로와 밀실
내안에 당신
순천만의 군무
술친구 하나라도
기다림의 외출
4부_보름달만 같아라
광암廣岩
타향살이
한평생
황혼
억새의 유혹
보름달만 같아라
폐왕성
만선
겨울 금오산
해송
걸어 넘은 군사 분계선
첫사랑
무병장수
구절초 사랑
무진정
농월가
하회마을
달빛에 우는 낙화암
영정사진
봄소식
■ 해설
절반의 시작을 넘어 당당하게 나아가다 / 마경덕(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