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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 나쓰메 소세키
1867년 2월 9일 일본 에도(현재 도쿄 신주쿠 부근)에서 태어났다. 에도 막부 혼란기에 본가가 몰락하여 양자로 보내졌다가 21세에 나쓰메 가로 복적되었다. 도쿄 제국대학 영문과를 졸업하고 영어교사로 재직하다 문무성에 의해 영국으로 유학갔다. 하지만 적응하지 못하고 귀국하여 대학에서 강사일을 하던 소세키는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집필하였고 시키 문하의 모임에서 발표하여 호평을 얻었다. 1907년에 강사직을 사임하고 아사히신문사에 입사하여 수많은 작품을 발표하였다.1915년 3월에 위궤양으로 쓰러진 소세키는 이후 당뇨병을 앓다가 1916년 12월 9일 49세의 나이에 내출혈로 사망하였다. 시신은 도쿄제국대학 의학부로 보내져 해부되었고 이때 적출된 뇌는 기증되어 현재도 도쿄대학 의학부에 보관되어 있다. 현재 그의 시신은 도쿄의 조시가야 묘원에 묻혀있다. 저서로는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풀베게』, 『도련님』 등이 있다.
지은이 : 다야마 가타이
본명 다야마 로쿠야. 도치기 현 다테바야시(현재 군마 현)에서 태어났다. 1891년 '참외밭'을 발표한 후 이듬해 「국민신문」에 연재한 '낙화마을'에서 '가타이'라는 호를 처음 사용했다. 이후 서정적인 신체시나 미문조의 문체로 실연이나 죽음을 주제로 하는 감상적인 소설을 잇달아 발표했다.1907년 여자 제자에 대한 애욕과 자신의 사생활을 적나라하게 고백한 '이불'을 발표, 문단에 충격을 던져주며 소설가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했다. 이 작품은 자연주의 문학의 성격을 결정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 소설이기도 하다. 주요 작품으로 <생(삶)>, <시골선생>, <아내>, <인연>, <시간은 흘러간다>, <미나모토 요시토모>, <미치츠나의 어머니>, '백야' 등이 있다.
지은이 : 다자이 오사무
일본 아오모리현 쓰가루의 대지주 가문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쓰시마 슈지津島修治다. 프랑스 문학에 관심이 있어 1930년 도쿄제국대학 불문과에 입학하지만, 좌익 운동에 가담하는 등의 이유로 거의 출석하지 않아 제적당한다.이후 소설가가 되기 위해 이부세 마스지井伏鱒二의 제자로 들어가 ‘다자이 오사무’라는 필명을 쓰기 시작한다. 1935년 소설〈역행逆行〉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작가의 길을 걷게 되었으며, 1936년 첫 단편집《만년》을 출간하며 세상에 이름을 알리지만 주목받지는 못했다. 술, 담배, 여자에 빠져 방탕하게 살기도 하고 약물 중독으로 어려운 시기를 겪기도 하지만, 1938년 이시하라 미치코와 결혼한 후 안정된 생활을 하면서 많은 작품을 발표했다. 1947년에는《사양》을 출간하며 전후 사상적 공허감에 빠진 젊은이들에게 큰 호응을 받아 작가로서 명성을 얻었으며, 1948년 자신의 체험을 반영한 자전적 소설《인간 실격》을 통해 위상이 더욱 견고해진다. 그러나 책의 출간을 미처 확인하지 못한 채 강에 뛰어들어 서른아홉 생을 마감했다.
지은이 : 모리 오가이
본명은 모리 린타로(森林太郎)로, 근대 일본의 대표적인 계몽기 지식인이자 근대 문학의 선각자다. 오가이(鷗外)는 도쿄대학(東京大學) 의학부 출신의 군의관으로 독일 유학(1884∼1888)을 가서 위생학 연구뿐만 아니라 서양 문학을 두루 섭렵했다. 1894년 가을, 1개월간 군의관으로 조선 부산에 체재하면서 남긴 일기 등도 있다. 동서양에 걸친 넓은 시야의 소유자로서, 동서양의 학문과 문학 일반에 대한 이해를 바탕 삼아 일본 근대 문학 초창기에 평론과 번역으로 근대화에 크게 기여했으며, 소설가·시인·학자로서도 여러 업적을 남겨 근대 문학 성숙기의 일본 문단에서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 1867∼1916)와 쌍벽을 이루는 작가다. 오가이의 대표작은 일본 근대 최초의 번역 시집 ≪그림자(於母影, 오모카게)≫(1889)와 서양 문학 번역에 안데르센의 ≪즉흥시인≫(1892), 입센의 ≪노라(인형의 집)≫(1913), 괴테의 ≪파우스트≫(1913)가 있고, 단편 소설 <무희(舞姫)>(1890), <망상(妄想)>(1911), 장편 ≪청년≫(1910), ≪기러기(雁)≫(1911), 역사 소설 <아베 일족(阿部一族)>(1913), <산쇼 대부(山椒大夫)>(1915) <다카세부네(高瀬舟)>(1916), 역사 인물 전기 ≪시부에 추사이(渋江抽斎)≫(1916), 그리고 ≪시로 쓴 일기(うた日記)≫(1905) 등, 다양한 작품을 발표하면서 다방면에 걸쳐 활약했다. 오가이는 ‘서양에서 돌아온 보수주의자’답게 ‘동도서기(東道西器)’와 비슷한 소위 ‘화혼양재(和魂洋才)’로서 동서양에 대한 해박한 식견과 복안으로 서양의 장점을 배워 바람직한 일본 근대화의 방향을 모색했다.
지은이 : 미야자와 겐지
1896년 일본 이와테현에서 태어났다. 일본 애니메이션 <은하철도 999>의 원작 《은하철도의 밤》을 비롯해 《비에도지지 않고》 《바람의 마타사부로》 《첼로 켜는 고슈》 등 많은 유작을 남겼으며, 현재까지도 일본에서 가장 사랑받는 작가 중 한 명이다.
지은이 : 시마자키 도손
엄격한 아버지로부터 한학 교육을 받았다. ≪여학 잡지(女學雜誌)≫에 번역을 기고하는 것으로 문단 활동을 시작했다. 그 뒤 ≪일엽주(一葉舟)≫ 등의 시집을 펴내 현실의 고투에서 한발 물러난 장소에서 좌절해 간 심정을 담담한 서정으로 읊는 독자적 시법을 구축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자비 출판한 장편 소설 ≪파계(破戒)≫로 명성을 확립했다. ≪봄≫, ≪집≫, ≪신생≫ 등 일련의 자전적 작품을 잇달아 발표해 자연주의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서 문호의 반열에 올랐다. ≪동트기 전(夜明け前)≫이 대표작으로 꼽힌다. 일본의 근대란 무엇인가라는 화두를 놓지 않은 작가로 명성을 떨쳤다.
지은이 : 오가와 미메이
일본의 소설가·아동 문학가. 본명은 오가와 겐사쿠입니다. 1881년 니가타에서 태어났습니다. 고향에서 다카다중학교를 졸업한 후, 도쿄전문학교(현재 와세다대학교의 전신)에 들어가 철학과 영문학을 공부했습니다. 1904년 잡지 ≪신소설≫에 데뷔작 「방랑아」를 발표하며 작가로서 주목을 받았습니다. 이때 스승인 쓰보우치 쇼요로부터 ‘미메이(未明)’라는 호를 받았습니다. 대학 졸업 후 와세다문학사의 편집자로 일하며 많은 작품을 썼습니다. 1925년 ‘와세다 동화 모임’을 만들고, 1926년 ≪도쿄일일신문≫에 ‘앞으로는 동화 작가로만’ 활동하겠다고 선언한 후로 동화 창작에 전념했습니다. 1946년 일본 아동 문학가협회 초대 회장을 지냈고, 1951년 일본예술원상을 받았으며, 1953년 일본예술원 회원으로 추대되었습니다. 평생 1200여 편의 동화를 남겼습니다. 1961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대표작으로 동화 「금빛 굴렁쇠」, 「붉은 양초와 인어」, 「달밤과 안경」, 「들장미」 등이 있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 30주년 되는 1991년 ‘오가와 미메이 문학상’이 만들어졌습니다. 1992년부터 1년에 한 차례씩 동화 작품을 뽑아 이 상을 주고 있습니다.
지은이 : 요시카와 에이지
1892년 8월 11일 가나가와현 요코하마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히데쓰구(英次)이며 일본을 대표하는 소설가이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소학교를 중퇴하고 생업을 위해 여러 직업을 거친 후 작가 활동을 시작했다. 1926년 『나루토 비첩(鳴門秘帖)』을 통해 일약 인기 작가가 되었고, 1935년부터 아사이신문에 연재를 시작한 『미야모토 무사시(宮本武蔵)』는 많은 독자의 사랑을 받아 대중 소설의 대표적인 작품이 되었다.요시카와 에이지는 어린 시절, 구보 텐즈이(久保天随) 번역의 『연의삼국지(演義三国志)』를 애독했는데 밤늦게까지 열중하여 읽다가 때때로 아버지에게 ‘빨리 자라’고 꾸중을 들었다고 한다. 『삼국지(三国志)』는 전쟁 중인 1939년부터 1943년까지 4년 동안 신문에 연재되었고, 전후에 단행본으로 간행되어 엄청난 인기를 얻었다. 기본적인 스토리는 중국의 역사소설 『삼국지연의(三国志演義)』를 따랐으나 인물묘사는 대담하게 각색하여 지금까지 일본의 ‘삼국지’ 관련 작품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1960년에 문화훈장을 수장했고 1962년 폐암이 악화되어 향년 70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그가 남긴 작품은 200편이 넘고, 사후 그의 이름을 딴 ‘요시카와 에이지 문학상’이 제정되었다.
지은이 : 이시카와 다쿠보쿠
1886년(메이지 19) 일본의 동북 지역인 이와테현에서, 승려의 아들로 태어나 귀여움을 받으며 자랐다(일본의 승려는 일반적으로 대처승으로 가족이 있다). 모리오카(盛岡)중학교 시절부터 문학적 재능을 보이며 시작(詩作) 활동을 활발히 했으며, 조숙하게도 후일 아내가 되는 세쓰코(節子)와 연애에 열중하기도 했다. 졸업을 반년 앞두고 중학교를 중퇴해, 학력 사회가 되어 가는 근대 일본 사회에서 불리한 인생길을 걷게 된다. 중학교를 중퇴한 다쿠보쿠는 문학적 재능을 입신의 기회로 삼고자 시, 문학 서평 등을 분주히 발표한다. 그러나 다쿠보쿠의 아버지가 호토쿠사 주지직을 파면당하면서, 이후 그는 생활고와 싸우며 문학의 길을 걸어야 했다. 1905년 20세 때, 시집 ≪동경(あこがれ)≫를 발간하며 문단의 주목을 받기도 했으나, 그것이 생활에 보탬이 되지는 않았다. 당시는 글을 써서 생활할 수 있는 소위 프로 작가들이 탄생하기 전이었고, 그나마 신문이나 상업 잡지 등에서 관심을 보인 것은 소설류였기 때문이다. 1907년 22세 때, 다쿠보쿠는 생활의 패턴을 바꾸어 보고자 홋카이도에 건너가 임시 교원, 신문 기자 등을 하며 생활인으로서 동분서주해 나름대로 안정을 찾는다. 그러나 생활인으로서의 안정은 곧바로 문학으로부터 동떨어져 있음을 자각시켰고, 약1년여의 홋카이도 생활을 뒤로한 채 다쿠보쿠는 상경 길에 오른다. 마지막으로 문학적 인생을 추구하고자 한 것이다. 상경 후, 다쿠보쿠는 생활비를 마련하고자 열심히 소설을 쓴다. 당시는 자연주의 문학이 성행하던 시기로 리얼리즘이 소설의 중요한 요소였는데, 다쿠보쿠의 소설은 낭만주의적 성향의 작품이 대부분이었다. 다쿠보쿠 자신의 생활이나 발상이 다분히 현실적이지 못하고 낭만적 성향이 강했기 때문이다. 그의 소설은 팔리지 않았고, 다쿠보쿠는 문학적 좌절과 생활고에 허덕여야 했다. 다쿠보쿠는 많은 수의 단가를 지으며 현실적 고뇌를 잊기 위해 몸부림쳤다. 이 무렵 쓴 단가들은 후일 그의 대표 가집인 ≪한 줌의 모래(一握の砂)≫에 수록된다. 1909년 3월 24세 때, 다쿠보쿠는 생활을 위해 고향 선배의 도움으로 도쿄아사히신문사 교정 직원으로 취직하게 된다. 그리고 홋카이도의 가족을 맞이해 비로소 일가 단란의 기회를 얻게 된다. 그것도 잠시, 그해 가을 생활고와 고부간의 갈등을 참지 못한 아내 세쓰코가 딸을 데리고 친정으로 가출하는 일이 벌어진다. 얼마 후 아내는 돌아오는데, 이 일을 계기로 대단한 충격을 받은 듯, 다쿠보쿠는 친우에게 보낸 편지에 ‘나의 사상은 급격히 변했다(僕の思想は急激に?化した)’라고 쓰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그의 평론에 잘 나타나고 있다. ‘생활의 시(食ふべき詩)’에서는 공상적 시인의 발상을 버리고 현실적 감각에 의한 문학 추구를 주장한다. ‘가끔씩 떠오르는 느낌과 회상(きれぎれに心に浮んだ感じと回想)’에서는 국가 권력을 강권으로 이해한 면모가 드러나 있다. 당시 국가의 실체를 강권으로서 인식한 문학자는 매우 드물었다. 이러한 국가 인식은 다음 해에 쓴 <시대 폐쇄의 현상(時代閉塞の現狀)>의 하나의 기반이 된다. 25세 때인 1910년 초여름, 대역 사건이라 칭하는 사회주의자 탄압 사건 일어나게 된다. 다쿠보쿠는 여기에 큰 관심을 보이며 사회주의 사상에 대해 공부를 하고 관심을 기울인다. 이러한 배경 아래 그해 8월, <시대 폐쇄의 현상>을 집필하게 된다. 이것은 메이지 제국주의 사회 모순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당대 최고의 평론이라 할 수 있다. 그해 12월 다쿠보쿠는 일본 근대 문학사에 그의 이름을 각인한 단가집 ≪한 줌의 모래(一握の砂)≫를 간행한다. 이 단가집에 담긴 대부분의 단가들은 1910년에 쓴 것으로, 도시 생활의 애환을 그린 것과 추억을 회상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후세의 문학 연구가들은 이 단가집의 단가를 평해서, 다쿠보쿠식 단가 또는 생활파 단가라 칭했다.이듬해 다쿠보쿠는 점점 병약해져 대학 병원에 입원하기 까지 했다. 그러는 가운데 문학적 의지를 보이며 시 노트 ‘호르라기와 휘파람(呼子と口笛)’을 작성한다. 혁명에 대한 동경과 생활인으로서의 꿈이 그려져 있어 분열된 인상을 주기도 한다. 이 시 노트는 시집 발간을 염두에 두고 만든 것이었으나 다쿠보쿠 생전에 빛을 보진 못했다. 다쿠보쿠의 병세는 더욱 악화해 더 이상 집필 활동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고, 마침내 1912년 4월 13일 27세의 젊은 나이에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지은이 : 하기와라 사쿠타로
구어 자유시를 완성해 일본 근대시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슬픔, 우울, 허무 등의 감정이 짙게 드리워져 있는 그의 시는 잘 벼려진 예리한 감성과 감각적인 표현이 특징이다. 대표적인 시집으로는 ≪달을 향해 짖는다(月に吠える)≫, ≪우울한 고양이(?猫)≫, ≪빙도(氷島)≫ 등이 있다. 문학 활동 외에도 음악, 마술, 사진 등 다방면에 걸쳐 관심을 보였다. 그중 만돌린에 조예가 깊어 마에바시에 있을 때는 정기적으로 음악회를 개최하는 등 다른 예술 분야에서도 활발하게 활동했다.
지은이 : 나카하라 주야
1907년 야마구치현에서 태어났다. 13세에 『보초신문』에 기고한 단카가 입선하며 본격적으로 문학 활동을 시작했다. 학교 중퇴와 자퇴를 반복하며 문학 활동을 하는 과정에서 고바야시 히데오, 오오카 쇼헤이, 다자이 오사무 등 향후 일본 문학계를 이끌 문인들과 인연을 맺고 다다이즘, 상징주의, 생철학 등이 융합된 자신만의 독보적인 문학 세계를 구축한다. 니혼대학 자퇴 후에는 프랑스어학원 아테네 프랑세에서 프랑스어를 배웠고 베를렌, 랭보의 시를 번역했다. 다수의 동인과 기고 활동 중에 첫 시집 『염소의 노래』를 발표하고 상업적 실패를 겪지만 이후 문단의 재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장남 후미야가 소아결핵으로 사망하자 그 충격으로 환청과 신경쇠약에 시달리다 고바야시 히데오에게 마지막 시집 『지난날의 노래』의 출간을 맡기고 1937년에 30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지은이 : 하야시 후미코
가난하고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연인에게 버림받은 후 여러 아나키스트 시인들과 동거와 헤어짐을 반복하다가 미술학도 데쓰카 료쿠빈과 결혼했다. 생활이 안정되자 자전적 소설 ≪방랑기(放浪記)≫를 출간해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다. 만주, 조선, 런던, 파리 등을 여행하며 기행문을 쓰기도 하고 중일 전쟁 때 난징에 특파원으로 가 기사 등을 집필하기도 했다. 저널리스트로 활동했으며, 세상을 뜨기까지 집필과 여행, 취재와 강연 등을 멈추지 않았다. 대표작으로는 ≪방랑기≫, ≪청빈의 서(貧の書)≫, ≪굴(牡蠣)≫, ≪늦게 피는 국화≫, ≪뜬구름≫ 등이 있다.
지은이 : 다카무라 고타로
도쿄 미술학교 조각과를 졸업하고, 로댕이 일본에 소개되자, ≪오귀스트 로댕≫을 읽고 깊은 영향을 받았다. 뉴욕으로 건너가 조각을 공부하고 런던으로 건너가서 오기와라 모리에(萩原守衛)와 친교하고, 버나드 리치를 알면서 서구 전통에 빠졌다. 파리로 가서 보들레르와 베를렌의 시를 접했고, 격절된 문화적 차이에 열등감을 느껴 이탈리아를 여행하고 귀국한다. 대표작으로 ≪지에코초(智?子抄)≫, ≪위대한 날에(大いなる日に)≫, ≪아저씨의 시(をぢさんの詩)≫, ≪기록(記錄)≫(1944) 등이 있다.
지은이 : 가네코 미스즈
자연(바다)과 생명, 어촌의 풍경과 어부들의 삶을 소재로 한 그의 시들은 영ㆍ미 등 세계 10여 개 국가에 번역 출간돼 “휘트먼의 생명 찬미와 블레이크의 통찰, 실비아 플라스의 폭넓은 관조를 함께 품은” 작가로 큰 사랑을 누렸다. 특히 플라스와는 비극적 삶이 대비되기도 했다. ― 2018년 4월 11일자 <한국일보>의 '기억할 오늘'에서일본 야마구치현 오쓰군 센자키(현재의 나가토시 센자키)에서 삼남매의 둘째이자 외동딸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온순하고 독서를 좋아했다. 두 살 나던 해 서점 경영을 위해 만주에 있던 아버지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어머니가 생계를 위해 서점을 열었다. 가네코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어머니를 도와 서점을 돌보는 한편, 1923년 스무 살 무렵 시를 쓰기 시작하여 본명인 가네코 데루 대신 가네코 미스즈라는 필명으로 잡지에 투고했는데 이례적으로 네 개의 잡지에 일제히 게재되며 시인으로 데뷔했다. 잡지 <동요>의 선고자였던 시인 사이조 야소로부터 ‘젊은 시인 중의 거성’이라는 평가를 받아 당시 젊은 시인들의 동경의 대상이 된 그녀는 3년 후에는 일본 문단을 대표하는 문인 이즈미 교카, 시마자키 도손 등이 회원으로 있는 ‘동요시인회’의 최연소 회원이 되었다. 이렇게 시인으로서는 활발하게 작품 활동을 펼친 그녀의 개인적인 삶은 그리 평탄하지 못했다. ‘동요시인회’의 회원이 되던 1926년 집안에서 정한 남자와 결혼하고 딸을 낳았으나, 문학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남편은 그녀가 편지를 쓰는 것조차 금지했다. 결국에는 1930년 2월 이혼을 했지만 딸을 남편에게 빼앗길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3월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사후 50여 년간 어둠에 묻혀 있던 그녀의 작품은 아동문학가 야자키 세쓰오(현재 가네코 미스즈 기념관 관장)의 집념과 열의에 힘입어 다시금 세상 속으로 나오게 되어 교과서에 수록되고 세계 11개국의 언어로 번역.출판되고 있을 뿐 아니라, 그녀의 삶은 드라마와 영화로 만들어져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고 있다.
지은이 : 미요시 다쓰지
지은이 : 마사오카 시키
1867년 음력 9월 17일 마쓰야마(松山)에서 무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명은 쓰네노리(常規)였으며, 술을 많이 마셨던 아버지를 다섯 살 되던 해 여의고 세 살 아래인 여동생 리쓰(律)와 함께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랐다.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헤이지 모노가타리(平治物語)≫, ≪삼국지≫ 등 전쟁 소설 읽기를 좋아하던 시키는 사춘기에 들어서는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자유 민권 운동에 귀를 기울이며, 15세 때는 교내뿐만 아니라 청년 연설회에서 ‘자유’에 대해 연설하기도 한다. 정치열에 들떠 공부도 등한히 하게 된 시키는 정치가가 되려는 야심에 도쿄의 외무성에서 근무하고 있던 외삼촌에게 편지를 보내 그 허락으로 16세에는 꿈에 그리던 도쿄로 올라온다. 그 이듬해 1884년부터 옛 번주(藩主)의 육영 단체인 도키와카이(常盤會)의 급비생이 되어 공부하면서 도쿄대학 예비문에 합격, 이해에 수필 <붓 가는 대로>를 쓰기 시작한다. 도쿄대학 예비문은 2년 후 1886년에 제일고등중학교로 재편되었는데 이곳에서 시키는 동갑내기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도 만난다. 1889년 2월, 시키가 각종 문예 형식으로 집필한 7편을 ≪칠초집(七草集)≫ 한 권으로 묶어 비평을 부탁했을 때 나쓰메 긴노스케(夏目金之助)는 크게 칭찬하며 ‘소세키(漱石)’라는 필명으로 서명했고, 마사오카 쓰네노리(正岡常規)는 9월에 소세키의 기행·한시문집 ≪목설록(木屑錄)≫을 비평해 주었을 때 ‘시키(子規)’라는 필명을 쓴다. 시키는 이해 5월에 일주일 정도 객혈을 계속한 후, 이제부터 울며 피를 토한다는 두견새[子規]를 필명으로 하자고 결심하며 처음으로 사용했던 것이다. 이듬해 9월 시키는 도쿄제국대학 문과대학 철학과에, 소세키는 같은 대학 영문과에 입학한다. 그러나 시키는 다시 철학과에서 국문과로 전과해 하이카이(俳諧) 분류에 착수한다. 1892년 25세 되던 해 11월, 어머니와 여동생을 도쿄로 불러 함께 지내며 12월 1일부터 일본신문사에 입사해 하이쿠 시평(俳句時評)을 담당한다. 대학은 그 이듬해 3월 정식으로 그만둔다. 시키의 네기시 전셋집은 ‘시키암(子規庵)’ ‘네기시암(根岸庵)’이라 불리며 하이쿠와 단카 제자들은 물론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문예를 담론하던 ‘문학 살롱’ 구실을 했다. 시키는 ≪일본≫이 폐간되고 발간한 ≪소일본(小日本)≫의 삽화가로 일하게 된 나카무라 후세쓰(中村不折)와 만나 자연의 실경(實景)에 관심을 가지며 그의 예술적 지향이 된 ‘사생(寫生)’에 눈을 뜨게 된다. 27세 가을 무렵이다. 1894년 청일전쟁이 일어나 유능한 신문기자는 모두 종군 기사를 써서 인기를 떨치고 있을 때 시키도 간절히 원했던 종군이 허락되어 1895년 3월 중국으로 떠나 요동반도의 서쪽 금주(金州)·여순(旅順) 등에서 1개월 정도 머문다. 그때 육군 군의 부장으로 종군하고 있던 모리 오가이(森鷗外)를 매일같이 방문하기도 한다. 전쟁은 곧 끝나고 5월, 돌아오는 배 안에서 지병인 폐결핵이 재발해 고베(神戶)에 도착하자 병원에 입원한다. 8월 고향 마쓰야마에 돌아가 마쓰야마중학교 영어 교사로 근무하던 소세키의 하숙에서 동거하다가 11월에 도쿄로 돌아온다. 1896년 29세부터는 결핵균이 척추로 옮아가 보행이 불편해 대부분의 시간을 병상에서 지내게 된다. 하이쿠 혁신이 문단에서도 인정받아 이해 1월 3일, 시키암(子規庵)에서 열린 하이쿠 짓기 모임에는 오가이와 소세키도 교시(虛子), 헤키고토(碧梧桐) 등과 함께 참석한다. 4월부터 12월에 걸쳐 수필 <송라옥액(松蘿玉液)>을 신문 ≪일본(日本)≫에 연재한다. 병세가 악화하는데도 시키는 해를 거듭하며 <하이진 부손(俳人蕪村)>을 비롯해 <가인에게 보내는 글(歌よみに?ふる書)> 등을 연달아 발표하며 단카 혁신에도 힘을 쏟는다. 1898년 3월에는 최초의 단카 모임인 가회(歌會)를 시키암에서 개최했으며, 하이쿠 전문 잡지인 ≪호토토기스(ホトトギス: 두견새)≫를 도쿄에서 발간, 시키의 주재(主宰)로 교시가 편집을 담당하도록 한다. 이해까지는 인력거를 타고 수차례 외출을 시도했다. 그러나 병세는 더욱 악화해 누워 지내는 나날 속에 1899년 3월에는 ‘네기시 단카회’가 정식으로 발족한다. 이해 가을부터 시키는 나카무라 후세쓰가 쓰던 그림물감을 건네받고 수채화를 그리기 시작한다. 시키는 자신의 생존 기간과 경쟁이라도 하듯이 1901년 1월부터 7월에 걸쳐서는 <묵즙일적(墨汁一滴)>을 연재하고 9월부터는 병상 일지와 다름없는 <앙와만록>을 쓰기 시작한다. 1902년 1월부터는 병세가 더욱 급격히 악화해 문하생들이 교대로 간호하며, 원고는 구술로 집필된다. 5월 5일 <병상육척(病牀六尺)>을 연재하기 시작해 9월 17일 127회로 이승을 마감하기 이틀 전까지 계속한다. 그사이 6월 27일부터 8월 6일에 걸쳐서는 갖가지 과실을 그린 ≪과일첩≫을, 8월 1일부터 8월 20일 <나팔꽃>을 마지막으로 그린 ≪화초첩≫도 완성하고 있다.9월 18일 오전, 어머니는 의사를 부르러 가고, 구가 가쓰난 부부, 헤키고토, 여동생 리쓰가 둘러앉아 머리맡을 지키는 가운데 마지막 힘을 다해 먹물을 머금은 붓으로 절필 3구(句)를 쓰고 나서는 곧 혼수상태에 들어간 채로 이튿날 9월 19일 새벽 1시에 영원히 숨을 거둔다. 만 35년의 생애였다.
지은이 : 호리 다쓰오
일본의 소설가이자 시인. 1904년 도쿄에서 태어났으며, 열아홉 살부터 폐결핵을 앓았다. 1925년 도쿄제국대학 국문학과에 입학해 나카노 시게하루와 동인지 〈로바〉를 창간했으며, 졸업 후 1930년 《성가족》으로 문단에 데뷔한 후 본격적으로 소설 집필을 시작했다. 나가노 현 가루이자와의 요양소에서 약혼녀를 잃은 경험을 바탕으로 《바람이 분다》를 집필하였다. 《바람이 분다》를 통해 순수한 사랑과 생명의 아름다움을 그려내며, 이후 《아름다운 마을》, 《하루살이의 일기》, 《나오코》 등의 대표 작품을 남겼다. 1953년, 폐결핵으로 이른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지은이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도쿄(東京)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축산업을 했고 생후 7개월쯤 어머니가 정신 장애를 일으키자 어머니의 친가인 외삼촌 부부에게 맡겨진다. 결국 어머니는 33세의 나이로 그가 10세 때에 죽는다. 가난하고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으나, 중학생이 된 아쿠타가와는 동급생들과 회람잡지 ≪유성≫을 발간했고, 다년간 성적 우수자로 제일고등학교 문과에 무시험 입학한다. 수재형 모범생으로 보들레르, 스트린드베리, 아나톨 프랑스, 베르그송 등을 섭렵한다. 고등학교 동기인 구메 마사오, 기쿠치 간 등과 함께 제3차 ≪신사조≫를 간행하고 데뷔작 <노년>(1914)을 발표하면서 작가 활동을 시작한다. 대표작으로 꼽히는 <라쇼몬>(1915)과 <코>(1916), <마죽>(1916), <수건>(1916) 등을 연이어 발표하며 신진 작가로서의 지위를 확립한다. 작품 <코>는 나쓰메 소세키의 극찬을 받았고, 도쿄대학 영문과를 차석으로 졸업한다. 이후 역사 소설로 역설적인 인생관을 나타내려는 이지적인 작풍을 나타내며, 작가 생활 10여 년간 150여 편의 작품을 남긴다. 복잡한 가정 사정과 병약한 체질은 그의 생애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워 페미니스틱하고 회의적인 인생관을 갖게 된다. 결국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고 회의와 초조, 불안에 휩싸여 심한 신경 쇠약으로 ‘장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을 이유로 자살하고 만다. 문예춘추사의 사장이던 기쿠치 간이 죽은 친구를 기리기 위해 매년 2회, 1월과 7월 수여하는 아쿠타가와상을 제정했다.
지은이 : 미야모토 유리코
소설가, 사회운동가. 도쿄의 명망 있는 건축가의 장녀로 태어나 유복한 어린시절을 보냈다. 열여덟 살에 소설 「가난한 사람들」을 발표해 천재소녀로 주목 받았다. 자본주의 사회의 폐해를 깨닫고 문학으로 민주주의 운동을 펼쳤으며 수차례 투옥 및 집필 금지처분을 받았다. 패전 후 피폐해진 사회상을 여성의 시선으로 섬세하게 그려낸 소설 「반슈평야」를 비롯해 「두 개의 정원」, 「도표」 등 역작을 남겼으며 집필, 강연, 집회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지은이 : 다케히사 유메지
1884~1934. 그림 그리는 사람. 때로는 글도 쓰는 사람. 20세기 초 일본 다이쇼 시대의 낭만적인 예술적 흐름을 일컫는 ‘다이쇼 로망’을 대표하는 예술가. 그림 외에도 책 장정, 일러스트, 표지 디자인, 옷감 및 종이 패턴, 광 고, 르포, 시, 동시, 산문 등 전방위에서 자기 손으로 할 수 있는 모든 예술 활동을 자유로운 정신과 스타일로 펼쳐 보였다. 화가로서는 특유의 몽환적이고 쓸쓸한 여체 묘사가 사랑받아 ‘유메지식 미인도’가 시대를 풍미했다. 작가로서는 자연과 동물과 세상을 글과 그림으로 스케치한 사계절 시화집 시리즈가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고, 「달맞이꽃」과 같은 시는 유행가로도 만들어졌다. 그러나 전쟁의 서막을 알리며 경직되는 시대 분위기 속에 차츰 세상에서 밀려나 만년에는 산골 요양소에서 조용히 죽음을 맞이했다.
지은이 : 가타야마 히로코
시인, 수필가, 아일랜드문학 번역가. 외교관의 장녀로 도쿄 아자부에서 태어났다. 아일랜드문학에 매력을 느껴 예이츠, 존 싱, 그레고리 부인 등의 작품을 번역했다. 자기 삶의 소소한 단상을 절제되고 우아한 문체로 엮은 만년의 수필집 『등화절』은 근대여성의 아름다운 산문으로 이름이 높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와 깊은 문학적 교류를 통해 서로 사랑의 감정을 느끼기도 했는데, 아쿠타가와가 『어느 바보의 일생』 「나보다 나은 사람」 편에서 “재능 면에서 나와 겨룰 수 있는 여자를 우연히 만났다”며 “어찌 내 이름을 아낄까, 아껴야 할 것은 그대 이름인 것을”이라 노래한 대상으로 알려졌다.
지은이 : 오다 사쿠노스케
오다사쿠(織田作)라는 애칭으로 널리 불리는 오다 사쿠노스케는 1913년 오사카 덴노지 근처 뒷골목 튀김집의 1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학업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어 1931년 제3고등학교, 현 교토대학에 입학하나 졸업시험 도중 객혈하여 졸업하지 못한 채 1934년 오사카를 떠나 전지요양에 나선다. 그리고 이때부터 극작가를 지망하며 극본 집필에 몰두한다. 하지만 이윽고 스탕달에게 큰 영향을 받아 1938년 단편 「비」를 발표하며 소설의 세계에 발을 들인다. 이후 오사카로 돌아와 기자 생활을 시작함과 동시에 꾸준히 소설 집필을 이어간다. 1939년 발표한 「속취」가 최고권위 문학상인 아쿠타가와상 후보로 지명되고, 이듬해 7월 발표한 「부부단팥죽」이 제1회 가이조샤 문예추천작에 당선되며 소설가로서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된다. 전쟁이 시작되어 장편 『청춘의 역설』이 발매 금지 처분을 당하는 등 큰 어려움을 겪지만 다자이 오사무, 사카구치 안고 등과 함께 사회통념, 기성 사상 일체에 반발하며 고유의 직관을 추구하는 무뢰파 작가로서 활동을 꾸준히 이어간다. 1946년 12월 대량의 각혈을 일으키며 점차 상태가 악화하여 이듬해인 1947년 1월 33세 나이로 요절한다. 빠르고 경쾌하면서도 날카로운 문체와 희극을 보는 듯한 생동감 넘치는 이야기가 돋보이는 오다사쿠의 작품은 7년밖에 안 되는 짧은 활동 기간에도 불구하고 오다 사쿠노스케 문학상이 제정되는 등 많은 사랑을 받았다. 2007년, 사후 60년 이 지난 뒤에야 전시 중 발표하지 못한 단편 「부부단팥죽 속편」 원고가 발견되어 다시금 주목받고 있다.
지은이 : 요사노 아키코
요사노 아키코는 일본의 가인이자 시인, 작가, 사상가이다. 잡지 『묘조明星』에 단카를 발표하고 낭만주의의 중심적인 인물이 되었다. 대표작으로는 평론『정조를 파괴하는 자는 남자』, 가집『흐트러진 머리칼みだれ髪』, 시「너 죽는 일 부디 없기를君死にたまふことなかれ」, 남편과 함께 남긴 기행문『파리에서巴里より』 등이 있다.
지은이 : 도요시마 요시오
1890년-1955년. 도쿄대학 졸업.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등과 함께 문예지 <신사조(新思潮)>를 통해 활동. 모교 강단에도 섰으며, 소설 외에 동화와 희곡 창작에도 몰두함.
지은이 : 나가이 가후
나가이 가후[본명 소키치]는 1879년 12월 3일 도쿄 고이시카와 구에서 태어났다. 1894년 병에 걸려 입원하는 바람에 학업을 잠시 중단한 가후는 병원과 요양지에서 에도 시대의 통속 소설인 희작 문학을 탐독했다. 반년 후 복학했지만 학업에 흥미를 잃은 가후는 퉁소와 한시를 배우면서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1897년 엄격했던 아버지가 일본 우선(郵船)의 상해 지점장이 되어 집을 비우자 유곽에 출입하면서 한학자의 아들답게 에도 음악, 만담, 우키요에 등에 빠져 지냈는데, 유흥비를 마련하기 위해 집에 있던 한문 서적을 내다 팔기도 했다. 1898년에 히로쓰 류로의 문하생이 되었고 이듬해에는 이와야 사자나미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에밀 졸라에 심취했다. 1902년부터 ≪야심(野心)≫, ≪지옥의 꽃(地獄の花)≫, ≪꿈의 여자(夢の女)≫를 발표했는데, 특히 ≪지옥의 꽃≫은 모리 오가이의 극찬을 받아 인기를 끌었다. 1908년 가후는 8월에 ≪미국 모노가타리(アメリカ物語)≫를, 이듬해 3월에는 ≪프랑스 모노가타리(ふらんす物語)≫를 출간했지만 퇴폐적 내용과 일본에 대한 모욕적 표현 등이 문제가 되어 발매 금지를 당한다. 같은 해 12월부터는 아사히(朝日) 신문에 ≪냉소≫를 연재하면서 신인 작가로 주목을 받게 된다. 1910년 모리 오가이와 우에다 빈의 추천으로 게이오대학 문학부 교수가 된다. 불어와 불문학을 가르치는 한편으로 대문호들과 친분을 쌓는다. 1916년 대학과 심각한 의견 대립을 겪은 가후는 교수직을 그만두고 신주쿠의 요초마치(余丁町)로 이사하는데, 자기 집을 단초테이라고 부르고 1917년 9월부터 여기에서 이름을 따 ≪단초테이 일기≫를 쓰기 시작한다. ≪단초테이 일기≫는 1959년까지 40년 이상 계속되어 가후의 개인사뿐만 아니라 당시 시대상을 반영하는 사료로서 가치가 크다. 이후 가후는 ≪힘겨루기≫를 비롯해 ≪에도 예술론(江?芸術論)≫, ≪오카메자사≫, ≪장마 전후≫, ≪그늘의 꽃(ひかげの花)≫, ≪묵동기담(?東綺譚)≫ 등의 작품을 남긴다. 1952년 에도 문학 연구의 업적을 인정받아 문화 훈장을 받았으며, 이듬해에는 일본예술원 회원으로 뽑힌다. 말년에 두문불출하고 홀로 살다가 1959년 4월 30일 새벽 서재 겸 침실에서 피를 쏟고 쓰러져 숨을 거둔 채 발견되었다. 향년 80세였다.
지은이 : 데라다 도라히코
1878년 도쿄에서 1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부친의 아낌없는 지원 아래 어렸을 적부터 과학적 탐구 정신을 키워 나간다. 고등학교 시절에 당시 영어 교수로 있던 나쓰메 소세키를 만나 하이쿠에 흥미를 가지게 됐으며, 물리학 교수 다마루 다쿠로의 가르침을 받고 물리학에 뜻을 둔다. 도쿄 제국 대학 물리학과에 진학하면서 상경한 이후엔 가인(歌人) 마사오카 시키, 다카하마 교시 등과 교류하며 문학적으로 현저한 영향을 받는다. 이때부터 문예지 《호토토기스》에 수필 및 사생문을 발표하며 본격적으로 문필 활동을 시작한다. 학부를 졸업하고 조교수를 거친 후 우주 물리학 연구를 위해 국비 유학생 자격으로 베를린 대학교에 입학한다. 유럽과 미국을 여행하고 귀국한 다음엔 이학부 교수로 취임한다. 「라우에의 회절 무늬 실험 방법 및 그 설명에 관한 연구」(1917)로 제국 학사원 은사상을 수상하고, 정부 및 군대로부터 각종 조사 활동과 연구를 위촉받는다. 과학 저술로는 『바다의 물리학』(1913), 『지구 물리학』(1915, 1933)이 있으며, 『후유히코슈』(1923), 『만화경』(1929), 『가키노타네』(1933) 등 수필집도 펴냈다. 1935년 전이성 골종양으로 세상을 떠난다.
지은이 : 야마모토 슈고로
야마나시 현 출생으로 본명은 시미즈 사토무. 세이소쿠 영어학교 졸업. 전당포의 종업원으로 일하다 신문, 잡지의 기자를 거쳐 소설가가 되었다. 『문예춘추』(1926년 4월호)의 현상에 투고한 「스마데라 부근」으로 문단에 나왔다. 처음에는 극작이나 동화의 집필을 주로 했으나 이후 대중오락잡지를 작품 활동의 주 무대로 삼았다. 이에 초기, 중견 시대에는 순문학자나 비평가들로부터 거의 묵살 당했다. 그러나 야마모토는 “문학에는 ‘순’도 없고 ‘불순’도 없으며, ‘대중’도 ‘소수’도 없다. 단지 ‘좋은 소설’과 ‘나쁜 소설’이 있을 뿐이다.”라는 신념하에 보편타당성을 가진 인간상의 조형을 평생의 목적으로 삼았다. 야마모토는 언제나 볕이 들지 않는 서민 편에 서서 기성의 권위에 용감히 저항하는 태도를 유지했다. 1943년에 아쿠타가와상을 사퇴한 것을 시작으로 수상을 요청받은 문학상 전부를 일축한 이유는 ‘문학은 상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작가의 윤리에서 나온 것이었다. 일본의 패전 이후 마침내 폭넓은 독자층을 확보하여 수많은 걸작을 세상에 내놓았으며, 사후 “귀여운 여인을 묘사한 체호프를 능가한다.”, “100년 후, 일본의 대표적 단편작가로 남을 것이다.”라는 등의 높은 평가를 얻었다.
지은이 : 기타하라 하쿠슈
지은이 : 무라야마 가즈코
<우리도 고양이로소이다>
지은이 : 스스키다 규킨
<우리도 고양이로소이다>
지은이 : 하시모토 다카코
지은이 : 오카모토 가노코
지은이 : 와카야마 보쿠스이
지은이 : 기무라 요시코
지은이 : 구보타 우쓰보
지은이 : 하세가와 시구레
지은이 : 스기타 히사죠
지은이 : 와쓰지 데쓰로
지은이 : 우에무라 쇼엔
1장 가을
가을 눈동자 _ 다케히사 유메지
아, 가을 _ 다자이 오사무
피아노 _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모밀잣밤나무 열매 _ 하시모토 다카코
가을 기백 _ 도요시마 요시오
가을 달무리 _ 오다 사쿠노스케
가을비 추억 _ 오카모토 가노코
가을과 만보 _ 하기와라 사쿠타로
감 _ 하야시 후미코
가을 노래 _ 데라다 도라히코
가을 소리 _ 와카야마 보쿠스이
가을밤 _ 요사노 아키코
빨래하는 날 _ 기무라 요시코
2장 겨울
눈 오는 밤 _ 무라야마 가즈코
세밑 소리 _ 야마모토 슈고로
화로 _ 나쓰메 소세키
겨울날 _ 미야모토 유리코
동짓날 _ 구보타 우쓰보
사프란 _ 모리 오가이
홍매 _ 요사노 아키코
눈 내리는 날 _ 나가이 가후
겨울 정서 _ 하기와라 사쿠타로
눈 속 장지문 _ 시마자키 도손
등화절 _ 가타야마 히로코
눈 _ 미요시 다쓰지
3장 봄
제자리걸음 _ 가네코 미스즈
봄날 밤은 _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깨나른한 봄 낮 _ 다자이 오사무
나의 5월 _ 미야모토 유리코
마음 _ 나쓰메 소세키
어린잎에 내리는 비 _ 스스키다 규킨
보리걷이 _ 하시모토 다카코
봄바람이 분다 _ 오가와 미메이
봄 _ 하세가와 시구레
산의 봄 _ 다카무라 고타로
목련꽃 _ 호리 다쓰오
아침의 꽃 _ 오카모토 가노코
봄과 아수라 _ 미야자와 겐지
4장 여름
고양이 _ 기타하라 하쿠슈
시원한 은신처 _ 하야시 후미코
비 오는 날 향을 피우다 _ 스스키다 규킨
건살구 _ 가타야마 히로코
여름밤 소리 _ 마사오카 시키
짧은 여름밤 _ 시마자키 도손
해차 향기 _ 다야마 가타이
박 키우기 _ 하시모토 다카코
매실 나는 계절 _ 요시카와 에이지
솔바람 소리 _ 와쓰지 데쓰로
얼음 가게 깃발 _ 이시카와 다쿠보쿠
교토의 여름 풍경 _ 우에무라 쇼엔
여름 _ 나카하라 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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