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파란시선 91권. 매 순간 이화은 시인의 시는 갈림길 앞에 선다. 우리에게 물음을 던진다. 자신의 근원적인 허기와 갈증과 직면할 것인가, 아니면 완강하게 줄어들기를 거부하는 저 배부른 쌀독 앞으로 되돌아올 것인가. 자신이 사랑했던 것들과 기꺼이 결별할 것인가, 아니면 저 꽃잎 한 장조차 버리지 못할 것인가. 오직 무엇인가를 열렬히 좇다가도 원점으로 되돌아오는 원형 트랙처럼 마음은 기로에 선다.
출판사 리뷰
“살금살금 잃어버린 그 밤 겨울 이야기”
매 순간 이화은 시인의 시는 갈림길 앞에 선다. 우리에게 물음을 던진다. 자신의 근원적인 허기와 갈증과 직면할 것인가, 아니면 완강하게 줄어들기를 거부하는 저 배부른 쌀독 앞으로 되돌아올 것인가. 자신이 사랑했던 것들과 기꺼이 결별할 것인가, 아니면 저 꽃잎 한 장조차 버리지 못할 것인가. “트랙을 수백 바퀴 돌아도/여자의 눈물을 훔쳐 간 도둑을 잡을 수가 없다/털실 뭉치가 자꾸 커진다”라는 문장처럼(「트랙」), 오직 무엇인가를 열렬히 좇다가도 원점으로 되돌아오는 원형 트랙처럼, 그렇게 쌓여만 가는 털실 뭉치처럼, 먼짓덩어리처럼 마음은 기로에 선다. <절반의 입술>의 마지막 작품인 「Slow slow」에는 비로소 퇴장의 몸짓이 그려진다. 우리는 그러한 몸짓이 완수될 수 있는지 조바심을 지닌 채 지켜볼 뿐이다. 우리는 그 발길에 옳고 그름도 정답과 오답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그저 인간은 자신의 마음을 다할 뿐이다. 세상은 묵묵히 결단을 요구할 뿐이다. 삶은 계속될 것이다. (이상 박동억 평론가의 해설 중에서)
사순절의 화장법
오늘 화장의 컨셉은 고통이다
예수가 골고다 언덕을 오를 때 입었던 보라색,
짙은 아이섀도를 눈두덩에 바른다
볼연지는 없다
아무것도 바르지 않은 화이트, 창백이다
입술은 아무래도 피의 연상 자목련 쪽
거기에 펄을 살짝 덧칠한다
고통이 반짝여야 한다
한쪽 귀를 긴 머리카락으로 덮었다
예수를 잡으러 온 백인 대장의 귀를 베드로가 잘랐던
그 밤을 기억한다
입은 굳게 다물어야 한다
부활은 아직 개봉 전
“당신 오늘 섹시해 보여요”
말꼬리에서 물씬 죄의 냄새가 풍긴다
어느 시대건 유다는 있는 법
죄는 멜로이고 범죄는 액션이다
어느 쪽을 택할까
심야 극장 앞에서 이마에 바른 재의 기억을 닦는다
살금살금 잃어버린 그 밤 겨울 이야기
친척 오빠들을 따라다니던
겨울
참새 집을 터는 일은 신나는 일이었다
사닥다리를 타고 올라가 플래시를 비추면
눈이 부신 참새들이 짹소리 없이 끌려 나왔다
오빠들의 도움으로 조심조심 내 손이 둥지 속으로 들어갔을 때
참새 여러 마리의 중심에 손끝이 닿았을 때
따 · 뜻 · 했 · 다
지독히 따뜻했을 뿐인데
한 움큼 따뜻한 빈손을 움켜쥐고 엉금엉금
사닥다리를 도로 내려왔을 뿐인데
그 밤
내 치마 속으로 가만히 기어드는 손이 있었다
살금살금
눈도 못 뜬 어린 참새를 훔치러 온 손이 있었다
나는 울음을 한입 가득 깨물고
순하고 착한 아이였으므로
오빠들은 죽순처럼 쑥쑥 자라 도시로 떠나고
어느 겨울 미어터진 하늘에서 큰 눈이 쏟아져
참새들이 살던 초가집이 무너지고
참새도 참새 집도 없는 기억 속에 너무 오래 앉아 있었다
상처도 함께 살면 제 살처럼 정이 드는 법
한 움큼 겨울 햇살이 새털처럼 포근한 날
오늘은 울음을 참던 고 작은 계집아이나 데리고 앉아
우는 법이나 가르쳐야겠다
울음은 참는 게 아니라고, 착한 아이도 우는 거라고
봄은 항상 내일 오지요<.b>
한 평 남짓한 구두 수선집
좁은 나무 의자에 낯선 남자와 낯선 여자가 나란히 앉았다
고장 난 신발 외에는 아무런 볼일도 할 말도 없는
그저 그런 남자와 그저 그런 여자
수선집 아저씨가
수선대 위에 신발을 확 뒤집어 올려놓는다
남자도 여자도 짐짓 못 본 척 멀리 창밖을 내다본다
유난히 안쪽으로 쏠린 남자의 속내와
바깥으로 흘러 버린 여자의 행보가
법정에 선 증인처럼 숙연하다
인자한 법조인인 양 아저씨는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
접착제가 마르는 동안 무언가 들켜 버린 사람들처럼
어색한 시선을 이리저리 굴리는데
접착제와 구두약 냄새로 숨 막히는 좁은 감옥 속에서
감옥이라고 말해도 되나
생각 없는 생각이 잠깐 오가는 사이
새로 깐 바닥을 밟고 남자가 사뿐히 걸어 나가고
내일이 입춘이에요
거스름돈처럼 아저씨가 고친 신발과 함께 불쑥 입춘을 내민다
봄은 왜 꼭 내일 오는 걸까
남자와 구두와 접착제와 입춘이
뒤축의 변명이 될 수 있을까
그저 그런 봄이 또 수선집 인연처럼 어색한 얼굴로
잠시 곁에 앉았다 훌쩍 떠나 버릴 테지만
작가 소개
지은이 : 이화은
이화은1991년 <월간문학>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시집 <이 시대의 이별법> <나 없는 내 방에 전화를 건다> <절정을 복사하다> <미간> <절반의 입술>을 썼다.시와시학상을 수상했다.
목차
시인의 말
제1부 죄 없는 몸이 한 뼘이나 있다니
시론 11
트랙 12
사람아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가라 13
자문자답 14
치자꽃이 피었다 16
독법 18
책에게 묻다 19
책장을 넘길 수가 없다 20
아직도 놀고 있어요 22
미필적 고의에 의한 자살 또는 타살 24
슬픈 목수 이야기 26
중저가의 기쁨 28
제2부 내가 당신 외로움의 꽃이라는 거
줄장미 31
첫 꽃 32
연재소설이 사라졌다 34
살금살금 잃어버린 그 밤 겨울 이야기 36
어머니의 꽃밭 38
비밀의 방에 젖은 빵이 시름시름 40
팬티를 삶으며 창밖을 오래 바라보았다 42
아담에게 44
통증 클리닉 46
마태복음 5장 28절 48
새우젓처럼 외로운 날 50
성묘 52
합장 54
영정 사진 56
평화가 위험해요 58
바늘 같은 내 몸에 황소 같은 병이 오네 60
씹 달라의 봄 62
제3부 분홍과 보라는 따로따로 웃는다
사순절의 화장법 67
애매한 문장은 죄가 되지 못한다 68
절반의 입술 70
사과의 꼬리가 없어졌어요 72
피가 새고 있어요 74
명랑한 계란 76
십 년 78
동거 80
지독한 가계 82
고요한 날에 고요한 아픔이 84
원수를 갚아 주세요 86
어두운 습관 87
화요일에 웃었다 90
제4부 쓸쓸해서 시를 읽다가 더 쓸쓸해져
아무도 읽지 않은 것들이 하얗게 사라지네 93
사월의 정맥이 출렁출렁 흘러가고 94
마지막 감 하나가 감나무 가지 끝에서 하얗게 서리 덮인 땅바닥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다 95
금연의 사실적 고찰 96
공룡이라고 불러도 될까요 98
동거는 우울해요 100
봄은 항상 내일 오지요 102
오후의 정물화가 우두커니 104
수상한 시 105
손바닥이 활활 106
시집을 열지 않았다 108
나쁜 독자 110
문학 박사 아무개 씨의 현주소 112
Slow slow 114
해설 박동억 끝없는 갈림길 앞에서 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