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강제 병합으로 국권을 침탈당한 우리 민족의 울분은 일본의 수도 한복판에 울려퍼진 도쿄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서' 낭독으로 분출되기 시작했다. 대한해협을 건너 조선으로 들어온 분노와 독립에의 열망은 들불처럼 번져나갔고, 이는 곧 '3·1독립선언서' 낭독과 전국적인 만세 운동으로 타오른다. 유관순 열사의 고향으로 유명한 충청남도 천안의 아우내(병천)에서도 조선 민중이 집결했는데, 그 역사의 현장에 섰던 사람이 바로 아우내에서 진명학교 교사로 아이들을 가르쳤던 김구응 선생이다.
그는 3·1독립선언서 낭독 소식을 듣고 ‘자주독립’이라는 시대정신을 온몸으로 구현하기 위해 분연히 일어선다. 학생, 주민들과 함께 밤새 만든 태극기를 들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며 만세운동의 선두에 선 것이다. 이에 일제는 잔혹하게 총과 칼로 아우내장터에 모여든 조선 민중을 학살했는데, 그 과정에서 김구응 선생과 그의 어머니 최정철 여사가 순국한다.
이 책을 쓴 전해주 신부는 "사제로 있던 교회의 옛 자료들을 정리하다가 4·1아우내만세운동에 대한 강애단 신부의 회고록을 보았고, 거기서 김구응이란 이름을 발견했다. 그 뒤 무엇에라도 홀린 듯 탐색을 이어갔고 마침내 옛 4·1만세운동에 대한 신문기사와 그의 공적을 알리는 역사 자료들을 찾아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사실 그 모든 자료가 단지 알려지지 않은 것일 뿐이었고, 유관순 열사에 의해 철저히 가려졌을 뿐이었음을 알게 된다.
이후 그는 가려져 있던 사실들을 한데 모아 한 편의 논문으로 활자화했는데, 이번에 선보이는 책은 그 같은 자료를 기반으로 김구응 선생에 대한 역사적 사실들을 조금 더 그러모으고, 유족 및 관계자들과의 심도 있는 인터뷰를 통해 최종적으로 그의 삶과 그때 그 시절의 상황을 톺아본 것이다.
출판사 리뷰
독립운동에 대하여 ‘알려진 사실’ 너머의 ‘숨겨진 진실’을 알려주는 소중한 기록
41아우내만세운동을 실제로 계획하고 주동한 사람은 유관순 열사가 아니다
주인공은 바로 당시 아우내 지역에서 진명학교 교사로 일했던 김구응 선생이었다!
강제 병합으로 국권을 침탈당한 우리 민족의 울분은 일본의 수도 한복판에 울려퍼진 도쿄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서> 낭독으로 분출되기 시작했다. 대한해협을 건너 조선으로 들어온 분노와 독립에의 열망은 들불처럼 번져나갔고, 이는 곧 <31독립선언서> 낭독과 전국적인 만세 운동으로 타오른다. 유관순 열사의 고향으로 유명한 충청남도 천안의 아우내(병천)에서도 조선 민중이 집결했는데, 그 역사의 현장에 섰던 사람이 바로 아우내에서 진명학교 교사로 아이들을 가르쳤던 김구응 선생이다. 그는 31독립선언서 낭독 소식을 듣고 ‘자주독립’이라는 시대정신을 온몸으로 구현하기 위해 분연히 일어선다. 학생, 주민들과 함께 밤새 만든 태극기를 들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며 만세운동의 선두에 선 것이다. 이에 일제는 잔혹하게 총과 칼로 아우내장터에 모여든 조선 민중을 학살했는데, 그 과정에서 김구응 선생과 그의 어머니 최정철 여사가 순국한다.
이 책을 쓴 전해주 신부는 “사제로 있던 교회의 옛 자료들을 정리하다가 41아우내만세운동에 대한 강애단 신부의 회고록을 보았고, 거기서 ‘김구응’이란 이름을 발견했다. 그의 기록에 의하면 41아우내만세운동을 실제로 계획하고 주동한 사람은 유관순 열사가 아니라 당시 진명학교 교사였던 김구응 선생이었다. 그동안 나는 유관순 열사가 만세운동의 주역이라는 사실을 한 번도 의심해본 적이 없었다. 어렸을 때부터 그렇게 배웠고 역사적 사실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가 접한 새로운 사실은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라고 고백한다. 그러고는 ‘역사 속의 김구응’을 알기 위해 사방팔방 뛰어다니며 자료들을 모았다. 그는 “진입로조차 없어서 논두렁 밭두렁을 넘어야 했던 김구응 선생의 묘역은 지자체와 나라에서 공을 들인 흔적이 너무도 역력한 유관순의 것과 비교할 때 너무 초라해 보였다.”고 하면서 마치 무엇에라도 홀린 듯 탐색을 이어갔고 마침내 옛 41만세운동에 대한 신문기사와 그의 공적을 알리는 역사 자료들을 찾아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사실 그 모든 자료가 단지 ‘알려지지 않은’ 것일 뿐이었고, 유관순 열사에 의해 ‘철저히 가려졌을’ 뿐이었음을 알게 된다. 이후 그는 가려져 있던 사실들을 한데 모아 한 편의 논문으로 활자화했는데, 이번에 선보이는 책은 그 같은 자료를 기반으로 김구응 선생에 대한 역사적 사실들을 조금 더 그러모으고, 유족 및 관계자들과의 심도 있는 인터뷰를 통해 최종적으로 그의 삶과 그때 그 시절의 상황을 톺아본 것이다.
김구응 열사는 민족정기를 전수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온몸으로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일제의 총칼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분이다. 따라서 열사의 실천적 삶은 진정한 교육자의 모범으로서 그리고 귀한 아우내의 지역사로서 기억되고 계승되어야 할 것이다. 나아가 사회적 자본인 ‘아우내41만세혁명’의 역사를 제대로 알리고 순국자추모각에 모신 독립운동가들의 유지를 받들며 올바른 역사의 기억을 계승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이 책은 그러한 큰일을 도모하게 해주는 데 꼭 필요한 작은 불씨가 되어줄 것이다. 또한 이 책 ≪김구응 열사 평전≫에는 독자들이 잘 알 수 없는 일제강점기 아우내를 둘러싼 많은 이야기가 들어 있다. 영국의 성공회가 충청 지역에 안착하게 되었던 배경과 경위, 아우내라는 작은 지역에서 상업과 근대식 교육이 부흥하게 된 이유, 당시 지역 유지들과 교육자들이 독립운동을 통해 상호부조했던 이야기 등이다. ‘아우내41만세혁명’의 주역이었던 김구응 열사와 그날의 함성으로 얼룩진 아우내 역사의 현장으로 독자들을 초대한다.
김구응은 누구인가?
김구응 선생은 1887년에 태어나 대한제국 시기에 진천면 서기관과 입장면 서기관으로 재직했지만, 1908년 사임하고 고향인 병천에 청신의숙(靑新義塾)을 설립한다. 민중을 깨우치는 일만이 나라가 살길이라고 보고 교육에 투신한 것이다. 이후 선생은 1908년부터 1915년까지 청신의숙을 운영했고, 기독교계 감리교회에서 운영하던 장명학교에서 1915년부터 1918년까지 교사로 근무한다. 이때 가르친 이 중에 조병옥 박사의 당질로 아우내독립만세운동을 이유로 8개월 형을 받은 조만형 선생과 유관순 열사의 오빠인 유우석 등이 있다. 1918년부터 1919년 4월 1일 운명하기 전까지 선생은 성공회에서 운영하던 진명학교에서 선생으로 재직했다. 선생은 서울에서 일어난 31독립만세운동 소식을 접하고, 동네 유지인 조인원 선생 등을 위시해 성공회의 청·장년 신자들과 아우내에서도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할 것을 논의했다. 3월 13일, 서울에서 내려온 유관순 열사도 독립만세운동 소식을 전한다. 이에 김구응 선생은 유관순 열사와 지역의 교인·학생들을 동원하여 진명학교와 성공회 등에서 수백 장의 태극기를 밤낮으로 만들었다. 그러고는 1919년 4월 1일(음력 31) 아우내장터에 약 삼천여 명의 사람들이 모이자 선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시위에 앞장서다 현장에서 순국했다.
우리가 김구응 열사에게 주목하는 이유
당시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김구응 선생은 천원군 동부 6개 면을 위시하여 오창 등 각지와 비밀 연락망을 짜고 봉화 신호에 맞추어 일제히 총궐기하도록 밀령을 전달했다. 그는 또 “유관순 열사에게 ‘나이 어린 여학생이니 일경(日警)의 눈에 띌 염려가 없다’며 태극기의 제작과 연락책 임무를 맡겼다”(1991.3.1.중앙일보). 유관순 열사가 연락책이자 봉화 책임자라는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면 선생은 전체 계획을 짠 지도자였다. 선생이 1919년 4월 1일 아우내41독립만세운동으로 순국했을 때의 나이는 32세였다. 그 뒤로 26년의 세월이 흘러 한국은 마침내 독립을 이루어냈다. 그때의 기록은 ≪한국독립운동사략≫ ≪한국독립운동지혈사≫ ≪미국 신한민보≫에 실려 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그 사실을 모른다. 여전히 아우내41만세혁명의 역사에는 이를 준비하고 실행했던 인물과 조직과 전개 과정에 대한 실증적인 기록도 객관적인 평가도 생략되어 있다. 유관순 열사를 제외한 열사 59명에 대한 조명은 부실하거나 전무(全無)하고 무명 열사 11명은 명부에서조차 삭제되었다. 우리가 아우내41만세혁명의 역사를 자랑스럽게 기념하고 그 정신을 계승하려면 무엇보다도 그 역사적 실체를 객관적으로 규명하고 정당하게 재평가해야 하지 않을까? 이러한 의미에서 ≪김구응 열사 평전≫은 그 출발점이 될 것이다.
김구응 선생은 객지 생활을 마치고 고향인 병천으로 돌아와 진천과 입장에서 자신이 경험한 근대식 교육을 펼칠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옮겼다. 바로 청신의숙(淸新義塾)I이란 사설 교육기관을 직접 세워 꿈을 실현하려 한 것이다. 김구응 선생은 이를 위해 자신의 사재를 기꺼이 털었으며, 뜻을 함께하는 지역민들의 후원을 받기도 하였다. 때는 1908년, 그의 나이 21세였다. 그는 이곳에서 한학은 물론 진천과 입장에서 영국 선교사들로부터 배우고 익혀온 근대식 교육을 지역 내 어린 학생들에게 열정적으로 가르쳤다. 뿐만 아니라, 지역의 유지들과 지도자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근대식 교육의 필요성을 알리고 그들의 지지와 후원을 받아냈다. 이와 같은 그의 행동은 이후 아우내만세운동이라는 거사를 치르는 데 도움이 되는 지역민들의 지지와 호응으로 이어졌고, 큰 힘을 발휘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그 후 김구응은 1915년 수신면 장신리에 위치한 감리교회에서 운영하던 장명학교(長命學校)I의 일인(日人) 교장 밑에서 교사로서 잠시 일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학교는 감리교회가 문을 닫으면서 곧 문을 닫게 되었다. 이후 그는 1918년부터 성공회의 구세실 주교가 운영하는 진명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계속하던 중 아우내만세운동을 준비하면서 그 주역을 맡게 되었다_<병천 시절, 아우내만세운동의 터를 닦다>
당시 병천에서 진명학교 교사로 근무하던 김구응 선생에게 3‧1만세운동은 학수고대하던 반가운 소식이었다. 그는 일본의 압제가 심해질수록 어떤 식으로든 독립하고자 일본에 항거하는 민족적 운동이 일어날 것을 예상하고 있었으며 그때를 대비하여 나름대로 준비하던 차였다. 김 선생은 아우내장을 드나드는 장꾼들에게 전해 들은 전국 각지의 소식을 종합해보았을 때 만세운동이 일회성으로 그치 는 것이 아니라 점점 남북으로 뻗어나가 전국적인 운동으로 걷잡을 수 없이 커지리라고 확신했다. 또 교사로 있는 진명학교는 영국을 모체로 하는 조선성공회에서 운영하던 곳이었기에, 영국인 신부와 그곳 전도사를 만날 기회가 잦았다. 김 선생은 이들을 통해 서울에서의 긴박한 소식을 실시간으로 접할 수 있 었던 것이다. 따라서 아우내에서 김구응 선생만큼 3‧1만세운 동의 전후 내막을 자세히 아는 이도 없었다. 또한 3월 13일 고향인 병천으로 내려온 이화학당의 유관순은 자신의 오빠를 지도했던 김구응 선생을 찾아가 서울에서 직접 자신이 참여했던 만세운동의 소식과 그곳의 긴박했던 상황, 그리고 자신이 구금되면서 겪었던 일제의 동향 등을 전했다. 유관순은 아우내에서 만세운동을 한다면 이를 준비하고 앞장서 주도할 수 있는 사람은 김구응 선생밖에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_<아우내(병천)에는 김구응 선생이 있었다>
한편 김구응 선생이 성공회의 진명학교를 거점으로 삼아 아우내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준비했다는 것은 또 다른 정황으로도 설명할 수 있다. 이는 일본이 재판한 아우내만세운동에 대한 기록에서 살펴 볼 수 있다. 당시 기록을 살펴보면 아우내만세운동을 두 건의 사건으로 나누어 별도의 재판을 받은 것으로 되어 있다. 이는 일본 재판부가 다른 지역에서 벌어진 만세운동을 그 운동에 참여하다 잡힌 사람들을 한데 묶어 하나의 사건으로 처리했던 것과는 크게 다른 점이다. 우리는 이로 인해 바로 아우내만세 운동의 주도 세력이 하나가 아니라 최소한 둘 이상이라는 것과 두 세력이 별도로 만세운동을 준비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는 재판부가 도저히 이 사건을 하나로 처리할 수 없었던 배경을 설명해준다. 그 이면을 자세히 살펴보면 두 세력이 아주 긴밀하게 협조하였다는 것도 간과할 수 없다. 병천은 무척 작은 지역인데도 대규모인 데다가 조직적인 만세운동이 한날한시에 같은 장소에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두 세력이 사전에 긴밀하게 교류하고 미리 협조를 받아내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이는 분명 두 세력을 연결하고 조 정하는 지역공동체가 그 중심에 있었다고 봐야 한다. 만세운동이 일어났던 때는 지금처럼 통신이 발달했던 시절도 아니고 기껏해야 사람의 입과 발에 의존하여 연락을 주고받았을 시절에 만세운동 같은 조직적인 거사를 준비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분명 모든 일을 총괄하고 조정하던 공동체가 있었으리라고 추정하는 배경이다._<김구응, 만세운동의 주역>
작가 소개
지은이 : 전해주
서울에서 초중고를 졸업하고, 성균관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졸업했다. 직장생활을 하다 마흔이 넘어 성공회에 입문하여 49세의 늦은 나이에 사제로 서품을 받았다. 4.1아우내만세운동의 근거지인 충남 병천의 성공회에서 사제로 지내면서 자연스레 김구응 열사를 알게 되었다. 김구응 열사는 병천에서 진명학교 교사로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학생과 주민들을 이끌고 만세운동에 앞장섰다. 역사의 숨은 면면을 알리고자 김구응 열사에 대한 자료를 모아 논문(2005년)을 발표했고, 이 작업을 인연으로 《4‧1아우내만세운동의 주역 김구응 열사 평전》을 펴내게 되었다.
목차
기획자의 말_김종수(김구응열사기념사업회 회장)
기획자의 말_이용길(천안역사문화연구회 회장)
기획자의 말_김운식(김구응 열사 손자)
추천사_김지철(충청남도교육감)
추천사_한시준(천안독립기념관장)
추천사_유낙준(대한성공회 대전교구장)
저자의 말_전해주
1장 김구응, 그는 누구인가
김구응 선생의 뿌리를 찾아서 / 진천 시절, 근대 교육의 세례를 받다 / 병천 시절, 아우내만세운동의 터를 닦다 / 김구응과 그의 가족들
2장 성공회와 진명학교
충남 병천에 기독교가 들어오다 / 성공회 선교의 시작 / 성공회 선교의 특징
3장 그날의 함성
그해 그날의 3운동 / 아우내(병천)에는 김구응 선생이 있었다 / 김구응, 만세운동의 주역 / 아우내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준비하다 / 아우내만세운동의 현장
4장 아우내만세운동에 대한 평가
성공회의 3운동에 대한 입장과 분위기 / 후손들의 삶과 ‘김구응기념사업회’
<꺼지지 않는 아우내의 횃불>_이윤옥
참고문헌 및 기타 자료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