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리뷰
● 고전(古典) 중의 고전인 부처님의 본생담
고전은 아무리 긴 시간이 지나도 구닥다리 취급을 받지 않고, 오히려 시대를 거듭하여도 여전히 흥미롭거나 재미있으며 그 가치를 인정받는다. 불교의 고전(古典) 중의 고전은 바로 수천 백년 전의 부처님 자타카(본생담)이다.
본생담의 가치는 동서양을 막론하여 찾아볼 수 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솝이야기』나 『아라비안나이트』, 라퐁텐의 『우화』, 영웅 서사시인 『라마야나』, 『마하바라타』, 셰익스피어에도 영향을 미쳤다. 또한, 산치 대탑, 아잔타 석굴, 바르후트 스투파, 간다라 미술뿐만 아니라 중국의 키질 석굴, 둔황 석굴, 보로부두르 대탑에도 자타카의 이야기가 남아있다.
본생담은 약 547여 개의 이야기가 있는데 산치-아잔타 본생담은 총 25편이다. 그중 산치 대답에 부조로 조각되고 아잔타 석굴에 벽화로 그려진 본생담만을 뽑아 니그로다미가, 마뚜뽀사까, 찻단따, 마하수따소마 본생담 등을 실었다. 또한 법보신문에 연재했던 각전 스님의 본생담을 읽은 중학교 2학년부터 80대 중반의 거사님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독자들의 댓글도 실려 있어 스님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다시 한번 느낄 수 있다.
2021년 제18회 불교출판문화상 대상 수상 도서 《인도 네팔 순례기》의 저자 각전 스님은 구도의 연장선상에서 다녀온 인도 네팔 순례에서 부처님의 성지와 아잔타 석굴, 엘로라 석굴, 산치 대탑 등을 답사하였다. 《인도 네팔 순례기》가 부처님이 살아생전 계셨던 곳에서의 이야기라면 《자타카로 읽는 불교 1》은 난행(難行: 어려운 행)을 능행(能行: 능히 행함)하는 부처님의 전생 이야기이다. 스님은 이 책을 집필하며 우리에게 알려주고 싶었던 자신의 ‘변화’를 이미 몸소 느끼고 있었다.
순례기 초고를 탈고하고 나서 한동안은 본생담의 이야기들이 제 머릿속을 온통 채워 버리고도 남아 넘쳐흐를 정도였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제 자신이 조금 변해 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좋은 문구와 짧은 명언도 깊은 인상을 주는 경우가 종종 없는 것은 아니지만, 본생담의 이야기들이 주는 스토리텔링의 힘은 대단해서 저의 사고와 정서를 변화시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본생담의 이야기들이 도도히 흐르는 커다란 강물의 물줄기와도 같이 저를 휩쓸어 부처님의 대해로 쓸어가 버리는 듯한 느낌이었다고나 할까요.
● 왜 본생담에 주목해야 할까?
우리는 부처님의 전생 이야기에 대해 많이 알고 있다. 비둘기를 살리기 위해 허벅지 살을 도려내 준 부처님, 자신이 구해준 궁수에게 배신을 당하고도 오히려 그를 위해 살아날 길을 알려주는 황금 사슴이었을 적의 부처님 등 코끼리, 원숭이, 백조, 왕, 궁수 등으로 태어났던 다양한 모습의 전생 이야기가 있다. 대부분 자신을 희생해 타인을 구해주는 내용이다. 얼핏 ‘본생담에서 강조하는 것은 희생인가?’라고 생각할 수 있다. 왜 부처님의 본생담이 중요한 걸까? 왜 본생담에 주목해야 할까?
본생담은 부처님이 부처가 되기 이전 과거세의 선행 이야기다. 현재의 생을 일으킨 과거세의 끝없는 선행 덕분에 선업이 쌓이고 쌓여서 고타마 싯다르타로 태어나 부처가 된 것이다. 그냥 부처가 된 것이 아닌 반복적인 생과 사의 윤회 속에서 전생의 자기 희생의 복덕 덕분에 부처가 되었음을 보여준다. 결국 우리의 현세(現世)의 모습은 전생의 결과이고, 내세(來世)의 모습은 현세의 결과인 것이다. 본생담은 무엇보다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난행(難行: 어려운 행)을 능행(能行: 능히 행함)하는 보살의 구체적이고 다양한 행동을 보여주면서 악연(惡緣)을 선연(善緣)으로 바꾸어 더 이상 업을 짓지 않게 이끌어 준다.
본생담을 읽다 보면 나와는 상관없는 옛날 옛적의 이야기가 아닌 바로 나 자신의 마음 밑바닥의 이야기임을 느끼게 된다. 첫째 부인에게 질투하는 둘째 부인, 그 질투로 눈이 멀어 결국 남편을 죽음에 몰기까지 하는 이야기, 한쪽 눈을 내어주고도 모자라 나머지 한쪽 눈까지 내어주고, 결국 아무것도 보지 못하게 되자 후회하는 인간 본연의 마음.
각전 스님은 이렇게 말한다.
본생담에 실린 작품들의 세계관은 불교 수행에서 기초가 되는 심성과 성품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이런 기초가 없이 신행 활동을 하거나 수행 정진한다는 것은 1층 없이 2층을 지으려는 것과 같다. (중략)
어떤 위대한 가르침의 말을 들었을 때 그것을 기억하는 것은 총명한 이라면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로 인해 자신의 마음 내지 심성(心性)이 변화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본생담을 순수한 마음으로 여과 없이 읽는다면 누구나 크든 작든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물론 그 변화가 어떤 것인지, 어느 정도인지, 어떤 결과에 이를 것인지는 아무도 모를 것이다.
더욱 부처님의 전생 이야기가 중요한 것은 누구나 하기 어려운 행동을 능히 행하고, 선과 악의 대결이라는 전통적인 프레임이 구닥다리처럼 느껴지지 않는 것은 악에 대항하며 무찌르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 악(惡)이 스스로 느껴 선(善)이 될 때까지, 내 몸이 사라질 때까지 악을 끌어안아 폭풍우가 아닌 따스한 햇살로 포근히 감싸 안는 것, 이런 점이 본생담이 일깨우는 진정한 의미이다. 맞서 싸우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러나 싸우지 않으면서 은근한 따스함을 전하며 악인이 스스로 뉘우칠 때까지 시간을 주는 것,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부처님의 마음인 것이다.
각전 스님이 백척간두(百尺竿頭)에 머물지 않고 진일보(進一步)하여 정진(精進) 여가(餘暇)에 이 고전(古典) 중의 고전인 부처님의 본생담을 바래고 다 식어버린 잿더미 속에서 발췌해서 우리의 불심(佛心)을 심어주고 일깨워주는 법공양으로 올리니, 이 불사(佛事)의 크나큰 공덕(功德)을 말로 다할 수 없다.”
-불국사 승가원장 덕민 스님의 추천사 중-
덕민 스님의 추천사처럼 각전 스님의 《자타카로 읽는 불교 1》을 통해 내 마음속에 숨어있는, 나도 모르는 불심을 깨워 난행(難行: 어려운 행)을 능행(能行: 능히 행함)하여 자신의 한계를 깨뜨리면 어떨까 싶다.

∵ 누구나 젊은 시절에는 정신이 맑고 깨끗하며 정의로움으로 넘쳐흐르기 마련이지만, 인생의 본격적인 과정이 진행되다 보면 푸르던 정신은 물들고 흐려져서 물이 흘러나온 첫 수원지는 아득하기만한 것이다. 맑은 물은 흐려지는 것을 알 수 있지만 이미 흐려진 물은 맑은 상태를 알 수 없다. 가느다랗던 물줄기도 커질 대로 커졌다. 어찌 되돌릴 것인가?
그리고 현재의 삶이 또 그럭저럭 살아갈 만해질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기 때문이다. 적응은 행복을 헌납한다. 또 삶이 어렵고 힘들더라도 하루하루에 쫓겨 되돌아볼 틈도 없다.
이러한 물듦의 과정 속에서 그녀로 하여금 출가의 결심을 잊지 않게 한 것은 몸의 더러움에 대한 철저한 인식이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의 표출이 남편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다.
몸의 더러움에 대한 인식을 수행법으로 발전시킨 것이 부정관(不淨觀)이다. 부정관은 탐심을 없애는 수행법으로서 32가지 명상 주제, 백골관 등 다양한 방법으로 개발되어 수행에 사용되었다. 탐심이야말로 중생심의 근본이다. 탐심을 없애는 것이야말로 정진의 근본인 것이다.
∵ 댓글 2022.2.21.
내 몸속에 오물이 수두룩한데 겉모습만 치장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이 참으로 부끄럽고 한심하게 느껴집니다. 부모님이 허락하지 않으니 거역하지 않고 기다리면서 덕을 쌓고 공덕을 짓는 마음, 그 세월을 보내는 인내심, 과연 우리는 어느 잣대로 생각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 연재를 읽으면서 나 자신의 부족함이 자꾸 새록새록 생각납니다.
∵ 몸을 보시한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일까? 그것은 자신을 버리는 것이다. 자신을 버리는 것은 아상(我相)을 버리는 것이다. 아상으로 인해 자존심이 상하고 열등감과 우월감에 싸이고, 교만에 놀아난다. 아상을 버리는 것이야말로 ‘성인들이 선을 행하는 오래된 길’이다.
그것은 버리려 해도 잘 버려지지 않는다. 그래서 자기 몸을 버려 아상을 버리고자 하는 것이다. 내가 보시한다는 생각, 즉 아상을 버리고 보시를 하는 것이 최상의 수행법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금강경》 가르침의 핵심이다.
∵ 댓글 2022.4.10.
눈을 보시하는 것이 단순히 필요한 누군가에게 무엇인가를 준다는 것을 넘어 곧 아상을 버리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에 가슴을 얻어맞은 듯합니다. 어제도 나는 ‘내가 이것을 했어요. 내가 이것을 주었어요. 내가 만들었어요. 내가 썼어요. 내가---. 내가---’ 하며 얼마나 나를 보이고 싶었고 그에 대해 보상받고 싶어 했나 불현듯 나를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눈을 도려내는 그 고통이 가슴 절절히 느껴집니다. 아상을 버리는 것이 이렇게 고통스러운 것임을, 그래서 여전히 나는 ‘나’를 붙잡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