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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를 지우지 못한다
푸른사상 | 부모님 | 2024.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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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서 소개

정원도 시인의 시집 『나는 그를 지우지 못한다』가 '푸른사상 시선 192'로 출간되었다. 노동에 관한 사유를 근간으로 생명의 소중함을 존재론적으로 불러일으키는 시편들은 깊은 감동을 준다. 시인의 자전적 경험을 담은 시들은 우리 시대의 노동 현실을 구체적이면서도 진정한 시인 정신으로 반영한 것이기에 사회학적 상상력을 획득한다.

  출판사 리뷰

작품 세계
한 시인의 시세계는, 확장되고 변주될지언정 기본적으로는 ‘시인’이라는 같은 세계관을 공유한다. 재현의 양상에 차이가 있을 뿐, 시인의 경험과 사상을 기본 삼고 있다는 점에서는 같다. 그러므로 한 인간의 삶이 극적으로 달라지지 않은 이상, 대부분의 경우 시는 그 방법과 속도가 다를지는 몰라도 같은 방향을 향해 나아간다. 정원도에 국한해 말해보자. 그의 ‘말 연작’ 시집들은 자전적 경험에 그 밑바탕을 두고 있는데, 그 경험은 대부분 노동에 관한 것들이다. 이번 시집과 『귀뚜라미 생포 작전』은 노동에 그 중심을 두고 있는데, 시집에서 다루는 노동은 대부분 시인의 자전적 경험에 의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어디에 조금 더 방점이 찍혀 있느냐의 차이일 뿐 정원도의 시는 기본적으로 노동에 관한 사유를 근간 삼는 시들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우선 그의 시에 노동이 어떠한 방식으로 그려져 있는지에 대해 살피는 것이다. 그것을 제대로 살핀다면 자연스레 그가 생각하는 노동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더 나아간다면 그가 생각하는 올바른 노동과 올바른 삶에 대해서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을 알게 될 때 우리는 정원도라는 시인의 시세계를 더 깊이 이해하게 될 것이다. (중략)
정원도의 노동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는 정원도 시를 관통하는 또 다른 테마에 대해 말해야 한다. 그것은 바로 ‘생명’이다. 정원도는 꾸준히 생명의 소중함에 대해 말해왔는데, 이번 시집에서는 생명을 말하는 방식에서 이전 시집들과의 차이가 감지된다. 이전 시집들에서 생명이 마땅히 지켜야 하는 다소 당위적인 존재로서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면, 이번 시집에서는 존재론적 물음을 불러일으키는 것으로서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이는 아마 낙상 사고로 인해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시인의 경험이 시에 녹아든 것이리라. 위에서 나는 이번 시집에서 다뤄지는 노동들 또한 시인의 자전적 경험에 의한 것이라 했는데, 그것은 바로 여기에 기인한다.
― 진기환(문학평론가) 해설 중에서




나는 그를 지우지 못한다
딱 1년만 일 더 하고 접는다더니
갑작스레 연락 불통
쉬쉬하던 사이에 증발해버린 당신
아직도 연락처를 뒤적이다 보면
스쳐 지나는 옛 웃음은 그대로인데
나는 그를 지우지 못한다

우리가 곤죽이 되어 건너다보던
해거름 노을 건너 사라진 지도 오래
명절 직전 고향 갈 채비로 들떠 있던 날
포클레인 바가지에 올라타고 컨베이어를 용접하다가
바가지가 흔들 하는 바람에

일 년 전 내가 낙상당한 바로 옆자리
내 드러누운 정신이 혼미할 때
구급차를 부르고 실어주었다는 그가
다시 실려 가서는
영영 돌아오지 못하는 자리

예순이 훌쩍 넘어 힘들어도
늘 웃는 얼굴로 조금만 더 하고 가야지 하더니
다시는 쓸모없어진 그의 연락처를
나는 끝끝내 지우지 못하네

물은 언제나 수평을 지향한다
기계 수평 검사를 하다 보면 알게 된다

물은 언제나 수평을 지향한다는 것을
여기 바닥에서 저기 높이까지
거리가 아무리 멀거나 굽이굽이 꺾여져 있어도
물은 어김없이 수평을 지향한다

투명 호스의 물이 통로를 따라 움직이며
호스가 높아지면 저를 낮추고
호스가 낮아지면 저를 높여
서로의 가슴 높이를 맞추려 한다

파도가 뭍으로 뭍으로만 밀려드는 짓도
먼바다에서 가장자리로 됫박을 쓸듯
가차 없이 수평을 맞추려는 짓도

불멸을 터득한 종(種)들의 팔만대장경이다

  작가 소개

지은이 : 정원도
1959년 사과 산지인 대구 반야월에서 출생하여 아버지가 마차를 끄는 모습을 보며 성장했다. 1978년부터 포항공단 철강회사의 기계사업부에서 근무하던 중 ‘민중시 낭송회’ 사건으로 1989년 서울로 좌천되어 기계 애프터 서비스(A/S) 업무에 종사하다가 회사의 합병으로 퇴직했다. 그 뒤 기계 수리 관련 자영업을 운영했다. 1985년 『시인』에 「삽질을 하며」 등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해 시집으로 『그리운 흙』 『귀뚜라미 생포 작전』 『마부』 『말들도 할 말이 많았다』 등이 있다. 한국작가회의 감사 및 연대활동위원장을 역임했고, 분단시대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목차

제1부
폭설 / 지렁이 같은 시(詩) / 꽃들의 배꼽 / 눈꽃 / 뿔 / 나는 그를 지우지 못한다 / 낙상(落傷) 1 / 낙상(落傷) 2 / 낙상(落傷) 3 / 낙상(落傷) 4 / 월문리(月門里) / 뇌를 앓다 / 피안의 언덕 / 투약 / 거룩한 노동 / 박 터진 날

제2부
귀뚜라미 재회 / 물은 언제나 수평을 지향한다 / 양말 한 짝 / 낙오자(落伍者) / 장롱 / 깃털 하나 / 벚꽃도 점심 먹으러 간 사이 / 미수금 대책회의 / 연탄 / 비둘기 다리가 붉은 이유 2 / 한 지붕 공존법 / 꿈틀대는 형체 하나 / 좋은 소리 나쁜 소리 / 이불 널기 / 능원리(陵原里) / 고등어 한 마리

제3부
파산 / 하루 맹인 / 국밥 / 식은 밥과 칼국수 / 벽지 배달 간다 / 떠나간 웃음을 뜯어낸다 / 노크 귀순 / 낙인(烙印) / 우울한 낙화(落花) / 농성 / 몽키 / 야간 정비복 / 코끼리 노동자 / 증발(蒸發) /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

제4부
입술이라는 배 / 대청호 찔레꽃 / 참새 식구들의 아침 / 슬픔도 옹벽처럼 / 뇌 먹는 아메바 / 구름 이사 / 극우의 통치 방식 / 이상한 가족 소풍 / 초승달 눈꼬리 / 아까운 저 꽃들 / 새들도 비상할 땐 두 발을 감춘다 / 다 떠나거라 / 내리는 눈발처럼

작품 해설 : 노동하는 생명, 생명의 노동- 진기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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