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이연희 시인의 두 번째 시집이다. 이번 시집의 시편들은 사건을 해석하거나 감정을 앞세우지 않는다. 대신 신체와 공간, 사물과 시간이 미세하게 맞물리며 생성하는 정동의 순간들을 집요하게 포착한다. 지하철 객실과 복도, 상자와 보도블록, 공터와 응달 같은 공간들은 배경이 아니라, 하루의 감각이 순환하는 인프라로 기능한다. 이곳에서 삶은 하나의 서사가 아니라, 접히고 펼쳐지는 장면들의 연속으로 존재한다.
이연희의 시는 감정을 설명하지 않고, 교훈을 제시하지 않으며, 세계를 비판하기보다 그 작동 방식을 드러낸다. 그 결과 이 시집은 즉각적인 공감을 요구하지 않는 대신, 정동의 잔여로 독자의 신체에 오래 남는다. 삶을 비관하지도 미화하지도 않은 채 살아 있다는 상태를 끝까지 견디는 시선, 아무것도 해결하지 않으면서 아무것도 단순화하지 않는 태도. 이 시집은 오늘이라는 하루를 통과하고 있는 시인의 민활한 감각을 보여준다.
출판사 리뷰
[작품 해설]
이 시집에서 ‘검정’은 절망이 아니라 현대 삶의 기본값이다. 검정은 모든 감정과 의미가 출현하기 이전의 기저 상태다. 화자는 그 기본값을 부정하지 않은 채, 그 위에서 색을 꺼내 진열하고, 다시 접어 캐리어에 넣고, 네모의 저녁으로 돌아온다. 이 반복을 끝내 거부하지 않는 태도, 그러나 끝내 무감각해지지도 않는 시선. 바로 그 지점에서 이 시집의 미학적 성취가 발생한다. 이 시집은 삶을 구원하지 않는다. 대신 삶이 어떤 구조 속에서 반복되고 있는지를, 그리고 그 반복 속에서 정동이 어떻게 유지되고 이동하는지를 끝까지 보여 준다. 의미를 강요하지 않고, 상태를 존중하는 태도. 그것이 이 시집이 도달한 가장 단단한 시적 윤리다.
이 시집에서 검정은 감정을 덮는 색이 아니라, 세계를 과잉 해석하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거리다. 분노를 고발로 확장하지 않고, 고통을 의미로 봉합하지 않는 태도, 즉 그 절제 자체가 이 시집이 선택한 윤리다. 검정의 기본값이란, 세계를 바꾸겠다는 선언이 아니라, 세계가 작동하는 방식을 끝까지 견디며 바라보겠다는 결심에 가깝다.
- 작품 해설(김종광 문학평론가) 중에서
도시철도 4호선
숙제를 마쳤다는 듯
여분의 자세로 앉은 사람들의 헐거워진 몸을
안락의자처럼 받아준다
귀를 찢는 베어링 마찰음이 괴기스럽게 들려도
일용할 쉼을 취한 사람들 안락이라는 듯 앉아있다
전동문이 열리고 닫히며 목적지를 알리자
귓등을 세운 신발들이 나가고 들어온다
피곤을 매단 늦은 귀갓길
휴대폰으로 낯선 시선을 차단한다
식은 밥처럼 앉아 있는 사람들
이번 내리실 곳은 으슥한 밤 아홉 시 반역입니다
내리실 방향은 세 시 방향입니다
틈새가 넓으니, 귀중품을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안내 방송에 잃을 것 없다는 듯 귀만 열어 두고 있는 사람들
의자 위에 얹힌 어둠을 돌아보지 않고 객실을 빠져나간다
―「아홉 시 반」
나는 날마다 검정으로 태어난다 명랑한 날은 검정 옷을 입고 검정 걸음을 걷는다 검정 안경을 끼고 검정 햇빛을 본다 그의 출근은 쾌활하고 즐겁다 나의 출근은 자석처럼 그의 등에 딸려 간다 나는 까만 옷을 벗고 파란 의자에 앉아 파란 일을 한다 시급 오천 원의 키보드에 놓인 손가락이 현란해 나는 인공 눈물을 넣고 가짜 눈물을 흘린다 빨간 꽃 있습니다 노란 스카프 있습니다 초록색 백팩도 있습니다 초록과 백색은 가장 아끼는 마음입니다 나는 검정에서 하나씩 하나씩 색을 꺼내 진열한다 보라색 오로라도 있나요? 하고 묻는 고객에게는 드문 일이라서 여행을 권한다 여기 캐리어도 있습니다 나는 캐리어에 착착 접히는 상상을 하다가 네모로 된 저녁에 도착한다 네모의 집 네모의 화장실 네모의 실내가 익숙해서 다시 검정으로 들어가 까만 책을 보고 까만 차를 마시고 까맣게 잠을 잔다
―「자화상」
언덕엔 언제나 발목이 젖어 있는 물풀이 있다
그곳은 스쳐가는 바람이 있고
생기로 방글거리는 바람나무가 있다
부레옥잠이 엽병을 부풀린다
물속에 비친 제 얼굴을 입질하는 황새
수면을 쥐고 있는 소금쟁이
물방개는 숨기 위해 계속 파문을 일으킨다
그곳은 오래된 얼굴
풀이 웃자란 연못으로 가는 길은 보이지 않는다
햇빛에 달구어진 풀숲은 그늘이 촘촘하고
가두어진 물은 고요하다
딱딱한 골짜기를 쪼는 딱따구리
수면의 심장이 조금씩 흔들린다
심심한 개암나무가 그 위로 열매를 던지고 있다
―「연못」
작가 소개
지은이 : 이연희
경남 고성 출생2007년 ≪문학공간≫ 등단시집 『비의 안부가 궁금한 바깥』
목차
제1부 봄이 고양이 털을 핥고 있다
자전
공터
징검돌
저수지
켜켜로 쌓이는 밤비
아홉 시 반
연못
자화상
조각난 유리컵은 작살 같아
파도타기
아무일 없이
보도블럭
강아지풀
봄이 고양이 털을 핥고 있다
콩
여름을 접는다
제2부 바닥에 핀을 꽂은 저 노랑나비 떼 좀 봐
3월 감포
바닥에 핀을 꽂은 저 노랑나비 떼 좀 봐
삼삼오오
복도
응달
낙엽
8월
긴 골목
6월의 어둠을 지나
번개가 번쩍일 때마다 기분이 스캔되고
목줄
도서관
상자
퍼즐게임
새
창문
제3부 모두 공중에 떠 있다
모두 공중에 떠 있다
벌써 잠에 기댄
잠잠하다
장마
그믐달
은사시나무 정류장
플래카드를 지나가며
폐쇄된 골목
저녁 일곱 시
사과
노인
횡단보도
철물점
세월을 점검하다
Happy day
공중으로 튀는 흰,
제4부 쏟아지는 줄무늬
겨울산
가방은 텅 비어 있다
개척교회
관광
그의 안부가 궁금하다
썬팅
놀이터
까꿍 놀이
흥얼흥얼 기저귀
몽타주
행인
어떤 싸움
오른손
쏟아지는 줄무늬
빈집 5
작품 해설 검정의 하루, 네모로 접힌 세계 _김종광(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