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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 산책 1970년대편 1
전태일과 경부고속도로, 개정증보판
인물과사상사 | 부모님 | 2026.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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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서 소개

우리가 살아왔고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한국 현대사는 역사의 출발점이자 결승점이다. 끊임없는 선택 속에 지금 내가 살아가야 하는 마당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사는 역사학계에서 찬밥 취급을 당하기 일쑤였다. 민감한 주제들이기 때문이다. 강준만은 논란이 되는 부분은 다양한 입장을 소개하면서도 그 나름의 시각을 제공함으로써 독자들에게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은 물론 다양한 참여의 마당을 제공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한국 현대사 산책’ 시리즈는 독보적이다. 지금의 ‘나’를 이룬, 대한민국의 모든 것을 담고 있는 한국인의 ‘보물창고’와 같다.

1945년 8월 15일 정오부터 봉준호의 <기생충>까지 75년의 역사를 촘촘히 담아낸 ‘한국 현대사 산책’ 시리즈는 정치·경제·사회는 물론 대중문화·스포츠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분야를 아우르고 있다. 그리고 현대 한국인들이 맞닥뜨려야 했던 삶과 역사의 무대를 고스란히 되살려냈다. 이를 위해 ‘한국 현대사 산책’ 시리즈는 방대한 주석에 당시의 현장을 포착한 사진, ‘역사 산책’ 코너 등을 통해 입체적인 접근을 시도했다.

『한국 현대사 산책 1970년대편 전태일과 경부고속도로』 개정증보판은 모두 3권으로 구성되었다. 제1권은 1970~1972년, 제2권은 1973~1975년, 제3권은 1976~1979년의 역사를 담아냈다. 강준만은 한국처럼 현대사가 끊임없이 다시 쓰거나 수정하거나 보완해야 할 필요성이 큰 나라는 없을 것이며, 한국의 운명에 큰 영향을 미친 나라들의 비밀문서가 해제되고, 비극적인 과거에 대한 진상이 뒤늦게 밝혀지면서 배상과 보상이 논의되는 상황에서 24년 전에 출간된 『한국 현대사 산책 1970년대편』의 개정증보판을 펴낸다고 말한다.

  출판사 리뷰

수출의 국가 종교화, 닉슨 독트린과 대미 외교,
서승서준식 형제 ‘간첩’ 조작 사건, 통일벼와 절미 운동

지난 10년 한국의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 그 모든 것은 어떻게 달려왔는가?
“한국 현대사의 기록과 평가의 문화를 정착시키다”


우리가 살아왔고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한국 현대사는 역사의 출발점이자 결승점이다. 끊임없는 선택 속에 지금 내가 살아가야 하는 마당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사는 역사학계에서 찬밥 취급을 당하기 일쑤였다. 민감한 주제들이기 때문이다. 강준만은 논란이 되는 부분은 다양한 입장을 소개하면서도 그 나름의 시각을 제공함으로써 독자들에게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은 물론 다양한 참여의 마당을 제공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한국 현대사 산책’ 시리즈는 독보적이다. 지금의 ‘나’를 이룬, 대한민국의 모든 것을 담고 있는 한국인의 ‘보물창고’와 같다.
1945년 8월 15일 정오부터 봉준호의 <기생충>까지 75년의 역사를 촘촘히 담아낸 ‘한국 현대사 산책’ 시리즈는 정치·경제·사회는 물론 대중문화·스포츠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분야를 아우르고 있다. 그리고 현대 한국인들이 맞닥뜨려야 했던 삶과 역사의 무대를 고스란히 되살려냈다. 이를 위해 ‘한국 현대사 산책’ 시리즈는 방대한 주석에 당시의 현장을 포착한 사진, ‘역사 산책’ 코너 등을 통해 입체적인 접근을 시도했다.
‘한국 현대사 산책’ 시리즈는 단순한 사건의 나열에만 그치지 않는다. ‘한(恨)과 욕망의 폭발’(1940년대), ‘극단의 시대’(1950년대), ‘기회주의 공화국의 탄생’(1960년대), ‘수출의 국가 종교화’(1970년대), ‘광주학살과 서울올림픽’(1980년대), ‘분열은 우리의 운명, 연대는 나의 운명’(1990년대), ‘노무현 시대의 명암’(2000년대), ‘증오와 혐오의 시대’(2010년대) 등 각 시대를 지배했던 정서와 구조에 대한 치열한 문제의식 속에서 수많은 사건과 주제를 집요하게 파헤치고 있다. 그리고 새로운 세대가 ‘진보’의 이름으로 새로운 가치를 선점할 수 있듯이 극단과 궁핍의 시대를 살아남아야 했던 과거 세대의 ‘아픔’도 함께 껴안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강준만은 한국 현대사가 ‘인간’을 배제했던 역사라고 간파하며 ‘인간’의 복원, 그리고 그 바탕 위에서 이념과 세대의 새로운 화해를 시도하고 있다. ‘한국 현대사 산책’ 시리즈는 한국 현대사의 기록과 평가의 문화를 정착시킨 한국 최초의 단행본으로 평가받기에 충분하다.

‘한국 현대사 산책’ 시리즈, 1970년대편 개정증보판 출간!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10년간을 꼽으라면 1970년대라고 할 것이다. 1970년대를 보는 시각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전태일과 경부고속도로’가 될 것이다. 1970년 7월 7일에 개통된 경부고속도로는 전쟁의 잿더미 속에서 들고일어난 ‘한강의 기적’을 상징하며, 1970년 11월 13일에 일어난 전태일의 분신자살은 ‘한강의 기적’의 이면에 숨은 잔인한 인권유린을 상징한다. 그 두 얼굴 가운데 ‘전태일’에 주목한다면 1970년대를 부정적으로 볼 것이고, ‘경부고속도로’에 주목한다면 1970년대를 긍정적으로 볼 것이다. 전태일이 분신자살로 항거한 참혹한 노동 실태의 현장이었던 서울 평화시장은 “공간적으로 당시 민중들의 삶의 중심지였을 뿐만 아니라 한국 자본주의화 과정에서 노동자에 대한 가혹한 희생 속에서 자본가 계급의 형성을 뒷받침한 요람”이었다. 경부고속도로는 그러한 ‘요람’에서 짜낸 피와 땀을 근거로 이루어진 것이었지만, 경부고속도로가 낳고 촉진시킨 발전과 번영의 수혜는 다른 사람들의 몫이 되었다.
전태일은 독재권력의 주구로 전락한 언론, 경제발전 지상주의라고 하는 거센 물결 속에서 ‘경제동물화’되어 갔던 중산층과 중산층에 편입되기를 열망했던 사람들의 싸늘한 시선까지 보여주었다. 경부고속도로의 중단 없이 쭉 뻗은 길은 발전과 번영의 표상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경부고속도로가 하나였던 것을 가로지르면서 만들어낸 경계는 새로운 갈등과 차별을 잉태시켰다. 농촌과 지방 인구는 그 길에 흡수되어 서울과 도시에 내던져졌고, 권력과 부(富)의 집중과 전횡을 낳는 시스템이 고속도로처럼 빠른 속도로 구축되기 시작했다. 전태일의 분신자살이 그것을 웅변해주었고 이후 동일방직 여성 노동자들이 1970년대 내내 계속된 그런 ‘억압과 착취’의 시스템을 상징적으로 폭로했다. 박정희의 독재정권이 한국 사회에 미친 가장 큰 악영향은 사회와 개인의 관계를 단절시킨 것이다. 나와 내 가족을 사회에서 단절시키지 않으면 안전하게 살아갈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것은 불가피한 생존술이었을 것이다. 어느덧 그 생존술은 자연스러운 문화로까지 정착되었다.
『한국 현대사 산책 1970년대편: 전태일과 경부고속도로』 개정증보판은 모두 3권으로 구성되었다. 제1권은 1970~1972년, 제2권은 1973~1975년, 제3권은 1976~1979년의 역사를 담아냈다. 강준만은 한국처럼 현대사가 끊임없이 다시 쓰거나 수정하거나 보완해야 할 필요성이 큰 나라는 없을 것이며, 한국의 운명에 큰 영향을 미친 나라들의 비밀문서가 해제되고, 비극적인 과거에 대한 진상이 뒤늦게 밝혀지면서 배상과 보상이 논의되는 상황에서 24년 전에 출간된 『한국 현대사 산책 1970년대편』의 개정증보판을 펴낸다고 말한다.

박정희의 ‘원맨쇼’와 경부고속도로 개통

1970년 7월 7일, 429킬로미터 길이의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었다. 그날 박정희는 부산 공설운동장에서 열린 준공식에서 “이 공사는 민족의 피와 땀과 의지의 결정이며 민족적인 대예술 작품”이라고 말했다. 추풍령에 세워진 준공기념탑 전면에는 “서울-부산 간 고속도로는 조국 근대화의 길이며 국토 통일의 길이다. 1970년 7월 7일 대통령 박정희”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1964년 서독을 방문한 박정희는 본에서 쾰른까지 20킬로미터 구간의 아우토반(고속도로)을 왕복으로 달려본 후에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결심했다. 그는 두 차례나 도로 중간에서 차를 멈추게 하며 지대한 관심을 표명했고, 서독의 경제 번영에 아우토반이 큰 기여를 했다는 것에 큰 감명을 받았다. 경부고속도로는 박정희가 직접 지휘했던 ‘원맨쇼’였다. 박정희도 자신의 ‘원맨쇼’를 즐겼다. 그는 늘 고속도로만 달리고 오면 기분이 좋았다.
경부고속도로 건설에는 429억 원이 투입되었고, 연동원 인원은 900만 명에 이르렀다. 경부고속도로는 세계에서 가장 싼 건설비로 가장 빠르게 공사가 진행되었고, 건설 동기추진 방법공사 방식이 모두 군대식이었다. 건설공사라기보다는 군사작전이었다. 경부고속도로는 초기 설계도 채 끝나기 전에 시작되었는데, 즉 설계와 공사가 병행되고 있었다. 경부고속도로는 원래 1971년 6월 30일 개통 예정이었는데, 박정희는 1년 앞당겨 1970년 6월 30일까지 준공할 것을 지시했다. 그것은 1971년에 대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서둘러 건설했으니 부작용이 없을 리 없었다. 고속도로 건설 중 사망자가 77명이나 나왔고, 부실 공사도 피하기 어려웠다. 또한 고속도로 건설은 땅값에 영향을 미쳐 영농의 영세화를 초래하고 농민들의 주거지 상실로 인한 이촌 현상을 유발시켰다.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서울 평화시장에는 2만 7,000여 명의 노동자가 일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대부분 가난한 농촌 가정 출신이고 14세에서 24세 사이의 젊은 여성들이었다. 그들의 노동 조건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열악했지만, 업주와 정부는 노동자들의 탄원서를 10여 차례나 묵살했다. 1970년 11월 13일 근로조건 개선을 요구하며 전태일이 온몸에 석유를 뿌리고 불을 질러 자살했다. 전태일은 불길에 휩싸인 채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마라!”고 부르짖었다. 전태일은 1964년 당시 16세의 나이에 서울 평화시장 내에 있는 삼일사에 견습공으로 취직했다. 그는 인간 이하의 열악한 노동 조건을 몸소 겪으면서 노동과 인권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전태일은 우연한 기회에 ‘근로기준법’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몇몇 동료와 모여 1969년 6월 ‘바보회’를 결성했다.
전태일은 노동청장 앞으로 ‘평화시장 피복제품상 종업원 근로개선 진정서’를 제출했는데, 노동청 출입기자가 이것을 『경향신문』에 보도했다. 전태일 일행을 감격했고, 『경향신문』 300부를 사서 평화시장에 돌렸고, 그날 저녁 평화시장 일대는 축제 분위기였다. 그러나 노동청과 기업주는 외면했고, 경찰이 가세해 노동자들을 더욱 통제하려 들었다. 대대적인 데모를 계획했으나 경찰의 방해로 실패로 돌아갔다. 이런 좌절로 전태일은 분신을 결심하게 된다. 그 후 서울대 법대생 100여 명은 전태일의 시체를 인수해 학생장으로 거행하겠다고 했고, 서울대 상대생 400여 명은 무기한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또 새문안교회 대학생부 학생 40여 명은 금식 기도회를 열었고, 기독교인들은 신구교 합동으로 전태일 추모 예배를 드렸다. 전태일의 죽음은 한국의 지식인과 대학생, 기독교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전태일의 분신자살 사건은 다른 노동자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으며 이후 본격적인 노동운동이 벌어지게 만든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광주대단지 폭동 사건

박정희 정권은 도시 빈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서울의 청계천 일대를 비롯한 판자촌을 대거 철거하면서 주민들을 1969년 5월부터 경기도 광주로 강제 이주시켰다. 그런데 이곳은 도로도 없고 배수 시설도 없는 문자 그대로 황무지였다. 이들은 14만 5,000여 명에 이르렀는데, 쓰레기 내버리듯 광주에 내팽개쳤을 뿐 아무런 대책도 세워주지 않았다. “인구 10만 명만 모아놓으면 어떻게 해서든 뜯어먹고 산다”는 기막힌 발상이 대책이라면 대책이었을 뿐이다. 그들은 천막을 치고 살았는데, 더욱 큰 문제는 그들에게 일감이 없다는 것이었다. 더욱이 상당수 주민들은 아침에는 죽을, 점심에는 굶고, 저녁에는 국수 한 봉지로 연명하는 형편이었다. 그 어떤 주민 편의시설도 전혀 없었고, 교통도 기본적인 인프라가 없었으니 다른 지역으로 취업이나 물건을 구하러 나갈 수도 없었다.
서울시가 토지 유상 불하와 가옥 취득세 부과를 발표하자, 주민들은 1971년 7월 대책위원회를 구성해 토지 불하 가격과 가옥 취득세 인하를 요구했다. 7월 7일 ‘광주단지 토지불하가격 시정대책위원회’를 조직하고, 7월 14일 서울시가 애초의 약속을 어기고 유상 불하 통지서를 발부하자 주민들은 이 위원회를 중심으로 여러 차례 산발적인 시위도 벌였다. 결국 주민들은 대책위원회를 ‘투쟁위원회’로 바꾼 다음 8월 10일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서울시는 시장 양택식과 직접 면담을 오전 11시에 주선해주겠다고 제의했다. 오전 10시경 5만여 명의 주민은 성남출장소 뒷산에 모여 양택식을 기다렸다. 그러나 11시 40분이 되어도 양택식은 나타나지 않았고, 주민들은 결국 폭발하고 말았다. 주민들은 파출소와 경찰차에 방화하고 관공서 건물과 차량을 파괴·탈취했다. 서울시장이 주민 요구를 무조건 들어주겠다고 발표한 것은 오후 5시경이었다. 이로써 6시간의 비극적인 드라마가 끝나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주민과 경찰 100여 명이 부상했고 주민 23명이 구속되었다.

‘10월 유신’ 국민투표와 ‘체육관 선거’

박정희 정권은 1972년 10월 27일 대통령 종신제를 기조로 하는 헌법개정안을 발표했는데, 투표를 앞두고 대대적인 홍보 공작이 전개되었다. 이 헌법개정안은 11월 21일 공포 분위기 속에서 실시된 국민투표에서 91.9%의 투표율과 91.5%의 찬성률로 통과되었다. 박정희는 ‘통일을 향한 국민 의지의 발현’이라고 주장했지만, 그것은 국민들에게 무력감과 공포감을 조장한 폭력 정치의 승리였다. 유신헌법에 따라 대통령은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간접선거로 선출하게 되었다. 국회의원의 선출은 임기 6년에 전국 73개 지역구에서 1구 2인의 국회의원을 뽑는 중선거구제로 바뀌었다. 대통령이 추천한 국회의원 정족수의 3분의 1에 해당되는 73명을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들이 선출하는 제도가 도입되어 대통령이 마음대로 임명하는 새로운 전국구 제도였다. 대통령이 추천한 전국구 의원 집단을 ‘유신정우회’라고 불렀는데, 이 국회의원들은 임기를 6년으로 하되 3년마다 대통령의 추천에 따라 교체할 수 있게 했다.
박정희는 “1981년에 1인당 국민소득 1,000달러, 수출 100억 달러를 달성하겠다”고 약속해 ‘10월 유신, 100억 달러 수출, 1,000달러 소득’이라는 유신 구호가 생겨났다. 12월 15일 통일주체국민회의의 대의원 선거가 실시되었다. 이 선거에서 당선된 2,359명의 대의원들로 구성된 선거인단이 서울 장충체육관에 모여서 대통령을 뽑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에 ‘체육관 선거’라고 불렸다. 12월 23일 통일주체국민회의는 장충체육관에서 박정희를 제8대 대통령으로 뽑았다. 전체 대의원 2,359명 가운데 2,357명이 지지한 99.99%의 지지율이었다. 박정희는 12월 27일 제8대 대통령에 취임함으로써 김대중과의 경쟁 끝에 당선된 제7대 대통령 임기는 1년 5개월 만에 끝나게 되었다.

박정희는 1967년 제6대 대통령 선거 때 호남 푸대접을 들고 나온 호남인들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해 호남선 복선화를 공약했다. 그러나 이것은 착공만 했을 뿐 실제 공사는 조금도 진척이 없었다. 1978년 3월 30일 겨우 대전-이리(익산) 간 복선이 개통되었을 뿐이고, 이 문제는 1990년대까지도 국회에서 지속적으로 논란이 되었다. 1993년 10월 5일 경제기획원에 대한 국정감사에서 민주당 의원 조세형은 “경부고속철도사업을 중단하고 재래철도 및 고속도로 등의 사업에 투자해야 한다”고 주장한 적이 있다. 이에 대해 부총리 이경식이 “경부고속철도사업에 이어 호남고속철도사업도 추진할 계획”이라며 민주당의 공세를 피하려 하자 조세형은 호남선의 복선화에 30년이 걸렸다며 “굼벵이도 30년이면 서울에서 광주까지 갈 수 있다”고 반격을 가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호남선의 복선화는 완료되지 않은 상태였다. 「제1부 제4장 경부고속도로와 지역 갈등」

1970년 4월 8일 아침 6시 30분쯤 서울 마포구 창전동 와우산 중턱에 세워진 와우아파트 붕괴 사고는 군사작전식 개발독재의 어두운 면을 여지없이 노출시켰다. 33명의 생명을 앗아가고 40명에게 중경상을 입힌 이 사고는 부정부패로 얼룩진 날림공사의 표본이었기 때문이다. 목사 박형규는 4월 11일 YMCA에서 열린 ‘와우아파트 도괴 사건과 시민적 관심’이라는 특별 강연에서 이 사건을 가리켜 “숫자만 늘리면 칭찬받는 종적 권력구조, 돈이면 제일이라는 업자들의 사고방식, 이런 것들이 얽혀서 빚어진 결과”라고 말하고, 이른바 ‘와우식 근대화’가 지속된다면 우리는 모두 죽게 되는 결과가 올 것이라고 비난했다. 시인 김지하는 『사상계』 1970년 5월호에 발표한 담시 「오적」에서 “모든 집은 와우식으로!”라고 외쳤는데, ‘와우식’은 이후에도 계속된 날림공사의 전형을 말하는 것이었다. 「제1부 제9장 33명이 죽은 와우아파트 붕괴 사고」

박정희 정권의 정보기관들은 4·27 대선을 앞두고 ‘건수 올리기’ 경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후락의 중앙정보부가 밀어붙인 『다리』 탄압 사건에서 별 재미를 보지 못하자, 김재규의 육군 보안사가 나서 새로운 사건을 조작해냈다. 4·27 대선이 열흘도 남지 않은 시점인 1971년 4월 18일 ‘선거를 틈타 민중봉기를 일으켜 정부를 전복시키려고 암약’해왔다는 혐의로 재일교포 대학생 서승(27세, 서울대 사회학과 대학원 2학년), 서준식(24세, 서울대 법대 3학년) 형제 등 ‘간첩’ 10명에 대한 구속영장이 청구된 것이다. 이 사건으로 서준식은 7년형을, 서승은 무기형을 선고받았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서로 무관한 여러 사건을 한데 묶어 서승·서준식을 주범으로 하는 50명가량의 대조직으로 이루어진 학원 침투 간첩단 사건을 만들어내 이를 수개월에 걸쳐 라디오와 텔레비전에서 반공 드라마로 선전했다. 「제2부 제2장 서승·서준식 형제 ‘간첩’ 조작 사건」

  작가 소개

지은이 : 강준만
전북대학교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강준만은 탁월한 인물 비평과 정교한 한국학 연구로 우리 사회에 의미 있는 반향을 일으켜온 대한민국 대표 지식인이다. 전공인 커뮤니케이션학을 토대로 정치, 사회, 언론, 역사, 문화 등 분야와 경계를 뛰어넘는 전방위적인 저술 활동을 해왔으며, 사회를 꿰뚫어보는 안목과 통찰을 바탕으로 숱한 의제를 공론화해왔다.2005년에 제4회 송건호언론상을 수상하고, 2011년에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한국의 저자 300인’, 2014년에 『경향신문』 ‘올해의 저자’에 선정되었다. 저널룩 『인물과사상』(전33권)이 2007년 『한국일보』 ‘우리 시대의 명저 50권’에 선정되었고, 『미국사 산책』(전17권)이 2012년 한국출판인회의 ‘백책백강(百冊百講)’ 도서에 선정되었다.그동안 쓴 책으로는 『법조공화국』, 『MBC의 흑역사』, 『공감의 비극』, 『정치 무당 김어준』, 『퇴마 정치』, 『정치적 올바름』, 『좀비 정치』, 『발칙한 이준석』, 『단독자 김종인의 명암』, 『부족국가 대한민국』, 『싸가지 없는 정치』, 『권력은 사람의 뇌를 바꾼다』, 『부동산 약탈 국가』, 『쇼핑은 투표보다 중요하다』, 『강남 좌파 2』, 『바벨탑 공화국』, 『오빠가 허락한 페미니즘』, 『손석희 현상』, 『박근혜의 권력 중독』, 『전쟁이 만든 나라, 미국』, 『정치를 종교로 만든 사람들』, 『지방 식민지 독립선언』, 『개천에서 용 나면 안 된다』, 『싸가지 없는 진보』, 『감정 독재』, 『미국은 세계를 어떻게 훔쳤는가』, 『갑과 을의 나라』, 『증오 상업주의』, 『강남 좌파』, 『한국 현대사 산책』(전28권), 『한국 근대사 산책』(전10권), 『미국사 산책』(전17권) 등 300권이 넘는다.

  목차

머리말 : 1970년대의 두 얼굴
‘한강의 기적’의 이면에 숨은 인권유린 · 5 박정희 정권의 산업화가 “민주화에 기여했다”? · 7 양자택일의 문제일까? · 9

제1부 1970년 : 도시에 빨려 들어가는 농촌

제1장 수출의 국가 종교화
‘조국 근대화’를 종교로 삼은 박정희 · 27 ‘군사적 성장주의’와 ‘수출의 전쟁화’ · 29 수출은 전쟁이되 성전이었다 · 31 수출 ‘10억 달러’ 고지 점령 · 32 수출 군사작전의 양면성 · 35

제2장 닉슨 독트린과 대미 외교
리처드 닉슨과 샤를 드골 · 37 박정희의 리처드 닉슨 푸대접 · 38 박정희가 닉슨에게 당한 굴욕 · 39 1970년대의 한국을 지배한 주한미군 문제 · 42

제3장 경부고속도로 개통
‘민족사적 금자탑’을 세운 박정희의 ‘원맨쇼’ · 44 가장 싸고 빠른 군사작전식 건설 · 46 77명의 생명이 바쳐진 경부고속도로 · 48 ‘자동차 시대’와 ‘고속도로의 문학’ · 50 고속도로가 농촌에 미친 영향 · 52

역사 산책 1 고층빌딩은 ‘조국 근대화’의 상징 · 56

제4장 경부고속도로와 지역 갈등
지역균형발전을 외면한 경부고속도로 · 59 투표 성향으로 나타난 소외감 · 61 공약이 된 호남선 복선화 · 63 호남인의 호남 탈출 · 65 ‘시장 논리’로 정착된 호남 차별 · 66

제5장 북한에 ‘경제 경쟁’을 제안한 8·15 선언
‘함정 피랍 사건’과 ‘현충문 폭발 사건’ · 69 ‘자력 방위’를 위한 방위산업 육성 · 70 북한 존재를 인정한 8·15 선언 · 71

제6장 신민당 대통령 후보 지명대회
김영삼·김대중·이철승 ‘40대 기수들’의 도전 · 74 김영삼의 자만, 김대중의 승리 · 76 박정희를 섬기는 ‘박정희교 신도’의 등장 · 78

제7장 평가교수단과 대통령 특별보좌관 제도
지식인을 경멸한 박정희의 지식인관 · 80 박정희의 지식인 이용 · 82 평가교수단이 누린 특혜 · 83 대통령 특별보좌관 제도의 발족 · 84 박종홍의 박정희 체제 옹호 · 86 함병춘의 군사정권 옹호 · 88 학계에서 존경을 누린 박종홍의 영향력 · 90

제8장 정인숙 살해 사건과 ‘요정 정치’의 천태만상
정인숙의 수첩에서 나온 33장의 명함 · 92 박정희인가, 정일권인가? · 94 국회 대정부 질문 · 95 아직도 진실을 밝힐 때가 아니다? · 97 ‘정성일의 아버지’ 미스터리 · 98 박정희의 놀라운 엽색 행각 · 100 부정부패를 심화시킨 ‘요정 공화국’ · 102 밤낮 구분이 없는 박정희 정권 실세들의 엽색 행각 · 103

제9장 33명이 죽은 와우아파트 붕괴 사고
불도저처럼 밀어붙인 아파트 건설 · 106 33명의 생명을 앗아간 아파트 붕괴 사고 · 108 부실, 싸구려, 날림공사 · 110 선거 때만 멈춘 판자촌 철거 · 111

제10장 시인 김지하의 ‘오적’
다섯 도둑의 부패상을 풍자한 담시 · 113 부정부패 고발도 반공법 위반 · 114 『사상계』 폐간, 『씨의소리』 창간 · 116 정부 고관들이 사는 ‘도둑 마을’ · 118 무엇을 위한 5·16이었는가? · 119 독재와 부정부패는 동전의 양면 · 121

역사 산책 2 일일연속극 <아씨>의 인기 · 124

제11장 청년 노동자 전태일의 분신자살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 127 왜 전태일이 만든 모임은 ‘바보회’였을까? · 128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참상 · 130 언론은 무엇을 하고 있었던가? · 132 양심을 강타당한 대학생과 지식인 · 134 학생 시위와 기독교인들의 참회 · 135 ‘경부고속도로’와 ‘닭장집’ · 136

역사 산책 3 ‘우리들의 어머니’가 된 이소선 · 139

제2부 1971년 : 박정희 1인 체제의 완성

제1장 ‘언론화형식’과 ‘언론자유수호선언’
이희호와 팻 닉슨의 사진 촬영 논란 · 143 월간지 『다리』 탄압 사건 · 144 편집국장 옆에 앉은 중앙정보부원 · 146 “정상배로 전락한 신문 경영자” · 148 기자들의 ‘언론자유수호선언’ · 149 교련 철폐와 공명선거 운동 · 151

제2장 서승·서준식 형제 ‘간첩’ 조작 사건
보안사가 연출한 반공 드라마 · 153 서승이 당한 잔인한 고문 · 154 선거를 엎기 위한 음모극 · 157

제3장 제7대 대통령 선거
‘김대중 바람’ 대 색깔론 · 159 박정희의 대선 자금은 국가예산의 10% · 162 중앙정보부의 투표 결과 조작 · 164 “이번이 마지막 출마”라는 거짓말 · 165

제4장 4·27 대선과 지역 갈등
“신라 임금을 뽑자”는 선동 · 167 ‘피의 보복이 있을 것’이라는 선동 · 169 “럭키치약을 사지 말자”는 공작 선동 · 170 박정희의 호남 차별 인사정책 · 172

제5장 제8대 국회의원 선거와 ‘진산 파동’
신민당 당원들의 습격을 받은 유진산 · 174 신민당의 ‘실질적인 대승’ · 175 언론의 김대중 보도 통제 · 177

제6장 사법부 파동과 사법부 탄압 공작
판사들의 자체 정화운동 · 179 박정희 정권의 사법부 탄압 공작 · 180 박정희 정권의 재판권 침해 사례 · 182 박정희 정권의 하부기관으로 종속된 사법부 · 183

제7장 그린벨트와 산림녹화
수도권 인구 억제를 위한 그린벨트 · 186 한국은 20세기의 대표적 녹화 사업 성공 국가 · 187 아무런 대책 없이 철거당한 판자촌 · 189

제8장 광주대단지 폭동 사건
쓰레기처럼 내버려진 사람들 · 191 주민 희망을 유린한 서울시의 배신과 오만 · 194 굶어죽을 정도로 굶주린 사람들 · 196 끝나지 않은 판자촌 빈민 문제 · 198

제9장 실미도 사건의 비극
서울 시내 한복판에 출현한 무장공비? · 200 김일성 암살을 위해 만든 특수부대 · 202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은 특수부대원들 · 204 단지 ‘후진적 인력 관리’의 문제였는가? · 205 동료들에게 맞아 죽은 탈영자 · 206 실미도 부대는 ‘홧김에 만든 부대’ · 207

제10장 공화당 ‘4인 체제’의 몰락
박정희의 ‘소름 끼칠 듯한 무서운 눈매’ · 210 김성곤은 박정희의 정치자금 창구 · 211 내무부 장관 오치성 해임건의안 가결 · 212 공화당 의원들에게 가해진 가혹한 고문 · 215 공화당과 의회정치의 사망 · 216 박정희의 냉혹한 인간관 · 217

제11장 ‘10·15 위수령’과 ‘12·6 국가비상사태’
수경사 병력 고려대 난입 사건 · 221 서울 8개 대학에 무기휴업령을 내린 10·15 위수령 · 222 전 서울대생 4명의 ‘내란예비음모’ 사건 · 224 헌법적 근거가 없는 12·6 국가비상사태 · 224

제12장 프레스카드제와 MBC <뉴스데스크>
민심에 편승한 언론통제 · 226 박정희 정권의 프레스카드제 악용 · 229 신문 산업의 경영 합리화 · 230 앵커가 진행하는 MBC <뉴스데스크> 탄생 · 231 재벌과 박정희 측근에게 넘어간 MBC · 234 MBC 분양 비리와 부작용 · 236 MBC 분양이 보여준 박정희 정권의 부정부패 · 237 범여권계 매체 계열화 · 238

제13장 포크 음악, 라디오 DJ, 미팅
김민기와 양희은의 <아침이슬> · 241 라디오 DJ 프로그램과 음악다방 · 242 교회 갱신 운동에 이용된 포크 음악 · 245 대학생들의 미팅 문화 · 247

역사 산책 4 인스턴트 커피가 변화시킨 다방 문화 · 249

제3부 1972년 : 박정희 영구집권 체제의 완성

제1장 리처드 닉슨의 중공 방문과 남북대화
중공에 초청된 미국 대통령 리처드 닉슨 · 255 브레턴우즈 체제의 폐기 · 258 김일성의 남북대화 제의 · 260 닉슨의 중공·소련 방문 · 261 닉슨의 중공 방문이 한반도에 미친 영향 · 263 역사적인 울산 현대조선소 기공식 · 264 기상천외한 ‘정주영 공법’ · 266

제2장 통일 열기를 만들어낸 ‘7·4 남북공동성명’
중앙정보부장이 김일성을 만나다니! · 269 박정희의 정치적 필요 · 270 남한도 북한에 배울 게 있다 · 273 서두른 30여 명 사상범 사형 집행 · 273 남북적십자회담은 열렸지만 · 274

제3장 사채를 동결한 8·3 긴급경제조치
기업을 위한 사채 동결 · 278 8·3 긴급경제조치로 억울하게 당한 사람들 · 280 정경유착과 재벌 중심 경제 · 282

제4장 박정희의 ‘10월 유신’ 선포
대통령 종신제를 위하여 · 285 북한도 두려워한 국제 정세 변화 · 287 사쿠라만 활짝 핀 신민당 · 289 ‘악질’ 의원들에게 가해진 고문 · 290 “내가 인간의 세상에 살고 있는가” · 291

제5장 ‘10월 유신’ 국민투표와 ‘체육관 선거’
91.5% 찬성, 강요된 부정선거 · 293 입법부와 사법부의 무력화 · 294 99.99% 지지가 나온 ‘체육관 선거’ · 295 ‘박정희는 유신, 김일성은 유일’ · 297 김일성의 1인 지배체제와 세습 강화 · 299 남북한의 ‘내통 가능성’을 부정한 김종필 · 301

제6장 ‘10월 유신’, 언론과 지식인은 무엇을 했는가?
언론의 대대적인 유신 홍보 · 303 이어령의 프랑스 파리 피난 · 304 취재 기능을 거세당한 언론 · 306 박정희와 『조선일보』의 유착 · 307 『조선일보』의 ‘10월 유신’ 지지 · 310 ‘항가리 헌법’으로 불린 유신헌법 · 312 박일경의 ‘한국적 민주주의’론 · 313 갈봉근의 ‘권력의 인격화’ 이론 · 315 강만길이 느낀 배신감 · 316

제7장 통일벼와 절미 운동
박정희의 ‘희’를 딴 ‘희농 1호’의 실패 · 318 ‘진짜 기적의 볍씨’ 통일벼 · 320 절미 운동 위반은 범죄 · 321 학교에서 과잉 단속 · 323 ‘쌀밥=미개’, ‘밀가루=문명’ · 325

제8장 새마을운동과 민족성 개조론
‘시멘트 생산 과잉’에서 비롯된 운동 · 327 ‘초가집’에서 ‘기와집’으로 변화 · 329 박정희의 민족성 개조론 · 330 새마을운동의 사회개혁운동화 · 332 “유신 이념과 연결된 정치적 국민운동” · 334

역사 산책 5 ‘화투 화형식’과 ‘주부도박단’ · 336
역사 산책 6 “아들 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 · 339
역사 산책 7 미신·무속 타파 운동 · 342

제9장 이순신 숭배와 국민의식 개조 사업
국사 교육 강화가 만든 ‘국사 붐’ · 345 박정희의 이순신 성웅화 작업 · 346 이순신 영화 때문에 망한 김진규 · 349 ‘성웅=멸사봉공 정신’ · 350 효도도 ‘국민총화’를 위하여 · 351

제10장 어용 단체로 전락한 한국노동조합총연맹
노동 착취가 최대 경쟁력 · 352 정권에 포섭된 한국노총 · 354 노조 간부들의 귀족화 · 356 한국 노동운동의 이중 구조 · 357

제11장 남진·나훈아와 김추자·신중현의 활약
남진과 나훈아의 경쟁 · 358 경쟁과 상부상조 · 360 <고향역>·<님과 함께>의 사회학적 의미 · 362 “담배는 청자, 노래는 추자” · 364 신중현의 예술가적 근성 · 366 51명이 사망한 서울시민회관 화재 · 368

제12장 정부 주도 축구의 인기
‘실세’ 장덕진의 축구협회장 취임 · 371 메르데카컵·킹스컵 우승이 불러온 ‘축구 열풍’ · 373 1970년 멕시코월드컵 열풍 · 375 ‘박대통령배 아시아축구대회’ 출범 · 377 이회택의 눈물과 삭발 · 380 축구 황제 펠레의 방한 경기 · 381 북한의 올림픽 금메달이 준 자극 · 384

제13장 왜 공중전화 통화시간을 3분으로 제한했는가?
전화기 50만 대로 34번째 중진국 · 386 ‘청색전화’와 ‘백색전화’의 차이 · 388 1971년 서울-부산 간 장거리자동전화 개통 · 390 1972년 공중전화 3분 제한제 · 391

주 · 3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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