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리뷰
실패한 유토피아의 폐허를 따라가는 라틴아메리카 인문 르포
혁명과 자본, 공동체와 욕망의 흔적에서 다시 읽는 세계
자동차 왕 헨리 포드가 건설한 아마존의 산업 유토피아부터,
프리드리히 니체의 여동생이 꿈꾼 광기 어린 인종주의적 이상향,
원주민과 예수회가 함께 만든 남미의 이상 공동체,
쓰레기 매립지 위에 세워진 신자유주의 유토피아까지
멕시코 작가이자 문학 연구자인 페데리코 구스만 루비오의 『네, 그런 곳이 정말 있습니다』는 “실제로 존재했던 유토피아들”을 따라가는 책이다. 완벽한 사회를 향한 인간의 꿈은 오랫동안 ‘유토피아’라는 이름 아래 반복되었다. 어떤 이들은 현실의 모순을 넘어 새로운 공동체와 문명을 만들고자 했고, 실제로 도시를 건설하고 혁명을 조직하며 다른 삶의 방식을 실험했다. 저자는 라틴아메리카 곳곳에 남겨진 혁명 공동체와 계획 도시, 산업 실험과 종교적 이상향의 흔적을 직접 탐사하며, 인간은 왜 반복해서 더 나은 세계를 꿈꾸는지 그리고 그 꿈은 왜 실패와 폐허로 귀결되곤 하는지를 집요하게 질문한다.
『네, 그런 곳이 정말 있습니다』는 단순한 여행기나 역사 해설서가 아니다. 이 책은 문학과 정치, 도시와 혁명, 자본주의와 공동체에 대한 사유를 결합한 인문 르포에 가깝다.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에서 출발해 혁명 공동체와 산업 도시, 폐쇄적 신자유주의 공간에 이르기까지, 유토피아라는 개념이 현실에서 어떻게 구현되고 변형되었는지를 추적한다.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것은 단순한 실패담을 너머서, 실패한 유토피아의 흔적에서 인간 사회가 끝내 포기하지 못하는 욕망, 즉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는 믿음의 잔해를 발견한다.
한국어 번역은 라틴아메리카 문학과 문화를 오랫동안 연구해 온 두 학자, 조구호 교수와 남진희 교수가 맡았다. 두 번역자는 단순히 외국어 텍스트를 옮기는 데 그치지 않고, 라틴아메리카의 역사와 문화, 정치적 맥락을 한국 독자들에게 꾸준히 소개해 온 연구자이자 번역가들이다. 조구호 교수는 『백년의 고독』, 『이야기하기 위해 살다』, 『이 세상의 왕국』 등 라틴아메리카 문학의 대표작들을 번역하며 국내에 중남미 문학장을 넓혀 온 인물이다. 남진희 교수 역시 중남미 문학과 사유를 꾸준히 소개하며 스페인어권 도서를 한국 사회와 연결해 왔다.
특히 두 번역자가 『네, 그런 곳이 정말 있습니다』를 소개한 이유는 단순히 “흥미로운 라틴아메리카 이야기”이기 때문이 아니다. “이 책의 가장 큰 의의는 유토피아를 ‘이루지 못한 꿈’으로 치부하지 않고, 그것이 남긴 구체적인 발자국을 통해 현재의 우리를 비추는 거울로 삼았다는 데” 있다. 그들은 현시대가 앓고 있는 문제들, 즉 “끝없는 더위, 몰아치는 홍수, 울부짖는 사람들, 엉망이 되어 버린 세계. 여기저기에서 들려오는 것은 혐오와 증오에 젖어 서로 네 탓만 하는 목소리와 그 메아리”에서 유토피아가 태어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라틴아메리카의 실패한 이상향들은 먼 나라의 특수한 사례가 아니라, 오늘날 전 세계가 반복해서 만들어 내는 현대성의 또 다른 얼굴이라는 점에서 한국 독자들에게도 매우 현실적인 질문을 던진다.
한국 사회 역시 더 높은 생산성과 더 효율적인 도시, 더 안전하고 완벽하게 관리되는 공동체를 꿈꾼다. 그렇기에 실패한 유토피아를 통해 “현상적 본질을 포착”하는 것이 중요해진다. “여러 위기와 전쟁, 불평등 등이 중첩·심화되고 있는” 요즘이다. “실패한 유토피아의 흔적을 예리하고 다층적인 시각으로 탐사하는 행위는 우리가 발 딛고 선 현실을 정직하게 조망하고 새로운 사회를 꿈꾸기 위한 필수적인 성찰의 과정”이다.
페데리코 구스만 루비오는 유토피아가 인간 해방의 상상이자 동시에 통제와 배제의 시스템으로 변질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며, 이상 사회를 향한 꿈이 어떻게 권력과 결합해 왔는지를 날카롭게 분석한다. “유토피아의 발자국을 따라가는 여정은 역설적으로 우리를 다시금 뜨거운 삶의 현장”으로 우리를 데려갈 것이다.
자동차 왕 헨리 포드가 꿈꿨던 미국식 유토피아, 포드란지아
자동차 왕 헨리 포드가 아마존 한복판에 건설했던 미국식 산업 도시, ‘포드란지아(Fordlandia)’. 자동차 타이어 생산에 필요한 고무를 안정적으로 생산하기 위해 헨리 포드만의 이상 도시를 세웠지만, 왜 이 꿈은 처참히 무너졌을까? 공장, 병원, 골프장까지 미국의 것을 이식했으나, 정글의 생태와 원주민의 문화를 무시한 채 자본의 힘으로 자연을 정복하려 했던 헨리 포드의 오만한 욕망은 유토피아를 고철 더미로 만들고 말았다.
노동자의 주거 공간과 식단, 노동 시간과 오락 문화까지 철저히 관리되었으며, 금주와 규율, 효율성이 도시 전체를 지배했다. 그러나 이 유토피아는 결국 실패한다. 아마존의 생태를 이해하지 못한 대규모 단일 재배는 병충해로 무너졌고, 현지 노동자들은 강압적인 미국식 규율에 저항했다. 저자는 포드란지아의 폐허를 통해 산업 자본주의가 꿈꾸었던 완벽한 질서가 어떻게 자연과 인간 모두를 통제 대상으로 바꾸었는지를 보여 준다.
인종적 순수성을 꿈꾼 광기 어린 이상향, 누에바 게르마니아
“신은 죽었다”고 말한 프리드리히 니체의 여동생 또한 유토피아를 건설하려 했다. 누이 엘리자베트 니체는 순수한 아리아인의 혈통을 보존하겠다는 광기 어린 유토피아를 꿈꿨다. 인종주의적 기획과 배타적 우월성은 어떻게 유토피아를 디스토피아로 전락시켰을까? 정착에 실패하고 몰락한 인종주의자들의 흔적을 통해 유토피아의 어두운 면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파라과이에 실제로 건설되었던 독일인 공동체 ‘누에바 게르마니아(Nueva Germania)’. 엘리자베트 푀르스터 니체와 그녀의 남편 베른하르트 푀르스터와 함께 유럽 문명의 타락과 혼혈 사회를 거부한 이들은 파라과이 밀림 속에 새로운 독일 사회를 건설하려 했고, 노동과 규율, 금욕과 민족적 순수성을 기반으로 한 폐쇄적 유토피아를 꿈꾸었다. 이 공동체는 유토피아라는 이름 아래 인간이 얼마나 쉽게 배제와 우월성의 논리에 빠질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극단적 사례이다. 공동체는 혹독한 자연환경과 경제적 실패 속에서 빠르게 붕괴했고, 구성원들은 빈곤과 질병에 시달렸다.
문학과 문명이 충돌한 공간, 파라과이의 예수회 선교구
남미 식민 시대 예수회 선교구. 오늘날 파라과이와 브라질, 아르헨티나 일대에 존재했던 이 공동체는 원주민 과라니족과 예수회 선교사들이 함께 만든 독특한 사회였다. 공동 생산과 공동 분배, 음악과 종교 교육이 결합한 이 공간은 오랫동안 “남미의 이상 공동체”로 불렸다. 당시 유럽 지식인들조차 이 공동체를 하나의 유토피아적 실험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식민 권력과 경제적 이해관계 속에서 예수회는 추방되고 공동체 역시 해체된다. 저자는 유토피아가 단순한 상상이 아니라 실제 역사에서 구현된 적이 있었음을 보여 주면서도, 동시에 이상향이 언제나 제국과 권력의 충돌에서 불안정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드러낸다.
혁명 이후의 꿈과 폐허, 쿠바의 사회주의 이상향
쿠바 혁명이 만들어 낸 사회주의 유토피아의 흔적을 따라간다. 쿠바는 오랫동안 “새로운 인간”과 평등 사회를 꿈꾸며 사회주의적 이상을 실험해 온 공간이었다. 교육과 의료, 공동체 중심의 삶은 많은 이들에게 대안적 사회 모델로 읽혔다. 그러나 냉전과 미국의 봉쇄, 경제 위기에서 혁명의 이상은 점차 균열되기 시작한다. 저자는 폐허가 된 건물과 쇠락한 도시 풍경에서도 여전히 남아 있는 혁명의 흔적을 관찰하며, 유토피아는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기억과 생활에 잔존한다고 말한다. 쿠바의 사례는 이상 사회가 현실 정치와 경제의 압력 속에서 어떻게 변형되는지를 보여 주는 동시에, 실패 이후에도 남는 공동체 감각의 의미를 되묻는다.
혁명과 예술이 함께했던 섬, 니카라과의 솔렌티나메
니카라과의 군도 솔렌티나메(Solentiname). 이곳은 시인이자 해방 신학 사제였던 에르네스토 카르데날이 1960-1970년대에 세운 혁명 공동체다. 주민은 함께 노동하고 그림을 그리고 시를 쓰며, 예술과 신앙, 공동체와 혁명이 결합한 새로운 삶의 방식을 실험했다. 솔렌티나메는 단순한 정치 공동체가 아니라 인간의 감수성과 일상 자체를 변화시키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소모사 독재 정권의 탄압과 니카라과 혁명의 격변에 공동체는 해체되고 만다. 저자는 혁명이 단지 제도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방식과 감정의 문제였음을 보여 준다. 솔렌티나메의 실패는 이상이 무의미했다는 증거가 아니라, 오히려 인간이 얼마나 끈질기게 공동체를 꿈꾸는 존재인지를 드러낸다.
폐쇄된 미래 도시, 멕시코의 산타 페
산타 페(Santa Fe)는 현대 신자유주의가 만들어 낸 유토피아다. 멕시코 시티 외곽의 쓰레기 매립지 위에 건설된 산타 페는 초고층 빌딩과 쇼핑몰, 고급 아파트와 사설 경비 시스템으로 이루어진 미래형 도시다. 이곳은 효율성과 안전, 소비와 자본의 흐름을 극대화한 공간이며, 글로벌 기업과 중상류층의 생활을 중심으로 설계되었다. 그러나 저자는 산타 페가 사실상 가난과 노동, 빈민가를 외부로 밀어낸 “배제의 도시”라고 지적한다. 이곳의 유토피아는 모두를 위한 이상향이 아니라 특정 계층만을 위한 폐쇄적 낙원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산타 페를 통해 오늘날 스마트 시티와 플랫폼 도시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지를 날카롭게 보여 준다.
폐허를 따라가며 다시 묻는 질문, 유토피아는 가능한가
인간은 왜 반복해서 유토피아를 꿈꾸는가. 혁명 공동체와 산업 도시, 계획 수도와 신자유주의 도시까지, 서로 다른 시대와 이념에서 등장한 유토피아들은 대부분 실패하거나 변질되었다. 그러나 저자는 그 실패를 단순한 오류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유토피아의 흔적에는 인간이 더 나은 삶을 상상하고자 했던 욕망이 남아 있다고 말한다. 완벽한 사회는 존재하지 않을지라도, 다른 삶의 가능성을 꿈꾸는 상상력 자체는 인간 사회를 움직여 온 중요한 힘이었다는 것이다. 『네, 그런 곳이 정말 있습니다』는 결국 폐허가 된 이상향을 통해 오늘의 세계를 되돌아보게 만드는 책이다.
부엔 비비르,
근대성 패러다임을 넘어선 새로운 패러다임
‘나가며’에서는 자연의 권리의 미래로서 부엔 비비르를 다룬다. 남미에서 탄생한 부엔 비비르는 기존 개발에 관한 아이디어를 비판하는 동시에 이에 대한 대안을 의미한다. 남미에서 탄생한 부엔 비비르는 기존 개발에 관한 아이디어를 비판하는 동시에 이에 대한 대안을 의미한다. 이는 서구의, 인간중심적인, 자본주의적 경제 중심의 근대성 패러다임과는 정반대의 것이다. 부엔 비비르는 서로 다른 유래를 가진 지식의 융합을 대표하며 단지 ‘토속적’ 아이디어로 한정될 수 없다. 결국 부엔 비비르는 서로 다른 입장이 개발과 일반적인 근대성에 대한 비판에서 만나는 공통의 플랫폼 또는 분야로 해석되어야 한다. 자연을 존중하고 자연의 권리를 인정하는 방향으로 자연과의 관계의 재정립하며, 그러한 관계 속에서 인간의 안녕을 추구하는 것이 인류 사회의 지속 가능한 미래를 보장하는 불가결한 요소이다. 부엔 비비르 담론은 이러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데 있어 좋은 안내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부엔 비비르 총서’는?
한국외국어대학교 중남미연구소 HK+사업단은 ‘21세기 문명 전환의 플랫폼, 라틴아메리카: 산업 문명에서 생태 문명으로’라는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다. 본 사업단은 라틴아메리카뿐만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생태 문명으로의 패러다임을 전환하기 위해 투여하는 다양한 노력을 비롯해 라틴아메리카 사람들이 추구하는 대안적 세계관과 삶의 방식에 관해 연구하고 있다. 이와 관련된 연구 결과물을 대중과 공유하기 위해 ‘부엔 비비르 총서’를 기획해 출판하고 있다. ‘부엔 비비르(Buen vivir)’는 안데스 원주민이 추구하는 삶을 표현하는 단어로 그 핵심 내용은 공동체에서의 조화와 공존이다. 부엔 비비르 총서에는 인문학, 사회과학, 자연과학이 융합해 라틴아메리카의 생태 문명을 탐구한 결과가 오롯이 담겨 있다.

유토피아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가장 엄밀한 의미에서 상상의 장소이거나, 혹은 가장 불온한 의미에서 현실 속의 장소가 필요하다. 잘 알려져 있듯이, 토머스 모어는 자신만의 이상향을 만들고자 이 단어를 만들었고, 이를 에스파냐어로 옮기고 서문을 썼던 케베도는 유토피아를 ‘그런 곳은 없다’라고 번역했다. 상상 속 유토피아와 함께 현실의 유토피아,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 유토피아를 구현하려는 시도가 등장한다.
— 들어가며
모든 것은 사물을 보는 관점에 달린 문제였다. 이곳에 널린 물건들을 수집해 예술, 혁신, 인류학, 대중문화, 혹은 역사 등의 이름으로 전시관에 옮겨 놓을 포드 같은 백만장자만 있으면 될 것 같았다. 사실 모든 전시관은 결국 똑같은 물건들을 담게 될 터였다. 대상의 정체성을 결정짓는 것은 물건 자체가 아니라, 물건에 붙은 라벨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제1장 포드란지아, 산업 유토피아_19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