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광해군 재위 기간 내내 조정을 뜨겁게 달군 두 개의 논쟁이 있다. 조정 신료들은 양편으로 나뉘어 이 논쟁을 매일같이 격렬하게 벌였고, 그로 인해 국가행정은 수시로 마비되기 일쑤였다. 그리고 광해군은 결국 이 논쟁의 끝에서 조카가 주도한 정변(계해정변, 인조반정)으로 왕위에서 쫓겨난다. 그 하나는 인목대비 폐위 논쟁이고, 또 다른 하나는 명과 후금 사이에서 조선이 취할 외교적 태도를 놓고 벌어진 논쟁이었다.
저자 계승범의 전작 『모후의 반역』이 인목대비 폐위 논쟁을 통해 충과 효가 정치 무대에서 정면으로 충돌한 사건을 그렸다면, 이번에 펴내는 『상놈과 국왕』은 명나라에 대한 사대 의리와 군부-신자 관계를 강조한 조정 신료들에 맞서 광해군이 명과 후금 사이에서 이중외교를 펼치고, 그의 뜻을 후금 누르하치에게 충실히 전달한 하서국의 활동을 그린다.
출판사 리뷰
상놈 하서국과 국왕 광해군
숭명배금(崇明排金)에 맞서 한배를 타다
‘상놈’ 하서국은 어떤 사람인가? 하서국은 평안도(오늘날 북한 자강도) 만포에서 북방 여진을 상대로 통역 업무를 맡아보았던 향통사였다. 본인은 변방에서 수자리를 서며 군역의 부담을 진 평민이고, 그의 아내는 노비다. 철저한 신분제 사회에서 지배층인 양반은 상천(常賤: 평민과 천민을 합한 개념)을 천하게 여겨 ‘상놈’이나 ‘상것’으로 불렀다. 하서국은 바로 그런 존재였다. 국왕 광해군과는 도무지 접점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후금의 도성 허투알라와 조선을 바삐 오가며 누르하치와 광해군의 가교 역할을 충실히 한 인물이다. 조선 조정은 누르하치와의 교섭 창구로 하서국에게 전적으로 의존했다.
1589년 누르하치가 만주의 건주여진 세력을 통합하며 새로운 강자로 부상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는 조선에 원병을 보내주겠다는 제안도 해왔다. 1616년 후금을 세우고 칸을 자칭한 누르하치는 이제 국제무대에서 명 중심의 동아시아 질서에서 벗어나 독자 노선을 걷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밝혔다. 마침내 1618년 4월 누르하치는 요동의 무순(撫順)을 공격하여 함락했다. 무순은 명나라가 요동 지역을 방어하는 데 매우 중요한 거점이었다. 명나라로서도 가만있을 수 없었다. 후금을 정벌하기 위한 대규모 원정군을 꾸리고 조선에도 징병하라고 요구해왔다.
명의 파병 요구에, 비변사를 필두로 한 조정의 절대다수 신료는 신자(臣子) 된 제후국의 도리로 군부(君父)인 명나라의 징병 요구에 마땅히 따라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한 데 반해, 광해군은 참전에 부정적이고 강력히 반대했다. 병농이 분리되지 않은 조선에서 갑자기 군사를 뽑기도 어려울뿐더러 무리하게 파병한다면 국경 방어가 허술해지니 우리 강토만 잘 지켜도 그 도리를 다하는 것이라는 논리를 내세웠다.
이런 와중에 누르하치가 명-후금 간 전쟁은 조선과 상관없으니 끼어들지 말라는 내용의 서신을 보내왔다. 만포로 누르하치의 서신을 갖고 온 차관을 상대한 이는 여진어 통역을 맡은 향통사 하서국이다.
요동전쟁(1618~1622)이 발발하자 하서국은 더욱 분주해졌다. 파병을 강력히 반대하던 광해군이 명 황제의 칙서를 받아 강홍립을 도원수로 삼은 조선군을 파견했을 때 하서국도 통사이자 길을 인도하는 향도장으로 출정했다. 하서국은 누르하치에게 조선은 명나라와 달리 후금과 싸울 의사가 없었는데 명나라의 요구에 못 이겨 어쩔 수 없이 출전했을 뿐이라고 설명했다. 후금군과 전투를 벌인 부차 전투에서 출정한 군사의 70%를 잃은 강홍립도 투항하면서 누르하치에게 조선의 출정은 불가피하게 내린 결정일 뿐 후금과는 원한이 없다고 말했다. 저자는 실록과 여러 자료를 통해 하서국과 강홍립 등의 그러한 설명이, 명을 도와 후금과 싸운다면 그 보복으로 후금이 조선을 침공할 가능성을 우려한 광해군의 뜻이었을 것이라고 본다.
하서국은 누르하치의 국서를 조선에 전달하기도 했으며, 한양에 직접 올라가 국왕 광해군을 알현하고 양국이 서로 화친하자는 내용의 답신을 구두로 전달받아 그대로 누르하치에게 구두로 전하는 임무도 수행했다. 이렇듯 그는 광해군의 아바타이자 분신처럼 조선 국왕의 뜻을 후금 누르하치에게 충실히 전하면서 조선과 후금 사이의 긴장을 일시적이나마 완화했다. 사대 의리와 숭명배금으로 뒤덮인 조선 조정에서 후금과 화친하려는 광해군과 그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한 하서국은 한배를 탄 사람이나 다름없었다.
명나라냐 후금이냐, 양자택일의 상황에서
광해군의 아슬아슬한 줄타기외교
명나라 중심의 동북아시아 질서가 공고할 때 조선의 외교정책은 단순했다. 조선의 지배 엘리트층은 사대 의리로 중화 문명의 주체인 상국(上國)을 섬기며, 자신은 소중화(小中華) 이데올로기로 무장했다. 중원이 세계 문명의 중심이고, 조선을 제외한 모든 나라는 이적(夷狄) 오랑캐라는 화이론(華夷論)적 문명 의식이 정치·사회·문화·사상을 지배했다.
그러나 명질서(明秩序)의 약화가 가시화하고 후금이 강성해지면서 조선에 위기가 닥쳤다. 17세기 초 만주 지역에서 성장한 누르하치의 후금이 명나라를 위협하고, 급기야 1619년 봄 명나라의 대규모 원정군을 대파하고 1621년에는 요동의 심장부인 심양과 요양을 점령하면서 후금의 누르하치는 조선에 명나라냐 후금이냐 양자택일을 하라고 압박했다. 지정학적으로 명과 후금 사이에 낀 한반도의 조선은 양쪽의 눈치를 모두 봐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당시 명나라는 우방 제후국인 조선에 군사를 파병하여 함께 싸우자고 했으나 광해군은 미온적이었다. 명을 도와 전쟁에 끼어들었다가는 틀림없이 후금의 보복 공격을 당할 것이라는 정세 판단 때문이었다. 반면, 조정 신료들은 임진왜란 때 명 황제가 군사를 보내주어 거의 망하게 된 나라를 일으켜 세워준 은혜를 입었으니 명나라의 요구를 무조건 들어줘야 할 것이며, 후금의 국서에 절대로 답하지 말고, 후금과는 교통을 완전히 단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광해군은 모든 신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후금에서 보내온 국서에 답하고자 했고, 요동전쟁에 출정한 강홍립에게는 “사람을 보내 오랑캐와 몰래 통하라”고 했다. 이는 곧 무리하게 전투에 임하지 말고 눈치껏 지휘하며, 상황을 보아 필요하다면 조선은 부득이 파병하는 것이기 때문에 후금과 원한이 없으며 그래서 싸울 의사도 없음을 저들에게 알리라는 뜻이었다.
명나라와 후금, 어느 나라를 상대로도 국가의 자위력을 갖추지 못한 조선의 외교는 난관에 부딪쳤다. 이 상황에서 광해군은 당당하게 중립을 천명하지 못한 채, 명나라에 대해서는 전통적 사대를 계속하면서 후금과는 명나라 몰래 대화를 추진하는 아슬아슬한 이중 노선의 외교를 줄타기하듯 이어갔다. 그리고 명나라의 눈을 피해 후금과 비밀리에 교통하는 일을 일선에서 수행한 인물은 하서국이었다.
1년 간격을 둔 두 죽음,
그리고 결국 피할 수 없는 전쟁
사반세기 넘게 조선과 후금을 오가며 광해군과 누르하치의 핫라인 같은 역할을 했던 하서국은 1622년 봄 후금의 요동 장악 이후 급변하는 정세에 휩쓸려 후금에서 처형되었다. 후금에 대한 조선(비변사)의 분명치 못한 태도, 후금 지도부 안 강경론자들의 주도권 장악, 하서국의 간첩 행위 탄로 등 때문이었다. 그의 죽음 이후 후금은 조선에 매우 공격적으로 나왔다.
광해군은 후금의 공격적 대응에, 1622년 봄 조선군을 요충지에 주둔시키라는 명나라 칙서마저 문무백관이 보는 앞에서 거부했으며 명나라의 존재가 조선의 안위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방해가 된다고 천명했다. 그리고 후금에 우호적인 국서를 보내라고 독촉했다. 이전에는 비밀리에 후금과 교통하고 은밀하게 명나라를 속이는 차원이었지만, 이제는 대놓고 명나라를 기피하는 차원으로 전환된 것이다.
신료들은 파병을 거부하는 국왕 광해군의 정통성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명나라와의 군부-신자 관계를 부인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결국 조정 신료들로부터 철저하게 고립되었던 광해군은 외교 논쟁이 시작된 지 거의 5년이 되던 1623년 3월 12일 밤에 발생한 정변으로 말미암아 왕위에서 축출되었다. 하서국이 처형 소식이 전해진 지 1년 만이었다.
한 사람은 후금에 대한 전략을 세우고 또 한 사람은 이를 충실히 수행했던 가운데, 실행자 하서국은 후금 지도부(홍타이지가 이끄는 강경파)의 손에 의해, 전략가 광해군은 그 1년 뒤 조선 신료들(주자학적 화이론자 강경파)의 손에 의해 물리적·정치적 죽임을 당한 것이다.
16세기를 지나면서 명과 조선의 군신 관계에는 부자 관계가 추가되었다. 가변적인 군위신강(君爲臣綱, 충)보다 훨씬 더 중요한 부위자강(父爲子綱, 효) 논리가 조선왕조의 국가정체성으로 확고해진 것이다. 충효에 기초한 사대 의리를 포기하지 않는 한, 조선이 취할 대응 방법은 사실상 명나라(군부)와 운명을 함께하는 것뿐이었다.
조선의 새 인조 정권과 후금의 새 홍타이지 정권이 대화를 통한 수교를 거부하면서, 인조가 등극한 지 3년 만에, 홍타이지가 즉위한 지 불과 3달 만인 1627년 정묘호란이 벌어지고, 다시 그로부터 9년 뒤 1636년에 병자호란이 발발했다.
작가 소개
지은이 : 계승범
역사학자. 서강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2026년 초에 정년 퇴임하였다. 현재는 개인적으로 HIKAN 연구소를 세워 역사 탐구를 계속한다. 서강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워싱턴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동아시아 맥락에서 보는 조선 시대 정치·지성·사회사 및 국제질서 분야를 주로 연구한다. 특히 양반 지식인의 중화 의식과 유교의 한국적 특성이 조선을 빚어내는 과정 및 그 역사적 유산이 현재 한국 사회에서 여전히 작동하는 양상에 관심이 많다.대표 저서로는 『아버지의 그림자』, 『유자광, 조선의 영원한 이방인』, 『모후의 반역』, 『중종의 시대』, 『정지된 시간』, 『우리가 아는 선비는 없다』, 『조선시대 해외파병과 한중관계』 등이 있다. 공저로는 The Cambridge World History of Slavery Vol. 2 와 Long Live the Emperor: Uses of the Ming Founder across Six Centuries of East Asian History 외 다수가 있다.
목차
01. 전쟁 속의 한반도, 1592~1644
02. 여진 세력의 동태와 누르하치의 성장, 1392~1616
03. 하서국은 누구인가?
04. 임진왜란과 향통사 하서국, 1592~1607
05. 임진왜란과 광해군의 트라우마, 1592~1618
06. 요동전쟁 발발, 광해군과 하서국, 1618
07. 조선군의 투항과 하서국, 1619
08. 후금의 국서, 광해군과 하서국, 1619~1620
09. 누르하치의 조서, 광해군과 비변사, 1621
10. 처형대에서 하서국이 바라본 하늘, 1621~1622
11. 유배지에서 광해군이 바라본 하늘, 1622~1641
12. 에필로그: 17세기 초 조선의 선택과 그 유산
다시 생각해보기 1: 광해군의 노선은 과연 중립 외교였을까?
다시 생각해보기 2: 조선은 왜, 질 줄 알면서도 호란을 피하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