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응축된 흐름의 존재인 ‘나’를 자신만의 색깔과 은유로 풀어낸 천향미 시인의 시집이다. 시인은 상처와 슬픔을 과장하거나 미화하지 않고 담담한 언어로 그려내며, 보편적 의미와 울림을 함께 담아낸다.
“모래시계 속으로 가라앉는 오래된 수레바퀴”, “손가락이 그리는 동심원은 불협화음의 파동으로 퍼져 나간다”, “오래된 전시품은 이름 대신 침묵을 달고 있다”와 같은 표현은 시간과 통증, 기억과 침묵의 감각을 섬세하게 형상화한다. 또한 「페르소나」, 「막다른 골목에서」 등에 담긴 독창적인 이미지와 은유는 깊은 여운을 남긴다.
자신만의 시적 문법으로 슬픔과 존재의 감각을 응축해낸 시집이다. 여기에 아포리즘의 울림까지 더해져 독자들에게 사유의 깊이와 감동을 전하며, 앞으로의 작품 세계를 더욱 기대하게 만든다.
출판사 리뷰
천향미 시인의 이번 시집은 전반적으로 응축된 흐름의 존재인 ‘나’를 은유하는데, 성공하고 있다. 훌륭한 시인은 자신의 색깔로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문장과 은유로 시를 지을 수 있어야 한다. 또한 보편적 의미가 내재되어 독자에게 울림을 줄 수 있어야 한다. 시의 길은 완성도 끝도 없기에 무척이나 지난하다. 천향미 시인은 이 지난한 길을 가면서도 그러한 부분을 놓치지 않고 있기에 신뢰가 간다. 돌이켜보면 숱한 시인들이 자신의 상처나 아픔을 지나치게 미화 혹은 과장하거나 공감할 수 없는 은유로 진술하는 사례가 많다. 천향미 시인은 그러한 부분을 경계하면서 자신만의 빛깔로 슬픔을 담담하게 묘사한다. 예컨대 시간 속에서의 통증이란 메타포를 생각할 때, 이미 언급한 내용 이외에도 “모래시계 속으로 가라앉는 오래된 수레바퀴”(「일곱 번째 석양 무렵」)라는 표현이나 “손가락이 그리는 동심원은 불협화음의 파동으로 퍼져 나간다”, “오래된 전시품은 이름 대신 침묵을 달고 있다”(「우리는 서로의 얼굴에 손목시계를 매달았다」)라는 표현들이 그렇다. 「페르소나」라는 시에서는 “잠입하지 못한 어둠이 긴 목을 빼고 바닥을 서성이는 동안 커튼을 흔들어 보는 바람, 십자가 불빛을 이정표 삼아 누군가 공중을 걸어가요”라는 묘사나 「막다른 골목에서」라는 시에서는 “뇌수에 박힌 거미줄 문양은 나침반의 바늘을 삼켰다/ 유리잔 속 시간은 흐느끼는 골목을 배회하며/ 바람의 지문 읽는 법을 익혔다”라는 묘사는 독자들에게 깊은 울림을 주기에 충분하다. 더욱이 이러한 시적 문법에다 아포리즘의 감
식물학 연주회
오른팔이 자라는 동안 눈먼 소년의 생애를 왼손으로 받아 적는다
조금씩 관절 자라는 소리를 들으며 바깥을 경청하는 꽃들
방언으로 쏟아지는 언어를 버린 대가는 꽃의 몸을 입는 일
네 출생은 필연이었다
가늠할 수 없는 깊이를 재는 대신 적막을 즐겨 봐
무표정하게 겨누는 저격수의 푸른 눈동자는 적요한 빛깔이었다
흔들리는 총구 아래 오래 서성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재즈 멜로디를 부력 삼아 부풀어 올랐다
유통기한 지난 날개는 이제 그만 내려놓아도 좋아
닿을 수 없는 초록을 절벽이라 부르겠어
끝없이 멱살 잡히는 머리카락을 수습할 시간
잔기침을 하며 열두 번째 관절 인형이 돌아눕는다
더는 달려들지 않는 불빛을 추스르며 낮은 음역을 지날 때
네가 건넨 귓속말 허공의 문을 열고 들어선다
빙점 아래 내려앉은 서리꽃, 눈을 뜨고
기약 없는 초침 소리 메아리로 서성인다
또 다른 생이 펼쳐지는 겨울과 봄 사이
몇 번의 절기를 함께 견뎌낸 목소리 동심원으로 쌓여가는 동안
느닷없이 교차하는 비트 음에 눈을 감고 귀를 여는 꽃들
비로소 환해지는 소리의 비등점
시간이 시럽처럼 새는 줄도 모르고
주머니 없는 웃음을 가득 털어 넣고 붉은 담요 속에 잠을 불러들였다
눈꺼풀을 깜박이는 동안 첫 만남을 노래하던 새는 여러 번 의자를 옮겨 앉았다
내 그림자에 뿌리내린 메아리는 낡은 괘종시계 속 부엉이처럼 드나들었다
바람이 바스락거리는 낙엽들을 불러 모아 조심스레 쓸어 담고 있다
창문 너머 겨울의 숨결을 타고 차가운 공기를 아슬하게 핥는다
나비의 날개처럼 부드럽게 당신 숨결에도 깃털 같은 계절이 내려앉을 때
길들지 않은 작은 짐승을 두 발 사이에 누이고 여린 잠을 다독인다
비등점 너머의 풍경
종일 속을 달궈도 나는 끓는점에 닿지 못한다 바다는 뼈대가 된 파도를 불러 앉혀 놓고 수평을 저울질하고 있다 해변의 그림자를 어루만지는 동안, 눈 속 적색 점멸등이 깜빡이고 해변의 연인들은 수평선에 뿌리 내린 채 막 끓기 시작한 저녁 불빛을 나눠 마신다 스타벅스 엔제리너스 탐앤탐스 이름표를 단 조각 케이크들이 입술을 음미하고 있다 낮은 채도의 불빛 속에서 백색 소음은 물고기로 변주되고 시간은 반복되는 후렴구로 배열된다 나는 마지막 지점을 통과한 마라토너, 가쁜 숨은 폐 속에서 꽃가루로 흩어진다 하나의 슬픔이 또 다른 슬픔을 잉태할 때, 한입 베어 문 울음이 폭발한다 사건은 뒤틀린 상상에서 시작되고 영화의 한 장면과 기묘하게 포개진다 검은 파도가 밀려오고 오랜 슬픔이 소환된다 반복되는 멜로디와 끈적한 올가미, 천천히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이 모든 것은 아메바성 급성 뇌 질환, 검은 바닷속으로 잠겨 드는 어지럼증, 괜찮아 너의 탐색은 이제 멈추어도 좋아 밤새 창밖을 지키던 점멸등이 유리 벽 너머로 불빛을 흘려보낸다 파도의 침묵이 나의 모든 소란을 집어삼킨다 나는 물속에서 너무 오래 호흡을 멈추고 있었다 마지막 코딩 지점에서 내 몸을 빠져나온 소란 허공에 재배열된다
작가 소개
지은이 : 천향미
경북 의성 출생. 2007년 계간 『서시』를 통해 등단했고, 시집으로 『바다빛에 물들기』 『깡이 있어야 날제』가 있다. 2012, 2026년 부산문화예술지원사업을 수혜했으며, 부산시인 작품상, 천상병문학제 ‘귀천문학상’을 수상하였다. 현재 부산작가회의와 시와사상 등에서 활동 중이다.
목차
● 시인의 말
제1부 인간의 숲
식물학 연주회 10
성간 비행의 흔적 12
패러글라이딩 13
창문과 나와 풍경 14
커튼콜 16
빙점 위의 불꽃 18
12월 19
2층 침대의 별 22
내일을 품은 사람 24
편도 여행 26
난청의 바다 28
천년의 미소 30
파도 소리길 32
민무늬 34
일곱 번째 석양 무렵 36
제2부 침묵하는 증인
수렵도 38
마른장마 40
환승론 41
전시장 42
모든 감각이 하나가 될 때까지 44
피타의 퍼즐 46
오리무중 47
우리는 서로의 얼굴에 손목시계를 매달았다 48
오월 50
선경仙境에 들다 51
휴식 52
나이테 54
제3부 세상의 피부
침묵의 게임 56
비등점 너머의 풍경 58
결빙의 노래 59
겹꽃의 연대기 60
소금빵을 굽는 시간 61
페르소나 62
페르소나 2 64
노스탤지어 65
고요를 먹는 눈 66
슬픔을 표현하는 방식 68
헛꽃 70
헛꽃 2 72
우기의 추상 74
제4부 시간의 순환
시간이 시럽처럼 새는 줄도 모르고 78
막다른 골목에서 80
박물관에서 82
칼스섬의 파도 84
워터마크 2 86
지상의 별자리 87
빈집의 생각 88
책갈피 90
가지 않은 길 92
소리의 나침반 94
놓친다는 것 95
착시 96
밤의 문고리 98
두물머리 100
손끝으로 걷다 101
예측 가능한 맛 102
▨ 천향미의 시세계 | 안민 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