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고적(高適, 701?∼765)은 당(唐)나라 개원(開元), 천보(天寶) 연간의 이른바 성당(盛唐) 시기에 활동한 시인으로, 변새(邊塞)에서의 실제 경험을 토대로 장수들의 투지와 용맹함을 찬양하거나 병사들의 고통을 써내는 등 많은 변새시(邊塞詩)를 창작해 동시대의 잠삼(岑參)과 더불어 당대(唐代) 변새시를 대표하는 시인으로 꼽힌다.
그는 공업의 수립과 일신의 영달을 목표로 삶의 오랜 기간을 여러 곳을 유랑하며 떠도는 생활을 했으며, 실제 고관으로서 득의했다고 할 수 있는 시기는 생의 후반부의 일부분에 불과했다. 또한 안사의 난 이후 정사에 본격적으로 참여하며 관직에서 승승장구한 이후로는 쓴 작품 수도 이전보다 많지 않았다. 현재 남아 있는 그의 작품의 대다수는 은거와 유랑을 반복하던 시기에 쓴 것으로, 공업 수립의 열망과 그 좌절에 따른 실망과 안타까움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는 40여 편에 달하는 변새시를 썼는데, 그의 변새시는 동시대 잠삼(岑參)의 변새시와는 다른 평이하고 담담한 정경 묘사와 침중하고 혼후한 표현으로 침울하고 비통한 정서를 나타내며, 잠삼과 더불어 당대 변새시의 또 다른 최고 수준을 보여 준다 평가받는다.
출판사 리뷰
고적(高適, 701?∼765)은 당(唐)나라 개원(開元), 천보(天寶) 연간의 이른바 성당(盛唐) 시기에 활동한 시인으로, 변새(邊塞)에서의 실제 경험을 토대로 장수들의 투지와 용맹함을 찬양하거나 병사들의 고통을 써내는 등 많은 변새시(邊塞詩)를 창작해 동시대의 잠삼(岑參)과 더불어 당대(唐代) 변새시를 대표하는 시인으로 꼽힌다.
고적은 공업의 수립과 일신의 영달을 목표로 삶의 오랜 기간을 여러 곳을 유랑하며 떠도는 생활을 했으며, 실제 고관으로서 득의했다고 할 수 있는 시기는 생의 후반부의 일부분에 불과했다. 또한 안사의 난 이후 정사에 본격적으로 참여하며 관직에서 승승장구한 이후로는 쓴 작품 수도 이전보다 많지 않았다. 현재 남아 있는 그의 작품의 대다수는 은거와 유랑을 반복하던 시기에 쓴 것으로, 공업 수립의 열망과 그 좌절에 따른 실망과 안타까움으로 점철되어 있다.
현재 그의 시는 전하는 판본에 따라 약간씩 차이가 있지만 대략 240여수가 전하고 있는데, 이 중 특정인에 대한 기증시나 증별시가 매우 높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 아울러 대상에 따라 그 내용과 표현 방식 또한 차이가 나는데, 이는 오랜 기간 떠돌며 불우했던 그의 삶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고적은 평생토록 수많은 사람들과 교유하며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에게는 동정과 연민 및 격려의 뜻을 나타냄으로써 스스로에 대한 위안으로 삼고, 고관이나 정치적 유력자들에게는 이들에 대한 찬미와 함께 자신의 능력과 재주를 드러냄으로써 간알의 목적을 이루고자 했다.
그러나 아무래도 그의 시 중 가장 돋보이며 또한 문학사적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은 그의 변새시(邊塞詩)라 할 수 있다. 고적은 40여 편에 달하는 변새시를 썼는데, 그의 변새시는 동시대 잠삼(岑參)의 변새시와도 다른 풍격을 보인다. 즉 잠삼의 시가 화려하고 섬세한 정경 묘사와 독특하고 빼어난 표현으로 호탕하고 격정적인 정서를 나타내었던 반면, 고적의 시는 평이하고 담담한 정경 묘사와 침중하고 혼후한 표현으로 침울하고 비통한 정서를 나타내었으니, 잠삼과 더불어 당대 변새시의 또 다른 최고 수준을 보여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연가행
한나라 동북쪽에 전란이 일어나니
한나라 장군이 집을 떠나 남은 적을 치러 갔네.
남아는 본래 거침없이 내달리는 것을 중히 여기는 법,
천자께서 특별히 용안을 보여 주셨네.
징 치고 북 두드리며 유관을 내려가니
깃발들은 기다랗게 갈석산 사이에 이어지고,
교위의 급보는 사막에 날아들며
선우의 사냥 횃불은 낭거서산을 비추었네.
쓸쓸한 산천은 변방 끝까지 펼쳐져 있는데
비바람 섞여 치듯 오랑캐의 기병 쳐들어와,
전사들은 전장에서 절반이 죽었거늘
미인은 장막 아래에서 여전히 노래하고 춤추었네.
가을 저무는 넓은 사막엔 변새의 풀이 시들고
석양 내리는 외로운 성엔 싸우는 병사가 적었나니,
장수들은 성은을 입었건만 항상 적을 경시해
변방에서 힘이 다해 포위를 풀지 못했네.
갑옷 입고 멀리서 나라 지키느라 오래도록 고생하니
이별한 후 분명 옥 젓가락 같은 눈물 흘렸겠고,
젊은 아내는 성남에서 애간장이 끊어지고
병사는 계북에서 부질없이 돌아보리.
변방의 바람 휘몰아치니 어찌 견뎌 낼 수 있겠으며
외딴 곳 아득히 황량하니 또 무엇이 있으리?
살기는 하루 종일 전운을 일으키고
처량한 소리가 밤새도록 조두에서 전해 오리.
하얀 칼날의 흥건한 핏자국을 서로 보나니
예로부터 절개에 죽지 어찌 공훈을 바랐으리?
그대 보지 못했는가, 사막에서의 전쟁의 고통을.
지금도 여전히 이 장군을 그리워하리.
燕歌行
漢家煙塵在東北, 漢將辭家破殘賊.
男兒本自重橫行, 天子非常賜顔色.
摐金伐鼓下楡關, 旌旆逶迤碣石間.
校尉羽書飛瀚海, 單于獵火照狼山.
山川蕭條極邊土, 胡騎憑陵雜風雨.
戰士軍前半死生, 美人帳下猶歌舞.
大漠窮秋塞草腓, 孤城落日鬪兵稀.
身當恩遇恒輕敵, 力盡關山未解圍.
鐵衣遠戍辛勤久, 玉筯應啼別離後.
少婦城南欲斷腸, 征人薊北空回首.
邊庭飄颻那可度, 絶域蒼茫更何有.
殺氣三時作陣雲, 寒聲一夜傳刁斗.
相看白刃血紛紛, 死節從來豈顧勳.
君不見沙場征戰苦, 至今猶憶李將軍.
작가 소개
저자 : 고적
고적(高適, 701?∼765)은 당(唐)나라 창주(滄州) 수[(蓚, 지금의 허베이성(河北省) 징현(景縣)] 사람으로, 자(字)가 달부(達夫)다. 일찍이 공업 수립의 뜻을 품었으나 기회를 얻지 못하고 오랜 기간 송성[宋城, 지금의 허난성 상추현(商丘縣)]에 은거하며 연조(燕趙) 일대를 유람하며 지냈다. 천보(天寶) 8년(749) 나이 49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저양태수(雎陽太守) 장구고(張九皐)의 추천으로 유도과(有道科)에 합격해 봉구위(封丘尉)에 제수되어 관직 생활을 시작했으나 얼마 되지 않아 그만두었고, 가서한(哥舒翰)이 농우절도사(隴右節度使)가 되자 그의 막부(幕府)에 들어가 장서기(掌書記)가 되었다. 안사(安史)의 난이 일어나자 가서한을 도와 동관(潼關)을 지켰는데, 동관이 함락되자 그 패배 원인을 현종(玄宗)에게 아뢰어 간의대부(諫議太夫)로 발탁되었다. 숙종(肅宗)이 즉위하자 어사대부(御史大夫) 겸 양주대도독부장사(揚州大都督府長史)·회남절도사(淮南節度使)가 되어 위척(韋陟), 내진(來瑱)과 함께 영왕(永王) 이린(李璘)의 난을 토벌했다. 그러나 환관(宦官) 이보국(李輔國)의 참언으로 태자소첨사(太子少詹事)로 강등되었으며 오래지 않아 팽주(彭州)와 촉주(蜀州)의 자사(刺史)로 전출되었다가 다시 성도윤(成都尹)·검남서천절도사(劍南西川節度使)에 임명되었다. 대종(代宗) 때에 형부시랑(刑部侍郞)에서 산기상시(散騎常侍)로 옮겼으며 발해현후(渤海縣侯)에 봉해졌고, 영태(永泰) 원년(765) 정월에 병사했다. 변새(邊塞)에서의 실제 경험을 토대로 장수들의 투지와 용맹함을 찬양하거나 병사들의 고통을 써내는 등 많은 변새시(邊塞詩)를 창작해 잠삼(岑參)과 더불어 당대(唐代) 변새시를 대표하는 시인으로 꼽힌다. 저서로 ≪고상시집(高常侍集)≫ 10권이 있다. 그의 작품은 잦은 이민족의 침입과 정변으로 나라가 어지럽던 시기, 변방을 떠돌며 직접 목격한 백성과 병사들의 고통, 험준한 국경 지역의 풍경, 낯선 이민족들의 생활 등을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평이하고 담담한 표현이 오히려 한층 침울하고 비통한 정서를 나타낸다.
목차
인생길의 어려움 2수(行路難 二首)
위 참군과 이별하며(別韋參軍)
궂은비 속에 방사 형제에게 부쳐(苦雨寄房四昆季)
객사에 있는 이 소부를 보내며(送李少府時在客舍)
변새에서(塞上)
계문에서 왕지환과 곽밀지를 만나지 못하고 인해서 남기어 드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