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그리스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대표작. 실존 인물을 모티프로 쓴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는 수십 개국 언어로 번역되어 전 세계인들이 손꼽는 고전의 반열에 오른 스테디셀러다. 번역자이자 서강대학교 영어영문학과 명예교수인 김욱동 교수는 원전에 대한 충실한 연구를 바탕으로, "카잔차키스가 구사한 원어와 관념의 아름다움과 힘을 생생하게 되살려 냈다."라고 평가를 받는 피터 빈 판본을 바탕으로 번역했다.
젊은 연구자의 감수와 편집을 거쳐 문체 면에서 동시대의 언어 감각에 맞게 읽는 재미를 잃지 않도록 가독성을 높인 것이 특징이다. 또한 조르바라는 인물이 지닌 자유로움은 젊은 판화 예술가 최경주의 작품으로 되살아났다. 강력한 가독력과 새로운 감각의 표지로 소개되는 민음사의 <그리스인 조르바>는 이미 조르바를 만난 적 있는 독자뿐만 아니라 조르바를 처음 만나는 독자에게도 의미 있는 독서 경험으로 이끌 것이다.
출판사 리뷰
영혼의 순례자이자 그리스의 이방인, 니코스 카잔차키스
조르바의 솔직하고 자유로운 정신을 새롭게 만끽하는 시간
그리스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대표작 『그리스인 조르바』가 민음사에서 새로운 번역으로 출간되었다. 실존 인물을 모티프로 쓴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는 수십 개국 언어로 번역되어 전 세계인들이 손꼽는 고전의 반열에 오른 스테디셀러다. 번역자이자 서강대학교 영어영문학과 명예교수인 김욱동 교수는 원전에 대한 충실한 연구를 바탕으로, "카잔차키스가 구사한 원어와 관념의 아름다움과 힘을 생생하게 되살려 냈다."라고 평가를 받는 피터 빈 판본을 바탕으로 번역했다. 젊은 연구자의 감수와 편집을 거쳐 문체 면에서 동시대의 언어 감각에 맞게 읽는 재미를 잃지 않도록 가독성을 높인 것이 특징이다. 또한 조르바라는 인물이 지닌 자유로움은 젊은 판화 예술가 최경주의 작품으로 되살아났다. 뛰어난 가독성과 새로운 감각의 표지로 소개되는 민음사의 『그리스인 조르바』는 이미 조르바를 만난 적 있는 독자뿐만 아니라 조르바를 처음 만나는 독자에게도 의미 있는 독서 경험으로 이끌 것이다.
『그리스인 조르바』 국내 소개의 역사
니코스 카잔차키스 작품 중에서 독자들에게 가장 널리 읽히고 일반 대중에게 알려져 있는 작품이 『그리스인 조르바』다. 그의 작품이 국내에 처음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중반이다. 1981년부터 1993년까지 고려원에서 카잔차키스의 소설, 서사시, 자서전, 서간집 등 11종 14권의 선집을 출간하였다. 그러나 출판사가 1997년에 폐업하면서 이 책들은 모두 절판되고 말았다. 그 뒤 2008년에 열린책들에서 고려원의 선집에 카잔차키스의 장편소설 2종, 단편집 1종, 희곡집 2종, 여행기 6종을 보태어 전집의 형태를 갖추어 출간하였다.
이렇게 카잔차키스 작품이 선집이나 전집의 형태로 발간된 것은 흔히 번역 왕국으로 일컫는 일본은 말할 것도 없고 서양에서도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현상이었다. 『그리스인 조르바』로 좁혀 말하면 이 작품이 한국에 최초로 번역된 것은 1974년이다. 이 해에 언론인이자 번역가인 박석기와 독문학자 이인웅이 『희랍인 조르바』라는 제목으로 함께 번역하여 출간했다. 그러나 국내에서 카잔차키스의 작품은 『그리스인 조르바』를 제외하고는 그렇게 큰 관심을 받지 못하였다. 작가의 명성은 『최후의 유혹』이나 『자유인가 죽음인가』를 제외하면 역시 『그리스인 조르바』 한 권에 달려 있다고 하여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 같다. 이러한 현상은 어느 나라보다도 독서의 편식 현상이 심한 국내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조르바를 둘러싼 오해와 진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는 한국을 비롯하여 세계 여러 나라에서 가장 많이 읽히고 있지만 이 작품은 피터 빈의 지적대로 독자들에게 “가장 이해되지 못한 작품”이기도 하다. 이 소설은 유명한 만큼 잘못 알려진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한마디로 온갖 그릇된 정보와 실수, 오해로 얼룩져 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이러한 잘못된 정보와 실수와 오해를 풀기 전에는 이 작품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우선 주인공의 이름과 제목부터가 잘못 표기되었다. 주인공의 이름과 성은 ‘알렉시스 조르바’가 아니라 ‘알렉시스 조르바스(Αλ?ξη?Ζορμπ??)’다. 본디 그의 성에는 시그마가 붙어 있었지만 그리스어에서는 주격이 목적격으로 바꿀 때 시그마(?)를 생략한다. 이 작품을 영어로 처음 번역한 칼 와이드먼은 주격을 목적격으로 착각하여 ‘조르바스’가 아닌 ‘조르바’로 옮겼던 것이다. 한편 그리스어를 모르는 와이드먼은 프랑스 번역본에서 중역했기 때문에 프랑스 발음 방식대로 마지막 자음을 묵음으로 처리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어찌 되었던 그동안 ‘조르바’라는 이름으로 워낙 널리 알려져 있기 때문에 뒷날 번역가들도 주인공 이름이 잘못 표기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냥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리스 문학 전문가인 피터 빈조차 그동안 이루어진 관행을 무시하지 못한 채 ‘그리스인 조르바’로 옮겼다. 더구나 『그리스인 조르바』의 제목도 1946년에 그리스에서 처음 출간된 텍스트에 따르면 ‘그리스인 조르바’가 아니라 ‘알렉시스 조르바스의 삶과 시대’로 되어 있다. 카잔차키스는 이 작품을 집필하면서 처음에는 ‘알렉시스 조르바스의 성인전’이라고 불렀다. 카잔차키스가 작품에서 조르바를 ‘위대한 영혼’이니 ‘미치광이’니 하고 부르고는 있지만 그를 성인으로 간주한다는 점이 예사롭지 않다. 전통적인 그리스 동방정교회의 기준에서 보면 그는 성인은커녕 이단자나 이교도일 터이지만 적어도 카잔차키스가 꿈꾸던 새로운 종교에서는 성인의 반열에 올려놓아도 크게 무리가 없을 것이다. 피터 빈은 새 영어 번역본에서 ‘그리스인 조르바’라는 제목에 ‘알렉시스 조르바의 성인전’이라는 부제를 덧붙여 타협점을 찾으려 시도했으며, 민음사 판 국내 번역본은 국내 정서를 따라 기존의 ‘그리스인 조르바’라는 제목으로 출간하였다.
실존 자유인 ‘조르바스’와 소설 속 ‘조르바’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작품이 흔히 그러하듯이 『그리스인 조르바』는 자전적인 성격이 강한 작품이다. 이 작품에는 카잔차키스가 살아온 고단한 삶의 궤적이 화석처럼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다. 카잔차키스는 자신의 영혼에 가장 깊은 흔적을 남긴 인물로 프리드리히 니체, 앙리 베르그송, 호메로스, 요르기오스 조르바스 등 네 사람을 들었다. 그동시대 인물로는 조르바스가 유일하다. 조르바스를 두고 카잔차키스는 “자신에게 삶을 사랑하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도록 가르쳐 준” 사람이라고 밝힌다.
주인공의 정신적인 성장을 다룬다는 점에서 『그리스인 조르바』는 인식론적인 주제에 초점을 맞추는 빌둥스로만(성장 소설)이다. 화자는 크레타 해변에서 조르바와 함께 일 년 남짓 지내면서 영혼의 개안(開眼)을 경험하고 정신적으로 성장하기 때문이다. 작품의 초반만 해도 화자는 창백한 지식인이었다. 그의 절친한 친구 스타브리다키스는 화자를 ‘책벌레’라고 부르면서 그에게 “얼마나 더 오랫동안 종이 나부랭이나 씹어 대고 먹물을 머리에 뒤집어쓰고 살 거냐”라고 다그친다. 알렉시스 조르바도 화자를 두고 ‘붓을 잡고 있는 사람’이니 ‘먹물을 뒤집어 쓴 사람’이니 하고 놀려 대면서 읽고 있는 책을 모두 불살라 버리면 삶을 좀 더 이해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화자인 ‘나’는 알렉시스 조르바와 생활하면서 조금씩 삶의 태도를 바꿔 나간다. 작품 첫머리에서 화자는 『신곡』의 저자 단테 알리기에리와 불교의 붓다가 인생의 길동무라고 밝힌다. 그러나 조르바와 생활하는 동안 화자는 단테와 붓다를 멀리한 채 조금씩 조르바의 삶의 방식을 받아들인다. 화자는 크레타섬 해변에서 조르바와 함께 지내던 때가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다고 회고한다. 물질적으로는 파산했을지언정 정신의 갱도에서는 삶의 지혜라는 값진 광석을 채취했기 때문이다.
조르바의 정신: 실존주의
그렇다면 화자가 조르바한테서 배운 인생철학은 과연 무엇일까? 한마디로 ‘조르바주의(Zorbatism)’ 또는 ‘조르바 정신(Zorbahood)’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조르바주의나 조르바 정신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뜻밖에도 실존주의와 만나게 된다. 그러니까 화자는 조르바 학교에서 실존주의적 삶의 태도를 배운 것이다. 카잔차키스는 니체나 베르그송한테서 배운 바 적지 않지만, 작품을 좀 더 자세히 뜯어보면 장폴 사르트르나 알베르 카뮈 같은 실존주의자들의 세례를 한차례 강하게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실존주의는 먹물 냄새 풍기는 추상적 명제가 아니라 땀 냄새 물씬 풍기는 구체적인 삶을 다룬다. 그렇기 때문에 실존주의는 문학과 자주 손을 잡는다. 사르트르나 카뮈를 비롯한 실존주의자들은 흔히 문학의 형식으로 자신들의 주장과 태도를 표현하려 했다.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다 보면 호메로스의 주인공 오디세우스와 미겔 데 세르반테스의 주인공 돈키호테나 산초 판사 말고도 알베르 카뮈가 쓴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의 그림자가 자주 어른거린다.
한마디로 카잔차키스는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지난 몇 세기 동안 서구인들이 당연하게 받아들여 온 유럽의 가치관과 신념을 반성하고 그것을 대신할 새로운 대안을 모색한다. 이 작품이 많은 독자에게 그토록 신성한 충격을 주는 까닭은 작가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용기 있게 그 대안을 모색하기 때문이다. 화자의 영적 지도자라고 할 알렉시스 조르바는 작가가 입버릇처럼 말하듯이 ‘자유인’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화자는 ‘조르바 학교’에서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데 필요한 새로운 지식을 조금씩 터득해 간다.
―「작품 해설」 중에서
새로운 감각으로 새롭게 소개하는 민음사 판 『그리스인 조르바』
민음사에서는 국내 영미문학 연구 분야의 대가이자 ‘한국출판학술상’을 수상한 김욱동 교수 번역의 『그리스인 조르바』를 준비하면서 ‘완독 가능한 독서’와 ‘조르바의 의미 재확립’을 염두에 두었다. 과거에 소개되어 왔던 조르바 번역본의 수많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완독한 사람이 없는 책으로 손꼽히는 고전 중 하나였던 『그리스인 조르바』는 김욱동 교수의 문체 아래에서 맛깔스럽고 재미있는 소설로서의 재미를 되찾게 되었다. 영어 번역본 중 1954년 칼 와이드먼(Carl Wideman) 번역과 2014년 피터 빈(Peter Bien)의 번역은 누락, 추가 등 부분적으로 차이가 있다. 그중 빈은 미국에서 그리스 문학 번역가와 연구가로 정평이 난 인물로, 그의 『그리스인 조르바』 번역은 “카잔차키스가 구사한 원어와 관념의 아름다움과 힘을 생생하게 되살려 냈다.”라는 평가를 받아 왔다. 김욱동 교수는 피터 빈이 새롭게 번역한 영어 번역서를 저본으로 삼았다. 평소 “번역에도 유통기간이 있다”는 평소 번역관에 따라 신세대 언어 환경에 맞춰 자유분방한 영혼의 소유자 조르바가 구사함직한 언어를 한껏 살린 민음사 『그리스인 조르바』는 뛰어난 가독성과 원전에 최대한 가깝게 옮기고자 하는 노력을 통해 또 한번 번역 문학의 정수를 창조해 냈다. 특히 작품 뒤에는 작가 카잔차키스가 직접 쓴 ‘작가의 말’을 실어, 조르바 이해를 심층적으로 할 수 있게끔 배려했다.
또한 ‘조르바’라는 단어에서 떠올려지는 ‘생생한 자유의지’를 표지에서 구현하고자 젊은 판화 아티스트인 최경주의 표지로 콜라보레이션했다. 최경주의 작업은 밝은 색상과 추상적인 구성을 통해 조르바 특유의 자유로운 이미지를 작품으로 구성했고, 판화의 질감은 책 표지에 그대로 구현되었다. ‘조르바’를 만나는 독자는 ‘미술작품’ 역시 소장하는 재미를 함께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최경주의 다른 작품은 www.artistproof.org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도대체 얼마나 더 그럴 건가?”
“‘얼마나 더’라니, 뭘?”
“얼마나 더 종이 나부랭이나 씹으면서 먹물을 머리에 뒤집어쓰고 살 거냐고?”
인간의 영혼이라는 진흙은 아직 예술 작품으로 빚어지지 않은 채 미완성 상태로 남아 있고, 그 내면의 감정도 조잡하고 촌스럽기 그지없다. 그래서 그 어떤 것도 분명하고 확실하게 예측할 수 없다.
삶을 그토록 사랑하는 내가, 어떻게 그렇게 오랫동안 종이와 먹물에 파묻혀 살아 왔던 것일까?
작가 소개
저자 : 니코스 카잔차키스
1883년 2월 크레타 섬의 이라클리온에서 태어나 1957년 10월 여행 피로증세로 독일의 한 병원에 입원해 있던 중 그동안 앓아오던 백혈병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1902년 크레타에서 수도 아테네로 유학하여 아테네 대학의 법학과에 들어갔으나 곧 문학에 뜻을 두고 맹렬하게 문학 수업을 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1908년에 프랑스 파리로 유학하여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의 지도를 받아가며 철학을 공부했는데 이때 프리드리히 니체도 함께 읽었다. 1910년 유학을 마치고 그리스로 돌아와 갈라테아 알렉시우를 아테네에서 만나 동거생활에 들어갔으며 1년 뒤에는 정식으로 결혼했다. 1914~1915년 그리스 시인 앙겔로스 시켈리아노스와 그리스 전역을 여행했다. 이 시절 일기에다 “나의 위대한 세 스승은 호메로스, 단테, 베르그송.”이라고 적었다. 그는 또 같은 일기장에다 단테의 『신곡』 중 '지옥편'의 열다섯 번째 칸토에 나오는 말 “인간은 어떻게 그 자신을 영원하게 만드는가.”를 자신의 좌우명으로 삼겠다고 적었다. 이 영원은 “물질(현세)을 넘어 정신(영원)으로”라는 카잔차키스 문학의 핵심을 보여주는 단어이다.1919년 베니젤로스 총리에 의해 복지부 장관으로 임명되어 카프카스에 볼셰비키에 의해 억류되어 있는 15만 명의 그리스인을 본국으로 송환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베니젤로스 총리가 1920년 11월의 총선에서 패배하자 카잔차키스는 장관직을 사임하고 파리로 건너가서 독일과 유럽 지역을 여행했다. 이때 카잔차키스는 여행과 꿈을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1924년에 아테네로 돌아와 엘레니 사미우를 만나는데 그녀는 나중에 그의 두 번째 부인 겸 작가 사후의 저작권자가 되는 여자이다. 이 당시 그리스 정치에 환멸을 느낀 카잔차키스는 소련으로 건너가 공산주의 사상에 심취했으나 곧 그 사상과 결별했다. 1931년 그리스로 돌아와 아이기나 섬에 정착하고서 돈벌이를 위해 프랑스어-그리스어 사전을 편찬했다. 이 무렵 장편서사시 『오디세이아』를 쓰기 시작하여 1938년에 탈고하여 출판했다. 1930년대에는 영국, 스페인, 러시아, 일본과 중국, 모레아(그리스의 펠로폰네소스) 등을 널리 여행했으며 이때의 여행 소감과 인상들을 모두 해당 지역의 독립된 여행기로 출간했다.1940년대 초반에는 그리스가 나치 독일의 지배를 받으면서 카잔차키스로서는 가장 고통스러운 시기였으나, 대작 『그리스인 조르바』(1943)를 써냈다. 『그리스인 조르바』는 키프리오트 미할리스 카코야니스에 의해 1964년에 영화화되었고 세 개의 아카데미상을 수상했다. 카잔차키스는 생전에 두 번(1951년과 1956년) 노벨상 후보에 올랐으나 수상을 하지는 못했다. 카잔차키스는 『그리스인 조르바』 이후에 『수난』(1948), 『미할리스 대장』(1950), 『최후의 유혹』(1951), 『성자 프란체스코』(1953) 등 네 편의 장편소설을 더 썼고 사망하기 1년 전에는 자전적인 『영혼의 자서전』을 썼다.
목차
새 번역에 부쳐 7
그리스인 조르바 11
작가의 말 545
작품 해설 5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