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리뷰
서로의 세계를 방문하는 이방인이 되는 일“그곳에 가야만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있고 나눌 수 있는 대화가 있고 쓰일 수 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낯선 곳에서 내 곁을 데워준 사람들, 그들의 손을 꼭 잡은 채로 다른 한 손을 당신에게 건넵니다.”
《나로부터 당신까지의 여행》은 작가 김연지는 세계여행을 하던 스물둘부터, 늘 떠나려 하거나 떠나 있던 스물셋까지 인도, 파키스탄, 이집트, 터키, 조지아, 몽골 등 24개국을 유랑하며 가슴에 오래 남은 사람들을 시와 글로 남긴 것을 모은 책이다. 여행서가 아닌 여행산문집이라고 부르지 않을 수 없도록 작은 조각칼로 정성껏 다듬은 작품처럼, 단어 하나하나가 작가의 고민과 감상의 결실이다.
그렇다면 이 책에 나오는 여행의 매력은 과연 무엇일까? 낯선 곳에 가서 전에 보지 못한 풍경을 만나는 감동뿐만이 아니라, 구태여 멀리 떠난 곳에서 만난 아직 서로가 익숙지 않은 이방인들끼리 점차 서로의 세계를 열어 보일 때 가슴속에 쌓이는 기쁨이 그것일 것이다. 그 기쁨을 전하기 위해 작가는 아직 남은 한 손을 우리에게 내밀고 있다.
낯선 언어들 틈에서 우리만의 언어를 속삭이는 일“그 역시 하고 싶은 말이 얼마나 많았을까. 손녀뻘인 나를 품에 안으며 떠올렸을 문장들은 얼마나 다정한 언어일까. 그의 언어를 상상하면 아득하고 아득해져 그가 멀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괜찮다. 진심은 언어의 한계에 부딪히지 않으니까. 진심은 문화와 종교, 언어가 쌓아올린 벽을 뚫고 단숨에 가슴으로 꽂히니까.”
산티아고 순례길은 여전히 매력적인 여행 아이템이다. 긴 시간 동안 자신의 한계와 싸우며 걷다 보면 내면과의 깊은 대화를 하지 않을 수 없기에, 그것이 주는 카타르시스를 많은 사람들이 증언한다. 그런데 그 길은 때론 같이 걷다가 종종 각자 걸으며 결국 마지막에 다시 만나기에 더 기쁨이 큰 것이 아닐까?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해 떠난 여행일지라도 경우에 따라 그곳에서 소중한 사람을 만난 것이 해답일 때가 있다. 이 책에는 홀로 장기간 여행하며 문득 흔들리고 부서지던 순간들, 그럴 때마다 낯선 누군가가 나누어준 온기, 그 덕에 끝내 자신을 비롯해 타인의 상처까지 보듬을 수 있게 되었던 과정이 담겨 있다.
한 도시의 여러 날씨와, 여러 도시의 한 계절을 당신과 함께 걸어가는 일“‘오랜만에 사람들 만나면, 어디가 제일 좋았냐는 말 많이 들을 것 같아.’ ‘맞아, 그럴 때마다 어디라고 대답해?’ 나는 그가 어떤 대답을 할지 알 것 같기도 했다. ‘지금 여기, 서울.’”
이집트에서 우연히 만난 요정 같은 사람. 그 사람과의 소중한 추억이 담긴 라다크를 뒤로 하고 많은 곳을 거쳐 돌아온 서울. 원시와 같은 라다크와 메트로폴리스인 서울은 전혀 공통점이 없지만 한 사람으로 인해 전혀 다른 의미로 바뀐다는 점은 같다. 그렇기 때문에 작가 김연지는 여행지보다 한 사람, 한 사람과의 만남이 소중했던 지난날을 ‘나로부터 당신까지의 여행’이라고 부르는 것일 게다.
어디가 제일 좋았냐고 물을 때 주저하지 않고 지금 여기라고 대답할 수 있는 여행을 꿈꾸는 나그네들. 그런 사람들과 한 도시의 여러 날씨와, 여러 도시의 한 계절을 함께 걸은 길을 같이 걸어보자.
나로부터 당신까지의 여행“멀티태스킹이 안 되는 나는 우리를 스쳐간 많은 사람들이, 머물렀던 도시의 풍경들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어쩌면 한 사람에게 익숙해지며 놓친 것들이 많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나는 그게 아쉽지가 않다.”
친구와 연인 사이를 뜻하는 ‘썸’이란 말처럼 연애와 여행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는 작가의 경험담은 풋풋하다. 이따금씩 장난처럼 했다는 “너 말고 다 재미없어”라는 말처럼 여행의 종착지는 장소가 아니라 사람일지도 모른다.
새로운 풍경 속에서 우리가 살던 곳의 그림을 찾아보는 일, 그렇게 서로의 과거를 맞춰보는 일, 둘이 아니라면 그 많은 젖은 기억들을 말릴 수는 없는 일로 가득한 나로부터 당신까지의 여행을, 삶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여행을 하고 글을 쓰는 작가의 섬세하지만 깊이 있는 문장으로 만나보자.

“너는 그저 세상에 반응한 것일 뿐이야. 다른 건 없어. 너는 너의 의지로 춤을 춘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음악에 반응한 거야. 너는 너의 의지로 크레페를 먹는다 생각하지만, 사실은 배고픔에 반응한 거야. 너는 모든 순간 너의 의지대로 결정하고 행동한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렇지 않아. 그날 아침 눈을 떴을 때의 구린 날씨, 그날따라 기분이 안 좋았던 직장 상사, 그가 서류 파일을 던진 순간 유리창 너머로 날아가는 비행기… 그날 신은 너에게 당장 그 엿 같은 도시를 떠나라고 메시지를 보낸 거야. 거기서 네가 달리 취할 수 있는 행동이 있었겠니. 너는 네 자신을 위한 최선의 선택을 한 거야. 그러니 스스로를 탓하지 마.”
의도치 않게 들은 장황한 연설에 하마터면 손뼉을 칠 뻔했다. 남자의 투명한 갈색 눈에는 일말의 의심도 없어 보였다. 무엇을 택하든 그것이 최선이라니. 그렇다면 나 또한 나의 최선의 선택들로 여기까지 온 건가. 여기에 있는 모두가, 이 지구 위에 살고 있는 모두가 그런 것인가. 내가 그려온 삶의 궤적이 모든 순간들의 최선이라 생각하면 적어도 가보지 못한 길에 대한 미련은 사라진다. 그러나 앞으로 내가 어떤 선택을 하든 그게 나의 의지와 상관없는 일이라 생각하면 도무지 허무해져버리고 마는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들로 머리가 어지러운 사이 남자와 여자는 자리를 떴다. 깨끗하게 비운 에스프레소잔을 보니 그들의 이야기를 엿들은 게 한낮의 환영처럼 느껴졌다. 여행자에게 신은 매일 다른 얼굴로 찾아온다더니, 그들은 오늘 내게 찾아온 신이었나. 가게 밖으로 나오니 더위가 식었는데도 정신이 아찔하다. 남자가 남긴 말이 자꾸만 머릿속을 붕붕 떠다닌다. 무엇을 선택하든 그게 최선이다. 무엇을 선택하든 그게 최선이다. 오늘 내가 신으로부터 받은 메시지는 앞으로 어떤 선택을 낳게 될까.
다른 건 모르겠고 오늘은 나도 내 얘기를 귀담아 들어줄 완전한 타인 하나 만났으면 좋겠다.
블랙커피만 마시던 우리에게도 가끔은 별미가 있었는데요, 그건 바로 요정이 긴 여행 동안 틈틈이 한국인들로부터 받아 모은 ‘맥모골’이었습니다. 맥심 모카 골드. 전형적인 한국식 커피믹스 말이에요. 워낙 귀한 별미인지라 내주는 방식 또한 남달랐습니다. 요정은 커피믹스마다 그날의 운세 비슷한 것을 적어놓고는 한 사람씩 돌아가며 뽑게 했습니다. 커피믹스에 적힌 문구에 따라 어떤 날은 왠지 더 행복한 날, 어떤 날은 왠지 집에 가고 싶은 날이 되기도 하였죠. 특별한 문장도, 대단한 맛도 아니었지만 그가 건네는 커피믹스는 일종의 심리적 허기를 달래주었습니다. 참 이상하죠. 직장인들의 애환을 상징하는 커피믹스가 여행 중에는 이렇게 달콤한 위안을 주다니. 우리의 작은 일상을 지키는 힘은 아마도 누군가의 소소한 마음 씀씀이에 달려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매일 아침 요정이 나눠주는 크고 작은 마음들을 먹으며 저는 어떤 공동체 생활을 꿈꿨습니다. 나이가 들어서 언젠가는 이렇게 하늘 높고 물 맑은 곳에서 따뜻한 사람들과 작은 마음을 나누며 살고 싶다는. 넘치지는 않지만 모자라지도 않게. 다만 약간의 섬세함으로 서로의 오돌토돌한 부분들을 돌보면서. 그날이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장소는 라다크였으면 좋겠습니다. 소들의 언덕이 아닌 프랜차이즈들의 언덕에서 지내며 커피믹스보다 바닐라 라떼를 더 자주 마시는 요즘 저는 그곳이 많이 그립나 봅니다.